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무친색귀
군자와 박영제 사이의 분위기는 누가 봐도 심상치 않았다. 갈등과 대립에 미친 김석훈 PD였지만, 그래도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부딪히는 출연자들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자아, 우리 잠깐 쉬었다 갈까요? SD카드도 좀 갈고.”
“10분 간 휴식하겠습니다!”
녹화가 잠시 중단되자 7IN 멤버들이 바로 달려와 군자와 박영제를 떼어 놓았다. ‘칠린코인’을 타 보자고 주장했던 네이션스 홍현석 실장도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음을 인지한 것 같았다.
“영제야, 왜? 쟤가 뭐라는데?”
“몰라요. 죗값을 치르게 될 거라던데.”
“죄? 뭔 죄? 너 쟤한테 잘못한 거 없다면서?”
“하 시발, 나도 모르겠어요. 괜히 지랄하는 것 같아요.”
“그냥 피해의식 아니냐? 뭔가 문제가 있었다면 벌써 인터넷 뒤집혔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내 말이요.”
그러나 사건의 진상을 기억하는 군자와, 그것을 전해 들은 멤버들의 입장에선 오히려 박영제의 태도가 황당할 뿐이었다.
“군자야, 저 인간이 뭐래?”
“앞으로 친우로 지내자고 하더구나.”
“헐, 그래서여? 형아는 뭐라 했는데여?”
“당연히 거절했지. 나의 원수와는 친교를 맺을 수는 있으나, 친구의 원수와는 그럴 수 없단다.”
“엥? 근데 박영제는 니 원수 아니냐?”
“나는 다시 태어났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지.”
“뭔 개소리야···.”
“과정은 개소리지만, 아무튼 결과는 제대로 나왔네.”
“아하핫, 그럼 된 거지~”
“그 와중에 도시락까지 싸 왔네. 저 인간도 참 정성이구만?”
“···도, 도시락에 뭐 너, 넣지는 않았겠죠···.”
유찬의 걱정스런 말에, 유부초밥을 한 점 꺼내 베어물었던 태웅이 음식을 퉤 하고 뱉어 냈다.
“퉷, 으으··· 독 같은 건 없겠지?”
“하하, 태웅이 네가 기미상궁 역할까지 해 주는구나.”
“웃어? 하, 그래 웃어라. 내 목숨 바쳐서 너 웃겼으면 됐지 뭐.”
“걱정 말거라, 정말로 독을 넣지는 않았을 것이야.”
“나도 알거든요.”
멤버들은 군자와 박영제와의 독대 순간부터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다행히, 군자는 박영제를 마주한 뒤에도 꽤나 태연한 모습이었다.
“암튼 저 인간이 괴롭히면 말해.”
“···우, 우리가··· 바, 바로 도와 줄 거예요···.”
“그래, 든든하구나.”
“나도 도울 거다.”
“혁이 형은 돕는 게 아니라 박영제 머리통을 뽑아 버릴 것 같은데.”
“오, 비밀경찰 포스 나오는 건가.”
“···그거 아니라니까···.”
그렇게 잠시 간의 휴식시간이 끝난 뒤, 짤막한 회의 시간을 가진 김석훈 PD 사단은, 이 상황을 정리할 간단한 아이템을 들고 나타났다.
“자아, 지금부터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 드릴 겁니다. 지금부터 이 종이에 편지를 쓰시면 됩니다. 수신자는 자유입니다! 같은 팀의 동료에게 써도 되고, 아니면 오늘 이야기를 나눈 다른 참가자에게 써도 되고···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겁니다.”
상황을 마무리짓기 위해 김석훈이 꺼내든 아이템은 편지였다. 그래도 편지를 쓰라고 하면 훈훈한 모양새로 이번 회차를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피디님, 질문 있습니다.”
“네 유군자 씨, 질문 하세요.”
“붓펜으로 써도 됩니까?”
“···있으면 그렇게 하셔도 되고.”
붓펜 사용 허가를 받은 군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켓 안주머니에서 붓펜을 꺼내 들었다. 군자가 일필휘지로 편지를 써 내려가는 동안, 박영제 역시 막힘 없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수신자는 물론 군자였다.
박영제가 쓴 편지의 내용은 평범하고 상투적이었다.
오늘 이야기를 많이 못 나눠서 아쉽다.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빨리 풀었으면 좋겠다. 무대 항상 재미있게 잘 보고 있다. 다음 라운드에서도 좋은 경쟁을 펼쳐 보자.
마음 같아서는 쌍욕을 적고 싶었지만, 방송 카메라 앞이라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여 착한 말만 늘어놓았다.
“자, 다 됐다.”
편지를 완성한 박영제가 다시 한번 군자를 향해 갔다. 일부러 편지 내용이 잘 보이게끔 카메라 앞에 들이밀며.
“군자야, 난 편지 너한테 썼는데.”
“거 신기한 일이군요. 저도 마침 선배님에게 편지를 쓴 참이었습니다.”
“선배라고 하지 말라니깐.”
박영제가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군자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군자 역시 손에 든 종이를 박영제에게 건넸다.
“···?”
바로 다음 순간, 군자가 건넨 편지를 받아 든 박영제의 표정이 굳었다.
“···이게 무슨···.”
朴永悌無親索鬼
親悍倜疫何口癩
日盡佯鴉恥出身
親舊末誥加害者
한문으로 쓰여진 군자의 편지 중, 박영제가 읽을 수 있는 것은 고작 두어 글자 밖에 없었다.
* * *
<노래해 듀오> 2회차 녹화가 끝난 뒤, 편집실에 앉은 김석훈 PD는 신이 난다는 듯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급하게 늘린 분량인 만큼 알맹이가 없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 보니 오히려 경연보다 흥미진진한 떡밥이 있었다.
유군자와 박영제.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원래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김석훈 PD의 예상보다 더 심각한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 치고는 아직까지 그 누구도 이 관계의 실상을 폭로하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조연출 박윤수 PD 역시 두 사람 사이의 날선 분위기를 확실하게 느꼈다.
“선배님, 걔네 둘 사이 안 좋은 거 확실해 보이죠?”
“어. 그냥 친해서 싸우는 느낌은 아니던데.”
“어떻게 편집하실 거예요? 그냥 통편?”
“뭐? 미쳤냐? 그걸 왜 날려?”
김석훈의 말에, 박윤수가 어이없다는 듯 반문했다.
“왜라뇨, 둘 다 아이돌이잖아요. 학폭 이런거 엄청 예민한 문젠데, 괜히 무슨 오피셜 나기 전에 먼저 건드리는 건···.”
“그럼 오피셜 나고는 건드려도 된다 이거야?”
“네?”
“한 쪽이 나쁜 놈인 거 확정되면, ‘우리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러고 여론장사 하는 게 맞냐고.”
“아니, 그건 아니지만.”
“야, 오히려 그게 더 나쁜 거야. 차라리 속 시원하게 선빵 치는 게 낫지.”
“선빵이요? 그럼 둘 중에 누굴 치시게요?”
“누굴 치자는 게 아니지, 윤수야. 우리가 한 놈 묻자고 이러냐? 송캠프 가서 있었던 일들, 솔직하게 다큐처럼 보여주자. 그게 목적인 거 아냐.”
“그런가?”
“당연하지. 나 완전 중립이다?”
그러나 박윤수 PD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래도 있는 그대로 다 보여주는 건···.”
“아오, 그건 당연히 안 되지.”
“그럼 어떻게 보여주시게요?”
“티격태격하는 장면을 넣되, 배경음악도 귀여운 걸로 깔고. 자막도 ‘장난 장난~’ 이런 거 넣어서 분위기를 좀 유하게 보여 주자고.”
“흐음, 그래도 요즘 아이돌 팬들은 그거 다 뜯어서 분석하고 해석하고 하던데.”
“야,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되냐? 우리는 그냥 우리 선에서 최소한의 업무윤리만 지키면 되는 거야.”
“정말 그렇게 가신다고요? 그러다 또 시말서 쓰시면?”
“시말서가 별거냐? 이런 개꿀잼 아이템이 눈앞에 있는데?”
결국 <노래해 듀오> 2회차 방송은 김석훈 PD의 의도대로 편집되어 방송에 나갔다.
박영제와 네이션스의 입장에선 꽤나 난처한 일이었다. 장난스럽고 익살스런 분위기로 편집이 돼 있긴 했지만 어쨌든 박영제가 군자를 셔틀이라 불렀다는 내용, 학생들 사이의 급을 나눴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으니까.
네이션스의 홍현석 실장은 당장 김석훈 PD에게 전화를 걸었다.
“피디님! 방송을 이렇게 내보내시면 어떡합니까!”
- 예?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러면 꼭 우리 영제가 학폭 가해자 같아 보이잖아요, 예?”
- 에이, 무슨 소리십니까. 분위기도 말랑말랑하고, 자막도 장난이라고 넣어 놨는데요.
“피디님, 아이돌 팬들이 이런 문제에 얼마나 예민한지 모르시는 거예요?”
홍 실장은 강한 어조로 따지고 들었으나, 김석훈 PD 역시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 아니 그럼 애초에 유군자랑은 방송 못 하겠다고 말씀을 하셨어야지.
“뭐라고요?”
- 저희가 뭐 캐스팅 보드를 숨겼습니까, 아니면 칠린은 무조건 고정이라고 못을 박았습니까? 사전 미팅도 여러번 했고, 이미 출연에 문제없다고 컨펌까지 다 해 주셨으면서.
“아니 그건···!”
- 이제 와서 출연자들끼리 좀 티격태격 한 거 내보냈다고 이렇게 편집에 감놔라 배놔라 하시는 건··· 예의, 예의,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김석훈 PD님, 지금 장난하자는 겁니까?”
- 아뇨? 장난 하자는 거 아닌데요?
“!”
- 그리고 실장님, 우리 입도 안 삐뚤어졌는데 말도 똑바로 해 봅시다. 만약 정말로 박영제 군이 셔틀이나 부려먹던 그런 학생이라면요. 연예인을 하면 안되는 거 아닙니까?
“그, 그건···.”
- 실장님은 뭐가 걱정이신 건데요? 방송 나가고 막 제보 속출할까 봐? 그 동안 숨겨 왔던 진실이 드러날까 봐?
“우리 영제 그런 애 아닙니다!”
- 그래요? 켕기는 거 없고 떳떳하면 오히려 유군자가 역풍 맞겠죠. 있지도 않은 일로 셔틀이네 뭐네, 학폭 논란 조장했다고. 근데 이상하게 솔라시스템 쪽에선 전화 한 통 없네요?
“걔네가 안 했다고, 우리도 하지 말란 법 있습니까?”
- 아뇨, 그런 법 없죠. 근데 소속사에서 항의전화 했다고 깨갱 하라는 법도 없던걸요?
“와, 진짜···.”
- 실장님, 캄다운 하시고 방방봐 하세요.
“방방봐? 그건 또 뭔-.”
- 방송은 방송으로 좀 봐~
“이, 이런···!”
- 뿅!
항의전화도 소용없었다. 김석훈 PD는 본인이 시말서를 쓸지언정 이런 떡밥을 놓치는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사태를 진압해 보려 노력한 네이션스였으나, <노래해 듀오> 2화 방영 후 온라인 반응은 계속해서 활활 불타오르기만 했다.
[노듀 2화 군자-박영제 씬 모음.gjf]
[얘네 먼가 묘하지 않움?]
[진짜 친한건지 아니면 서로 싫어하는건지 모르겟어;]
[편집이 논점 흐려놓음ㅋㅋㅋㅋ]
[근데 자세히 보면 군자 표정이 계속 안좋긴해ㅠㅠ]
[아육시 초반 양정무랑 말할때도 항상 방글방글이던 애가]
[셔틀? 노비? 이런건 방송에서 할말은 아니지않나;;]
[장난 치고는 어조가 좀 세긴 한듯]
[에잌ㅋㅋㅋ그래도 장난이겟짘ㅋㅋㅋㅋ]
[근데 군자 이번에도 편지 한자로 쓴것 같은데]
[카메라에 잘 안잡혀서 머라 썼는지 안보이뮤ㅠㅠ]
[어차피 보여도 뭔 뜻인지 모른다는게 함정]
[능력자음슴? 누가 해석좀 해바]
때마침, 영상 순간 캡쳐본을 이용하여 구겨진 종이 위 한자를 하나하나 따 온 능력자가 등장했다.
[노듀 2화 군자 편지 캡쳐본.jpg]
[한자는 이게 대충 맞을거임ㅇㅇ]
[이제 능력자가 해석좀 해줭]
[헐;]
[뭔데뭔데]
[한자검정단 등판좀 해바]
[칠링즈 팬카에 아예 한자검정준비게시판 있던뎈ㅋㅋㅋㅋ]
[미친ㅋㅋㅋㅋ팬들까지 한자에 진심이야]
한문 공부에 진심인 군자의 찐팬들 덕에, 한시의 정체는 순식간에 드러났다.
朴永悌無親索鬼 (박영제무친색귀)
親悍倜疫何口癩 (친한척역하구나)
日盡佯鴉恥出身 (일진양아치출신)
親舊末誥加害者 (친구말고가해자)
뒤이어 한시의 뜻풀이를 해 내는 능력자들이 등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