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군자야 그거 안돼
“자, 자네가 줄타기를 할 수 있다고··· 요?”
의심과 두려움이 반반씩 섞인 마당놀이패 단장의 질문에, 소년인지 소녀인지 모를 그 아름다운 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평생 공연장에서 보냈지만 아이돌에 대해선 잘 모르는 단장이었다. 그렇기에 갑자기 말을 걸어온 이의 정체도 알 수 없었다.
미녀 배구선수인가?
그런데 이 사람이 줄타기를 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줄타기는 고도로 발달된 균형감각과 더불어 오랜 경력이 필요한 공연이었으니까. 초보자는 줄 위에서 뛰놀기는커녕 그 위에 올라서는 것조차 힘들다. 아니, 높이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것부터 불가능에 가깝다.
당연히 거절해야 했다. 물론 공연자가 부상을 입어 난처한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초보자를 줄 위에 올릴 수도 없는 법 아닌가.
“꼭 한 번 줄을 타 보고 싶습니다. 부탁입니다!”
하지만 미녀 배구선수는 간절해 보였다. 그 예쁜 얼굴을 마구 들이밀며, 커다란 키로 압박해 오니 단장의 입장에서도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왜 이렇게 줄타기가 하고 싶다는 거야?
게다가 저 눈빛은 또 뭔데. 그냥 호기심이 잠깐 돋은 사람 치고는 지나치게 진지한 표정 아닌가. 꼭 줄 위에서 살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단장이 고민하는 사이 관객들의 표정은 점점 굳어 가기 시작했다. 놀이마당 공연은 끊임없이 볼거리를 제공해야 했다. 쉬는 시간은 끝났는데 공연이 재개되지 않으니, 관객들이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한 거다.
“크흐음···.”
이제는 단장도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아직도 머리는 그를 말리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가슴은 이 미녀 배구선수를 믿고 싶었다.
“정말 줄 탈 줄 알아요?”
“네! 물론입니다!”
“위험해지면 바로 내려오는 겁니다.”
“넵!”
결국 수상한 이는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루고 말았다. 걱정이 되긴 했으나 한편으로는 그가 기특하기도 한 단장이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 문화에 관심이 없다. 줄을 타던 막내도 벌써 불혹에 가까워졌으니, 사실 언제 다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다.
그래, 젊은 사람이 줄 위에 올라가 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비록 몇 걸음 못 떼고 내려오겠지만, 그 서툰 모습만으로도 관객들에겐 충분한 즐거움이 되겠지.
“자, 그럼 2부 공연 시작해 봅시다.”
2부는 줄타기부터 시작이었다. 단원들의 보조를 받으며, 수상한 이가 마침내 줄 위에 올랐다. 관객석에선 환호성과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꺄아아악—.
“와하핫, 저 사람 이제 줄타기까지 하네.”
“어떡해, 위험한 거 아냐?”
“군자야! 조심해! 빨리 내려와아—.”
관객들이 그 수상한 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군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구나. 어쨌든 걱정이 커지기 전에 빨리 내려오도록 하는 게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단장이, 군자를 돕던 단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려던 순간이었다.
휘익-.
“어!?”
“자, 잠깐만!”
단원들의 보조를 받던 군자가, 순간 그들의 손을 놓으며 줄 위에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이, 이런 미친—!!”
잠시 자리에 앉아 있던 단장의 몸이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차라리 겁쟁이라면 더 좋았을 것을!
이제 정말 큰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 줄 아래 자리잡은 단원들의 순발력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숙련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줄타기를 잘 할 수 없···.
투우웅—.
···는데.
“어어?”
투우웅, 투우우웅—.
백발백중은 줄 위에서 균형을 잃고 떨어지리라 생각했는데.
투웅, 휘리릭, 후우우웅—!!
우리 줄타기 주자도 수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겨우 얻은 기술인데.
“우와아아아아아아—!!”
“뭐야, 뭐야아!? 왜 잘해—!?”
···왜 잘하는 거냐고!
단원들의 손을 놓은 군자는 줄 한가운데로 성큼성큼 나아가기 시작했다. 흔들흔들, 언뜻 위태로워 보이지만 다리의 움직임을 이용하여 중심을 잡아 나가는 것이 확실히 보였다.
부채를 든 오른팔은 균형을 잡기 위해 쭉 뻗어 놓았다. 균형을 잡는 움직임조차 안무로 승화시키는 능숙함, 단장과 단원들은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게 무슨···.”
그러나 놀라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미녀 배구선수의 보폭이 커지자 관객들의 환호성도 따라서 상승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관객들의 얼굴엔 지루함이 사라져 있었다.
* * *
이게 얼마 만이던가.
보조를 받으며 줄을 밟은 순간부터 군자는 감회에 젖었다.
어렸을 적, 숙부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가출하여 처음 찾았던 저잣거리 마당이 떠올랐다.
좁고 위태로운 밧줄 하나에 몸을 의탁해야 하는 줄타기였으나, 역설적이게도 군자는 그 위에서 가장 큰 자유로움을 느꼈다.
줄 위에서는 누구도 군자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군자만큼 자유자재로 몸을 사용하지 못했다. 아무리 과감하게 움직인다 해도, 관객들은 비난 대힌 환호성을 보냈다.
군자가 줄을 타기 시작하자 지현수가 앰프로 7IN의 노래를 재생했다. 대부분 국악기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7IN의 음원은 줄타기 퍼포먼스에도 기가 막히게 어우러졌다.
음악에 맞춰 학처럼 사뿐사뿐 걸음을 내딛던 군자가 종종걸음으로 스텝을 바꾸며 순식간에 줄을 왕복했다. 익살스런 움직임에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우하하하핫-.”
“흠, 흠, 어흠-!”
이번엔 이름 깨나 있다는 사대부처럼 헛기침을 하며 점잖게. 그러나 사대부는 몇 걸음도 못 떼고 발을 헛디디며 중심을 잃는다.
“어, 어어어—!?”
순간 줄 아래에 있던 단원들이 긴장했지만 이 또한 공연의 일부였다.
“어흐흐—.”
다리를 후들거리며 간신히 중심을 되찾는 사대부의 모습에 관객들이 다시 한번 웃었다. 단장은 놀라움에 탄성까지 터뜨렸다.
군자는 단순히 줄 위에서 중심을 잘 잡는 것이 아니었다. 그 위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며 진짜 공연을 선보이고 있었다.
중심을 되찾은 군자의 걸음걸이가 다시 우아해졌다. 마치 깃털로 된 부츠라도 신은 것 같은 움직임에 관객들이 낮은 탄성을 냈다.
“우와아···.”
“너무 예쁜 거 아냐?”
대부분의 여장이 우스꽝스러웠으나 군자는 달랐다. 줄이 위아래로 요동칠 때마다, 머리칼이 허공에 흩날릴 때마다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그와 함께 숙소생활을 하는 7IN의 동료들조차 그 모습엔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니 진짜 줄타기를 한다고?”
“아하하, 이러면 대역이 필요없지~”
“저 형아는 대체 못 하는 게 뭐래여.”
“진짜 이쁘긴 하다···.”
“언제 또 저렇게 예뻐진 거지?”
최근 S까지 올라선 용모 등급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군자였다. 꾸미기에 따라, 그의 얼굴은 웬만한 여자 연예인보다도 아름다웠다.
딱히 여장에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군자 역시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줄 위에서 어떤 연기를 하느냐에 따라, 그는 남자가 될 수도 있고 여자가 될 수도 있었다.
스으윽—.
자세를 낮추며 줄 위에 납작 엎드린 군자가 두 손으로 줄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군대의 유격 훈련을 받는 것처럼.
얼마 전 침대에 엎드려 유튜브를 시청하다가 우연히 본 <리얼 사나이> 영상이 퍼뜩 떠올라 즉흥적으로 취해 본 동작이었다.
“유격이다, 유격!”
효과는 굉장했다. 익숙한 움직임에 남자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갑자기 이글이글 진지해진 눈빛 연기와 급발진 샤우팅도 한 몫 했다.
“할 쑤 이씀돠!”
“푸하하하학—.”
저잣거리 공연은 익살이 절반이다. 기술만 좋다고 좋은 공연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훌륭한 공연자는 관객들을 웃게 만들어야 한다.
스윽, 스윽, 스으윽—.
밧줄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남성 관객들이 반응했다. 반쯤 영혼이 탈곡된 표정으로 여자친구 옆에 서 있던 남자들도 유격 동작엔 흥미를 느끼는 듯 했다.
“뭐야, 쟤 군대 나왔어?”
“왜 이렇게 잘하냐—!!”
“이름이 군자 말고 군필자인 거 아냐?”
찰칵, 찰칵—.
사방에서 셔터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줄타기 공연은 SNS를 타고 방구석 팬들에게도 생중계되고 있는 중이었다.
[ㅋㅋㅋㅋ지금 군자 여장하고 줄타는중]
[????????????]
[(사진) (사진) (사진)]
[아니미친ㅋㅋㅋㅋㅋㅋ]
[줄타는게 무슨 정치질 한다는건줄ㅋㅋㅋㅋ]
[나돜ㅋㅋㅋㅋㅋㅋㅋ진짜 줄이었어?]
[미쳣다진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매력터져ㅠㅠㅠㅠ진짜 못하는게머임]
[배신 협잡 각종 비윤리적 행위 못생기기 이런거 못함]
[ㅋㅋㅋㅋㅋ와근데 턱선무슨일이야진짜]
[군자야 턱선으로 밧줄끊을라 조심해유ㅠㅠㅠ]
팬들은 끊임없이 생성되는 새로운 떡밥과 즐길거리에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주에 가지 않은 스스로를 탓하며 발등을 찍었다.
[근데 대체 어떻게 저기서 저러고 있는건뎈ㅋㅋㅋ]
[줄타기 공연하시는분이 갑자기 다치셔서ㅠㅠ 군자가 급땜빵 들어감]
[진짜 오늘 경주러들 대체 전생에 뭔 덕을 쌓은거니]
[아ㅏㅏㅏ 보고싶어ㅓㅓㅓㅓ]
[나중에 유툽뜰듯ㅋㅋㅋ그거라도 봐]
[ㅋㅋㅋㅋㅋㅋ유격군자 뭐냐고진짜]
[남자들개좋아함ㅋㅋㅋㅋㅋㅋㅋㅋ미쳣]
[우리군자도언젠간군대가겟지ㅠㅠㅠㅠ]
[노노 양궁으로 금메달 따서 군면제받을거임ㅇㅇ]
[ㅋㅋㅋㅋ군자라면 어쩐지 진짜그럴거같아]
[영상중계조뮤ㅠㅠㅠㅠㅠ]
[진짜누가 유튭 스밍이나 인스타라이브 좀열어주면안대?]
[아 경주갈까 하다가 말았는데 갈걸]
유격 동작으로 왔다 갔다, 유격군자 쇼를 마친 군자가 이번엔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 하나로 밧줄 위에 섰다.
매번 줄 위에서 다양한 동작을 선보였으나, 언제나 이 동작에서 가장 큰 환호성이 따랐다.
투우웅, 투우우웅-.
발에 힘을 주며 뛰는 높이를 점점 높여 나갔다. 발을 구를 때마다 줄의 장력이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우와아아아아아—.”
더욱 아찔할수록, 더욱 위험해 보일수록 관객들은 즐거워하는 법.
군자의 몸이 가장 높은 곳을 찍고 내려오던 순간.
줄 위에 착지해야 할 두 발이 줄의 양 옆으로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어어어어——!?!?”
순간 놀란 관객들이었지만 이 또한 군자가 의도한 바다.
이번엔 발 대신 가랑이로 줄을 받아 내며, 다시 한번 높이 뛰어오른 군자였다.
투우우웅, 투우우우웅—.
가랑이로 줄을 받아 내며 높이, 더 높이.
어렸을 적 숱하게 취해 왔던 동작이었다. 그렇기에 동작을 구사함에 있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군자는, 그 시절과 달리 장성해 버린 자신의 몸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투우우우우우우웅—.
“···이이···.”
영 좋지 않은 곳으로 밧줄을 받아내 버린 군자의 입에서 율곡 선생의 본명이 비명처럼 튀어나왔다.
“으으, 세상에···.”
“이런···.”
남자 관객들은 공감의 탄식을 흘렸으며, 여자 관객들은 두 손으로 입을 턱 막았다.
“안돼!”
“군자야, 그거 안돼에!”
줄 위에 오른 뒤 처음 맞은 대위기. 뒤늦게 찾아온 통증은 천천히 군자의 아랫배를 감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