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아이돌은 선비님-128화 (128/303)

#128

소꿉놀이?

보따리장사꾼 하현재는 싸늘함을 느꼈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박히는 것 같았다. 무심코 군자의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대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군자의 스마트폰 숙련도가 할아버지 수준인 것이 다행이었다.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스마트폰을 낚아챈 현재가 황급히 SNS 어플을 꺼 버리고 군자에게 잔소리를 시작했다.

“바, 바, 발··· 어후, 나 말하기도 민망-.”

“발기가 왜?”

“그 단어 말하지 마아—!!”

새빨개진 얼굴의 현재를 보며 군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구나, 발기란 발연기의 줄임말일 뿐인 것을. 이렇게 부끄러워 하다니, 혹시 현재도 한때는 발연기를 한 적이 있었던 것일까.

“아하, 이제 알았다.”

“뭐, 뭘여.”

“현재 너도 한때는 발기를···.”

“이 미친놈아—!!”

촬영이 임박했으나, 어디서 자꾸 발기 소리가 들리자 멤버들은 모일 수밖에 없었다.

“뭐야? 누가 19금 소리를 내었어?”

“현재는 또 왜 이렇게 화가 났니.”

멤버들이 모여든 곳에선 죄인 유군자가 현재 앞에서 고개를 조아린 채 탈탈 털리고 있었다.

“그 발··· 그 단어 좀 말하지 말아 봐여.”

“발기?”

“아 하지 말라고 쫌!”

현재에게 꿀밤을 맞아 가며, 군자는 줄임말의 용법에 대해 다시 배웠다.

줄임말이란 문장 속 단어 앞글자만 따서 만드는 것이기에, 발연기를 발기로 줄이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다.

“과연···.”

“과연은 무슨, 큰일날 뻔 했다구여!”

“큰일? 왜 왜 현재야, 군자가 뭐 했는데?”

“오늘 소생을 설명하는 단어는 발··· 어휴, 그렇게 SNS를 올릴라고 했다니까여.”

“푸하하하학—.”

“아하하핫, 진짜 큰일 날 뻔 했네~”

“그래 군자야, 아침부터 그게 뭔 숭한 포스트냐.”

“왜? 아침엔 발기를 하면 안 되는 건가?”

“푸하하하하하하학, 아니지, 그건 아닌데—.”

“아아악, 누가 발기 소리 좀 안 나게 해 줘여—!!”

현재와 정무에게 각각 등짝 스매싱 한 대씩을 더 맞고 나서야 군자의 입은 꾹 닫혔다.

“알았다, 이제 그만 때리거라··· 흑.”

“어휴, 알았어여. 나도 미안해여.”

“아니다. 내가 미숙하여 그런 것 아니겠느냐.”

군자도 ‘그 단어’의 본래 뜻은 알고 있었다. 다만 줄임말이니 괜찮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었으나, 이제 줄임말의 사용법을 제대로 알았으니 같은 실수를 반복할 일은 없었다.

“아하하핫, 그럼 SNS는 촬영 끝나고 올리자~ 이제 시작해야 돼~”

“오케이. 웃고 나니까 얼굴 근육이 좀 풀리는 느낌인데?”

“크으, 역시 군자··· 우리 긴장 풀어 주려고 그랬네.”

감독 현시우의 지시에 따라 모든 배우와 스태프가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조감독님, 조명팀 준비 끝났을까요~”

“넵, 끝났습니다.”

“아하핫, 그럼 첫 컷 가 보겠습니다~”

“카메라 롤, 오디오 스피드-.”

“1씬 1-1-1, 레디, 액션—!!”

19금 단어로 인한 작은 소동이 끝나고, 드디어 칠린픽쳐스 첫 촬영 시작을 알리는 슬레이트 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촬영 전날, 문화재청 홍보컨텐츠 제작 담당자 공유민 주무관은 불안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처음엔 최애 아이돌과 작업할 수 있다는 설렘으로 머릿속이 가득했지만, 촬영 날이 다가올수록 불안감이 스멀스멀 자라났다.

아무리 7IN이 만능 아이돌이라고 해도 영상을 직접 제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핸디캠으로 찍는 소규모 모바일 드라마도 아니고, 중규모 촬영팀까지 꾸려서 진행하는 작업이니 더더욱 걱정이 됐다.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을까···.

회사에서 털리는 건 괜찮았다. 어차피 회사 생활에는 별 의욕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최애 아이돌이 무능력으로 욕을 먹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걱정으로 밤을 지새운 덕에 아침부터 두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첫 슬레이트 소리가 들릴 때까지 불안감은 지속됐다.

그러나 막상 촬영이 시작되자, 현시우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모니터 앞에 앉아 현장을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컷, 아하핫, 좋아요~ 촬감님, 이번 컷 타이트바스트로 하나만 더 딸게요~”

“예, 알겠습니다.”

“음향감독님, 이번 컷에 뛰는 장면이 들어가는데 바람 소리 체크 좀 부탁드립니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 했는데, 아무래도 풍속이 좀 강해서 후시녹음 필요해 보입니다.”

“아하핫, 그럴 줄 알았어~ 조감독님, 후시 스케쥴은 따로 잡아 놓으셨죠?”

감독이 중심을 잡아 주니 현장이 원활하게 돌아갔다.

지금까지 다양한 홍보 컨텐츠를 촬영하며 현장을 따라다녀 보았지만, 이만큼 딜레이 없이 스무스하게 진행되는 촬영은 본 적이 없었다.

배우인 7IN 멤버들은 틈틈이 스태프 일도 함께하며 촬영을 도왔다.

힘 센 인혁과 태웅은 무거운 촬영장비와 조명을 부지런히 날랐고, 꼼꼼한 현재와 유찬이 더블액션을 체크하며 연출부를 서포트했다.

그 와중에도 음악감독 현수는 짬이 날 때마다 맥북을 열어, 작품에 들어갈 음악을 스케치해 냈다.

“···뭐야, 뭐야아···.”

척척척 돌아가는 현장을 보며 공유민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왜 이런 것도 잘해?

지난 밤의 불면증은 모두 기우였다. 현시우는 거침없이 움직이며 콘티 상의 컷들을 지워 나갔고, 서은우 팀장이 구성한 유능한 프리랜서들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1인분 이상을 해냈다.

물론 모든 것이 완벽하진 않았다. 예를 들면 군자의 연기 같은.

“아하하핫, 군자야~ 여기선 조금 더 슬픈 표정으로~”

“이, 이렇게?”

“아하하하하, 전혀 슬퍼 보이지 않는데~”

“그런가···.”

“선비 형아, 붓글씨 쓰고 싶은데 붓이랑 먹이 없다고 생각해 봐여.”

“헉.”

“그래서 문구점에 갔는데 하필 주머니에 돈도 없는 거지.”

“···그런 끔찍한···.”

“아하하핫, 그거야 그거~ 그 표정이라구~”

공유민의 눈에는 군자의 발연기도 귀여웠다. 현시우의 지시엔 고장난 듯 뚝딱거리다가, 현재의 희한한 디렉팅만 알아먹는 것도 마냥 사랑스러웠다.

“컷, 아하하~ 오케이~”

“오케이입니다—!!”

“아하핫, 촬감님~ 다음 컷 촬영 세팅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조명까지 15분이면 될 것 같습니다.”

촬영팀이 장비를 세팅하는 동안 나머지 인원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이 진정될 새도 없이, 유찬과 군자가 다과를 들고 공유민 앞에 나타났다.

“···과, 과자 드세요 주무관님···.”

“주무관 나으리, 차도 함께 드시지요.”

“고, 고마워요.”

황송하기 그지없었다. 마음 속에선 벌떡 일어나 큰절이라도 할 기세의 공유민이었다.

“···아, 아니, 절 까지 하실 필요는···.”

“나으리, 어찌 저희에게 큰절을 하십니까!”

“아뿔싸!”

마음 속으로 한 게 아니라 실제로도 몸이 움직여 버렸구나!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 공유민 인생의 커리어 하이였으니까.

최애와 함께하는 프로젝트라니. 대체 전생의 나는 얼마나 거대한 덕을 쌓은 것일까.

공유민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촬영지가 경주여서 그런지, 마침 젊고 잘생긴 스님이 그 앞을 지나가던 참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너무도 거대한 만족감에 젖어 있었기에, 그 스님의 정체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채로.

“아 주무관님 진짜 너무하시네!”

“헉, 태웅 님.”

“근데 저 그렇게 스님 같아요? 완전 감쪽같나 봐요, 크크크.”

“네, 완전 완전 잘생긴 스님 같아요.”

“그래요? 주무관님도 예쁘십니다!”

진짜 스님으로 오해 받은 태웅은 뿌듯하다는 듯 대머리 가발을 문지르며 촬영팀 쪽으로 성큼성큼 사라졌다.

“헤헤, 헤헤헤···.”

그러나 공유민의 행복한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공 주무관~ 나 왔어요~”

공유민 주무관의 상사이자 타 영상 프로젝트 ‘의복 문화 컨텐츠’ 제작 담당자인 정윤철 사무관이 촬영 현장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어떻게, 촬영은 잘 되고 있나?”

“아, 예···.”

“얼굴에 아주 웃음이 떠나질 않네? 잘생긴 친구들이랑 일 하니까 좋은가 봐?”

“예, 뭐···.”

정윤철 사무관을 만나자 마자 공유민의 말수가 급격히 줄었다. 이 인간은 또 뭐 한다고 여기까지 온 거야?

“내가 우리 공 주무관 일 잘 하나 보러 왔지.”

“아, 예.”

“또 어리버리 하고 있으면 내가 도와줘야 되니까.”

“아.”

“공 주무관, 언제쯤 나 없이 혼자 잘할래~ 하나하나 다 해 줘야 하는 거 보면 꼭 공주님 같다니까~”

“아···.”

“공주무관, 공주 무관··· 공주 무관? 공주랑은 무관한 사람이 왜 자꾸 공주처럼 구냐 이거지~”

“아아···.”

“재밌지~ 재밌지~? 푸허허허헛—.”

정윤철의 말이 길어질수록 공유민의 얼굴엔 그늘이 드리웠다. 방금 전까지 행복의 바다에서 헤엄치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든 표정이었다.

아니, 이 인간은 할 일도 없나? 왜 여기까지 와서 이 지랄이지?

“사무관님, 의복 영상 프로젝트는 끝나셨나 봐요.”

“아, 우리는 진즉 다 끝냈지.”

“아하···.”

“알잖아, 의복 영상은 원래도 조회수 잘 나오는 거.”

“···예···.”

“이번엔 아예 해외 인플루언서들 섭외해서 보장 조회수부터 빵빵하게 채웠거든. 유튜브에서 국뽕 컨텐츠 잘 터지는 거 알지?”

“예, 뭐···.”

“생각해 봐. 구독자 몇백만 짜리 유튜버들이 한복을 입고 춤을 추고 리뷰를 한다고. 그것만으로도 조회수는 이미 보장된 거 아니겠어?”

“···그렇겠네요.”

인정하긴 싫었지만, 정윤철 사무관이 담당하는 전통 의복 컨텐츠 쪽은 항상 조회수가 잘 나왔다. 반대로 공유민 주무관의 문화재 컨텐츠 쪽은 조회수가 잘 나오지 않는 편이었고.

컨텐츠 특성 상, 인플루언서를 불러 협업하기 쉬운 의복 쪽이 조회수가 높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아예 작정하고 해외 인플루언서들까지 부른 모양이니, 조회수는 더욱 잘 나올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준비했는데, 드라마로 되겠어~?”

“해 봐야죠.”

“해 봐야죠가 아니라~ 언제까지 지기만 할 거냐고~”

“아···.”

“뭔 아이돌들 데리고 드라마를 찍는다고~ 공 주무관, 이거 소꿉장난 아니에요~”

“···.”

“공 주무관? 알아들은 거지~? 이거 소꿉장난 아니다~?”

마음 속에서는 벌써 육두문자가 켜켜이 쌓여 갔지만 공유민은 입술을 꽉 깨물며 욕설을 견뎌 냈다.

“···뭐 소꿉장난인지 아닌지, 한번 보세요.”

“으허허허, 그러려고 온 거야~ 그래, 아이돌 친구들이니까 얼마나 귀엽게 재롱을 부리겠어, 크허허허헛-.”

정윤철의 웃음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촬영감독이 큰 목소리로 세팅 완료를 알렸다.

“감독님, 세팅 끝났습니다!”

“아하하핫, 그럼 촬영 재개할까요~”

마침 다음 씬은 아사녀가 담장을 넘어 호위병력을 물리친 뒤, 아사달에게 전할 쪽지를 감은 화살을 쏘는 장면이었다.

군자가 자신있는 액션으로 가득찬 씬.

다음 씬이 액션이라는 말에, 정윤철 주무관도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웃었다.

“흐허허, 액션이라고~ 그게 어디 쉬운 줄 아나.”

모든 배우들이 제 자리를 잡은 뒤, 조감독의 우렁찬 목소리가 촬영 재개를 알렸다.

“카메라 롤, 사운드 스피드-.”

“4씬 3-1-1, 액션—!!”

따아아악-.

슬레이트 소리가 울리자 마자, 아사녀로 분장한 군자가 옷깃을 펄럭이며 담장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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