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덕후가 계를 너무 잘 탐
여고생 연지는 등산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 왔다. 적어도 군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덕후의 인생은 최애의 취향을 따라 변화하는 법. 군자의 끝없는 요산요수(樂山樂水, 산과 물을 사랑함)에, 연지의 관심사도 천천히 변해 갔다.
군자가 이토록 미쳐 있는 산이란 대체 어떤 곳일까?
호기심이 생겼으나 막상 산에 가려고 하니 겁부터 났다. 군자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긴 했지만, 군자의 취향을 따라 산에 갈 만큼의 진성 덕후는 연지 뿐이었다.
그렇다고 팬 커뮤니티에서 모집하는 산악회에 참가하기도 민망했다. 팬 커뮤니티에서 꽤나 인싸 역할을 하던 연지였기에, 막상 산악회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덕심이 부족하다며 뒷담화를 당할 것만 같았으니까.
결국 연지의 선택은 부모님이었다.
“엄마, 아빠. 주말에 등산 가는 거··· 나 따라가도 돼?”
“아유, 당연히 되지!”
부모님은 당연하다는 듯 연지의 동행을 반겼다. 그 때까지만 해도 연지는 그저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러나 막상 시작한 등산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일단 새벽 6시에 일어나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부모님과 함께 작은 도시락을 싸고, 따뜻한 차가 담긴 텀블러를 챙기고, 각자 등산복과 등산화, 등산용품까지 점검했다.
오늘만큼은 초보자인 연지를 위해 야트막한 등산로를 선택한 연지네 가족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준비만큼은 철저히 했다.
“연지! 신발 아무거나 신으면 안된다.”
“으으, 이건 좀 무거워서 싫은데.”
“그래도 산에선 등산화 신어야 돼.”
덕분에 새벽부터 기운이 빠져 버린 연지였다.
원래 주말에는 7IN 유튜브 채널 보고, 군자 개인 SNS 보고, 트위티 피드 좀 보고, 커뮤니티에서 재미있는 댓글 보면서 낄낄대다가 새벽 5시쯤 잠드는 것이 루틴이었는데, 새벽 6시부터 기상이라니···.
게다가 부모님은 자차를 탈 생각도 없어 보였다. 등산 가는 날엔 버스 타는 것부터가 준비운동이라나 뭐라나. 덕분에 연지는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며 손잡이 기둥에 연신 박치기를 해야 했다.
“푸하핫, 얘 진짜 졸린가 보네.”
“연지야, 군자 오빠가 보고 있어.”
“히이···.”
“그 오빠도 산 좋아한다며. 여기서 좌절하면 되겠니?”
“아니이···.”
애써 마음을 다잡아 보는 연지였으나 새벽 등산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다닥 등산로 맛만 보고, 사진이나 몇 장 찍고 내려오려 했지만 연지의 부모님은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문제는 등산로 입구 언저리에 새로 생긴 식당이었다.
“어? 여기 공사하는 것 같더니, 식당이 생겼네?”
“그러게. 되게 깔끔하게 잘 해 놨다~”
“배도 좀 출출한데 도토리묵이나 한 접시 하고 갈까 여보?”
“좋지. 등산 왔으면 도토리묵이랑 감자전은 먹어 줘야 된다고.”
“에엥?”
“연지야, 도토리묵 먹자!”
“드, 등산 하러 온 거 아니었어?”
“얘가 뭘 모르네. 도토리묵까지가 등산인 거야.”
“에에엥? 왜? 어째서?”
연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이었지만, 부모님은 연지가 거절 의사를 밝히기도 전에 <북한산 둘레집>으로 총총총 발걸음을 옮겼다.
“아, 나 묵 싫은데에.”
“그럼 콩국수 먹으면 되지~”
“콩국수도 좀···.”
“어휴, 넌 다 큰 애가 입맛이 왜 아직도 그렇게 초딩 같니?”
그냥 빨리 산이나 가고 싶은데···.
잔뜩 튀어나온 입으로 가게에 들어선 연지는 자리에 앉자 마자 유튜브 동영상을 틀었다. 군자를 중심으로 7IN 멤버들이 모두 등장하는 제이라이브 클립이었다.
부모님은 ‘또 유튜브 보냐’며 핀잔을 줬지만 연지는 괘념치 않았다. 언제 어디서든 군자의 얼굴만 보면 금방 기분이 전환되는 연지였으니까.
“어이고, 아주 결혼을 해라.”
“헐, 엄마! 결혼할 수 있으면 당장이라도 하지!”
“군자 걔가 그렇게 좋아?”
“응, 너무 너무 좋아.”
“뭐가 그렇게 좋은데? 엄마도 입덕 좀 시켜 주라.”
“으음, 너무 많은데. 잘생겼고,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노래도 잘하고, 랩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완전 다재다능하고, 활도 잘 쏘고, 운동도 잘 하고, 미친 웃수저고, 피지컬도 완전···.”
“손님! 저는 별로에여?”
“아이, 현재도 너무 좋치으아아앙으아아앜——!?!?!?”
메뉴판을 들고 불쑥 나타난 현재를 보며, 연지는 하마터면 뒤로 벌러덩 나자빠질 뻔 했다. 뒤에서 누군가가 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부끄러운 꼴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터억—.
하지만 커다란 두 손이 연지의 의자를 덥석 잡아 세웠다. 이어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스마트폰 속에서만 들을 수 있었던 목소리가 연지의 이름을 불렀다.
“연지 님.”
“—!?”
“오랜만입니다.”
“——!?!?”
“이렇게나 자주 마주치다니··· 아무래도 우리는 인연인가 봅니다, 하하.”
“———!?!?!?”
연지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아니, 아니 이게 대체 뭔데. 별로 먹고 싶지도 않았던 도토리묵 식당에 들어와서 유튜브나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얀 셔츠 입은 현재랑 앞치마 두른 군자가 뿅 나타난다고?
이건 꿈이다. 꿈이 분명했다. 꿈이 아니고선 이렇게 비현실적일 수는 없는 거다.
그러나 식탁 다리에 찧은 정강이가 너무 아팠다. 게다가 꿈이라고 하기엔 두 사람의 얼굴이 너무도 선명하고 생생했다.
“···구, 군···.”
“예, 저 맞습니다.”
“···여, 여, 여기에 오, 왜···.”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래도 연지 님을 뵙기 위해 이러고 있었나 봅니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애써 눈물을 꾹꾹 삼키며 미소를 지어 보이는 연지였다.
아침이라 쌩얼로 나온 것도 부끄러워서 미칠 것 같은데, 그 얼굴로 펑펑 울기까지 했다간 아마 사람 꼴이 아니게 될 거다.
하지만 군자는 그런 연지의 마음까지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분을 바르지 않아도 눈이 참 옥석같이 초롱초롱하십니다.”
“···그, 내, 내 모습을 기억하···.”
“물론이지요. 저는 기억력이 아주 좋습니다. 게다가, 함께 사군자를 찍었던 1호 팬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 헤헤, 하하핳—.”
“연지 님은 제게 참으로 의미 있는 분이십니다. 처음으로 생긴 팬이니까요. 원하는 메뉴를 골라 보세요. 오늘은 제가 한 턱 내겠습니다.”
“하헿핳핳히하—···.”
꿈보다 더 꿈 같은 현실에 연지는 그저 바보처럼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씩 서빙되는 메뉴를 바라보며 연지는 뭔가에 취하기라도 한 듯 헤헤 웃었다.
나는 전생에 이순신이나 세종대왕이었음이 분명해. 그게 아니고선 이렇게 미친 계를 계속 탈 수는 없는 거라고.
겨우 정신을 차린 연지가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아버지.”
“으음?”
“소녀, 앞으로 불같은 효녀가 되어 보렵니다.”
“그, 그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역시 부모님 말씀 잘 듣는 것이 인생 성공의 지름길이다. 도토리묵 식당에 와서 최애를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
“냠, 냠—.”
“연지야, 천천히 먹어 천천히.”
“하지만 너무 맛있습니다아.”
“···그 존댓말 너무 오그라드는데 어떻게 안되겠니···.”
심지어 음식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맛있었다.
최최밥밥, 최애는 최애고 밥은 밥이지. 아무리 최애인 군자가 만들었다고 해도 혀끝까지 군자의 팬일 리는 없었다. 그 어떤 신체부위보다 대쪽 같은 지조와 절개를 가진 연지의 혀였다.
그러나 <둘레집>의 음식은 그 냉정하고 객관적인 혀마저도 함락시켰다.
맛있다, 하루종일 먹어도 될 만큼 맛있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맛있지? 연지는 감격의 눈물을 줄줄 흘리며 연신 숟가락과 젓가락을 놀렸다.
“여, 연지야. 혹시 눈물로 간 맞추니?”
“이토록 완벽한 음식에 어찌 간을 더한단 말씀입니까···.”
감동의 식사 시간이 끝난 뒤, 연지는 마지막으로 군자를 비롯한 7IN 멤버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머물며 멤버들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곧 바빠질 식당 영업에 행여나 방해가 될까 걱정이었다.
“SNS 절대 안 올릴게요! 스포 절대 금지! 맞죠? 어, 어어, 음식! 너무 너무 맛있었어요! 그리고 다들 너무 잘생기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진짜 꿈 같았어요. 진짜 진짜 태어나길 잘한 것 같아요. 저 이제 효도도 많이 하고, 등산도 많이 할 거예요! 그, 다,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근데 지금까지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요! 저는 진짜 전생에 덕을 많이 쌓았나 봐요! 사, 사, 사랑해요!”
폭풍 같은 인삿말을 남긴 채, 군자의 1호 팬 연지는 <둘레집>을 떠났다. 팬을 대하는 군자의 모습을 보며, 양홍석 PD와 연출진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크으, 이게 아이돌의 팬 관리인가 봐요.”
“진짜 저렇게 한번 영업당하면 빠져나올 수가 없겠는데요.”
“군자 씨, 데뷔한 지 1년도 안 됐는데 완전 프로페셔널한데요.”
“흐음, 그런가?”
“왜요? 피디님이 보기엔 별로였어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보기엔 영업 같은 게 아니고 다 진심 같았거든.”
“아아···.”
양홍석 PD의 말대로였다. 이제 아이돌 2년차에 접어든 군자였지만, 그는 아직도 누군가에게 가식을 떠는 법을 몰랐다.
연지에게 했던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모니터 너머로 그 진심을 확인한 양홍석 PD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친구들은 그냥 찍기만 해도 대박 나겠네.”
“어어? 피디님, 설마 날먹 하시려고요?”
“어허어, 날먹이라니. 좋은 출연자를 만난 것도 다 피디 복 아니겠어?”
“아니죠! 다 작가진의 피땀 흘린 섭외 작업이 있었으니까!”
“음? 피땀 흘린 섭외? 양심 어디? 전화 한 통으로 바로 섭외한 걸로 아는데?”
“그, 그 전화 한 통이 얼마나 떨렸는데요!”
“그래 그래, 그럼 우리 모두의 복이라고 치자.”
양홍석 PD의 말대로, 7IN은 <맛집메이커> 현장의 복덩이가 되어 있었다.
오픈 전 사전 작업을 완벽하게 연습해 온 것은 물론, 일곱 멤버가 각자의 파트에서 완벽하게 역할을 수행해 내며 몰려오는 손님들을 소화해 냈다.
“우와, 우와, 우와아아—!!”
“칠린이야! 미쳤어어—!!”
젊은 손님들은 대부분 소년들을 알아보았다. 홀 서빙 담당 현재와 시우는 능청스러운 태도로 손님들을 맞이했으며, 주방 멤버들의 음식은 단 한 명의 손님도 실망시키는 일이 없었다.
그 놀라운 호흡과 정돈된 움직임은, 자문위원으로 방송에 참여 중인 백중헌마저 놀라게 할 정도였다.
“허허, 이 친구들 아이돌이 아니라 어디 자영업 하다가 온 거 아니유?”
심지어 체력마저 좋았다.
어느새 아침 장사가 끝나고 점심 장사를 시작한 <북한산 둘레집>이었지만, 멤버들은 지친 기색 없이 밝고 환한 표정으로 손님들을 맞았다. 오히려 현장의 스태프들이 먼저 지쳐 가는 모습이었다.
“자, 자, 다들 힘 내요! 스마일!”
그에 비해 7IN 멤버들의 표정은 갈수록 좋아졌다.
“우와, 얘네들 체력 뭐야···.”
“무슨 특수부대 출신들 같은데요?”
온갖 서바이벌 예능과 경연, 숱한 밤샘으로 체력을 단련해 온 7IN이었다.
게다가 소년들은 지금 한껏 즐거움을 느끼는 중이었다. 백중헌 선생의 말대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손님들에게 내는 것은 멋진 무대를 하고 난 다음만큼이나 뿌듯한 것이었다.
그러니 지치기는커녕 갈수록 눈빛이 초롱초롱 빛날 수밖에 없었다. 점점 빨라지는 움직임에 맞추어, 가게의 매출도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테이블에 앉은 손님과 사소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 호흡이 착착 맞아 떨어지는 주방의 모습, 가끔 티격태격하지만 또 오랜 부부처럼 금세 합을 맞추는 태웅과 현수의 모습까지.
양홍석 PD는 모든 그림을 카메라에 담으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북한산 둘레집> 편은 계속해서 이런 톤을 잡고 촬영을 진행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변수는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