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
짬은 괜히 먹었겠냐
아이돌 활동을 시작한 이래, 군자는 꽤나 많은 귀인을 만나 왔다.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을 통해 만난 선생님들과는 아직도 자주 연락하며 사제지간의 정을 나누고 있다. 멤버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우연히 만난 영의정과 나우리 부부 역시 너무나도 소중한 인맥이었다.
의지가 되는 선배, 루나틱의 리온과 벨로체의 파엘도 빼놓을 수 없었다.
아이돌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은 이 선배들이었다. 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었음에도, 이 선배들이 있었기에 어엿한 아이돌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
리온과 파엘 모두 생색을 내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군자는 언제나 그들에게 마음 속 깊이 감사했다. 평소에도 안부 전화를 자주 걸었고, 틈만 나면 산수화며 초충도 같은 것을 그려 선배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형님, 파엘 형님. 전자우편함을 확인해 보십시오.”
- 전자우편? 그게 뭔··· 아, 이메일? 미친, 그걸 전자우편함이라고 하는 놈은 또 처음 보네.
“오늘따라 붓끝이 잘 움직이기에 한 장 그려 보냈습니다. 새벽녘 풀잎에 맺힌 이슬, 그 옆에 앉은 무당벌레 그림입니다.”
- 그, 그래? 고맙긴 한데 이걸 왜···.
“초충도는 부귀, 장수, 다산을 상징한답니다. 아무쪼록 형님께서 부귀하며 장수하고 다산하는 삶을 이루셨으면 하여.”
- 부귀랑 장수는 고마운데, 다산? 내가 출산까지 해야 하는 거니? 하하···.
“후후, 아이는 많이 가지셔야 합니다. 형님을 닮은 아이가 많이 나온다면 그 얼마나 위대하고 바람직한 일이겠습니까.”
- ···그래에, 내가 노력은 해 볼게··· 먼 일이겠지만 말이다···.
파엘의 반응은 종종 떨떠름했지만 군자는 괘념치 않았다. 소중한 형님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으니까.
얼마 전에는 직접 수를 놓은 손수건을 동료들에게 선물했다가 ‘유군자가 여섯 다리를 걸친다’는 웃기는 루머를 만들었으나, 그 역시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에게나 그러고 다닌다면 순 놈팽이임이 분명하겠지만, 소중한 사람들에게라면 얼마든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벨로체의 무대를 볼 때마다 본방을 사수한 뒤, 파엘에게 ‘잘 보았다’는 문자를 보내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정작 파엘은 ‘모니터링 당하는 기분이라 간지러워 죽겠다’는 반응이었으나, 군자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호오오···.”
벨로체의 무대는 볼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몸을 쓰는 방식, 신선하기 그지없는 동선, 단 한 순간도 빈틈 없는 표정까지. 이젠 나름 경력이 쌓인 군자였으나, 그럼에도 벨로체의 퍼포먼스는 확실히 퀄리티가 달라 보였다.
“형님, 오늘도 정말 잘 보았습니다. 연륜이 느껴지는 멋진 무대였습니다.”
- 너 임마··· 쉬는 날엔 게임도 좀 하고··· 우리 무대 좀 보지 말란 말야. 그리고 연륜이 뭐냐 연륜이. 나 아직 20대거든?
“하하, 워낙 어린 나이부터 아이돌 활동을 하셨으니 연륜이 쌓인 것도 당연하지요. 게다가 조선시대라면 이미 장성한 자녀를 두셨을 나이입니다.”
- 이 자식 이거 일부러 먹이는 것 같은데. 아무튼 무대 봐 줘서 고맙다. 뭐 부족해 보이는 부분은 없었고?
“무엇이 부족했겠습니까. 눈이 즐겁고, 귀가 즐겁고, 마음마저 즐거웠답니다. 형님, 부디 오래오래 아이돌 활동 해 주십시오.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초충도 한 장 더 보내겠···.”
- 아니아니아니, 괜찮아 괜찮아. 알아서 오래 살아 볼게!
이렇듯 먼저 연락하는 쪽은 대부분 군자였으나.
위이이잉—.
“어엇?”
이 날만큼은 파엘이 군자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파엘 형님!”
- 군자, 요즘 바쁘냐?
“열심히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기는 한데, 어떤 일이신지—.”
- 그래? 시간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예, 당장 활동 중인 것은 아니니 어떻게든 시간을 내려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 오케이, 그럼 우리 연말 시상식 무대 같이 할래?
“여, 연말 시상식 무대 말씀이십니까?”
- 응. 너희랑 우리 팀이 같이 하면 진짜 멋진 그림 나올 것 같거든.
“!”
파엘의 제안은 군자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벨로체 형님들과 같은 무대에 선다니.
경연에서는 항상 경쟁만 해 왔기에 합동 무대를 할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만약 같은 무대에 설 수 있다면, 군자로서는 그만큼 영광스러운 일도 없을 것 같았다.
“하고 싶습니다! 동료들에게 전달하겠습니다. 회사 측에도 여쭤 보겠습니다!”
- 그래, 일정 안 될 것 같으면 너무 무리하진 말고.
파엘은 ‘무리하지 말라’고 했으나 군자는 이미 무리할 준비를 끝낸 것 같아 보였다.
소식을 전하자 동료들은 모두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을 보였다.
“난 함. 무조건 고야.”
“나도 하고 싶어.”
“헉, 인혁이 형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요.”
“이 형 벨로체 엄청 좋아하잖아.”
“아하하핫, 나도 좋아~ 이런 기회가 흔한 건 아니니깐~”
“저도 하고 싶어여. 제가 언제 벨로체 형아들이랑 화음을 맞춰 보겠냐구여.”
“메쉬업 구성이면 편곡도 필요하겠지?”
“그렇겠지. 너가 또 고생 하겠구만.”
“후우, 고생은 무슨. 나 안 그래도 벨로체 곡이랑 우리 노래랑 메쉬업 습작 만들어 본 적 있는데, 은근히 잘 붙더라고.”
“···너 잠은 자는 거지?”
“···우, 우리가 안 밀리려면··· 연습을 더 해야 할 것 같아요···.”
“당연하지. 아마 더 고된 일정이 될 거다. 유찬아, 겁이 나느냐.”
“···그, 그래도··· 다 끝나고 나면 보람 있을 것 같아요···.”
반면, 솔라시스템의 서은우 팀장은 다소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비쳤다.
“연말 시상식 합동 무대라··· 흐음, 솔직히 조금 걱정되기는 합니다.”
“헉, 안 돼요 팀장님!”
“저도 흔쾌히 동의하고 싶습니다. 다만 한 가지, 선배 가수들과의 합동 공연이기에 여러분들이 들러리가 될까 걱정입니다.”
“아···.”
“물론, 벨로체 멤버들 역시 여러분들을 아끼고 있기에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 그럼 일단 하게 해 주시는 거죠?”
“예, 항상 말해 왔던 부분입니다만 그게 우리의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도록 돕는 것.”
“!”
“다만, 퍼포먼스 계획서를 제대로 검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공기화되지 않도록, 비중은 확실히 가져가고 싶으니까요.”
“감사합니다, 팀장님!”
그렇게, 7IN - 벨로체의 연말 시상식 합동무대 준비가 시작됐다. 2집 앨범을 준비하느라 바쁜 시기였으나 7IN 멤버들에게도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프로듀서 스칼렛 홀 역시 소년들의 입장을 이해해 주었다.
“걱정하지 마. 퍼포먼스도 K-POP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잖아. 이번 합동 퍼포먼스를 준비하면서 아마 너희도 새로운 영감을 많이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신 앨범 작업을 아예 놓으면 안 돼. 일주일에 두 번씩은 만나자고. 알겠지?”
새로운 앨범을 만드는 것도, 좋아하는 선배와 연말 시상식 무대를 만드는 것도 7IN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과업이었다. 무엇 하나 포기할 수 없었기에, 소년들은 휴식을 줄이고 더욱 열심히 무대와 앨범을 준비했다.
지난 몇 주 동안은 편안하게 놀면서, 자유롭게 소통하면서 앨범 스케치 작업을 해 왔기에 체력적인 부담은 없었다. 오히려 그 기간 동안 몸과 마음을 재정비했기에, 벨로체와의 연습에서도 기운찬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합동 공연을 위한 첫 연습에서부터, 소년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벨로체의 고막을 공격했다.
“선배님들, 안녕하십니까아—!!”
“아오, 귀 아파.”
“하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살살 하자 살살. 응?”
기세 좋게 인사는 했지만, 소년들은 서은우 팀장이 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합동 무대, 레전드 콜라보레이션, 다 좋지만 분량은 확실히 챙겨야 합니다.’
‘자칫 선배 가수의 들러리만 서다가 끝날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들에겐 의미 있는 무대일지 몰라도, 우리 팬들에겐 슬픈 일이 되겠죠.’
‘저 역시 그렇게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절대로 지지 마십시오. 쟁취해야 합니다.’
팬들을 위해서라도, 회사를 위해서라도 독해져야 한다고 했다. 서은우 팀장의 말을 떠올리며, 군자와 멤버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뭐야, 군자 표정이 왜 그래. 응가 마렵냐?”
“아, 아닙니다. 연습 전엔 항상 장을 비우고 온답니다.”
“···그, 그러냐?”
“예. 연습을 하다가 무언가를 살포하게 될 수도 있으니···.”
“그래 그래, 알았어. 너무 TMI다, 내가 괜한 걸 물어봤네. 무튼 긴장하지 말고, 우선 구성 회의부터 할까.”
“네 형님.”
“우리가 대략적으로 구성을 짜 봤는데 말야. 같이 한번 볼까?”
그렇게 이야기하며 파엘이 자신의 타블렛 PC를 꺼냈다. 긴장감이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분량을 사수해야 한다. 들러리가 되선 안된다···.
“자, 어때?”
“이, 이것은···.”
“왜? 좀 별로냐?”
파엘과 벨로체 멤버들이 짠 구성안을 본 멤버들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합동 무대에서 들러리가 되어 버리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만약 형님들이 그런 식으로 구성을 짜셨다면, 약간의 갈등을 겪는 한이 있더라도 분량을 사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엘이 보여준 구성안 속에서, 7IN은 전혀 들러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선배 가수 벨로체가 7IN의 뒤를 받쳐 주는 구성이 많았으며, 대부분의 킬링 파트는 7IN 멤버들에게 배정되어 있었다.
리더 파엘을 돌아보며, 군자는 코끝이 시큰거림을 느꼈다.
이번에도 내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못난 걱정으로 파엘 형님과 벨로체 형님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구나!
“···형님들···.”
“우선은 요렇게 짜긴 했는데, 뭐 너희 의견이 있음 얼마든지 변형 가능해.”
“이, 이런 구성은···.”
“왜? 우리 분량이 너무 작은 것 같아서?”
파엘은 군자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건조하게 말했다. 군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파엘과 벨로체 멤버들은 딱히 별 상관도 없다는 듯 군자의 등짝을 팡팡 두들겨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우리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시상식에서 레전드 무대 만들었는데 뭐.”
“···.”
“너네도 보고 왔을 거 아냐, 유튜브에 올라가 있는 거. 우리랑 루나틱이랑 같이 한 건데.”
“···.”
“뭐야, 왜 말이 없어? 설마 안 봤냐? 아니 남돌이라는 것들이 그걸 안 보면—.”
“봤습니다. 몇 번이고 봤습니다. 저의 최애 영상 중 하나입니다. 볼 때마다 엄지척도 누른답니다.”
“그, 그래? 그거 누를 때마다 취소되는··· 아니, 뭐 그래. 그건 됐고. 아무튼, 우리는 이 무대에 딱히 욕심 없어. 그냥 너네랑 같이 재미있는 거 하고 싶어서 부른 거야.”
“그래도···.”
“게다가, 우리는 분량 적어도 상관 없어.”
그렇게 말하는 파엘의 눈빛이 투쟁심으로 반짝 빛났다.
“우리는 이 작은 파트만 가져가도 씹어먹을 수 있거든.”
“!”
“짬은 괜히 먹었겠냐,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