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에라 모르겠다
커다란 삼각근과 대둔근이 연신 흔들리며 근육의 물결을 만들었다. 몸짱들의 쓸데없이 부드러운 춤선은 모두를 경악케 했으나 그 와중에도 군자의 표정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후후, 후후후···.”
이마에는 식은땀 한 방울.
사실 군자라고 그 광경이 아름다워 보일 리 없었다. 누가 보아도 괴기스러운 응원이었다. 아니, 응원이라기보다 집중력을 부숴 버리는 훼방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군자는 웃었다. 흡사 첩첩산중에서 거대한 멧돼지 두 마리를 마주한 듯한 기분이었으나, 오랜 시간 활을 쏘아 온 군자는 그 상황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는 방법을 알았다.
“후으읍—.”
깊은 들숨으로 호흡기를 고정시키고, 몸의 흔들림을 잡으며.
한없이 자연스러운 연속 동작으로 활시위를 당겨 목표물을 조준한다.
하마터면 춤을 추고 있는 근육 멧돼지 두 마리를 겨눌 뻔 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린 군자였다.
이것은 사냥이 아닌 경연이다. 저 멧돼지들의 자태가 실로 숭하기는 하나, 사실은 착하고 순한 멧돼지들임을 군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군자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과녁의 정중앙. 지금 한가운데를 꿰뚫지 못한다면, 저 보배라는 궁사는 금방 군자의 발치를 추격해 올 터였다.
활시위를 끝까지 당긴 순간, 집중력은 한계선 위까지 치솟았다. 근육소년들의 훼방은 이어졌으나 이미 군자의 눈에는 더 이상 그 몹쓸 풍경이 들어오지 않았다.
파아아아아앙—.
마침내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활을 떠난 마지막 화살은.
퍼어어어어억—!!
이번에도 여지 없이 과녁의 정중앙에 꽂히고 말았다.
“우와아아아아악—.”
“마지막까지 10점이야—!?”
“아니 진짜 무슨 올림픽이냐고오—.”
끝내 10점을 쏜 군자의 신들린 활솜씨에 탄성이 이어졌다.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치는 가운데, 가장 크게 놀란 것은 다름아닌 군자의 경쟁상대, 윤보배였다.
“···미쳤어···.”
권태웅과 차인혁의 춤사위는 실로 더러웠다. 윤보배도 군자도 분명 그것을 보았다. 도저히 집중력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와중에도 군자는 자신의 페이스대로 화살을 쏘아 보내는 데에 성공했다.
무조건 10점을 쏘아야 하는 승부처에서, 인외(人外)라 하여도 무방할 정도의 집중력.
이제는 보배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군자는 그냥 ‘아이돌 치고’ 양궁을 잘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언니, 저 분 진짜 너무 잘 쏜다···.”
“할 수 있어요? 어깨에 힘 빼고!”
“차분하게 해, 차분하게. 그냥 음방 이벤트 경기잖아!”
바이올렛 멤버들이 보배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 주었으나, 정작 보배의 귀엔 웅웅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스코어 상으로는 8점 이상만 쏘면 바이올렛의 승리.
그러나 군자가 ‘올 10’을 성공한 이상, 보배 역시 이번에도 10점을 기록해야 한다.
압박감은 점점 보배의 어깨를 짓눌러 왔다. 애써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앞의 과녁에 집중해 보았지만, 이번엔 태웅과 인혁의 댄스가 아른거렸다. 그 약동하는 근육을 떠올릴 때마다 보배의 입에선 풉 하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흐헙—.”
“어··· 언니?”
“보배야! 왜 그래? 괜찮은 거야!?”
“후우, 후우··· 괜찮아.”
겨우 마음을 다잡고 사로에 선 보배였으나 100%의 집중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위를 당기는 손끝엔 일말의 망설임이 남아있었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퍼어억—.
“9점! 윤보배 선수, 마지막 화살이 9점 과녁에 명중합니다!”
“이러면 바이올렛의 승리네요! 와아아, 바이올렛 여러분들 축하드려요~”
“와아아아—!!”
결국 보배의 마지막 화살은 10점이 아닌 9점이었다. 9점으로도 팀의 승리를 만들기는 충분했지만 보배의 표정은 마냥 밝을 수 없었다.
“크으, 아쉽다 아쉬워.”
“···죄, 죄송해요··· 제가 조금 더 잘 쐈다면···.”
“아하하핫, 재미있었음 됐지 뭐~”
“그 와중에 군자는 진짜 대단하더라. 어떻게 저 더러운 춤을 보고도 10점을 쐈어?”
“후후, 내 1년치 식은땀을 다 쏟은 기분이었단다.”
“얌마, 나름 응원이었다고. 혁이 형 시무룩해졌잖아, 빨리 위로해 줘.”
“혀, 혁이 형님. 응원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됐다, 벌써 상처 받았어···.”
“허어—.”
오히려,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며 퇴근길에 오른 군자의 표정이 더 밝았다. 비록 게임에선 패배했지만, 개인 기록만큼은 국가대표 상비군인 보배마저 앞선 군자였다.
“···.”
순간 무언가를 결심한 보배가 군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유군자 그 분 진짜 대단하더라.”
“그니깐. 어떻게 보배님보다 더 잘 쏠 수가 있지?”
“보배님은 좀··· 좀 실망했어. 이기긴 했지만 그래도 군자님보단 못 한···.”
“야, 야!”
“허업, 보배 님.”
가는 길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아이돌들도 있었으나 보배는 괘념치 않았다.
180cm이 넘는 성인 남성들의 발걸음을 성큼성큼 따라잡은 보배가 씩씩하게 군자의 이름을 불렀다.
“유군자 님!”
배후에서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에 일곱 소년들이 동시에 놀랐다. 허나 가장 놀란 것은 그들의 옆에 서 있던 이용중 실장이었다.
“헉, 허억, 여자 아이돌···.”
이용중 실장은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듯, 초조한 표정으로 소년들의 앞에 나섰다.
“보, 보배 님. 혹시 무슨 일로?”
“아, 유군자 님한테 할 말이 있어서요.”
“예? 그, 그게··· 죄송하지만··· 저희 군자 연락처는 드릴 수가 없겠습는데요···.”
“?”
“보배 님도 아시겠지만, 이게 아무래도 민감한—.”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예?”
“생각하시는 그런 문제 아니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단호한 어투로 이용중 실장을 안심시킨 보배가 군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군자 님, 아까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예? 무엇이 죄송했단 말씀이신지.”
“올림픽 기준에서 쏘자고, 조금 시비조로 말했던 거요.”
“하하, 아닙니다. 딱히 시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말을 잠시 멈추고 크게 심호흡을 한 보배가 다시 입을 열었다.
“후우···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정말 잘 하시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저도 양궁은 꽤 오래 했는데··· 오히려 저보다도 더 잘 하세요.”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아뇨, 운 같은 거 아니에요. 제가 제일 잘 알아요.”
그렇게 말하며 보배가 태웅, 인혁을 흘끗 바라보았다.
“저, 저 분들이 그런 춤을··· 푸흡—.”
“보배 님?”
“···그런 춤을 추고 계시는데도 집중력을 안 잃으셨잖아요. 그건 분명 실력이죠.”
겨우 호흡을 되찾은 보배가 간신히 말을 맺었다. 군자 역시 보배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에, 쉽진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화살을 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집중력이니.”
“그래서 말인데, 군자 님.”
“?”
“혹시··· 양궁을 제대로 해 보실 생각은 없으세요?”
“예?”
“그냥 취미나 아육대 같은 데서 쏘는 거 말고, 정말 제대로요.”
“제대로라면 어떤—.”
“올림픽 국가대표, 도전해 보실 생각 없으실까요?”
* * *
보배의 제안은 간단했으나, 그 내용은 이용중 실장을 포함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제가 그래도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간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그냥 딱 보면 알아요. 이 사람이 얼마나 잘 쏘는지, 얼마나 큰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제가 봤을 때, 군자 님은 정말 올림픽 국가대표가 될 만한 재능을 가지고 계세요.”
이번에도 이용중 실장이 나서서 보배를 만류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한참 활동 중인 현역 아이돌이 국가대표라니! 10초만 생각해도 수많은 논란이 발생할 것 같았다.
“하하하··· 저기, 보배 님. 말씀은 정말 감사한데 좀 힘들 것 같은데요···.”
“어째서요?”
“그야, 우리 군자는 아이돌이니까요. 군자가 활을 잘 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정말 국가대표에 도전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더 안 좋게 보지 않겠어요?”
“···.”
“안 그래도 논란에 예민한 직업이잖아요. 군자를 보호해야 하는 입장에서, 보배 님의 제안은 조금 위험한 것 같네요.”
“실장님 말씀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양궁을 했던 사람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적어도 양궁계에선 군자 님의 도전을 안 좋게 생각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러나 이용중 실장의 반대에도 보배는 뜻을 굽히지 않으며 의견을 피력했다.
“가장 잘 쏘는 사람이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는다. 양궁계에서 몇십 년 동안 바뀌지 않는 원칙입니다. 그 사람의 직업이 무엇이든, 실업팀 소속의 양궁 선수들보다 더 잘 쏜다면 당연히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을 자격이 있어요.”
“···.”
“그냥 화제몰이용으로 양궁에 도전하는 건 저도 반대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군자 씨는 정말 국가대표가 될 만한 실력을 가지고 계세요. 가장 잘 쏘는 사람이 올림픽에 나가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더 큰 논란 아닐까요?”
“아,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죄송합니다. 너무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제안이라 놀라셨을 것 같아요. 하지만 양궁을 오래 해 온 사람으로서, 이렇게 멋진 재능을 갖고 계신 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이용중 실장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보배가 마지막으로 군자를 바라보았다.
“아직 현역으로 계신 코치님들이랑 연락하고 지내고 있어요. 군자 님 의사만 확인된다면 평가전이나 선발전에 참가하실 수 있도록 연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
“군자 님, 꼭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세요. 그럼 실례했습니다.”
용건 전달을 마친 보배가 자리를 떠난 뒤, 이용중 실장은 들뜬 소년들을 추슬러 밴에 태웠다. 뜬금없는 보배의 제안에, 멤버들은 모두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국가대표? 군자 형아가? 생각만 해도 넘 멋지지 않아여?”
“그니깐. 나 아까 잠깐 상상했잖아. 태극 마크 그려진 유니폼 입은 개존잘 남신이 카메라에 원샷으로 딱 잡히고, 그 밑에 유군자 이름 딱 뜨고···.”
“잠깐, 그럼 소속은 어디로 나오지? 어디 실업팀 소속이 아니니까 우리 팀 이름으로 나오나?”
“에이, 설마 그러겠냐? 근데 그러면 멋지긴 하겠다.”
“아니 나 너무 설레는데? 실장님, 실장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허, 들뜨지 마. 무슨 국가대표야, 뜬금없이.”
“에이, 재미없어—.”
“아이돌은 아이돌의 본분에 충실해야지. 안 그러냐, 군자야?”
이용중 실장이 넌지시 질문을 던졌으나, 군자의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았다.
“흐으음, 활 쏘기 국가대표라···.”
“···군자야?”
그 순간, 군자 역시 나라를 대표하여 세계인의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군자의 맥박은 빨라졌다. 이용중 실장은 연신 군자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펼친 상상의 나래는 쉬이 접히지 않았다.
“저기요, 유군자 씨!”
“예, 예 실장님?”
“아니 뭐에 그렇게 정신이 팔렸어?”
“그, 그것이—.”
“에휴, 이제 나도 모르겠다. 팀장님께 말씀 한번 드려 보지 뭐.”
“예? 무엇을···.”
“양궁 국가대표 말야.”
“!”
“그래, 지금까지도 딱히 평범한 아이돌은 아니었으니까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