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귀엽구나 귀여워
[···고마워···.]
상태창이 띄운 메시지를 본 순간 군자는 그 자리에서 얼어 버렸다. 박영제의 주먹질에도 꿈쩍 않던 두 눈동자가 허공을 정신없이 오갔다.
“창이야···!”
“엥? 갑자기 웬 창?”
“다음 무대에선 칼춤 말고 창춤 추자고여?”
“오, 좋은데? 곡 제목은 <창놈들> 어떠냐?”
“난 진짜 기회만 주어진다면 웅이 형 딱 한 대만 때리고 싶어여.”
“···저, 저는 두 대요···.”
“허, 꼬마 놈들이 너무하는구만.”
시답잖은 농담이 오고 가는 중에도 군자의 시선은 상태창을 떠나지 못했다.
창이야,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말을 걸어 온 것이냐.
물론 잠깐의 오류일수도 있다. 그러나 군자는 그 인사가 오류 같지 않았다.
···우우웅···.
상태창은 그 어떤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그러나 밝은 빛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반짝이던 상태창과 감사 메시지는 어느 순간 이지러지며 사라져 버렸다. 대신 멤버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그 허공을 메웠다.
뒷풀이는 새벽녘까지 이어졌다.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멤버들은 기절하듯 쓰러졌지만 군자는 잠이 들 수 없었다.
“···창이야···.”
“음냐··· 창이··· 그래, 군자야··· 너 진짜 나랑 창놈들 유닛 안 할래···.”
헛소리를 하는 태웅의 혈도를 콕 찔러 기절시킨 뒤, 군자는 소파에 푹 앉아 생각에 잠겼다.
박영제는 옛 ‘유군자’의 원수 같은 존재다.
그런 그에게 인과응보의 벌을 내리니, 희한하게도 창이가 감사 인사를 표했다.
어쩌면 이 몸의 옛 주인과 창이 사이에 어떠한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방으로 들어간 군자는 이 몸의 옛 주인이 사용하던 노트북을 열어 SNS에 접속했다. 수많은 셀프캠 중 하나를 클릭하자, 과거의 유군자가 화면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도 문원 유씨 가문이었다면···.
···얼마 못 살아도 좋으니, 문원 유씨 같은 재능을 갖고 태어났다면···.
영상 속 유군자는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만약 이 몸의 옛 주인이 정말 문원 유씨의 저주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거라면?
사망 후에도 영혼은 사라지지 않고, 18세기 문원 유씨 가문의 동명이인에게 접근하여 그의 영혼을 현세로 데려온 것이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등골에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어쩌면, 이 몸의 옛 주인은 생각보다 훨씬 더 일찍 나와 함께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오직 나만이 가문의 저주, 상태창(常太瘡)을 다스릴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의 덕분일지도 모르겠구나.
어쩌면, 정말 어쩌면 내 오랜 벗의 정체를 드디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창이야.”
···.
“네가 이 몸의 전 주인인 것이냐.”
···.
상태창은 대답이 없었다. 어쩌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말하고 싶을 때 천천히 말해도 된다.”
군자는 오랜 친우를 닦달하지 않았다. 상태창의 정체가 무엇이든, 앞으로 군자가 해 나갈 일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오히려 이 몸의 옛 주인과 상태창 사이에 연관이 있음이 더욱 반가웠다. 이 몸의 옛 주인도 아이돌이 되고 싶어 하였으니, 군자와는 같은 꿈을 나눈 동료인 셈이다.
“나는 앞으로도 아이돌로서 너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할 것이야.”
···.
“그러니, 항상 내 옆에 있어 주려무나.”
···우우웅···.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상태창이 아주 작게 공명했다.
* * *
다음 날, 선비돌 7IN의 하루는 상쾌한 헤드라인과 함께 시작됐다.
[‘학폭 논란’ 박영제, 7IN - 영의정 뒷풀이 장소에서 난동··· 특수폭행으로 현장에서 체포돼.]
[다수에 대한 성희롱 혐의로 조사 중인 박영제, 특수폭행까지 추가되나?]
[학폭 - 성범죄 - 주취폭행, 하루아침에 범죄 그랜드슬램 달성한 박영제.]
[주취폭행 박영제 현장에서 제압한 유군자, 무력까지 출중한 진짜 선비!]
기사가 순식간에 뜬 이유는 목격자가 유포한 동영상 덕분이었다. 바 안의 누군가가 찍은 영상 속엔 모든 것이 담겨져 있었다.
완 소주 병을 들고 난동을 피우는 박영제의 모습, 군자가 우아한 동작으로 박영제의 난동을 제압하는 장면까지.
[와 박영제 진짜 가지가지 하는구나;;;;]
[이 정도면 아이돌 사고 중에서도 개 역대급인듯ㅋㅋㅋㅋㅋ]
[쟤는 머가 억울하다고 저기까지 가서 저 ㅈㄹ이래]
[군자때매 연예인 생활 조졌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머]
[ㅋㅋㅋ웃겨 지 팔자 지가 꼰거 아니냐]
[누가아니래ㅋㅋㅋ]
[그냥 조용조용 본업 잘하는 애인줄 알았는데 이런 개쓰레기였을 줄이야]
물론, 영상 속 군자에 대한 언급도 당연히 이어졌다.
[근데 그와중에 군자 너무 멋진거 아님?ㅇㅅㅇ]
[포캥 동영상에서도 씹덕 포인트 만들어 내는 울군자]
[하 오금 팍 차서 무릎꿇리는거 봐;;;존멋]
[나도 군자 앞에서 무릎 풀려서 털썩 주저앉고싶다]
[아니 그건 뭔 소망인뎈ㅋㅋㅋㅋㅋㅋㅋ]
[하 덕질 하다가 9시뉴스 사회면 캡쳐짤까지 저장하게 될 줄은^^;;;]
[이러다 우리 군자 정치까지 하는거 아니냐]
[붕당정치에 절여진 조선아이돌인데 정치력도 만렙일거야]
[뒤주 지독하게 싫어하는거 보면 일단 소론이실듯?]
[ㅋㅋㅋㅋㅋㅅㅂㅋㅋㅋㅋㅋㅋ]
[소론? 그게머야?]
[ㄴ친구야 군자덕 하고싶으면 국사공부부터 하자]
[ㄴ아니면 한문2급을 따든가]
[ㄴ아니면 국궁 쏘기도 괜찮아!]
[ㄴ아 지덕체 못 갖추면 진짜 팬 아니라고ㅋㅋ]
느지막히 일어난 멤버들이 세수를 하며 하루를 준비하는 가운데.
회식 다음날도 기가 막히게 새벽 6시에 기상한 군자는 이제 막 붓글씨와 산수화 그리기를 끝낸 참이었다.
“늦게들 일어나는구나.”
“크으, 회식 다음날도 새벽 기상한 거야?”
“이 지독한 놈 같으니.”
“후후, 너희들이 나태한 것이야.”
“오 선비 형아, 얼굴이 아주 폈는데여?”
“엥, 그러게. 오늘따라 얼굴 좋아 보인다?”
“그, 그런가? 하하.”
어색하게 웃는 군자를 보며, 지현수가 별 일 아니라는 듯 툭 말했다.
“당연하지. 군자가 뭐 언제는 못생겼었냐.”
“으으, 오그라들어. 지현수 넌 진짜 언제까지 그렇게 추종자 모드 할래?”
“음, 웅이 너가 똑똑이 되는 날까지?”
“헤헤, 그건 조건이 너무 빡센데여.”
“이 자식들이 진짜.”
“그리고 군자 얼굴 펼 만도 하지. 어제 그 망할 놈 유치장 보냈잖냐.”
“그건 그렇네.”
“아항, 그래서 선비 형아 얼굴이 이렇게 활짝 폈구나.”
“우와, 나도 웬수 같은 지현수 감옥 보내면 얼굴 피는 건가?”
“그건 안 될걸.”
“왜?”
“너 사실은 나 좋아하잖아.”
“지랄을···.”
동료들이 알아서 결론을 내는 동안 군자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얼굴이 편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마침 어제 상태창이 특별히 준 보상 1포인트로 외모를 올린 참이었으니까.
[사용자 : 유군자]
[용모 : S]
[노래 : B]
[춤 : B+]
[매력 : A+]
이제 군자의 외모는 S-에서 S로 또 한 단계 올랐다. 노래나 춤 실력을 올릴 수도 있었지만, 희한하게 포인트만 생기면 외모를 올리고 싶어지는 군자였다.
“···얼굴이 곧 개연성이라 들었느니···.”
어찌 됐든, 그렇게 얻은 S등급의 외모는 보기만 해도 신이 났다. ‘짜릿하다, 늘 새롭다, 잘생긴게 최고다’라고 말하던 모 배우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제 노듀도 끝났으니까 당분간 한가하겠네여.”
현재의 말처럼, 정신없었던 미니1집 활동도 어느새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다음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는 잠시 쉬어가는 시간일 터.
“형아들, 서 팀장님이 생각해 보라 하셨던 건 생각해 봤어여?”
“광고 뭐 하고 싶은지 그거?”
“넹.”
“음, 뭐 대충은?”
앨범 활동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서은우 팀장은 멤버들에게 숙제 하나를 내 주었다. 만약 광고를 찍는다면 어떤 광고를 찍고 싶은지 생각해 오라는 것.
데뷔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7IN에게는 벌써 광고 제의가 쏟아지고 있었다. 수많은 제의 중 조건 좋고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여 들어갈 수 있었으니, 광고주보다 오히려 7IN 쪽이 갑의 입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서은우 팀장은 사전조사를 실시했다. 선택지는 다양했으니, 최대한 멤버들의 의견을 반영하려는 의도.
늦은 오후, 솔라시스템 회의실에 모인 멤버들과 매니지먼트 팀은 숙제 발표 시간을 가졌다. 의외로 가장 먼저 손을 든 것은 기유찬이었다.
“···저, 저는 네버랜드 광고를 찍고 싶습니다···.”
“네버랜드? 놀이공원 말하는 거지? 거기 삼정그룹 꺼 아님?”
“오, 삼정그룹 모델을 해 보시겠다.”
“기유찬이 은근히 야심가라니까.”
“···그, 그런 건 아니고··· 가, 가족끼리 단란하고 해,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장소를··· 광고해 보고 싶어서···.”
“넌 진짜 가족 사랑하는구나?”
“그러게. 고등학생이 저렇게 가족에 미치기 쉽지 않은데.”
유찬을 시작으로 멤버들이 한 명씩 숙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전자기기 덕후 지현수는 국내 최초로 애플사의 메인 모델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며 서은우 팀장을 당황시켰다.
이어서 손을 든 현재는 모바일게임 광고를 찍으며 판타지 세계관 속 복장을 마음껏 입어 보고 싶다고 했고.
인혁은 모두의 앞에서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마약떡볶이 광고’를 ‘마약 광고’라고 하는 바람에 모두를 당황시키기도 했다.
“허, 역시 멕시칸 갱 출신.”
“···그거 아니라니까···.”
이어진 현시우의 선택은 의외로 카메라였다.
“오, 시우 카메라 좋아하냐.”
“아하핫, 나 촬영 하는 거 좋아하거든~”
“그렇구만. 평생 셀카만 찍을 줄 알았는데.”
“아하하하, 셀카를 왜 찍어~ 다른 사람들이 다 찍어 주는데~”
“아, 그러셔요···.”
이제 남은 사람은 군자와 태웅 뿐이었다. 태웅이 먼저 번쩍 손을 들며 자신의 희망사항을 외쳤다.
“전 속옷이요! 속옷 모델 하고 싶습니다!”
“푸웁-.”
“운동도 열심히 했는데, 아깝잖아요!”
“에라이 미친놈아.”
“왜? 지현수 넌 속옷 안 입냐? 속옷은 우리 삶에 아주 중요한 거야.”
“아니, 속옷 광고 하면 빤쓰만 입어야 되는 거잖아.”
“뭐 어때? 넌 자신 없음?”
“무, 무슨 그런 무례한 소리를. 너 진짜 깜짝 놀란다 임마.”
“그래? 그래에에? 깜짝 확실해?”
“뭐 이 자식아?”
“깜짝이 아니라 깜찍일 것 같은데에?”
“얘가 뭘 모르네. 원래 나 같은 체형이···.”
“그만 그만, 그마안.”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서은우 팀장이 멤버들을 진정시켰다. 군자 역시 동료들의 다툼이 귀엽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후후, 귀엽구나 귀여워.”
“귀여워? 아닐걸?”
“그러는 군자 너는 얼마나···.”
“자, 됐고. 이제 유군자 씨 의견도 들어 봅시다.”
군자는 기다렸다는 듯 품에서 백지 하나를 꺼내 펼쳤다. 백지엔 세 개의 한자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