#107
친한 척
오덕, 육덕에 이어 이번엔 십덕이라.
그러나 이번엔 그 누구도 당황하거나 놀라는 이가 없었다.
“군자 형아의 십덕은 우리가 아는 그 십덕과는 다른 의미겠져?”
“그렇겠지. 게다가 사실 뭐 씹덕은 딱히 나쁜 것도 아니고.”
“그래 군자야, 십덕이란 대체 무엇이냐.”
“아하핫, 오덕이 두 명이면 십덕인 거 아닐까~”
이번엔 뜻을 오해받지 않은 것 같아 기쁜 군자였다. 십덕이 무엇인지 묻는 동료들의 질문에 군자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도 아직 모르겠구나.”
“엥?”
“머야, 그냥 막 던져 본 거예여?”
“십덕(十德) 중 오덕(五德)은 온화, 양순, 공손, 검소, 겸양이라. 그러나 이것은 오래된 가치 아니더냐.”
“흐으음, 확실히 좀 구닥다리 느낌이 있긴 해.”
“나야 옛날 사람이니 그런 가치도 좋다만은···.”
“군자야, 너 옛날 사람 아니야. 너 이제 스무 살이거든?”
“그러나 이 시대를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새로운 덕목도 있겠지. 내가 육덕으로 삼은 긍지(矜持) 같은 덕목 말이다.”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서은우가, 군자의 아이디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었다.
“옛 오덕에 대응하는 지금의 오덕을 만들자. 두 개의 오덕을 합하여 십덕이라 부르고, 그것을 이번 경연곡의 주제로 삼자. 그런 말씀이신 겁니까.”
“네, 맞습니다.”
“난 괜찮은 아이디어 같은데?”
가장 먼저 영의정이 찬성 의견을 던졌다.
“온화, 양순··· 뭐라고 했지? 아무튼 그거. 다 좋은 말이긴 하지만, 솔직히 내 라이프스타일이랑은 안 맞거든.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가치 다섯 개를 더한다면 재미있게 재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어서 멤버들 역시 차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선은 자연스레 프로듀서 멤버인 지현수에게로 쏠렸다. 주제는 위트 있고 좋지만, 작곡가가 이에 걸맞은 곡 컨셉을 뽑아내지 못한다면 작업이 힘들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으···러면···.”
그러나 짜내기의 달인답게, 지현수는 그 자리에서 곡 컨셉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일단 십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일본이긴 하잖아.”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 일본풍 악기를 레퍼런스로 사용하는 법도 있고.”
허나 ‘일본풍’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군자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일본풍···.”
“군자, 너무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 아니니?”
“···아니다, 하자면 해야지···.”
애써 표정을 숨겨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우리 것도 좋은 것이 참 많은데, 굳이 일본풍의 음악을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십덕(十德)은 우리의 가치인데.
그런 군자의 실망감을 미리 예측했다는 듯, 지현수가 빠르게 두 번째 대안을 내놓았다.
“아니면 게임 사운드를 레퍼런스로 가져갈 수도 있어.”
“게임?”
“십덕 하면 또 떠오르는 게 게임이잖아. 생각해 보면 ‘아육시’도 시뮬레이션 게임 컨셉이었고.”
“그런 컨셉이었냐? 참가하면서도 몰랐네.”
“그래서 테마곡 에도 게임 효과음 딴 샘플들이 많이 들어가 있잖아.”
“샘플? 올리브영 가면 주는 거?”
“···관두자 태웅아.”
지현수가 한숨을 푹 쉬며 군자 쪽을 바라보았다. 일본풍이라는 말에 기가 팍 죽어 있던 군자는, 다른 대안이 제시되자 급격히 기분이 좋아진 듯 환하게 웃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그래? 군자 너 게임도 하냐?”
“물론이지! 나도 신세대 젊은이란다!”
그렇게 말하며 군자가 스마트폰을 스윽 내밀었다. 화면에는 스마트폰용 바둑 어플리케이션이 떠 있었다.
“이게 뭔··· 어?”
무심코 화면을 스윽 들여다본 동료들은 이내 경악하고 말았다.
“미친, 687승 4패?”
“하하, 너무 많이 졌지? 처음엔 조작법을 잘 몰라서.”
“지금 4패가 문제가 아니자나여! 승률이 99%가 넘는데!”
“아니 뭔데? 바둑 왜 이렇게 잘해?”
“금기서화는 선비의 기본 소양 아니더냐. 그 중 ‘기’가 바둑을 뜻함이니, 못하면 더 문제가 큰 것이지.”
“···진짜 넌 알면 알수록 놀랍다.”
“이 정도면 바둑 커뮤니티도 벌써 난리 났겠는데여?”
“그러게. 이건 뭐, 거의 고스트 바둑왕 수준이잖아.”
“어쨌든, 게임 속의 미디 사운드를 레퍼런스로 곡 만들어 보자는 데엔 다들 동의하는 거죠?”
지현수의 정리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작업의 협력자로 발탁된 나우리 역시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 사운드··· 그래···.”
“선배님, 괜찮으세요?”
“으응, 괜찮아··· 게임을 하진 못해도 게임 사운드는 실컷 들을 수 있겠네···.”
“하하핫, 선배님 파이팅.”
군자의 컨셉 제안, 지현수의 아이디어 제안으로 인해 곡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결정됐다. 덕분에 신곡 회의는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서 팀장, 그럼 우린 이제 가 봐도 될까?”
“네 누님, 다음 곡 회의 시간에 뵙겠습니다.”
“오케이. 난 오빠랑 플스방이라도 가야겠다.”
“프, 플스방? 정말?”
“그래. 아까부터 징징대는 거 진짜 못 봐주겠네. 하고 싶은 게임 실컷 하고, 대신 일도 열심히 하라고. 알았어?”
“그, 플스방에 엘드리치 링도 있을까?”
“아오, 그럼 가는 길에 게임 타이틀만 사 가든가.”
“오예!”
그렇게 영의정 내외가 떠난 뒤, 서은우 팀장과 7IN 멤버들만이 회의실에 남겨졌다. 신곡 회의는 마무리됐지만 서은우 팀장은 아직 할 말이 있어 보였다.
“혹시, 최근에 박영제의 라이브 방송을 보신 분이 계실지.”
서은우 팀장의 질문에 모든 멤버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박영제 라이브요?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왜요? 그 선배가 뭐라고 했는데요?”
박영제라는 이름이 나오자, 조용하고 온순하게 앉아 있던 차인혁도 도끼 눈이 되었다.
“군자 욕 했습니까.”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반대였죠.”
“반대요?”
“은근히 유군자 씨와 가까운 사이였다는 듯이 말하더군요.”
“그 새끼 미친 거 아냐?”
“그냥 갑자기 그래여? 아니면 무슨 질문이라도 받았나?”
“예. 유군자 씨와 박영제가 고등학교 동창 사이라는 것이 드러난 후부터, 박영제의 팬들이 궁금증을 가지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두 사람이 고등학교 때 어떤 관계였는지, 인터넷 상의 증언들처럼 정말 박영제가 군자 씨를 키워 준 것인지.”
“인터넷 증언이여? 그거 다 개소리 아니었음여?”
“예. 개소리죠.”
멤버들은 비속어를 내뱉는 서은우 팀장을 보며 깜짝 놀랐다. 서은우 팀장이 이렇게 거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러나 박영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땐, 서은우 팀장 역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박영제의 입장에선 그게 사실로 받아들여지길 바랄 겁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친한 사이였다는 듯 말한 것일 테고요.”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여? 본인이 한 일을 기억 못하나? 심지어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닌데?”
“원래 가해자는 뭐든 자신이 유리한 대로 기억하는 법입니다. 사건을 목격한 제3자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아마 박영제의 기억은 철저히 변질되어 있겠죠.”
“하아, 진짜 열받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그 ‘제3자’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군자와 박영제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요?”
“예. 벌써 제보자가 몇몇 있었지만, 진술이 일관되지 않아 고사했습니다. 어설픈 증언을 내세웠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 머지않아 확실한 증인과 증언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팀장님, 고생하시네요.”
“아닙니다. 진짜 고생하는 건 유군자 씨죠.”
그렇게 말하며 서은우 팀장은 군자 쪽을 바라보았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솔직히 걱정이 됩니다.”
“···.”
“유군자 씨, 박영제와 같이 방송하는 것··· 정말로 괜찮습니까?”
서은우 팀장은 진심으로 군자를 걱정하고 있었다. 군자 역시 그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매번 느끼는 바이지만, 참으로 감사한 분이시다. 형제가 따로 없는 군자였지만, 이런 분이 큰형이었다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전 괜찮습니다, 팀장님.”
“정말입니까?”
“예.”
“알겠습니다.”
서은우 팀장 역시 이제는 군자를 전적으로 믿기로 했다.
물론 순하고 착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봐 온 바 유군자는 결코 나약하기만 한 소년이 아니었으니까.
* * *
한편, 박영제와 그의 소속사 네이션스 측은 신곡 회의보다 대책 회의가 더 시급해 보였다.
“이거 봐, 온통 칠린이랑 영의정 얘기 뿐이라고.”
홍현석 실장이 포털 메인화면과 SNS 트렌드 키워드를 보며 탄식을 내뱉었다.
[7IN 유군자, “난 육덕이 취향” 선언···.]
[오덕이라서 육덕이 좋다는 아이돌이 있다? 웬만한 개그프로보다 재미있는 7IN 라이브!]
[유군자, 데뷔 1주년도 되기 전에 몸매 취향 밝혔다?]
[‘선비돌’의 은밀한 취향, “난 육덕파”]
[라이브 방송 보던 칠링즈, 충격의 도가니··· “오늘부터 벌크업”]
[알고 보니 건전한 ‘육덕’, 유교의 덕목들 바로알기.]
영의정의 <유교우먼>이 살짝 잠잠해지나 했더니, 뒤이어 터진 라이브 방송으로 인해 화제성은 다시 한번 7IN이 독점해 버렸다.
네이션스의 입장에선, 무엇보다 그 놈의 유군자가 문제였다.
아무리 열심히 무대를 준비해도, 아무리 인지도 있는 콜라보 아티스트를 섭외해도, 유군자의 저 순수한 똘끼를 이길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 옆에는 영의정과 나우리까지 붙어 있었다. 실력, 화제성, 그 어떤 측면에서도 박영제가 7IN을 앞지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영제야, 이제 노선을 바꿀 때가 온 것 같다.”
“어떻게요?”
“뭘 어떻게야, 칠린코인 좀 타 보자 이거지.”
“예?”
“솔직히 지금은 무슨 수를 써도 걔네 화력 못 이긴다. 2차 경연까지는 절대 불가능이야.”
“그럼 그냥 우승을 내주잔 거예요?”
“그건 아니지. 3차까지 가면 얘기가 또 달라질 수 있거든. 아무리 기발한 놈들이라고 해도 결국 언젠가는 레퍼토리 떨어지지 않겠냐.”
“그럼 일단은 친한 척으로 비비면서 이미지 챙겨가자는 거네요.”
“그래, 바로 그거야. 너 유군자랑 동창이었다며. 요즘 네 라방에서 그 얘기도 종종 나오던데.”
“아, 네. 그랬죠.”
“은근히 친했다고 어필하더라?”
“일단 지금은 대립각 세워서 좋을 거 없잖아요.”
“잘했어! 녹화 가서도 계속 친한 척 좀 해.”
“아, 그건 좀 싫은데···.”
“임마, 지금이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야? 이대로라면 우리 이번 라운드에서 떨어질지도 몰라. 칠린 한 팀만 독보적이고, 나머지 세 팀은 거의 비등비등하다고.”
“흐음-.”
박영제의 입장에선 썩 달갑지 않은 전략이었다. 고등학교 땐 완전히 아래로 보던 놈에게 친한 척 아양을 떨어야 한다니.
그러나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당장 7IN의 화력이 압도적인 것은 사실이니까.
우승은 불가능하다 해도, 끝까지 살아남아서 7IN과의 관계성을 확보해 두는 것이 좋을 거다.
“알았어요. 해 볼게요.”
“그래, 일단은 살아남자고.”
시간은 다시 순식간에 흘러, 2차 경연 녹화 날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