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
분노의 양궁
32강에서도 군자의 ‘퍼펙트 세트’ 행진은 이어졌다.
퍼억, 퍼어억, 퍼어어어어억—!!
[10점, 10점, 또 10점입니다아아—!! 유군자 선수, 망설임이 없습니다! 마치 10점을 쏘는 것이 이미 정해진 일이라는 듯,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화살을 꽂아넣습니다—!!]
[주어진 준비 시간을 다 쓸 생각도 없어 보입니다!! 화살을 시위에 걸자 마자 망설임 없이 팔을 뒤로 당깁니다!! 과녁을 확인한 뒤엔 거침없이 화살을 발사합니다!!]
[상대인 브라질의 에드손 알바레즈, 당황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입니다!! 아마존의 엘리트 궁사도 유군자 선수를 당해 내기엔 역부족인 것 같네요—!!]
에드손 알바레즈 역시 첫 세트에서 29점, 두 번째 세트에서 28점을 쏘며 분전했다.
올림픽 기준으로도 결코 나쁘지 않은 스코어였으나, 군자의 세트별 점수는 30 - 30 - 30.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단 아홉 발의 화살로 경기를 마무리한 군자였다.
퍼어어어어어억—!!
마지막 화살이 과녁의 한복판에 꽂힌 순간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나며 환호성을 질렀다. 64강 때보다 두 배는 더 큰 소리였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경기 끝납니다아아—!! 유군자 선수, 정말 딱 아홉 발의 화살만으로 경기를 끝냅니다!! 30-29, 30-28, 30-28—!! 최종 스코어 6-0으로 유군자 선수의 완승입니다—!!]
[에드손 알바레즈 선수,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듯 웃으며 유군자 선수와 악수를 나눕니다!! 64강 때와 비슷한 훈훈한 풍경이 연출됩니다!! 중국 선수들과는 날을 세운 신경전을 벌인 유군자 선수입니다만, 오늘은 전혀 다른 모습이군요—!!]
[모든 화살을 10점에 꽂아 넣겠다는 공약을 실현시킨 유군자 선수입니다!! 마치 무하마드 알리, 베이브 루스와 같은 전설을 연상케 합니다!! 이 선수, 과연 어디까지 올라가려는 걸까요—!!]
군자의 선전은 동료 국가대표인 덕준, 한영에게도 자극이 된 듯 했다. 덕준과 한영 역시 32강 상대를 각각 6-0의 스코어로 물리치며 무난하게 16강에 진출했으니.
그렇게 올라간 16강, 마침내 첫 한 - 중 대결이 펼쳐졌다. C블록의 덕준이 중국의 쉬웨이준을 만나게 된 것.
“와, 진짜 절대로 지기 싫으네.”
“덕준아, 평소대로만 쏴. 네 실력만 제대로 발휘하면 절대 질 일 없으니까.”
“오케이. 어제는 잠도 잘 잤고, 산수화도 세 장이나 그렸다고. 컨디션 최상이야.”
중국의 쉬웨이준은 지금까지 쉽게 물리쳐 온 상대와는 다른 기량을 가진 선수였다.
[10 - 10 - 9입니다!! 첫 세트부터 29점!! 엄청난 고득점 기록하는 쉬웨이준 선수—!! 만점에서 딱 1점이 모자란 스코어입니다!!]
[29점을 기록한 뒤 자랑스럽다는 듯 김덕준 선수 쪽 바라보는 쉬웨이준입니다!! 확실히 김덕준 선수에게도 넘기 힘든 벽이네요!! 이번 세트를 가져오기 위해선 무조건 30점을 쏴야 합니다—!!]
그러나 덕준의 말처럼, 그의 컨디션은 오늘 최상이었다.
퍼어억, 퍼어어어억, 퍼어어어어어억—!!
[10점!! 10점!! 또 10점입니다아아아—!! 세상에, 세상에, 이번엔 김덕준 선수가 퍼펙트 세트를 선보입니다—!!]
[김덕준, 이번 대회 첫 퍼펙트 세트입니다!! 논란의 여지 없이 완벽한 10 - 10 - 10—!! 멋집니다, 화살이 꽂힌 위치도 세 발 모두 거의 정중앙이에요—!!]
[완벽하게 쉬웨이준을 제압한 뒤,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중국 쪽 벤치를 바라봅니다!! 한국 선수 중에 가장 호전적이고 도발적인 성향을 가진 선수가 바로 김덕준이죠!!]
첫 세트를 빼앗긴 쉬웨이준이 어금니를 뿌득 갈며 다음 세트를 준비했다.
2세트는 29 - 29 동점. 사이좋게 1점씩을 나누어 가지며 세트 스코어는 3-1이 되었다. 이어진 3세트, 이번에도 쉬웨이준은 29점을 쏘았으나 덕준이 한 발의 미스샷을 기록하며 28점을 기록, 스코어는 다시 3-3 동점이 됐다.
[김덕준, 쉽지 않은 경기입니다!! 중국의 쉬웨이준이 일관된 경기력을 선보이며 김덕준을 바짝 추격합니다—!!]
[쉬웨이준, 굉장히 일정한 호흡으로 화살을 쏘는군요!! 반면 김덕준 선수, 한 번 탄력을 받으면 불붙는 스타일입니다만··· 지금은 흐름이 좋지 않습니다!!]
“후우, 후우—.”
코너에 몰린 덕준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상대 쉬웨이준을 바라보았다. 동점을 만들어 낸 쉬웨이준은, 마치 가소롭다는 듯 덕준을 보며 썩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니 눈에 불이 퍽 들어오는 덕준이었다.
“아오, 저 놈이 진짜···!”
“덕준, 덕준! 호흡 가다듬어. 차분하게, 차분하게 가자 우리!”
“코치님! 저 그냥 과녁 말고 저 놈 쏴 버리면 안 돼요?”
“이 놈아, 침착함 유지하라니깐—.”
대표팀 오진식 코치는 덕준을 진정시키기 위해 쩔쩔맸으나, 오히려 한영과 군자는 그런 덕준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형님, 덕준이가 화가 단단히 났나 봅니다.”
“하하, 그러게.”
“덕준이는 항상 화가 나 있을 때의 점수가 더 좋지 않았습니까.”
“맞아. 저 중국 선수가 아직 우리 덕준이를 잘 모르네.”
한영과 군자의 말처럼, 덕준은 분노와 꽤나 궁합이 좋았다.
“우씨, 저거 나 비웃은 거 맞지?”
퍼어억—!!
[김덕준, 10점.]
“내가 다른 선수들은 몰라도···.”
퍼어어어어억—!!
[김덕준, 10점.]
“중국 선수들한테는 절대로—.”
퍼어어어어어어억—!!
[김덕준, 10점.]
“절대로 안 질 거라고!”
[기, 김덕준 퍼펙트 세트으으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기가 막힌 기량을 선보입니다—!! 놀라운 반전입니다!! 흐름을 타지 못한 것 같아 보였으나, 놀라운 샷의 연속으로 반전을 만들어 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표정이 없던 쉬웨이준, 처음으로 당황합니다!! 그런 쉬웨이준 선수를 보며 가슴팍을 쾅쾅 두들겨 보이는 김덕준 선수!! 양궁 선수로서는 드물게 공격적인 쇼맨십을 가진 선수입니다—!!]
이어진 세트, 쉬웨이준은 떨어지지 않는 기량을 선보였지만 그의 하이스코어는 29점이었다.
반면 덕준의 분노는 사그라들 줄 몰랐다.
퍼어억, 퍼어어억, 퍼어어어어어억—!!
[또, 또 퍼펙트 세트입니다아—!! 김덕준, 2연속으로 완벽한 경기력 선보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눈에 불이 들어오더니, 단 한 발을 놓치지 않으며 10점 행렬을 이어가는 김덕준입니다—!!]
[화난 김덕준, 이거 못 막습니다!! 중국의 쉬웨이준, 괜한 도발이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니까 왜 우리 덕준 선수를 화 나게 했나요, 하하하하—!!]
“앗싸아아아—!!”
2연속 퍼펙트 세트를 기록한 덕준은 고함까지 질러 가며 화려한 세레모니를 펼쳤다. 그 불 같은 기세에, 이제는 중국의 쉬웨이준 쪽이 완전히 눌려 버리고 말았다.
“젠장, 저 자식···.”
“쉬웨이준, 쫄지 마. 넌 너의 경기를 하면 돼. 침착하게, 차분하게, 쏘던 대로 쏘란 말야. 알았지?”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훈련한 대로 화살을 날린 쉬웨이준이었으나, 마지막 세트에서조차 그는 29점의 벽을 넘지 못했다.
퍼어어억—.
[마지막 화살 9점에 꽂힙니다아아아—!! 마지막 세트 30 - 29—!! 김덕준 선수가 16강 한중전에서 승리하며 다음 라운드로 진출합니다아—!!]
[동점까지 따라잡히며 위기 맞나 했지만, 중반 이후 놀라운 기량으로 경기 다시 뒤집어 버리는 김덕준이었습니다!! 정말 불 같은 경기였습니다—!! 과녁을 보는 이글이글한 눈빛, 다시 한 번 보시죠—!!]
[중국 대표팀의 막내 쉬웨이준, 완전히 멘탈 털려 버린 모습입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경기력을 선보였으니, 어떤 선수라도 쉬웨이준을 당해 내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걸 김덕준 선수가 해냅니다!! 29점도 높은 점수입니다만, 30점을 이길 수는 없죠—!!]
승자인 덕준에게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쏟아졌다. 일방적인 경기가 아니었던 만큼, 그 긴장감은 그 어떤 경기보다 높았다.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오진식 코치도 덕준을 와락 끌어안으며 껄껄 웃었다.
“이 놈아, 16강에서 떨어지는 줄 알았다!”
“코치님, 제가 그랬잖아요! 중국 선수들한테는 죽어도 안 진다고요!”
“난 네가 화를 내길래, 평정심 잃어버린 줄 알고 걱정했지. 그런데 이제 보니까 넌 좀 화가 나야 더 잘 쏘는 것 같네!”
“헤헤, 그런가요? 그럼 맨날 중국 애들 생각하면서 쏴야겠네.”
한영과 군자 역시 덕준을 끌어안으며 그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축하해, 덕준!”
“영이 형, 나 마지막에 어땠어! 괜찮았지?”
“그럼, 너무 멋지더라. 너 화 난 것 같길래 거기서 딱 확신했지. 원래 넌 좀 열받아야 더 잘 쏘잖아, 하하.”
“뭐야, 형이랑 군자는 알고 있었던 거야?”
“후후, 덕준아. 이제 한두 경기만 더 이긴다면 우리가 서로 만나게 되겠구나.”
“···그러네. 4강까지 가면 만나기 싫어도 만나게 될 테니까.”
“우선 눈앞의 경기들부터 잘 해내자. 군자 말대로, 아직은 경기가 남아있으니까.”
가장 먼저 8강에 진출한 덕준에 이어, 이번엔 한영과 군자가 각각 8강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고한영, 완벽한 경기입니다!! 30 - 29 - 29, 최종 스코어 6대 0으로 미국의 윌리엄 헨드릭스 깔끔하게 제압합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일정한 표정입니다!! 입가에 걸린 옅은 미소를 결코 잃지 않으며, 아름다운 양궁을 선보입니다!!]
[팀 동료 김덕준 선수와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경기입니다!! 얼음처럼 차가운 심장을 유지하며 연달아 고득점을 올립니다—!!]
한영은 미국의 윌리엄 헨드릭스를 깔끔하게 제압했으며.
[유군자, 또, 또, 또 아홉 발 모두 10점입니다아아—!! 이게 말이 됩니까—!? 이번에도 공약 실천해 내는 유군자!! 놀랍습니다!! 30 - 30 - 30, 깔끔한 스코어보드입니다—!!]
[16강 상대였던 이탈리아의 마르코 비아니, 완전히 유군자의 팬이 되어 버린 듯한 표정입니다!! 경쟁이고 자시고, 군자를 끌어안으며 ‘Gracias’를 외치는 마르코 비아니!! 뭐가 엄청 고마운가 본데요, 하하하—.]
군자는 다시 한번 30 - 30 - 30의 스코어로 이탈리아의 마르코 비아니를 물리쳤다.
이제 4강에 이르기까지 남은 경기는 단 하나. 그러나 대진은 점점 더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쉬운 대진을 받은 덕준과 달리, 한영은 8강 무대에서 중국의 차봉 왕하오핑을 만났으며, 군자는 캐나다의 우승후보 저스틴 킹과의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이제 이 한 경기만 이긴다면, 4강 무대에서 한국 선수끼리의 대진이 성사될 수 있었다. 대회를 시작하며 이야기했던 ‘메달 싹쓸이’를 실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