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의심은 풀어야지
“···그래, 뭐 소꿉놀이 수준은 아닌 것 같네, 흠흠.”
헛기침을 내뱉으며, 정윤철은 민망하다는 듯 턱을 만지작거렸다. 그에게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다. 이런 액션 연기를 소꿉놀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정윤철은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다.
제 아무리 지붕 위를 펄펄 날아다닌다 해도 결국 조회수는 전통의상 영상 쪽이 높게 나올 것이다.
영상 퀄리티와 조회수는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 정윤철 역시 그걸 알고 있었기에 영상의 질을 높이는 쪽보다 파급력 높은 인플루언서를 섭외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고.
“그래도 결국 조회수는 전통의상 쪽이 높게 나올 걸?”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무리 좋은 영상을 찍으면 뭐하나, 올릴 만한 채널이 없는데. 우리는 구독자 몇백만 짜리 인플루언서들이랑 계약을 했다니까?”
“흐음, 그러셨구나.”
“걔네들 채널에서 조회수 높은 건 조회수 천만도 넘게 나와요. 파급력이 장난이 아니라고. 우리 공무원들이 숫자 좋아하는 거 알잖아. 결국 조회수가 최고라니까.”
“아하.”
그러나 공유민은 조회수가 최고라는 말에도 오히려 잘 됐다는 듯 웃었다.
“그럼 더 잘 됐는데요?”
“음?”
“우리 애들··· 아니, 칠린 영상들 조회수가 어떻게 나오는지 아세요?”
“허허, 얼마나 나오는데.”
“저희는 억 단위입니다, 억 단위.”
“무, 뭐라고?”
“사무관님, 어떤 인플루언서랑 계약하셨는지는 모르겠는데요. 아마 그 분들보다 칠린이 훨씬 유명할 걸요?”
억이라는 말에 황급히 유튜브를 검색하며 정윤철은 다시 한번 입을 떡 벌렸다. 공유민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 * *
이후로도 촬영은 순조로웠다. 워낙 복잡한 액션 씬이 많았기에 난항이 예상됐지만, 군자는 모든 액션 씬에서 독보적인 기량을 보이며 빠르게 OK를 받아냈다.
오히려 액션 씬이 아닌 일반 연기 씬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컷! 군자야~ 남편을 그렇게 터프하게 안으면 어떡해~”
“이, 이런 느낌이 아닌가?”
“하하하, 그래~ 지금은 꼭 골 넣고 세레모니 하는 축구선수들 같다고~”
“그랬구나.”
“선비 형아, 오랜만에 거문고 만났을 때 생각해 봐여.”
“아육시 때 말이더냐.”
“넹. 3년 동안 거문고에 손도 못 댔는데, 어느 날 거문고를 다시 만난 거져.”
“그거 참 반갑고도 애틋하겠구나!”
“하하하, 군자 디렉팅은 현재가 해 주는 게 낫겠는데~”
시우와 현재의 부단한 노력으로, 군자의 연기도 조금씩 나아져 갔다.
“자, 식사 왔습니다.”
“우와, 냄새 미쳤네!”
식사는 솔라시스템 측에서 준비했다. 촬영 현장에선 시간을 아껴야 하기에 급하게 도시락이나 김밥, 버거류를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군자가 액션 씬에서 시간을 대폭 절약해 주었기에 모두 여유롭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메뉴는 언양식 불고기를 곁들인 6첩 한식 도시락. 군자가 라이브 방송에서 선보인 요리를 토대로 솔라시스템에서 준비한 도시락이었다.
“세상에···.”
라이브 방송에서만 보던 군자의 요리를 실제로 먹을 수 있다니. 공유민 주무관은 젓가락도 들지 않고 사진만 수십 장을 찍어 댔다.
찰칵, 찰칵—.
“주무관님! 식사 하셔야죠!”
“엇, 태웅 님 대머리 가발 벗으셨네요.”
“네, 잠깐 벗었습니다! 스님 모습으로 언양불고기 먹는 건 좀 그렇잖아요, 푸하핫-.”
“아, 하긴···.”
“아직 안 드셨으면 저기 가서 같이 드실래요? 군자랑 유찬이랑 같이 있는데.”
“그, 그, 그래도 될까요!?”
공유민에겐 꿈 같은 식사시간이었지만 정윤철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솔직히 식사를 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냥 가기엔 냄새가 너무 치명적이었다.
“···내가 언양불고기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솔직히 맛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저 유군자라는 친구의 레시피대로 만든 언양불고기라 들었는데. 아니, 요리까지 이렇게 잘 한단 말인가.
먼 발치에서 해맑게 웃는 군자를 보며 정윤철은 자신도 모르게 아들 생각이 났다. 진짜 여자였다면 우리 집 며느리 삼았으면 참 좋았겠구만···.
하지만 곧 고개를 세차게 가로지으며 엄한 생각에서 빠져나온 정윤철이었다. 며느리는 무슨. 경쟁 프로젝트의 핵심 인력 아닌가. 지금은 견제를 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식사를 마친 정윤철이 커피차에서 받은 아메리카노를 들고 군자의 주변을 기웃기웃거렸다. 마침 군자는 영어 가사가 많은 노래 <몸매>를 들으며 영어공부를 하고 있었다.
[I be like hold up wait a minute girl-.]
“아비와 할아버님 모시고···? 흐음, 제이 팍이라. 효심이 넘치는 분이로구나.”
효심을 담아 가사를 재창조 중인 군자에게, 정윤철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크흠, 유군자 군?”
“예, 안녕하십니까.”
정윤철을 발견한 군자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요즘 어린 친구들 답지 않게 예의 바른 모습에 또 흐뭇한 미소를 지을 뻔한 정윤철이었지만, 웃음은 애써 꾹꾹 눌러 담았다.
“연기 잘 봤어요. 아주 하늘을 훨훨 날아 다니시던데?”
“좋게 봐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이야아, 난 진짜 성룡인 줄 알았다니까. 허허허허~”
“서애 류성룡 선생님 말씀이십니까!?”
“으음?”
“과, 과찬이십니다. 헤헤···.”
군자는 극찬이라도 받았다는 듯 방글방글 웃었다. 정윤철은 어쩐지 군자에게 천천히 말리는 느낌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뭐 어쨌든. 거 몸 쓰는 거 보니까 싸움도 깨나 하셨을 것 같던데.”
“아닙니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 만한 힘만 길렀을 뿐입니다.”
“으허허, 그 정도면 누굴 지키는 게 아니라 전부 때려눕히고도 남겠던걸요.”
“그건···.”
“덩치도 크고, 쌈도 잘하고··· 이거 학창시절에 일진 아니셨나 몰라, 허허허.”
“···.”
“그런 건 조금 민감한 부분인가? 농담입니다 농담, 허허헛-.”
그러나 정윤철의 노골적인 도발에도 군자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일진이라, 군자 역시 그 단어의 뜻을 알았다. 박영제와의 학교폭력 시비가 불거졌을 때 지겹게 들어 왔던 단어니까.
그러나 군자는 장담할 수 있었다. 그도 그랬고, 이 몸의 전 주인도 그랬다. 인간 유군자는 일진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서은우 팀장님께서 그러셨지, 이런 부분은 아이돌에게는 특히 민감하니 오해를 사지 않도록 바로 해명해야 한다고.
아무래도 정윤철 사무관님의 오해를 풀어 드려야겠구나.
켕기는 것 없이 떳떳한 자라면 목소리부터 당당해야 하는 법.
군자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한층 커진 발성으로 정윤철에게 말했다.
“오해가 있으신 듯 합니다. 저는 일진이 아니랍니다.”
“···어어···.”
일진이라는 단어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순간 난처해진 정윤철이었다.
그저 말장난으로 신경이나 긁어 볼 생각이었는데, 이러면 정윤철만 이상한 모양새가 되어 버리니까.
그러나 군자는 오해를 확실히 풀고 싶은 듯 했다.
“저와 함께 가시죠.”
정윤철의 손을 덥석 잡은 군자가 솔라시스템 식구들이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더 모여들었다.
“아니, 이제 괜찮은···.”
“아닙니다. 이런 오해는 확실하게 풀고 가야 합니다. 마침 얼마 전, 박영제라는 친구와 비슷한 시비가 붙은 적이 있었지요.”
“일단 이거 좀 놓고-.”
“당시 저를 도와 주신 회사 분들이 계시니, 공증이 가능할 겁니다.”
일진 논란 앞에서 군자는 더할 나위 없이 단호했다. 정윤철 사무관의 손을 잡고, 군자는 단숨에 서은우 팀장에게까지 걸어갔다.
“군자 씨, 무슨 일입니까?”
“허허허, 아니, 아무 일 아닙···.”
“팀장님, 여기 정윤철 사무관님께서 저를 일진이라고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예?”
사방에서 정윤철을 향한 경멸의 시선이 꽂혔다. 정윤철의 얼굴은 순식간에 시뻘개졌다.
나이 오십 넘게 먹고 스무 살 짜리 애한테 시비나 걸다가 검거된 꼴이라니. 부끄러웠지만 정윤철은 그 상황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팀장님께서 그러셨죠, 일진 논란은 바로바로 해명해야 한다고.”
“예, 그랬었죠.”
“그래서 팀장님께 왔습니다. 제 말은 믿지 않으실 수도 있으니, 바쁘시지 않다면 팀장님께서 직접 해명해 주실 수 있겠는지요.”
“물론입니다.”
한참 손윗사람인 정윤철이었으나, 서은우 팀장의 눈빛에는 경멸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정윤철 사무관님. 어떤 이유로 유군자 씨를 오해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유군자 씨는 일진회가 아닙니다.”
“아, 알겠으니까 이제 좀···.”
“아니요, 저희에겐 중요한 문제인 만큼 확실히 해명하겠습니다.”
“!”
“이 분야에 관심이 없으셔서 모르셨겠지만, 얼마 전까지 유군자 씨는 학폭 논란에 휘말려 있었습니다. 사실은 학폭 피해자였음에도, 오히려 가해자라는 누명을 쓴 채 오랫동안 정신적인 고초를 겪었죠.”
“아, 아아···.”
“다행히 증거를 모아 누명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유군자 씨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운 박영제는 현재 검찰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랬군요···.”
“컨텐츠 일을 하시는 만큼, 이 업계의 큰 뉴스들은 알고 계시리라 믿었습니다만··· 아무래도 흥미가 없으셨나 봅니다.”
“그, 그게···.”
“잘 모르셨다면 의심 같은 것도 안 하셨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그냥 농담이었습니다, 농담.”
“예, 농담도 못 받는 재미없는 인간이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일진, 학폭 문제는 저희의 입장에선 결코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라서요.”
정윤철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며 땀만 삐질삐질 흘렸다. 괜히 시비를 걸었다가 본전도 찾은 셈이었다.
“···예, 죄송합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하며 정윤철은 축 쳐진 어깨로 돌아섰다. 불꽃처럼 정윤철을 몰아붙이던 서은우 팀장은, 한결 다정한 눈빛으로 군자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잘 하셨습니다, 군자 씨. 앞으로도 이런 의심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제게 데려오세요. 그럼 제가 혼···.”
“혼?”
“혼··· 신의 힘을 다해서 해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별 반박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선, 정윤철 사무관의 의심은 확실히 풀린 듯 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 아닌가. 확 착해진 정윤철을 보며, 군자가 인자하게 웃었다.
* * *
“수고하셨습니다—!!”
“넵, 다들 수고하셨습니다아아—!!”
식사 시간 후에 이어진 촬영 역시 무탈하게 끝났다. 이제 남은 촬영은 2회차. 처음 하는 연기가 쉽지 않은 군자였으나, 그래도 하면 할수록 재미와 매력이 느껴졌다.
“현재야, 나의 연기가 어떠했느냐?”
“뭘 어때여, 아직도 발연기지.”
“무어라? 그래도 마지막엔 조금 나아졌다고 했거늘···.”
“그거야 시우 형아가 촬영 빨리 끝내려고 우쭈쭈 해 준 거지.”
“시우야, 시우야! 현재의 말이 사실이더냐!”
“아하하하하하~”
“왜 웃기만 하는 것이냐!”
“아하하하하하하하~”
“푸하하학, 솔직히 군자 너 진짜 발연기긴 해.”
동료들의 맹비난에 군자의 두 어깨가 축 쳐졌다. 그래, 아무래도 연기는 더 많은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겠구나.
숙소로 돌아간 군자가 SNS를 열었다. 낮에 쓰지 못한 SNS를 마저 쓰기 위함이었다.
“어? 형아 SNS 쓸라구여?”
“그래, 아까 쓰지 못했으니. 팬 분들이 기다리실 테다.”
“좋아여. 그런 자세 좋은데, 또 무슨 발··· 어쩌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단어 쓰지 마여.”
“하하, 걱정 말거라. 이제 발기는 안 할 터이니.”
“아오, 그 단어 좀 쓰지 말라거여!”
“뭐? 군자가 뭘 안 한다고? 군자, 영 좋지 못한 곳을 공격당한 거야?”
“군자라니, 내가 군자라니!”
“푸하하하하학-.”
정신없이 떠드는 동료들을 뒤로 하며 군자가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낮에 찍어 놓은 예쁜 아사녀 셀카와 함께.
“군자··· 발연기··· 이쁘게 봐 주세요···.”
첫 번째 문장부터 줄이고.
“여자··· 군자···.”
두 번째 문장도 줄이고.
그렇게 SNS 포스트를 작성한 뒤, 해맑게 웃는 얼굴로 업로드 버튼을 누른 군자였다.
“이제 됐구나!”
[(사진)]
[#군발이]
[#여군]
다음 날, 멤버들과 팬들이 발칵 뒤집어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