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줄임말은 위험해
연습용 대사를 받아든 군자가 입을 여는 순간.
“아- 아사달-.”
연출가 현시우의 머릿속엔 환청이 들리는 듯 했다.
“저어- 아사녀느은- 당신을- 만나러- 갈.끄.에.요-.”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배우를 만난 순간 울려퍼지는 종소리 같은 것이 아니었다.
뚜욱, 따악-.
마치 목각 구체관절 인형이 뻑뻑한 관절을 꺾으며 뚝딱거리는 듯한 소리.
“아하하핫, 군자야~”
어색하게 움츠러든 어깨, 갈 곳을 잃은 눈빛, 장수원 형님의 귀싸대기를 올려 붙일 기세의 대사 처리까지.
발연기다. 이건 불지옥 수준의 발연기다.
“아하하하핫, 잠깐, 잠깐만~ 이거 좀 당황스럽네~”
“야 유군자, 장난치지 마.”
“그래 군자야. 아무리 연습 리딩이라도 이건 좀···.”
그러나 군자는 장난을 칠 생각이 없었다. 그저 최선을 다하여 연기를 펼쳐 보였을 뿐. 한없이 진지한 눈빛, 살짝 떨고 있는 두 손이 그것을 증명했다.
“다, 다시 한 번 해 보마.”
“그래, 집중해서 다시 해 봐. 지금은 몸이 안 풀려서 그런 걸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두 번째 시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푸하하하하학-.”
“양정무, 그만 웃어라.”
“혁이 형, 형도 입꼬리 난리 났거든요?”
“크흠, 큼-.”
“선비 형아, 진짜로 장난 아니에여?”
“진심인 것 같은데. 쟤 동공 지진 난 거 봐라.”
“아니, 무대 위에선 그렇게 표현력 좋은 형아가 연기는 왜···.”
황당한 연기력에 모두가 당황해 마지않았다. 그 동안 무대에서 보여 준 표현력을 생각한다면, 연기도 당연히 어느 정도는 해 줄 줄 알았으니까.
그러나 군자에게 공연과 연기는 완전히 다른 영역의 것이었다.
가무(歌舞)와는 300년 전부터 친밀했다. 노래를 부를 땐 마치 가사 속 작은 세상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러운 표정이 나오고, 몸동작에도 생기가 넘쳤다.
허나 연기는 달랐다. ‘춤과 노래’라는 형식을 가진 가무와 달리, 연기는 마치 어딘가에 실존하는 누군가를 그대로 구현해 내는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야, 마치 몸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군자야, 너 노래 할 땐 엄청 자연스럽잖아.”
“그래, 노래 한다고 생각하고 한번 해 봐.”
“노래를 한다라··· 그래, 알겠다.”
비장한 표정으로 돌입한 3차 시기.
‘노래하듯 해 보라’는 조언을 받아들이자마자, 놀랍게도 표정은 바로 자연스러워졌다.
“어라?”
“후후, 어떠한가? 이번엔 조금 달랐지?”
“이 미친놈아, 노래하듯이 하랬다고 대사에 음을 붙이면 어쩌자는 거야!”
“아뿔싸!”
정말 말 그대로 노래하듯이, 대사에 음을 붙이니 표정은 확실히 자연스러워졌다. 그러나 이런 또라이 같은 대사처리로는 연기를 할 수 없었다.
“아니, 음을 안 붙이면 안 되는 거야?”
“그, 그것이···.”
“아하하핫, 그래도 뮤지컬은 잘 하겠네~”
“시우는 이 와중에도 참 밝아서 좋아.”
“아하핫, 아니야~ 나두 머리 터질 것 같다구~”
“시우 형, 뭣하면 나로 주연 교체해도 좋아요. 난 언제든 준비돼 있으니까.”
“양정무 넌 이 와중에도 분량 욕심 내고 있냐.”
“그 막장 웹드에서 연기 잘 하는 이유가 있었구만?”
태웅이 긴 한숨을 내뱉으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군자를 바라보았다.
“하아, 군자야. 이걸 어떡하면 좋냐.”
“와, 살다 살다 권태웅이 군자한테 잔소리하는 걸 다 보네.”
“그러게 말이다. 내 살다 살다 태웅이에게 타박을 다 듣는구나.”
“뭠마, 꼬우면 나보다 연기를 더 잘 하든지.”
“···내 연기가 그렇게 최악이더냐···.”
“한 번 볼래? 시우가 찍어 놓은 거 있는데.”
자신의 연기를 모니터링한 군자의 얼굴이 대번에 사색이 되었다.
대관절 이 구체관절인형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어때? 장난 아니지?”
“···그, 그래도 대사는 잘 외울 수 있거늘···.”
“그래, 그 와중에 열받게 대사는 또 잘 외우더라.”
그러나 군자도 알고 있었다. 대사를 아무리 잘 외운들, 이런 연기력으로는 민폐가 될 뿐이다.
군자가 시무룩해 있는 사이, 나머지 멤버들은 현시우를 중심으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으아아, 어떡하지? 시우야, 네 생각은 어때?”
“아하하하, 군자 연기가 말도 안 되기는 하는데~”
그렇게 말하며 현시우가 스크린 위에 영상 하나를 띄웠다. 여장한 군자가 줄 위에서 펄쩍 뛰어오르는 장면이었다.
“와아-.”
“이건 다시 봐도 미치긴 했다.”
“아하핫, 난 이 비주얼은 포기 못 하겠네~”
“솔직히 얼굴이 개연성이긴 해···.”
군자의 연기에 심각해졌던 멤버들도, 막상 줄을 타는 군순이를 보자 마음이 다시 녹는 것 같았다.
S등급 외모의 위력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호시탐탐 주연 자리를 노리던 양정무마저도, 그 영상을 보고 나선 아사녀 역할엔 군자가 찰떡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군자 형이 예쁘긴 하네.”
“···정무야, 고맙다···.”
“왜 그렇게 축 쳐져 있어요, 보기 싫게.”
“넌 신이 난 것 같구나···.”
“당연히 신나지, 드디어 내가 형보다 잘하는 걸 찾았는데.”
양정무는 이죽거렸으나 군자는 그의 말을 꼬아 듣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도 양정무의 연기력은 군자보다 한참 뛰어났으니까.
“그래, 정무 넌 연기를 참 잘 하더구나. 꼭 독이 한껏 오른 독사 같았다.”
“내가 좀 도와줘요?”
“그, 그래 줄 수 있겠느냐.”
“글쎄에.”
“정무야, 나 좀 도와 다오!”
군자의 간절한 표정을 보자 양정무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아, 이걸 어떡하지~”
“정무야!”
“형, 그럼 나 필요한 거예요?”
“당연하지! 내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으마!”
“이제야 나 뽑아 주네.”
“···?”
“알았어요. 도와 줄게요.”
“!”
대번에 환한 미소를 짓는 군자를 보며 양정무도 따라 웃었다.
“형은 표현력이 좋으니까, 카메라 앞에서 힘 빼는 법만 알아도 금방 좋아질 거예요.”
“고맙다, 정말로 고맙구나!”
비록 약간의 문제는 있었으나, 결국 캐스팅은 바꾸지 않기로 결심한 소년들이었다.
그렇게 칠린픽쳐스는 본격적인 촬영 준비에 돌입했다.
* * *
첫 리딩으로부터 2주 뒤, 드디어 첫 촬영일이 밝았다.
이른 아침부터 촬영지에 집결한 제작사 칠린픽쳐스는 촬영 준비에 한창이었다.
항상 실없이 웃던 현시우였으나, 오늘만큼은 약간은 진지하고 예민한 모습으로 현장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미술팀, 세팅 끝났을까요~”
“네 감독님, 미술 세팅 끝났습니다.”
“아하핫, 좋아요~ 조감독님, 15분 후에 슛 들어갈 수 있을까요~”
“네, 문제없습니다.”
“그럼 촬감님, 오늘 첫 콘티부터 한 번만 더 확인하고 가시죠~”
그 와중에도 군자와 양정무는 막판 대본 연습에 열심이었다.
“자, 이번엔 어땠느냐?”
“많이 좋아졌어요.”
“그래? 얼마나?”
“전엔 발가락 연기였는데, 이젠 발연기 정도는 되는 수준?”
“발연기? 그건 또 무슨 뜻인고?”
“뭔 뜻이긴, 연기 겁나 못한다는 뜻이지.”
“태웅아, 너무하는구나···.”
“그래도 실망하지 마. 전엔 거어어어어어업나 못했는데, 지금은 그냥 겁나 못하는 정도니까.”
“아하핫, 괜찮아~ 연기 어색한 부분은 그냥 군자 비주얼로 밀어버리면 돼~”
“역시 감독님이 확실한 플랜을 가지고 계시는구만.”
“발연기··· 내가 발연기라니···.”
군자가 발연기라는 단어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동안, 현재는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SNS에 게시물을 남겼다.
“팀장님, 저 이거 트위티에 올려도 돼여?”
“흐음··· 네, 그러셔도 됩니다.”
“앗싸아.”
귀여운 보따리장사꾼으로 변신한 현재의 보따리 속엔 하트 모양 초콜렛 상자가 가득 들어 있었다.
어차피 내용물이 공개될 일 없는 소품이니 신문지 같은 것으로 채워도 됐지만, 현재의 요청으로 준비한 초콜렛 상자였다. 그 초콜렛 상자 중 하나를 꺼내 든 현재가, 셀카를 찍어 개인 트위티에 업로드했다.
[오늘은 보따리장사꾼으로 변신! 초콜렛 사세요~♥︎ (사진)]
[허류ㅠㅠㅠㅠㅠㅠㅠㅠㅠ개귀여워!!!]
[현재야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렇게 사랑스러운 보부상이 어딨니ㅠㅠㅠ]
[현재야 내 적금 개 박살내서 그 초콜렛 풀매수할게]
[ㅋㅋㅋㅋㅋㅋㅋㅋ나도하나만줘어어]
[아 왕보따리 메고있는거 넘나귀엽다ㅠㅠㅠㅠ]
[근데이거뭐야? 뭐임? 무슨의상이야!?!?]
[무대의상은 아닌것 같은데!!!! 현재야 알랴죠ㅠㅠㅠㅠ]
[헐 현재 혹시 드라마 촬영해!?!?]
[뒤에 보이는 거 촬영 모니터 아니야????]
[헐 현재 웹드찍나바!!!!!]
[헗허헐헣헐헐헗럴ㄹㄹ헐헐]
[머야머야 그럼 여장이랑 목탁이랑 다 그 떡밥이었던 거야???]
[근데 대체 무슨 드라마길래 목탁이랑 여장이 나와!?!?!??]
[현재야 제발 알랴죠ㅠㅠㅠㅠ!!!]
“역시 하현재, 소통왕이구만.”
“헤헤, 팬들이랑 드립 놀이 하는거 재밌음여.”
“흐음, 나도 한 장 올려볼까.”
주지스님으로 분장을 마친 태웅도 셀카를 찍어 개인 SNS에 업로드했다. 하이앵글로 촬영한 셀카 속에선 태웅의 대머리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내가 이 구역의 주짓수님 ㅋㅋ (사진)]
[????]
[????????????]
[태웅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잠깐만]
[ㅋㅋㅋㅋㅋㅋ?????????]
[머리는?????????]
[머리는 어디가고 머머리가 왔니]
[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뭔뎈ㅋㅋㅋㅋㅋㅋㅋ]
[분장이지? 분장이지? 분장이지? 분장이지?]
[웅녀들 단체 오열]
[스님은 닭가슴살도 못먹는데 진짜 출가한거야?ㅠㅠㅠ]
[후 권태웅 덕질 난이도 진짜 하드코어야]
[?????아니이거뭐야??????????]
[아 두상 너무 예뻐ㅠㅠㅠㅠ울 태웅이 이두뿌셔 삼두뿌셔 대흉뿌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웅녀들 멘탈 잡으라곸ㅋㅋㅋㅋㅋㅋㅋㅋ]
[웅녀들이 정신차리기엔 쑥과 마늘이 너무 맵다]
[ㅋㅋㅋㅋㅋㅋ미치겟네진짜]
물론 태웅은 딱 5분 만에 이용중 실장에게 탈탈 털린 뒤 대머리 셀카를 내려야 했지만, 군자는 현재와 태웅의 SNS 놀이가 재미있어 보였다.
“현재야, 나도 SNS로 팬들과 소통을 하고 싶구나.”
“오옹, 형아도 해 봐여. 웅이 형처럼 이상한 셀카 올리지 말고.”
“그래야겠지.”
“분장도 예쁘게 됐으니까, 그냥 평범한 사진만 올려도 다들 좋아하실 걸여.”
“그래, 고맙다 현재야.”
“아, 그리고 팬 분들이 유추할 수 있도록 떡밥을 조금 뿌려 드리는 것도 좋음여.”
“떡밥?”
“넹. 그렇다고 웅이 형처럼 이상하게 뿌리진 말구여.”
“한시를 써 볼까?”
“후음, 그건 비추천.”
“어째서?”
“요즘 우리 팬들 전부 한자 자격증 따잖아여. 아마 완전 금방 해석해 버리실 걸여?”
“그렇구나. 그럼 어떻게 떡밥을 뿌리지?”
대화를 듣고 있던 태웅이 그 사이로 스윽 끼어들었다.
“줄임말 같은 걸 암호처럼 써 보는 건 어때?”
“줄임말이라? 단어나 문장을 축약하여 전달하는 것 말이더냐?”
“응. 좀 오래된 방법이긴 해도, 팬 분들이 유추하기엔 딱 좋잖냐.”
“과연 그렇구나!”
줄임말이라.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겠구나.
현재는 보따리장사꾼이라는 단서를 남겼고, 태웅이는 주지스님이라는 떡밥을 던졌으니 나는 ‘발연기’라는 단서를 던져야겠다.
헌데 이 단어를 어떻게 줄인다···.
잠시 고민하던 군자가 무릎을 탁 쳤다.
“옳거니!”
예쁜 표정으로 찍은 여장 셀카, 그 아래에 군자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늘의··· 소생을···.”
[오늘의 소생을 설명하는 단어는? : ]
아직도 쿼티 키보드보다 붓글씨가 편한 군자였기에, 타이핑은 한없이 느리고 정성스러웠다.
“ㅂ··· ㅏ··· ㄹ··· ㄱ···.”
오늘의 소생을 설명하는 단어는?
이 뒤에 붙은 단어는, ‘발연기’의 앞글자와 뒷글자만 따서 만든 군자 표 줄임말이었다.
완성된 문장을 본 순간.
“···아니, 아니, 이 형아가 미쳤나 봐—!!”
별 생각 없이 군자의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현재가 대경실색하며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