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우리 친해져요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신분 상승의 기회는··· 바로 ‘신분 연합 배틀’입니다!”
‘신분 연합 배틀’이라는 용어에 많은 참가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분’과 ‘배틀’은 감이 왔지만, ‘연합’은 예상하지 못했던 단어였기에.
그 부분을 설명하겠다는 듯, 정해진이 말을 덧붙였다.
“<다이너스티>의 첫 번째 본선은 연합 배틀입니다. 같은 신분을 가진 팀끼리 연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무대를 만들어 내는 겁니다. 연합 배틀에서 상위 신분보다 좋은 무대를 펼친 팀은 한 계단의 신분 상승이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하위 신분에 비해 안 좋은 무대를 보여준 팀들은 신분이 하락하게 되겠죠?”
정해진의 말이 끝나자 마자 사방에서 웅성거림이 시작됐다.
“한 계단 신분상승이 가능하다고? 그럼 이 따가운 방석이랑 작별할 수 있는 거야?”
“상승은 한 계단씩만 가능하지만, 하락은 몇 계단이라도 가능한가 봐여.”
“올라가는 팀이 있으면 떨어지는 팀도 있어야지.”
“그러면 채점은 어떻게 하는 거지? 또 우리끼리 하나? 그럼 너무 불리한 거 아냐?”
채점에 대한 궁금증이 제기된 순간, 정해진이 말을 이어갔다.
“사전 경연은 오직 여러분들의 평가로만 채점됐습니다만, 이번에는 새로운 평가 시스템이 도입될 예정입니다. 다이너스티 캐슬 주민 여러분들의 평가 30%, 전문가 평가 30%, 마지막으로 400명의 글로벌 방청객 평가 40%. 이렇게 세 집단의 평가를 종합하여 나온 점수로 여러분들의 새로운 신분이 결정됩니다.”
“Whoa—!!”
이번엔 노예 계급 가디언즈 멤버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자체 평가만으로 노예 계급을 배정받은 것이 꽤나 억울했던 모양인지, 그들은 빗자루까지 들고 흔들며 고함을 질러 댔다.
“Whoo—!! Whoo—!! Whoo—!!”
“Guardians, Vamos—!!”
가디언즈처럼 호들갑을 떨진 않았지만 7IN 멤버들 역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방청객과 전문 평가단이 합세한다면 아마 훨씬 객관적인 결과가 나올 테다. 가디언즈와 마찬가지로, 7IN 역시 사전 경연의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번엔 무조건 평민까지는 가야져.”
“당연히 그래야지.”
“저 친구들이랑 연합을 해야 한다는 게 조금 걱정되긴 하는데···.”
그렇게 말하며 현수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가디언즈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가디언즈 멤버들은 지푸라기 방석을 부메랑처럼 던지며 놀고 있었다.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은 것이 세상 행복한 것 같아 보였다.
“1차 경연까지 남은 시간은 열흘입니다. 앞으로 열흘 동안, 같은 신분으로 묶인 팀끼리 합심하여 경연 무대를 준비하시면 됩니다.”
“네!”
모두의 대답은 우렁찼다. 이제는 경연만 준비하면 될 것 같았지만, 정해진의 설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모든 신분이 동일한 조건에서 경연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
“다이너스티 캐슬엔 작곡, 편곡, 녹음, 트레이닝을 위한 모든 시설이 완비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시설의 퀄리티는 신분에 따라 달라집니다. 높은 신분일수록 훌륭한 시설을 사용할 수 있겠죠.”
멤버들은 가지가지 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개똥 같은 숙소 줬을 때부터 이 정도는 예상했지.”
“연습실이야 뭐··· 거울 하나만 있으면 어디든 괜찮으니까여.”
허나 차등대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또한, 식사 역시 차등 제공됩니다. 최고 신분인 왕족에게는 전용 조리사 군단이 배정됩니다. 이들은 왕족만을 위한 인력으로, 언제든 왕족이 원하는 최상급의 요리를 제공할 예정입니다.”
“우와아아—.”
탄성과 함께 모두가 벨로체 쪽을 쳐다보았다. 정작 벨로체 멤버들도 이 정도의 특혜를 받을 줄은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귀족들에겐 전용 조리사가 배정되진 않습니다만, 상등품의 식재료로 만든 맛있는 식사를 매 끼니 제공합니다. 평민, 노예로 내려갈수록 식사의 퀄리티 역시 달라지겠죠.”
신나게 날아다니던 가디언즈의 지푸라기 방석은 어느새 모두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식사의 퀄리티를 차별한다는 말에 가디언즈 멤버들은 맥이 빠져 버린 것 같았다.
“와, 밥 가지고 치사하게···.”
“이건 너무한 거 아니에여 진짜?”
“더러우면 신분상승 하라 이거지 뭐.”
그렇다면 대체 노예의 밥상은 어떤 느낌일까.
멤버들이 궁금해 하는 사이, 정해진이 신분제의 마지막 조건 하나를 발표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귀족 이상 계급의 참가자들은 노예를 부릴 수 있습니다.”
“···예?”
“왕족과 귀족들은 노예 참가자들에게 일상적인 심부름, 연습 도우미, 청소 도우미 등 간단한 노역을 부과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물론, 도를 넘는 노역은 제재의 대상이 됩니다.”
이를테면 쭈그려 앉아서 의자 대용품이 되라든지, 숙소 화장실 청소를 하라든지, 그런 비인도적인 노역은 안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참가자들의 심부름꾼이 된다는 것은 전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노예를 부릴 수 있다는 이야기에, 유독 귀족 계급의 팀들이 기뻐 보였다.
피호우캄이 소속된 테이보는 기쁨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SHINO는 생글생글 웃으면서도 종종 7IN 멤버들의 눈치를 보며 양 손을 모아 합장하듯 인사를 건넸지만, 7IN 멤버들의 눈에는 그 모습이 더 가증스러워 보였다.
“사과하는 거야 뭐야···.”
“쟤네가 우리 노예로 만든 애들 아니에여?”
“아마 그렇겠지.”
신난 귀족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멤버들이었다.
MC 정해진의 마무리 멘트와 함께 설명 시간은 끝났다. 사전 세팅과 마찬가지로 뒷정리 역시 노예 멤버들의 차지였다.
“짜요—!!”
“크헤헤헷.”
“가, 간바레!”
대놓고 웃으며 ‘힘내’라고 말하는 중국 아이돌들이나, 가증스런 미소를 지으며 앙큼하게 두 주먹을 쥐어 보이는 일본 아이돌들이나, 맘에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안되겠다 이거.”
“일단 무조건 노예부터 탈출하져.”
최단시간 안에 신분 상승을 노린다. 그것이 7IN 멤버들의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신분 상승을 위해서는···.
“We are not a Fxxking SLAVE!”
“Let’s go to the god damn palace!”
“Let’s cut off the king’s head!”
“Whoo—!! Whoo—!!”
일단 이 미친 친구들과 먼저 가까워져야 할 것 같다.
* * *
뒷정리는 이미 아까 끝났지만 가디언즈 멤버들은 노예 숙소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작진이 직접 제재를 가하기 전까진, 이곳 메인 홀에서 조금이라도 더 놀다 갈 생각인 것 같았다.
빗자루로 기타를 치며 입으로 일렉기타 소리를 내더니, 어느새 그 빗자루를 타고 퀴디치를 하고.
퀴디치를 시작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필드 하키로 종목을 바꾸었다가, 다시금 빗자루를 타고 홀 이곳저곳을 폴폴폴 날아다니며 괴성을 지르는 가디언즈 멤버들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군자는 연신 혀를 내둘렀다.
“나도 독특하기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해 왔다만···.”
“저 분들은 차원이 다르신데여.”
나름 인싸미를 담당해 왔던 현재마저 그 광기 앞에서는 기가 죽은 것 같았다.
모두가 쭈뼛거리고 있는 가운데, 놀랍게도 먼저 나선 것은 멤버들 중 가장 과묵한 인혁이었다.
“Hola.”
“O, Hola mi amigo!”
“Como estas?”
“No es bueno~”
인혁은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 가며 가디언즈 멤버들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인혁의 입에서 스페인어가 튀어나오자, 정신 사납던 가디언즈 멤버들도 인혁과 손을 맞잡으며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저, 저거 스페인어 아님여?”
“맞는 것 같은데···.”
“거 봐. 저 형 그거 맞다니까, 멕시코 갱단.”
그렇게 한참 가디언즈 멤버들과 대화를 나눈 뒤, 인혁이 7IN 멤버들 사이로 돌아왔다.
“아니, 형 스페인어는 언제 배웠어요?”
“솔직히 말해 봐요. 형 멕시코 갱 맞죠?”
“···아니야. 미국 고등학교에선 스페인어가 필수다.”
“쓰읍,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한데. 암튼, 저 분들이 뭐라셔요?”
“같이 놀고 싶어 한다.”
“에? 지금여?”
“지금부터 빗자루 UFC를 할 건데, 원하면 언제든 참여하라고···.”
“빗자루 UFC? 그게 뭔데여?”
“그건 나도 모르겠다.”
그러나 멤버들은 머지않아 빗자루 UFC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가디언즈 멤버들이 빗자루를 몽둥이처럼 들고 서로를 폭행하기 시작했으니까.
“꺄하하하학—.”
“Hey, Fxxk you!”
웬만한 놀이였다면 은근슬쩍 끼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빗자루 UFC는 결코 호락호락한 놀이가 아니었다. 어디서 술이라도 한 잔 마시고 오지 않는다면 이들의 텐션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와, 진짜 정신없이 노는 분들이시네···.”
그러나 군자는 어째서인지 가디언즈 멤버들이 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허나 지킬 것은 지키는 분들이지 싶구나.”
“에? 어딜 봐서여?”
“저렇게 천방지축으로 노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법규’를 부르짖는 것을 보아라.”
“버, 법규?”
“저 무질서 속에서도 본인들 사이의 법규가 분명히 존재함이야. 법규를 소중히 하는 분들이지 않은가.”
“그건 법규가 아니라 다른··· 에이, 됐다.”
그 사이 가디언즈 멤버들은 또 다시 종목을 바꿨다. 빗자루 UFC가 질린 것인지, 이번엔 양철 쓰레받기를 카혼(페루 지역의 리듬악기) 삼아 두들기기 시작했다.
챙, 두둥, 채앵—!!
그 산만한 와중에도 리듬은 절로 어깨를 움직이게 할 만큼 좋았다. 흥이 오른 가디언즈 멤버 한 명이 비트박스를 시작하자 음악은 더욱 풍성해졌다.
그 때까지만 해도, 7IN 멤버들은 모두 쭈뼛거리며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군자가, 물에 담근 인삼처럼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며 가디언즈 멤버들에게로 다가가기 전까지는.
“예의, 예의.”
“Oh, Oh, Come on—!!”
“예의, 예의, 예의—.”
“Yeah—!!”
가디언즈 멤버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군자가 무대 중앙에 섰다.
넘치는 흥이 그의 발걸음을 이끌었지만, 군자에겐 책무가 있었다.
물과 기름 같은 두 집단을 자연스레 어우러지게 만들어야 한다. 물과 기름이 힘을 합해야 이 썩을 신분제를 극복할 수 있단 말이다.
비트박스가 만드는 리듬을 느끼며, 쓰레받기 카혼 소리에 발 박자를 맞추며.
군자가 천천히 머릿속에서 벌스를 짜맞추어 나갔다.
이 자유주제즉석시조낭송(自有主題卽席時調朗誦)의 첫 구절은 무엇보다 이 분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할진저.
그래, 이 분들이 노는 것을 유심히 보고 들어 놓기를 잘했구나.
난 이미 이 분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마침내 열린 군자의 입에서, 짧고 강한 첫 단어가 우렁차게 튀어 나왔다.
“법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