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
강녕하신지요
군자가 날숨을 멈추자 몸의 미세한 떨림까지 멎었다. 호흡은 안정되어 있었으나, 극도의 집중력 때문인지 심장박동이 들리는 것 같았다.
과녁에만 오롯이 집중하며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해 온 군자였으나, 그래도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는 안다.
앞선 경쟁자들이 모두 실수를 범했다. 이 살 떨리는 경기를 끝낼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 짧은 순간, 군자의 머릿속에 하나의 잡념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다시 한번 10점을 기록한다면 나는 이 대회를 우승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될 경우, 다른 선수들은 어떤 심정일까.
갑자기 굴러 들어온 돌, 그것도 선수 출신도 아닌 놈에게 수십 명의 국가대표급 궁사들이 패배하게 되는 거다. 단순한 한 번의 패배를 넘어,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될지도 모른다.
잡념이 커질수록 망설임도 함께 커졌다. 좀처럼 활시위를 놓지 못하는 군자를 보며 해설위원들은 목청을 높였다.
[유군자 선수, 열 번째 화살에는 충분한 시간을 쓰고 있습니다!! 마지막 화살인 만큼 만전을 기하겠다는 뜻일까요—!?]
[어쩌면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든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괴물 같은 선수라고 해도 이 순간마저 차분하기는 어렵겠죠—!!]
[맞습니다!! 어쩌면 경쟁자들의 실수가 유군자 선수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라면 활을 쏘기는커녕 다리가 풀려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것 같은데요—!!]
여전히 활시위를 손에 쥔 채 군자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여기서 이들을 잔인하게 꺾어 버리는 것이 맞나.
어차피 올림픽이라는 대회에 나간다면 같은 국가의 선수들과는 경쟁이 아닌 화합을 해야 한다. 곧 하나의 팀이 될지도 모르는 자들인데, 지금은 자존심을 세워 주는 편이 더 나은 것 가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옆으로 살짝 돌린 순간이었다.
“···!”
고한영, 김덕준을 비롯하여 이미 탈락한 선수들까지, 군자의 마지막 화살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서 시기, 질투, 억하심정 같은 것은 없었다. 악의 없이 순수한 승부욕만이 가득한 눈빛. 승리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면서도, 표독스러운 기운은 전혀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자 군자는 비로소 깨달았다.
선수들을 위해서 화살에 힘을 빼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던가.
이들은 이미 나를 하나의 경쟁자로 인식하고 있다. 선의의 경쟁을 펼쳐야 하는 자리에서, 상대의 자존심을 위해 일부러 실수를 하는 것은 오히려 지극한 무례일 터. 군자 역시 경쟁자라 생각한 누군가가 그런 짓을 한다면, 그 행동에 대해 분노했을 터였다.
물론 지금까지 그 누구도 군자보다 뛰어나지 않았기에, 단 한 번도 경험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몸에 익은 대로 화살을 쏘아 보내는 것 뿐.
꽈아악···.
시위를 고쳐 잡으며, 바뀐 풍향에 따라 두 어깨와 팔을 미세조정했다.
파아아앙—.
그 어느 때보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활을 뛰쳐나간 화살은.
콰자작—!!
이번에야말로 과녁의 정중앙, 중계용 카메라 렌즈를 박살내 버리며 완벽하게 정중앙에 꽂혔다.
[10]
전광판엔 여지없이 숫자 ’10’이 떠올랐고.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관중석에선 군자의 팬들, 그리고 양궁협회 위원들이 동시에 기립하여 환호성을 질렀으며.
[우와아아아악, 세상에, 미쳤어요—!! 유군자, 유군자 선수가아아—!! 기어이 사고를 쳤습니다!! 마지막, 그 최후의 화살까지 10점에 꽂아 넣으며 10X10을 기록합니다아아—!!]
[아니 이거 뭐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수십 명의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지켜보는 자리, 수십 수백만 시청자가 지켜보는 이 친선대회에서 완벽한 점수로 1등을 기록합니다—!!]
[천재 신궁의 등장입니다!! 중계 카메라에 잡힌 양궁협회 임원들의 표정을 보세요—!! 무슨 환생한 고주몽이라도 본 듯 완전히 뿅 가 있습니다—!! 파란입니다, 양궁계에 파란이 일어납니다—!!]
“···와, 이게 뭐지···.”
“덕준아, 우리 잘하면 올림픽 못 갈 수도 있겠다.”
“형,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줘요···.”
“농담 아냐. 적응기도 없이 저렇게 잘 쏘는데, 선발전이라고 해서 저 사람을 이길 수 있겠어?”
“그건··· 에휴, 안 그래도 빡센 선발전 더 빡세지겠네.”
“재미있게 됐다, 그치? 규정이도 폼 찾은 것 같고!”
“재미 하나도 없거든요?”
놀란 표정의 선수들은 모두 하나같이 군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하하, 감사하오—!!”
그 혼란의 중심에서, 군자는 활짝 웃는 얼굴로 사방을 향해 폭풍 큰절을 올리고 있었다.
* * *
[국가대표급 양궁 평가전 깜짝 출전한 유군자, 미친 기량으로 단독 1위 차지하다!]
[아이돌 신궁의 놀라운 양궁 실력, 현역 국가대표 선수들 압도··· 10발 모두 10점 맞춘 ‘올 10’ 진기록 달성.]
[국내 시청자만 총 95만 몰린 양궁 평가전 중계방송, 평일 낮 스트리밍 최고기록 갱신.]
[현 국가대표 궁사 고한영, “유군자는 이미 국가대표에 승선할 만큼의 기량을 갖춘 선수.”]
[현역 아이돌의 놀라운 양궁 솜씨, 역대 최초로 아이돌 - 국가대표 투잡러 등장하나?]
[대한양궁협회장 김명중, “100% 실력 본위로 선발한다는 기조는 달라지지 않는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유군자 선수가 타 선수보다 더 좋은 기량을 선보인다면 그를 뽑을 것.”]
국가대표급 양궁 평가전이 끝난 뒤, 양궁계를 비롯한 온, 오프라인 세계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다.
가장 놀라운 것은 경기 결과 자체였다. 대부분은 ‘꼴찌나 안 하면 다행’이라는 예상을 내놓았고, 긍정적인 전망을 가진 이들도 중간 정도나 하면 다행이라 생각했으니.
커뮤니티의 팬들은 아직도 감동이 가시지 않은 듯 여운 속에 빠져 있었다.
[어제자 유군자 활 쏘는 장면 모음.gif]
[미쳣다미쳣어진짜;;;;;;]
[어떻게 이렇게 미친ㄹ나ㅓㅇㄹ판ㅇㅍㄴ]
[진짜 말이 안돼]
[이렇게 생긴 사람이 이렇게 머리 쓸어넘기면서 이렇게 활 쏘는게 맞아?]
[근데 쏘는 족족 10점에 팍팍 달라붙는다고?;;;ㅋㅋㅋㅋㅋ]
[한 사람한테 이렇게 외모랑 재능이 몰빵돼도 되는거냐고ㅠㅠㅠㅠㅠ]
[ㄴ그래도 개그감각은 확실하게 가져가신것 같더라]
[ㅋㅋㅋㅋㅋㅋ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군자개그가 어때섴ㅋㅋㅋ난 군필자드립도 빵터졋다구]
[ㅇㅏㄴㅣㅇㅑ···개그는 타멤한테 맡기는게 더 좋아보여ㅎㅎ;;]
[ㅋㅋㅋㅋ후 뭐 어때 얼굴자체가 개꿀잼인데]
[아 난 진짜 아직도 믿겨지지가 않아;; 국대선수들이 봐준건가]
[뭔 헛소리얔ㅋㅋㅋㅋ국가대표정도 되면 승부욕이 얼마나 쎈데 전세계에 중계되는 방송경기에서 아이돌한테 일부러 져주겠음?]
[ㄴ아니 나도 져줬을거라 생각안함ㅠㅠ그냥 너무 놀라우니까 생각해본거임 화내지말아줘ㅠ]
[ㄴ나도 흥분미안··· 근데 놀랍긴해 진짜로]
[이러면 우리 군자 국가대표 되는거야? 올림픽 나감?]
[노노 아직 공식선발전 성적은 없어서 국대가 된건 아님]
[아그래? 아쉽다ㅠㅠ]
[근데 아마 협회에서는 무조건 국대선발전 참여시키려고 할듯?]
[아진짜? 헐 군자 활쏘는거 또 볼수있는거?]
[ㅇㅇ아마도]
언론과의 인터뷰를 마친 뒤, 회의를 소집한 양궁협회장 김명중의 표정엔 웃음이 가득했다.
“허허, 흐허허.”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른 표정. 맨입인데 어째 벌꿀을 한가득 머금은 듯 달달한 미소. 김명중 회장 뿐만 아니라 다른 협회 위원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허흐허, 세상에.”
“흐허커허, 뭐 이런 일이 다 있답니까.”
“헤헤, 흐헤헤, 그러니까요.”
“어그로만 끌어도 절반의 성공이라고 봤는데, 여기서 이렇게 활약까지 해 주면···.”
“이러면 국가대표 선발전 로스터에 올려도 아~무런 반감이 없지 않겠습니까.”
위원들의 이야기에 김명중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군자가 평가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다면, 공식 국가대표 선발전 출전 명단에 군자의 이름을 올리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군자와 양궁을 엮는 것은 무조건 도움이 된다.
당장 평가전에 불과한 엊그제 경기에 중계방송이 붙고 100만에 가까운 국내 시청자가 경기를 보게 된 것도 90%는 군자 덕분 아니었던가.
다만, 중요한 것은 명분이었다. 양궁을 할 줄도 모르는 아이돌을, 어그로 끌기 좋다고 계속해서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놀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군자가 평가전에서 1위를 해 준 덕분에 위원들의 고민은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아무리 평가전이라고 해도, 이토록 압도적인 실력을 선보인 선수라면 선발전에 넣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할 테니까.
“유군자 그 친구, 무슨 논란 같은 건 없지?”
“논란이요? 아유, 클린하다 못해 이제 날티 좀 내라고 팬들이 먼저 조르는 수준입니다.”
“보니까 엄청 예의바르고 착한 것 같긴 하더라만.”
“말도 마세요 회장님, 이번에 대회 진행하면서 저희 싹 다 팬 돼버렸습니다.”
“잘 모를 때는 그냥 선비 컨셉 잡고 노는 친구겠거니 했는데 실제로 보니까 아니더라구요. 상투적인 말이긴 하지만, 정말 요즘 그런 젊은이들이 잘 없잖습니까.”
“허어··· 인성까지 좋다고···.”
낮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김명중 회장은 욱신거리는 광대를 양 손으로 마사지하듯 만졌다.
“뭐 이런 보물 같은 친구가 다있지?”
“제 말이 그 말입니다, 회장님.”
“우리가 이 복을 이렇게 꿀꺽 먹어 버려도 되는 걸까?”
“당연하죠. 아니, 이제 안 먹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며 위원 한 명이 스크린에 자료를 띄웠다.
“어제부터 급하게 돌린 설문조사 결과입니다. 아이돌 유군자가 양궁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여하는 것이 옳은가. 무려 89%의 참여자들이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흐음.”
“여론을 생각해도 군자와는 함께 가는 것이 맞습니다. 이미 전국민 앞에서 실력을 검증했으니, 무조건 실력 본위로 간다는 협회의 기조도 지킬 수 있고요.”
“평가전에 참여시킨 게 여러 모로 신의 한 수가 됐군.”
“흐흐, 회장님. 평가전 참여는 제가 제안했습니다?”
“어유, 그래 그래. 잘했다 아주.”
“흐헤헷.”
긍정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회의실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위험성을 분석하는 위원들은 있었다.
“회장님.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그래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음, 그래. 무슨 부분인가.”
“유군자의 국가대표 선발전 승선이 가시화된 상황에서, 다른 선수들의 반응이 걱정됩니다.”
“다른 선수들의 반응?”
“물론 대부분의 선수들은 경쟁을 반기고 극복해 나갈 테지만··· 유독 승부욕이 강한 선수들은 달갑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예를 들면?”
“뭐, 덕준이 같은 친구들도 있고···.”
김덕준의 이름이 거론되자 김명중 회장 역시 헛기침과 함께 침음했다. 자신의 친손자이자 최연소 국가대표 타이틀 보유자인 김덕준의 미친 승부욕은 김명중 회장 역시 익히 알고 있었다.
“···뭐, 모처럼 영상전화라도 걸어 볼까.”
손자의 의견을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레 덕준에게 영상전화를 건 김명중 회장이었다. 전화벨이 세 번 울리기도 전에, 덕준은 김명중 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 할아버지?
“그래 덕준아, 할아비다.”
- 안녕하세요!
언제나처럼 밝은 손자의 인사, 김명중 회장의 만면에 미소가 떠올랐다.
“으음?”
그런데 그 때, 김명중 회장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손자 덕준이 웬 백지를 잔뜩 깔아 놓고, 손에 붓을 든 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덕준아, 너 뭐 하는···.”
- 오오, 덕준 군의 조부님!
“엥?”
- 강녕하신지요!
전바로 그 때, 전화기 너머에서 익숙하고 구수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