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오늘만큼은 나쁜 선비
텅 빈 메인 홀을 천천히 거닐며, 군자는 일본 친구들이 내뱉던 정체불명의 가사를 곱씹고 있었다.
처음엔 분명 화자(花者)였지.
이건 알겠다. 화자, ‘꽃 같은 이’라는 뜻 아닌가. 또는 화자(話者), 말하는 이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그 다음으로 나온 가사는 마자(魔者).
앞선 가사인 ‘꽃 같은 이’와 반하는, ‘마귀에 사로잡힌 이’라는 의미다.
이러한 가사의 나열을 통해, 무언가 대비되는 의미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갔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영어가 나오면서부터 의미가 꼬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군자도 영어를 조금은 안다. ‘And’, ‘My’, ‘Big’ 같은 단어들은 기초 중에도 기초이니 못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부라자’는 대체 무엇인가.
“···부라자, 마이 빅 빅 부라자라···.”
직역한다면 ‘나의 크나큰 부라자’.
앞선 단어들은 이해했으나 정작 중요한 핵심어의 뜻을 모르니 답답할 뿐이었다.
“흐음, 도통 감이 오질 않는구나.”
그렇게 한참을 부라자 부라자 거리면서 메인 홀을 서성거리자, 어느새 7IN 멤버들이 호다닥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야, 너 여기서 뭐 해!”
“아아, 마침 잘 왔다.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생겨 버린 참이거든.”
“어?”
“부라자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더냐?”
“얌먀—!!”
태웅이 군자의 입을 텁 하고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인혁을 제외하면 멤버들 중에서도 가장 힘이 센 것이 군자였으니까.
기어이 입마개를 뜯어 낸 군자가 다시 문제의 단어를 입에 담았다. 군자는 일단 한 번 생긴 궁금증을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왜? 왜? 대체 부라자가 무엇이길래?”
“그 단어 좀 쓰지 말라니깐!”
“네가 그러니 더욱 궁금하잖느냐.”
“알았어, 알았어, 설명해 줄 테니까 일단 그 단어 좀 쓰지 말아 봐.”
“그래, 알았다. 나는 뜻만 알면 된다.”
“휴우, 그럼 이제 진정 좀···.”
겨우 군자의 호기심을 진정시킨 줄 알았지만, 때 이른 방심이었다.
“아, 그리고 ‘빅 부라자’라는 단어도 궁금했다.”
“아오, 진짜로—!!”
“직역하면 큰 부라자라는 뜻 아닌가?”
“고만 하라니까 임마!”
“흐음, 부라자라는 것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 모양이지?”
“혁이 형, 얘 좀 기절시켜 봐요!”
결국 허둥지둥 달려온 인혁까지 합세한 뒤에야 군자를 진정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강당 의자에 묶이듯 포박당한 군자의 눈은 여전히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뭐 이렇게까지 호들갑들을 떠느냐. 설마 SHINO 분들이 가사에 그렇게 몹쓸 단어를 넣었으려고.”
“군자, 네가 들은 게 확실히 그 단어가 맞아?”
“그래. 분명 부라···.”
“아오, 쫌—!!”
인혁이 군자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사이, 현재와 현수가 문제의 단어를 설명해 주었다.
읍읍거리며 발버둥치던 군자는 단어의 뜻을 듣더니 급격하게 안정을 찾아 갔다.
“···아뿔싸···.”
“그래여, 이제 우리가 왜 오바 육바 했는지 알겠어여?”
“···나는, 나는 그런 단어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 이 자식아, 여기 카메라도 이렇게 많은데 왜 그런 걸 중얼중얼 하면서 걸어다니고 있는 거야.”
“나는 그저 SHINO가 가사에 그런 단어를 넣었기에, 그 뜻을 유추해 보느라···.”
“근데 좀 희한하네. SHINO 분들이 정말 그런 가사를 썼다고여?”
“정말이다! 내가 왜 이런 것으로 거짓을 말하겠느냐.”
“아무래도 직접 한번 들어 봐야겠어.”
“그래, 따라오거라.”
그렇게 군자를 따라간 멤버들은 곧 SHINO의 연습곡을 들을 수 있었다.
“무친···.”
“지, 진짜 부라잔데여?”
잠시 웃음을 참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눈치 빠른 현수가 금세 ‘부라자’의 의미를 알아챘다.
“이거 가족에 대한 노래인 것 같은데?”
“가족?”
“화자는 Father, 마자는 Mother. 빅 부··· 그래, 그건 Big Brother. 단란한 4인가족을 소재로 한 노래 아닐까?”
“나도 그게 맞는 것 같아여. 발음 때문에 좀 위험하게 들리긴 하지만···.”
“가디언즈 애들이 왜 SHINO 약점을 영어로 지적해 줬는지 알 것 같기도 하네.”
“무튼 유군자, 괜히 돌아다니면서 이상한 논란 만들지 말고 얌전히 좀 있어! 알았지?”
군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괜히 SHINO의 모습이 걸렸다.
사실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만약 저렇게 무대에 오른다면 분명 많은 논란을 만들 터인데.
괜한 오지랖이 발동한 군자가 통역사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혹시 통역 한 번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어떤 통역이요?”
“일본 팀 SHINO에게 전달하고픈 말이 있어서···.”
“좋아요, 갑시다.”
흔쾌히 군자를 따라나선 통역사와 함께, 군자는 SHINO의 연습 장소로 향했다. 연습을 마친 SHINO 멤버들은 자리에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 소리 사이에서 군자와 7IN의 이름이 들리는 것 같았다.
“으음···?”
일본어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SHINO 멤버들의 표정은 평상시와 달랐다. 7IN 멤버들 앞에선 항상 사근사근하던 모습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적의에 가득 차 있었다.
유쿤자 어쩌고 저쩌고. 칠린이 어쩌고 저쩌고.
군자는 문득 그들이 무슨 말을 나누는지 궁금해졌다.
“선생님, 지금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통역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나 통역사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 그게, 흐음···.”
“그다지 좋은 뜻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건 압니다.”
“!”
“저 분들 표정이 이미 말해 주고 있으니까요.”
“하하, 확실히 좋은 말은 아니긴 한데···.”
“말씀해 주십시오.”
“유군자 그 자식, 난 척 하는 거 꼴불견이다. 마음에 안 든다.”
“···.”
“이럴 줄 알았으면 노예였을 때 어떻게든 부려먹는 건데···.”
“···.”
“이번엔 절대로 잘할 수 없는 미션을 줬으니, 아마 스스로 무너져 내릴 거다··· 라고···.”
“···.”
대충 예상은 했지만 현실은 군자의 상상 이상이었다. 7IN 멤버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SHINO는 7IN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통역사는 통역을 마친 뒤에도 괜히 군자가 걱정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군자 씨, 괜찮아요?”
“예, 괜찮습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군자는 괜찮다는 듯 싱긋 웃었다.
앞뒤 다른 SHINO의 태도가 실망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진정한 선비라면, 상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면전에서 그것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상대가 평민이든, 사대부든, 심지어 왕이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모두가 훌륭한 선비인 것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대쪽 같은 성품을 보이는 이들도 있으나, 간사하게 제 속내를 숨기고 협잡을 일삼는 이들도 있었다.
군자 역시 이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뒤에서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SHINO 멤버들의 자유 아닌가.
굳이 통역사까지 대동하여, 이 곳에서 그들의 뒷담화를 우연히 들었다 한들 그것을 SHINO의 잘못이라 하여 책망할 수는 없는 법이다.
SHINO는 SHINO, 유군자는 유군자.
나는 그저 지금 이 순간 내가 옳다고 생각한 행동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군자가 통역사를 돌아보았다. 군자가 여기에 온 목적은 뒷담화를 듣기 위한 것은 아니었으니. 그 역시 SHINO에게 할 말이 있었다.
“선생님, SHINO 멤버 분들에게 말씀 좀 전해 주시겠습니까.”
“아··· 네, 어떤 말을.”
잠시 호흡을 고르던 군자가 SHINO에게 전할 말을 전달했다.
“여러분들의 영어 발음···.”
“?”
“너무 훌륭하다고.”
“아하.”
“3차 경연, 정말 기대하고 있다고 전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통역사는 살짝 감동받은 표정으로 SHINO를 향해 갔다. 물론 군자가 하려던 말은 그런 칭찬이 아니었으나, 이젠 군자도 어쩔 수 없었다.
“섭섭하구나, 섭섭해.”
귀족 숙소로 돌아가며 군자는 댓발 나온 입술을 연신 삐죽거렸다. 뒷담화를 죄라 할 순 없지만, 뒷담화 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진 않은 군자였다.
“나는 아직 성인군자가 되려면 멀었나 보구나···.”
안타까운 듯 중얼거렸으나, 이상하게 가슴 속에선 약간의 통쾌함이 일었다.
정진하고 또 정진해야지. 하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돼먹지 못한 선비가 되련다.
그렇게 생각하며 군자는 총총걸음으로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 * *
<다이너스티> 3차 경연 방청을 위한 방청권 추첨도 엄청난 경쟁률을 자랑했다.
행운의 상징인 연지였지만 그 동안 유독 <다이너스티> 방청과는 인연이 없었다. 지금까지 계속 추첨에 참여했으나 단 한 번도 당첨된 적이 없었으니까.
“이제 내 운도 다 한 것인가···.”
어느새 옮은 군자의 말투로 연지는 장탄식을 내뱉었다. 하긴, 사실 지금까지만 해도 계를 10번은 탄 수준의 행운을 누렸으니 할 말은 없었다.
무명 시절 군자와 같이(완벽하게 같이는 아니지만) 사진도 찍고, 그 군자를 다시 만나기도 하고, 아육시 시절엔 방청도 몇 번 갔다. 이 정도면 7IN 팬의 입장에서 연지는 거의 로또 연속당첨 급 럭키인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연지는 아직도 배가 고팠다.
최애의 얼굴은 봐도 봐도 더 보고 싶은 법이다. 게다가 최근엔 다이너스티 캐슬에 있느라 라이브 방송 같은 컨텐츠도 없었으니 더더욱 군자를 보고 싶었다.
“제발, 제발 당첨···.”
그 동안 착하게 살아 온 덕일까.
그렇게 어렵다는 방청권 당첨이 다시 한번 연지를 찾아왔다.
“앗—싸아아아아——!!”
다시 한번 7IN과 군자를 직접 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인생의 모든 번뇌가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연지였다. 수능을 망친 것도 이 행운을 위한 빌드업 같이 느껴졌다.
“엄마! 나 이럴라고 수능 망쳤나 봐!”
엄마는 탄식만 내뱉으며 쇄골 아래를 주먹으로 콩콩 때렸지만, 괜찮다. 그래도 평소엔 세상 누구보다 착한 딸인 연지였으니까.
“엄마, 너무 실망하지 마! 똑똑한 냉혈인간보다 좀 멍청하지만 사랑을 아는 착한 딸이 더 좋잖아!”
그렇게 엄마에게 엉터리 궤변을 던져 놓고, 불속성 효녀는 다이너스티 캐슬로 향했다. 처음으로 본 웅장한 세트와 공연장, 연지는 완전히 압도돼 버렸다.
“우와···.”
이 공연장에서 군자와 7IN은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사실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다. 그런데 무대까지 볼 수 있다니. 과연 이번엔 어떤 컨셉의 어떤 무대를 준비했을지 벌써 기대가 되는 연지였다.
그 동안 쌓아 온 서사가 있으니 이번에도 웅장한 무대를 준비했겠지.
어느 정도 예상은 됐다. 사실 귀염뽀짝하고 소년 같은 군자의 모습도 좋아하는 연지였기에 내심 그런 무대를 기대하기도 했지만, 이미 기대는 접은 상태였다.
그래도 경연인데, 잘하는 걸 하는 게 맞지.
어떤 무대가 나오든 난 행복할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연지는 가져온 응원봉을 열심히 흔들었다. 밋밋한 두어 개의 무대가 물 흐르듯 지나가고, 마침내 7IN의 차례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