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사생활?
사로 앞에 쓰러진 리장량, 그리고 그에게 손을 내미는 한국 선수들의 모습이 중계 카메라를 통해 전세계로 송출되고 있었다.
[아아, 시상대에 오르기 전 한국 선수들이 한 곳에 모입니다!! 그곳은 카메라 앞이 아닌 리장량 선수의 사로 근처입니다—!!]
[한국 선수들, 내내 신경전을 벌였던 리장량 선수에게 손을 내미는군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리장량 선수,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한국 선수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봅니다. 아직도 패배의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한 얼굴인데요—.]
카메라가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촬영하고 있었지만 한국 선수들은 개의치 않으며 리장량에게 계속해서 손을 뻗었다.
많은 이들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특히 한국인들은 중국 선수들이 끝까지 철저히 뭉개지기를 바랐으니, 마지막에 손을 내민 한국 선수들의 태도가 탐탁치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보며 야유나 비난을 퍼붓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짝짝짝—···.
한인, 현지인,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대부분의 관객이 한국 - 중국 사이의 신경전에 대해 알고 있었다. 중국이 먼저 도발과 공격으로 악연을 만들기 시작했으니, 한국 선수들이 이들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해도 모두 이해했을 터.
그러나 마지막 순간 한국 선수들이 보인 관용은 모두를 감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멋져···.”
TV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연지도 손이 닳도록 박수를 보냈다.
“뭐야, 이러면 인터뷰에서 중국 욕은 안 하겠네.”
“야, 뭔 중국 욕이야. 군자가 미쳤냐?”
“아니 뭐··· 그러면 재미있을 것 같단 말이지.”
마지막까지 시원한 사이다를 기대했던 동생 연준도, 그런 한국 선수들의 모습을 보며 묘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꼭 끝까지 공격하고, 물어뜯고, 비난과 비방으로 마무리해야 속이 뻥 뚫리는 것은 아니구나.
온라인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시청자들 역시 한국 선수들의 그런 태도에 감동받은 듯, 박수 이모티콘을 쏟아내고 있었다.
[(박수)(박수)(박수)(박수)]
[멋지다,,, 저게 진짜 위너지]
[욕터뷰 기대했던 나새끼 반성해]
[ㅋㅋㅋㅋ근데사실나도,,,ㅋㅋㅋㅋㅋ]
[아니 누가 저렇게 멋지게 대응할수있겠냐구]
[나같으면 중국쪽 사로에 침뱉고갔음ㅋㅋㅋ]
[그것도 재밌긴 했겠닼ㅋㅋㅋㅋㅋ]
[근데 이게 내가 아는 올림픽이긴함]
[ㅁㅈㅁㅈ 세계인의축제자나··· 서로 존중하는게 맞다고]
[이상한애들때매 병림픽 될뻔한거 한국선수들이 다시 갓림픽 만들어줌ㅎㅎㅎㅎㅎ]
[리장량 쟤도 지고 나서 멘탈 터진거 보니까 좀 안쓰럽긴했어]
[응 자업자득이야~]
[ㅋㅋㅋ누가 자업자득 아니라고 했냐구··· 자업자득 맞는데 그냥 짠하다는거지ㅇㅇ]
[맞아 쟤네도 다 20대 초중반이잖아ㅠㅠㅠㅠ]
[우리 팀 선수들이 으른 같은 모습 보여줘서 뿌듯,,,]
[관객석 사람들 다같이 일어나서 박수 쳐주는거 존멋이야ㅠㅠ]
[나도 쇼파에서 일어나서 개같이 물개박수 치는중]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참 멍하니 한국 선수들을 바라보던 리장량도 이내 그들의 손을 붙잡았다. 이미 넋이 나가 버린 리장량은, 그간의 적개심 따위는 잊어버린 듯 글썽이는 눈망울로 한국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미, 미안···.”
중국어를 능숙하게 할 수는 없었으나, 한국 선수 셋 모두 리장량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한국 선수들의 손을 잡고 일어나는 리장량의 모습을 보며, 한국의 중계진도 감동을 받은 듯 속사포를 쏟아 냈다.
[중국의 리장량, 한국 선수들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났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남자 양궁 개인전입니다만, 마지막엔 한국 선수들의 관용이 빛나는군요—!!]
[이게 제가 알던 올림픽의 모습입니다!! 한국 선수들이 올림픽을 다시 올림픽답게 만들었습니다—!!]
[한국 선수들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는 리장량, 포옹··· 까진 안 하는군요!! 하긴, 그렇게까지 하는 건 조금 오버긴 하죠!!]
[하지만 이렇게 마지막엔 손을 잡는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또 먼저 손을 내민 것이 한국 선수단이라는 사실도 참으로 뿌듯합니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를 들으며 리장량과 중국 선수단은 조용히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대기를 가득 메운 박수 소리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닌 한국 선수들이었다. 제 아무리 철없고 눈치가 없어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젠장···.”
“리, 다음엔 꼭 이겨 버리자.”
“그래야지.”
그때는 사술이 아닌 제대로 된 실력으로.
대표팀 막내 쉬웨이준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형들에게 처음으로 진심 어린 한 마디를 건넸다.
“그런데 있잖아.”
“···?”
“한국 애들 말야.”
“응.”
“정말 더럽게 잘하긴 하더라.”
“···.”
* * *
[남자 양궁 개인전, 대한민국 선수단 금 - 은 - 동 싹쓸이!]
[시상대 위에 선 세 명의 한국인, 울려퍼지는 애국가에 경기장은 감동의 물결.]
[고한영, 30-30-30 퍼펙트 게임으로 중국 주장 리장량 제압하며 동메달 획득··· 2연속 올림픽 메달리스트 위업 달성.]
[중국에 4전 4승 거둔 대한민국, 양궁 한중전 완벽한 승리!]
[경기 종료 뒤 중국에 관용 보인 대한민국 선수단, 올림픽 정신 되새기게 해 준 ‘승자의 품격’.]
[주장 고한영, “기후 적응은 끝났다. 이제는 단체전에 집중할 것.”]
역대급으로 많은 관심이 몰렸던 올림픽 남자 양궁 개인전 종목은 결국 한국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양궁은 수십 개의 나라가 열심히 활을 쏘다가 결국 한국이 우승하는 경기’라는 오랜 격언이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한국 선수들이 금 - 은 - 동을 모조리 싹쓸이해 버린 것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특히 전 경기 퍼펙트게임을 달성하며 올림픽 역사에 이름을 새긴 유군자, 그런 유군자에게 2점이나 빼앗으며 저력을 보인 김덕준, 어깨 부상을 안고도 동메달 결정전에서 완벽한 경기를 펼친 고한영 등 모든 선수에게 서사가 있었기에, ‘양궁소년단’의 인기는 천장을 뚫고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절정의 순간은 세 선수가 나란히 시상대에 오른 순간이었다.
찰칵, 찰칵, 찰칵—···.
몰려든 촬영 인파는 이들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관객 사이엔 심지어 남자 100m의 유력 우승후보인 자메이카의 칼럼 볼트도 있었다.
“헤이, 헤이, 나 너네들 존나 좋아해! 악수 한 번만 하자!”
“오오! 재빠르신 분 아니오!”
지난 올림픽 최고의 스타와 2024 올림픽의 라이징 스타가 손을 맞잡는 모습은 모든 언론 기사의 1면을 장식하기에 충분했다.
중반부터는 한국 대 중국의 대결 구도로 수많은 이야기를 남겼지만, 역시 마지막 순간 가장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현역 아이돌 유군자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이었다.
아이돌이 국가대표 자격으로 올림픽에 나온 것만으로도 엄청난 화젯거리인데, 그 아이돌이 당당하게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것도 올림픽 역사상 최고 점수까지 기록하면서.
금메달을 깨물며 환하게 웃는 군자의 사진은 전 세계 언론 포털의 메인 화면에 대문짝만하게 걸렸다.
수많은 외신에서 이 사건을 ‘충격’이라 표현했다. 군자의 금메달 소식을 대서특필한 것은 물론, 특집 칼럼까지 써 가며 이 놀라운 소식을 방방곡곡에 전달했다.
[2024년 파리 올림픽, 칼럼 볼트를 비롯한 수많은 스타들이 출전했으나 가장 또렷하게 빛난 별은 대한민국의 유군자일 것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경기장보다 무대 위에서 존재감을 뽐내던 그는, 돌연 2024 올림픽을 위한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석하여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양궁계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대한민국 양궁 대표 선발전은 올림픽 본선보다도 어렵다는—···.]
[···—퀄리피케이션 라운드부터 세계신기록을 작성하며 범상치 않은 시작을 보인 소년은, 본선부터 30-30-30 행진을 이어 가며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하이라이트는 중국의 리장량과 대결한 4강전일 것이다. 모든 화살을 10점에 꽂아 넣는 것도 모자라, 한 경기에서 세 번의 ‘로빈 훗 애로우’라는 진기명기까지 선보이며—···.]
경기 리뷰 기사는 물론 올림픽 기간 내내 군자가 입은 옷과 팬으로부터 받은 선물, 훈련을 포함한 하루 일과까지 모든 것이 기사거리가 됐다. 올림픽 시작 전엔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을 것이라 예상했던 칼럼 볼트도 이 정도의 주목을 받진 못했다.
2024 파리 올림픽이 개막한지도 꽤 되었으나, 지금까지 모든 종목을 통틀어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것은 남자 양궁 개인전 4강, 유군자 대 리장량의 경기였다. 올림픽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육상, 수영 등 인기 종목조차도 이 경기의 시청률을 뛰어넘지 못했다.
야무지게 금메달을 깨무는 군자의 모습, 포디움의 중앙에 서서 울려퍼지는 애국가를 함께 제창하는 모습, 시상대에서 내려오며 뜨거운 포옹을 나누는 양궁소년단 멤버들과 눈물범벅이 된 오진식 코치의 모습까지.
연일 쏟아지는 신박한 클립과 움짤에, 군자의 팬들은 혼절할 지경이었다.
[시상대 군자 움짤 다른 각도 모음.gif]
[온힘을다해 애국가 열창하는 군잨ㅋㅋㅋㅋ.shorts]
[사실 울보였던 대표팀 코치 진식쨔응.gif]
[유군자 김덕준 고한영 동시 광대승천짤.gif]
[아ㅏㅏㅏ 미친 잠깐 멈춰줰ㅋㅋㅋㅋㅋ앜ㅋㅋㅋㅋ]
[아니 뭔ㅋㅋㅋㅋㅋㅋㅋ영상이 이래 쏟아지는데]
[아 근데 하나하나 다 너무 귀엽고 멋지고 심장뜀ㅠㅠㅠ]
[내아이돌이 올림픽 금메달이라니 이게 진짜 실화맞냐구]
[애국가 나올때 나도 가슴 웅장해짐 후우ㅜㅜㅜ]
[군자 애국가 열심히 부르는거봨ㅋㅋㅋㅋㅋㅋ]
[발성이 올림픽 음향 뚫고나옴ㅋㅋㅋㅋㅋ]
[난 군자 올림픽 참가만으로도 엄청 의미있다 생각했거든? 근데 여기서도 어뜨케 주인공이 돼버리는걸까,,, 나 진짜 콩깍지가 아니라 이렇게 완벽한 남자 본적이업슴]
[새로운 친구 사귄것도 너무 뿌드슈ㅠㅠㅠ]
[ㅁㅈㅁㅈ 덕준이 한영옵 다 너무 좋은 사람들인것 같아]
[한영옵 부상 치료 잘 하고 다시 돌아왔으면ㅠㅠ]
[후우,,, 이제 개인전 끝났으니까 구···ㄴ···대···얘기··· 좀 해두대낳ㅎㅎㅎ]
[ㄴ 쉬잇]
[ㄴ 아직 단체전 안 끝났자나]
주체할 수 없는 환희에 젖어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군자의 팬들은 예민한 떡밥을 함부로 꺼내지 않으며 차분히 군자의 다음 행보를 기다렸다. 올림픽 대표팀 선발전부터 금메달을 딴 순간까지, 팬들의 의도는 다분히 명확했다.
군자로 인한 그 어떤 논란도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러나 몇몇 기자들은 팬들과는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양궁 개인전이 끝나기도 전에, 군자는 이미 올림픽 최고의 스타로 주목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파리의 선수촌 주변에 모인 타블로이드지 기자들이 이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그 유군자라는 놈, 우리가 한 번 파 보면 어떨까.”
“양궁 금메달 땄다는 그 친구 말이지?”
“응. 개인전은 끝났지만, 아마 단체전 일정 때문에 조금 더 파리에 머물 거야. 그 이후에도 어떤 이유 때문에 파리에 더 체류할 수도 있고.”
“어떤 이유?”
“글쎄에, 뭐 여자 문제일 수도 있고.”
“흐음, 사생활은 깨끗한 친구라고 들었는데—.”
“또 모르지. 올림픽 선수촌은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곳이잖아?”
어그로 전문 기자 브래들리 존스는 그렇게 말하며 히죽 웃어 보였다.
“그 녀석, 사생활을 한 번 캐 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