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
마지막 질문
뜻밖의 팬미팅이었음에도 분위기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최애 아이돌 멤버 세 명이 갑작스레 나타난 생일카페의 분위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후우욱—.
각자의 이름을 딴 시그니쳐 차를 호호 불어 마시며, 세 사람은 간이 의자에 앉아 팬들을 둘러보았다. 팬들은 마치 총명한 초등학생처럼 똘망똘망한 눈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찬아, 참으로 대단하지 않더냐.”
“···마, 맞아요···.”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무릇 아이돌 팬이라면 최애 멤버를 눈앞에서 보았을 때 흥분을 감추지 못함이 인지상정이다.
아직 ‘최애 아이돌’이 없는 군자는 그 감성을 완벽하게 이해할 순 없었지만, 비유하자면 나유선의 향비파 같이 오랜 시간 사랑해 온 무언가를 만난 느낌일 것이다.
처음 향비파와 재회했을 때 온갖 오두방정을 떨었던 것을 떠올린 군자였다. 심지어 그 땐 호들갑을 떨다 못해 눈물까지 조금 흘렸을 것이다. ‘최애’를 만난다는 건 그런 것이다.
사실 굳이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뉴스 같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가수의 공연 현장에서 심심찮게 발생하는 인명 사고들. 과연 그들이 폭동을 일으킬 심산이었을까. 아니, 단지 좋아하는 마음이 크기에 그만큼 흥분한 것일 테다.
헌데 지금 이 팬들은 어떠한가. 너무나도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세 멤버를 오롯이 배려하고 있지 않은가.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으나, 한편으로는 스멀스멀 걱정이 올라왔다.
생일찻집에 온 것까지는 좋았다. 타나카 공이 어구로(漁求擄, 고기를 낚아 올리듯 사람들을 미혹함)를 끌어 주신 것도 참으로 좋았지. 이렇게 어여쁜 팬들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은 또 얼마나 큰 즐거움이던가.
그러나 문제는···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세 사람에게는 현재만큼의 끼도, 태웅만큼의 철면피도 없었다. 현수였다면 새로 작업 중인 트랙을 들려 줄 수라도 있었을 것이다. 시우는 하하호호 웃는 것만으로도 한 시간은 족히 보낼 수 있을 만큼의 호인이고.
그러나 세 사람은 유독 ‘즉흥적인’ 상황에 약했다.
“후우, 대체 무엇을 해야··· 어엇—!!”
때마침 구석에 놓인 거문고를 발견한 군자였다. 화색을 지으며 거문고로 달려갔으나, 안타깝게도 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
“어, 그거··· 그냥 인테리어 소품인데요···.”
뒤늦게 따라온 연지가 쭈뼛거리며 사죄하듯 말했다.
“아뿔싸!”
이것은 가짜 거문고였구나. 연지 낭자가 나를 골탕먹이기 위해서 함정을 파 놓은 것인가!
풉 하고 웃는 연지 낭자의 얼굴을 보니 더더욱 그런 확신이 들었다. 가만 보니 웃는 것은 연지 낭자 뿐만이 아니었다. 군자의 모습을 지켜보던 팬들 대부분이 생글생글 순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문고 해 주려고 했나 봐···.”
“귀여워!”
“아뿔싸 실제로 하는 거 처음 들어···.”
“어떻게 저렇게 사랑스럽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채 군자는 자리로 터덜터덜 돌아와 앉았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순간이었으나 이상하게도 팬들은 하나도 지루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군자의 행동 하나하나에도 반응하며 연신 웃음짓는 모습이었다.
“팬 여러분들···.”
“꺄악, 풀 죽은 목소리 봐.”
“거문고를 연주해 드리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저 거문고는 가짜였나 봅니다···.”
“꺄아악, 마음도 너무 예뻐—.”
“무엇을 해 드려야 할지··· 솔직히 고민이 됩니다··· 이렇게 귀한 시간에···.”
“꺄아아악, 고민하는 입술 봐아—.”
“···?”
“꺄아아아악, 얼굴에 물음표 떴어—.”
군자가 무엇을 하든 팬들은 그 모습을 귀여워 해 주었다. 유찬과 인혁도 마찬가지였다.
“와, 유찬이 속눈썹 봐.”
“···아, 이, 이거는···.”
“아악, 눈 찡긋 하는 거 귀여워!”
“···죄, 죄송해요···.”
“아아악, 얼굴 빨개졌어. 사과같은 애가 사과하는거 좀 봐—.”
유찬은 아까부터 얼굴 곳곳을 하나하나 다 귀여워 해 주는 팬들의 주접에 얼굴을 붉히는 중이었고.
“와, 인혁이 어깨 미쳤다 진짜.”
“어깨···.”
“헐, 허리 펴니까 더 넓어 보여.”
“더 자세히 보시겠습니까.”
“허윽, 오빠아, 저 호흡정지 와요.”
인혁은 본의 아니게 대출혈 서비스를 제공하며 팬들과 나름 자연스러운 소통을 하고 있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준비한 것 하나 없음에도 시간은 자연스럽게 흘렀다. 그 동안은 항상 ‘우리가 무언가를 준비하여 보여드려야 한다’는 은근한 압박감을 가지고 있던 군자였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 분들은 우리의 손짓 하나, 말소리 하나도 사랑하며 즐겨 주신다.
이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 노력할 필요 없이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만 해도 어색할 틈 하나 없이 시간이 흐르는구나.
이것은 마치 부모자식지간의 사랑과도 같지 않은가.
처음엔 무엇을 해야 할지 난감해 하던 군자도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올라탔다. 팬들 역시 지나친 주접이 멤버들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고 자중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세 멤버의 정수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모든 것을 깨물어버리고 싶을 만큼 애정이 터지는 중이었으나, 그런 마음을 꼭꼭 숨긴 채 멤버들에게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셋이 친해요? 얼마나 친해요?”
“으음, 제가 참으로 좋아하는 친우들입니다. 유찬이는 언제나 강아지 같은 동생이고, 인혁이 형님은 믿고 따를 수 있는 분이시지요.”
“군자 너도 멍뭉이 같아!”
“아앗, 그렇습니까. 후후, 그렇다면 저는 충섬심이 높고 정직한 풍산개로 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그럼 이렇게 셋이 풍산즈 결성해!”
“풍산주(風山住, 바람결과 산 속에 살아가다)라, 거 참 즐거운 삶이겠소이다.”
“엥? 무슨 말이지? 아무튼 풍산즈 좋다 좋아.”
주로 대답을 도맡은 것은 군자였다. 군자에 비해 말수가 적은 유찬과 인혁이었으나, 그들을 향한 질문에는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유찬아, 넌 누구랑 제일 많이 다녀?”
“···저, 저는··· 다 많이··· 많이 챙겨주시는데··· 으음··· 그래도 이, 인혁이 형이··· 요즘은 많이 챙겨 주세요···.”
“아 진짜? 완전 의왼데?”
“···이, 인혁이 형이··· 동생들 주라고··· 패, 팬더 인형도··· 만들어 주셨어요··· 보실래요? 여기···.”
“우와, 우와, 우와아, 너무 귀여워어어어—.”
“···헤헤···.”
평상시에도 거의 입을 열지 않는 인혁은 쏟아지는 질문에 난감해 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차분하게 팬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며, 가끔은 꽤나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다.
“인혁 오빠는 언제부터 이렇게 귀여웠어요?”
“제가 말입니까.”
“네, 진짜 넘 귀여우신데!”
“저는··· 저는 귀엽지 않습니다.”
“엥? 아니에요! 팬더 좋아하는 거 너무 귀여워요.”
“팬더···.”
“푸하핫, 팬더 얘기 나오면 왜 흐뭇하게 웃는 건데요.”
“팬더는 귀엽습니다. 하지만 전 귀엽지 않아요.”
“팬더를 좋아하는 오빠가 귀여운 거라고요.”
“그렇습니까.”
“아악, 웃는 거 봐—.”
질문을 주고받다 보니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아 맞다, 선물!”
찻집을 준비한 연지와 다른 운영진들이 총총총 달려가 선물박스를 들고 왔다. 세 멤버를 위한 선물이었다.
이렇게 직접 전달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추후 소속사를 통해 전달하려 했으나, 이렇게 직접 만났으니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오오—.”
예쁘게 포장한 선물박스를 개봉하자 세 멤버의 만면에는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것은··· 이것은 동양화 족자가 아닙니까?”
군자의 선물은 족자에 그린 초충도(草蟲圖)였다. 필치를 보아하니 전문적인 화공이 그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군자를 더욱 기쁘게 했다.
“여러분들이 직접 그린 그림이군요.”
몇몇 팬이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광경이었다. 사실 비싼 선물도 받아 본 적 있는 군자였으나, 그에게는 이렇게 정성과 노력이 들어간 선물이 더욱 소중했다. 그것을 준비한 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마음은 인혁과 유찬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유찬의 선물은 동생들과 함께 신을 수 있는 세 쌍의 수면양말이었다. 팬이 직접 만든 그 양말엔, 유찬 삼남매의 이니셜과 각자 좋아하는 동물이 수놓아져 있었다.
인혁의 선물은 가슴팍에 팬더 로고가 작게 그려진 바시티 자켓이었다. 의상을 전공하는 팬이 직접 제작했다는 바시티 자켓은, 커다란 인혁의 몸에도 세미오버한 핏으로 꼭 맞았다.
유찬과 인혁도 그 자리에서 선물을 직접 착용해 보였다. 유찬의 하얀 발에 귀여운 양말이 쏙 들어갈 때, 행복한 얼굴의 인혁이 바시티 자켓을 입고 팬더 로고를 쓰다듬을 때, 팬들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렇게 찻잔을 홀짝이다 보니 어느새 세 사람 앞에 놓인 잔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얘들아?”
이제 갈 시간이 되었다는 듯, 이용중 실장이 손목을 톡톡 두들기며 신호를 주었다. 군자의 입에서 말이 나오기도 전에, 팬들이 아쉬움이 탄식을 내뱉었다.
“아아—.”
팬들과 마찬가지로 군자 역시 아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용중 실장의 입장도 이해되는 바였다.
타나카의 행사가 끝나자 슬슬 생일찻집 근처에도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다. 거리의 시민들도 찻집 내부의 묘한 분위기를 인지한 듯, 안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누가 왔나?”
“왜 저렇게 몰려 있지?”
“무슨 강의 같은 거 하나···.”
팬들과 7IN 멤버들 모두 아쉬운 표정이었으나, 이제는 이 팬미팅을 마무리해야 할 때임을 모두가 통감한 것 같았다. 결심을 굳힌 군자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이제 딱 반 식경(半食頃, 약 15분 정도)만 더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아아아—.”
이제 반 식경이 얼마인지,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팬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목소리엔 아쉬움이 가득했으나 팬들도 이제는 더 이상 세 사람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통감한 듯 했다.
많은 질문을 할 수 없었으니 팬들도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나 참신한 질문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 저기··· 다음 활동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결국 팬들의 입에서 나온 것은 꽤나 뻔하고 흔한 질문.
그러나 동시에 많은 팬들의 궁금증이기도 했다.
연말까지 컴백할 수 있다면 연말 시상식에서 상을 탈 확률이 높아질 터, 그렇기에 팬들은 가능한 한 7IN이 빠르게 새로운 앨범을 들고 나타나기를 바랐다.
빠른 컴백이냐, 아니면 진득하게 정규앨범을 준비하느냐. 사실 멤버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허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지나치게 모든 것을 밝히면 안된다고 배웠다. 언제 어떤 변수로 계획이 변경될지 모르기에.
잠시 동안 고민하던 군자는, 대답을 정리했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