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아이돌은 선비님-234화 (234/303)

#234

멋지다

후우욱—.

미닫이문을 열어 놓은 탓에, 작은 호롱불은 칼바람 앞에 부질없이 흔들렸다.

삭풍이 살을 에는 한겨울 밤은 언제나 숙부와의 글공부 시간이었다.

“다음 장에 무어라 쓰여 있었느냐.”

“···.”

“무엇이 쓰여 있었느냐 물었다.”

“···잘못했습니다, 보지 못하였습니다 숙부님···.”

바람에 흔들리는 호롱불 아래에서 글귀를 읽어 내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미리 책을 통째로 외워 버리는 방법도 있었으나 군자는 언제나 정직했다.

“보지 못하였다?”

“···.”

“그럼 하는 수 없지.”

군자의 정직함만큼, 그의 숙부 유형원은 언제나 가혹했다.

짜악, 짜아악—!!

얼어 버린 종아리에 참나무 회초리가 떨어졌다. 아직 살아 있는 나무로 만든 회초리가 종아리에 선홍색 피멍을 만들었다. 그런 날엔 떨어지는 눈물마저 얼어 버릴 것 같았다.

“읽어라.”

“···으웁, 흐으읍···.”

“울 시간이 있다면, 읽어라.”

“···.”

“풍전등화 아래서도 글월을 읽어 낼 수 있어야 진정한 선비라 할 수 있을 터. 군자 너는 진정한 선비의 길을 걸을 생각이 없는 게냐.”

차오르는 울음을 꾹꾹 삼키며 군자는 두 눈에 힘을 주었다.

눈물이 시야를 뿌옇게 만들어도, 바람이 아무리 호롱불을 흔들어도 집중한다면 글자 몇 개 정도는 건져낼 수 있었다.

“······입니다.”

“그래. 그 눈도 우는 것 외의 다른 일을 할 줄 아는가 보구나.”

그렇게 정답을 말해야만 겨우 글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위험천만한 사냥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안개가 무릎까지 내려앉은 날, 숙부는 군자를 야산으로 데리고 가서 고라니며 멧돼지 같은 산짐승을 잡게 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야산 자락, 군자는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제 숙부를 부르곤 했다.

“숙부님, 너무 어둡습니다!”

“집중하거라.”

“하지만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집중력을 높인다면 보일 것이야. 보이지 않는다면 네 마음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겁에 질린 얼굴로도 군자는 도망치지 않았다. 숙부의 악행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후우, 후우, 후우우—.”

놀랍게도, 집중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면 야생 금수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그 기척을 느낀 순간 시위를 놓으면 군자의 화살은 여지 없이 놈들의 미간을 꿰뚫었다.

퍼어어억—.

“꾸에에엑—!!”

사냥 철도 아닌 계절에 동물을 잡은 것이 미안하다는 듯, 군자는 매번 사냥감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울었다.

“미안하다, 내가 미안하구나···.”

숙부는 그런 군자를 나약하다며 꾸지람했으나, 그렇다고 군자의 선한 본성이 달라지진 않았다.

그런 극한의 환경에서 집중력을 갈고 닦은 군자였다.

눈이 다소 피로하긴 하지만 눈물범벅이 되진 않았다.

미세먼지라는 것이 좀 있기는 해도 어디 두터운 안개에 비할쏘냐.

과녁은 꽤 멀찍이 떨어져 있었으나, 적어도 산짐승처럼 천방지축 움직이진 않는다.

군자에겐 어려울 것 없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이런 환경에서 최고의 궁사들과 자웅을 겨룰 수 있다는 것이 즐거울 뿐이었다.

쐐애애애애액, 퍼어억—!!

여섯 번째 화살 역시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과녁에 안착했다. 많은 궁사를 좌절시켰던 바람이지만, 군자에게는 그마저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상했던 곳에 정확히 떨어지는 화살을 보며 군자는 환하게 웃었다. 그 순수한 즐거움의 미소는, 중계 카메라를 통해 수십, 수백만의 시청자들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우와아아악, 또 10점—!! 또 10점입니다아—!! 유군자 선수, 멈출 줄을 모릅니다!! 이번에도 과녁의 정중앙 꿰뚫어 버렸습니다—!!]

[이 정도면 신궁이라고 부를 만도 합니다!! 경쟁자들 차례로 낙마하는 가운데, 특별 초대 선수로 참가한 유군자 선수가 미친 실력을 과시하며 다시 한번 선두그룹에 합류합니다—!!]

[김덕준 선수의 턱이 쩍 벌어져 있습니다!!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입니다—!! 하긴 당연합니다, 이 특별 평가전을 진행하는 저희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진 못했습니다!! 솔직히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현역 아이돌이 이렇게 활을 잘 쏘다니요—!!]

두 명의 해설은 입에 모터를 단 듯 군자의 활약을 칭송했다. 그러나 결코 편애중계 같은 것은 아니었다. 경기가 종반으로 치닫는 시점, 진천 양궁경기장에서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선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유군자였다.

그런 군자의 활약이 다른 선수들에게도 자극이 된 듯 했다. 남은 선수들 역시 입술을 꽉 깨물며 집중력을 끌어올렸으나, 매 분 매 초마다 정신없이 바뀌는 풍향은 경쟁자들을 차례로 낙마시키고 말았다.

퍼어억, 퍼어어억—.

8점, 7점, 다시 8점. 평상시라면 괜찮은 성적이었으나 심각한 ‘점수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현 상황에선 용납되지 않는 점수였다.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하나 둘 씩 고개를 숙여 가는 가운데, 이제 어깨를 펴고 일곱 번째 화살을 쏠 준비를 마친 선수는 단 네 명.

[이제 연장전도 종반에 이르렀습니다!! 남은 선수는 단 네 명입니다—!! 고한영, 김덕준, 연규정, 그리고 유군자 선수!! 단 네 명의 궁사만이 사로에 서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유군자 선수의 선전이 놀랍습니다!! 아니, 이건 선전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합니다!! 선전 수준이 아니라, 정말 대회를 씹어먹고 있습니다!! 아마 유군자 선수를 초대한 협회 측에서도 이 정도의 결과는 예상하지 못했을 텐데요!!]

[탈락한 궁사들의 표정에서도 아쉬움이 없습니다!! 모두 유군자 선수의 실력을 인정한다는 듯, 그저 경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야, 그런데 이렇게 네 명의 선수가 나란히 서 있으니까 무슨 신인 아이돌 그룹 같네요!! 네 선수 모두 아주 훈훈합니다!! 이거 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중계방송을 지켜보던 시청자들 역시 그 비주얼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별 생각 없이 중계방송을 보던 잡덕들마저 흐뭇함에 미소지을 정도였으니.

[오 나 이제 본진 정한듯ㅎ]

[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근데진짜이거좀;; 괜찮은데??ㅎㅎ;;]

[양궁소년단 먼데진짷ㅎㅎㅎ]

[유군자 예쁜건 원래 알았는데 다른 양궁선수들도 폼 미쳣는데?]

[고한영 저분은 진짜 무슨 신라시대 화랑처럼 생겼네]

[김덕준 저분은 이름은 구수하니 숭늉같은데 눈 쪽 찢어진게 ㄹㅇ볼매임]

[다들 얼굴에 특색있는게 이건머 그룹하라고 나온것같자나]

[오늘부터 내 최애스포츠 양궁이야ㅎㅎㅎㅎ]

[진짜 잘생긴게 최고긴해]

[프로젝트 활동을 국가대표로 하는 아이돌이 있따?]

[휴 최대한 천천히 쐈음 좋겠닿ㅎㅎㅎ이 경기가 안 끝났음 좋겠다구]

[정신차려이것들앜ㅋㅋㅋㅋㅋㅋㅋㅋ]

[오오 이제 7발째 쏜다쏜다다ㅏㅏ라]

그 사이, 네 명의 궁사들은 마지막 화살을 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쐐애액, 쐐애애액, 쐐애애애액—.

[10점!! 10점!! 모두 10점—!! 아니, 이제 정말 우습게 10점에 화살 날려보내는 선수들!! 일곱 발의 화살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모두 과녁의 중앙에 명중시켰습니다—!!]

[이게 그렇게 쉽게 나오는 상황이 절대로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의 집중력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 대한민국 최강의 궁사인 김덕준, 고한영 선수는 물론 기복이 심한 것으로 알려진 연규정 선수까지 오늘은 최상의 폼을 보여줍니다—!!]

[어어··· 이렇게 되면 4인 동률로 평가전이 끝나게 되는 건가요? 유연하게 운영되는 평가전인 만큼, 주최측인 양궁협회의 결정을 기다려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일곱 발의 화살을 모두 쏘았음에도 승부가 나지 않자, 협회 임원들은 급하게 모여 회의를 열었다.

“오늘 평가전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선발전을 준비하는 게 어떤가.”

“예?”

“이미 저 유군자라는 친구의 능력은 검증되고도 남았어. 이제 더 이상의 경기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네.”

“허어, 위원님!”

“으, 응?”

“수십만 시청자가 이 경기를 보고 있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아.”

“??”

“지금 양궁소년단 탄생했다고 난리인데, 게다가 온라인 생방이라 편성표 영향도 안 받는데! 1분이라도 더 이 친구들을 방송에 노출시키는 게 개이득 아니겠습니까.”

“그, 그런가?”

“게다가, 위원님은 안 궁금하십니까?”

“음?”

“이 경기의 향방 말입니다. 솔직히, 저는 궁금해 죽겠습니다.”

젊은 위원의 말에 모든 협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달아오른 경기를 여기서 중단시킬 순 없다. 무엇보다, 그냥 결과가 궁금해 미치겠다.

그렇게, 국가대표급 양궁 평가전은 최종장으로 접어들었다.

퍼어억, 퍼어어억—!!

여덟 발 째, 이번에도 모두가 10점.

쐐애애액—.

“앗··· 하하, 실수했네.”

아홉 발 째,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진 연규정이 미스 샷을 내며 4위로 떨어졌다.

연규정의 실수는 바로 옆의 동갑내기 궁사 김덕준까지 동요하게 했다.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리스트, 연습량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김덕준이었으나 열 발의 화살을 쏘며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퍼어어억—!!

[아앗, 김덕준 선수가 8점 쐈습니다!! 여기서 흔들리는 김덕준, 사실 흔들렸다는 말도 민망합니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불가사의할 정도로 잘 쐈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선수들이 워낙 미쳐 있기 때문에, 8점으로는 1위를 차지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이제 고한영 선수가 준비합니다!! 여기서 고한영 선수가 9점 이상 쏜다면 최소 2위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후우—.”

깔끔한 루틴을 시작한 고한영이었으나, 열 번의 활시위 당기기가 그의 어깨근육을 자극했다. 작년 선수권대회 직전 당한 부상이 아직 완벽하게 낫지 않았던 것.

“···아야···.”

쐐애액, 퍼어어억—!!

그럼에도 끝까지 자세를 유지한 고한영이었으나, 그의 마지막 화살은 과녁의 정중앙을 비껴 나가며 9점 영역에 꽂히고 말았다.

“형, 어깨가···.”

“아냐 아냐, 괜찮아. 이것도 실력이지 뭐.”

“괜찮아요?”

“응, 문제 없어.”

괜찮다는 듯 씨익 웃어 보이며, 고한영은 군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마지막 한 발의 화살을 남겨 둔 군자가 차분하게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자아, 열 발째에 이르러 경쟁자들이 흐트러지기 시작합니다!! 유군자 선수, 여기에서 실력발휘만 잘 한다면 평가전 1위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놀랍습니다!! 제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건지, 당황스러울 정도네요!! 하지만 유군자 선수, 압박감을 아주 잘 컨트롤하고 있는 것 같아요!! 차분하게 호흡하면서 화살을 매만지고 있습니다!! 마치 활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입니다—!!]

이 상황에서도 본인의 루틴을 깨지 않는 군자를 보며, 고한영은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멋지다.”

“네? 형, 저요?”

김덕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한영에게 되물었지만, 고한영의 시선은 군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후우우우—.”

때마침, 긴 호흡을 내뱉으며 마침내 군자가 열 번째 활시위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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