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작가 우하루-14화 (14/69)

14화. 내 심장 지금 사춘기인 거 맞네

“하루야!”

뭐지.

이 비현실적인 느낌은.

왠지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듯하다.

아니, 어쩌면 잠시 시공이 멈춰선 것인지도...

햇살과 어우러져 눈이 부시게 환한 그녀의 모습.

학교에서 아지트에서 그렇게 매일같이 보는데.

그리고 불과 몇 시간 전 시험장에 들어갈 때에도 봤었는데, 지금은 왜 이리 느낌이 다르고 아련한 걸까.

‘내 심장도 사춘기로 돌아간 건가.’

그게 과연 가능한 걸까.

하긴, 몸은 심장으로만 구성돼 있지 않다.

그러니 다른 부분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우하루는 지금 완벽히 열다섯 꽃피는 소년이다.

살랑살랑 순전하고 애틋한 사춘기 소년의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어, 세영아.”

간신히 제정신을 차린 그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치미 뚝 떼고서 그녀를 맞이했다.

그러자 그녀의 환한 미소가 눈을 간질였다.

“언제부터 나와 있던 거야?”

“난 좀 됐는데. 넌 어떻게 벌써 나왔어?”

“벌써라니. 한참 됐는데.”

우하루가 그제야 시간을 확인했다.

떠오른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몇 가지의 구상을 끄적거리다보니 벌써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린 것.

“아, 그렇구나.”

“뮤지컬 전공하고 문창과는 아직 좀 더 있어야 되나 봐. 끝날 기색이 안 보이네. 하루 넌 시험 잘 봤지?”

“최선을 다하긴 했는데, 모르겠어. 세영이 넌?”

“나름 괜찮게 본 거 같아. 긴장했는데 막상 들어가선 떨리지 않아서 다행이었어.”

“잘 됐다. 너야 뭐 베테랑이니까.”

“베테랑은 무슨. 하루야, 우리 좀 걸을까? 학교 구경하고 싶다.”

이미 둘러봤지만 우하루는 그녀를 위해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예쁜 교정 여기저기를 눈에 담으며 거닐었다.

아까 거닐었던 곳들인데 강세영과 함께여서 그런지 또 느낌이 다르다.

사이드에 있는 건물 뒤편에 작은 연못가로 다시 왔다.

그 안에 몇 마리의 금붕어가 보였다.

아까 하루도 한참을 쳐다봤던 놈들.

역시나, 강세영이 너무 좋아한다.

그녀가 하늘을 향해 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우리 꼭 여기 함께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역시나 우하루와 마찬가지로 송하예고 교정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렇게 될 거야.”

“하루 너하고 3학년 올라오면서 한 반이 되고나서 곧바로 내가 드라마 촬영 들어갔잖아.”

그건...하루는 모르지.

“그랬구나.”

“그래서 서로 알 기회도 없었고, 아쉬웠어.”

“나도 마찬가지야.”

“네 상황을 알게 되고 나서도 내가 도움이 될 수가 없는 게 안타까웠고.”

“친구가 꼭 뭔가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어.”

“알아. 더구나 친해지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혹시...내가 불쌍해서?”

언젠가 한 번 물어보고 싶은 말이었다.

강세영이 그에게 먼저 다가와주고 결정적 순간에 도와줬던 게 과연 동정심 때문이었을까 하는, 일말의 우려랄까.

그의 말에 시선을 우하루에게 향하는 강세영.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순백의 미소를 지었다.

“아니. 네가 마음에 들어서. 네가 좋은 사람이어서.”

그녀의 진심이 때 아닌 나비처럼 날아서 그의 가슴에 앉았다.

“정말이야. 그래서, 비록 사소하지만 저번에 내가 네게 도움이 됐을 때 기뻤어. 좋은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나쁜 인간들한테 당하는 건 정말 싫고 분했거든.”

“사소할 리가. 네 용기 덕분에 내 삶이 달라졌어.”

“와, 그렇게까지? 그랬다면 너무 기쁜데.”

“정말이야.”

“하루야!”

강세영이 아예 우하루의 앞에 그를 마주보고 섰다.

그녀의 향기가 주위를 뒤덮었다

게다가 하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주위에 사람이 없다.

“응.”

“난, 너하고 여기를 꼭 같이 다니고 싶어. 그리고 그동안 함께 못해 봐서 아쉬웠던 많은 것들을 함께 하고 싶어.”

“나도...마찬가지야.”

“정말?”

“음. 진심.”

“아마 여기 다니더라도 가끔은 내가 작품을 찍게 되면 한동안 못 보고 그렇게 될 거야.”

“그렇겠지.”

“그래도 난 우리가 멀어지거나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럴 리는 없어, 전혀.”

강세영의 우려에 우하루는 즉각 부정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고마워, 우하루.”

“솔직히 여기 지망한 건 내 꿈을 이루기 위함도 있지만, 어쩌면 너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나 때문에?”

“응.”

“너 혹시...나처럼 우리가 서로 사...”

그 때.

갑작스런 인기척이 분위기를 깨버렸다.

“오! 하루하고 세영이 벌써 나와 있었네!”

이런...

이 중요한 순간에.

윤준환 얘는 가끔가다 결정적인 순간에 산통을 깨는 버릇이 있다.

혹시, 노리고 그러는 건가.

하지만 그건 비단 이 친구 뿐만은 아닌 듯.

“얘들아!”

오지윤마저 모습을 드러냈다.

우하루는 강세영이 하려던 말이 정말 궁금했지만, 아무래도 지금 듣기는 틀린 모양이다.

잠시 둘이었던 두 사람은 다시 넷이 되었다.

*****

송하예고 입시 실기시험과 면접이 모두 끝났다.

네 명 모두 최선을 다 했고, 또 나름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았다.

워낙 각오와 의지가 대단했기에 그만큼 준비를 열심히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방심은 금물이다.

괜히 마음 놓고 있다가 내신에서 망하면 도루묵이 되기 때문.

남은 시험들에서도 최대한의 성적을 거둬야 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오늘도 그들은 아지트에 모여서 함께 공부 중이다.

“자, 얘들아. 이거 먹고 해.”

잠깐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올라온 강세영 이모.

그녀의 손에는 치킨이 들려 있었다.

“와아!”

“이모, 사랑해!”

“감사합니다!”

아지트 안에 환호가 일었다.

“하여튼, 이것들. 이럴 때만 애교지. 나한테 고마워할 거 없어. 세영이 너 엄마가 시켜준 거니까.”

“우리 엄마가?”

“그래.”

“역시. 그래도 어쨌든 이모가 가져다 줬잖아. 고마워. 근데 이모는?”

“나도 아래 조금 남겨놨어. 배고파서, 호호.”

“잘했어, 이모. 같이 드시면 좋을 텐데.”

“그렇다고 문 닫을 순 없지. 어서 많이 먹고 열심히 해서 다들 원하는 데 딱 붙어라!”

“넵!”

“꼭 해내겠습니다!”

치킨 하나에 기세가 지붕을 뚫을 것 같다.

내려갈 것 같던 강세영 이모가 다시 한 번 우하루를 돌아본다.

“그래. 오늘도 우리 하루는 잘 생겼네. 호호. 배우 하는 게 더 좋을 것을.”

“아유, 엄마나 이모나 하루한테 아주 푹 빠지셨네. 이모, 어서 내려가셔. 손님 오시겠어.”

“알았다.”

그녀의 우하루 편애는 오늘도 여전했다.

모두가 치킨에 달라붙었다.

프라이드, 양념, 파닭. 치킨무!

종류도 가지가지.

먹성 좋을 때인 그들은 정신없이 먹어치웠다.

닭의 처절한 비명이 난무할 것 같은 전투가 끝나고.

네 명은 소파에 널브러졌다.

그 많던 치킨들, 금세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와, 진짜 맛있다.”

“그러게. 저녁 먹었는데도 맛있으니까 또 들어가네.”

“밥은 밥이고 치킨은 치킨이지. 위가 달라요.”

“뭐래.”

“좀 쉬었다 하자!”

저마다 자리를 잡고서 널브러진 아이들.

오지윤은 소파에 편하게 눕다시피 한 채로 태블릿에서 너튜브 앱을 켰다.

잠시 후.

“와, 드디어 내가 좋아하는 ‘조셉 버튼’ 감독 신작이 나오는구나. 이번엔 넷플럭스네. 그것도 8부작으로! 신난다!”

“정말? 뭔데, 제목이?”

“오르테가의 비밀!”

“오, 이번에도 코미디 스릴러인가 보네?”

“맞아. 완전 재미있을 것 같아. 미국에서도 초기대작이라고 난리 났어.”

화장실에서 손을 닦고 물을 마시며 들어오던 우하루.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왜 그래, 하루야?”

“아, 미안. 사래가 좀 들렸나 봐. 물이 잘못 들어갔어.”

“등 두드려줄까?”

강세영이 걱정스레 물었다.

“아냐, 괜찮아. 고마워.”

그가 사래가 들린 이유를 아이들이 알 리가 없었다.

‘오르테가의 비밀.’

그건 바로 지난 삶에서 그의 마지막 집필한 소설이었고, 영화가 완성된 걸 보지 못했었다.

먼저 영화화를 제의한 건 바로 ‘조셉 버튼’이었다.

판타지와 스릴러, SF와 미스터리 등 독특한 장르물의 대가이며 미국 영화를 대표하는 명감독.

그는 이 작품에 대해 무한한 찬사를 보냈었다.

[내 일생에 이 작품을 만난 건 정말 행운입니다. 네이선 라이네의 천재성에 감탄합니다. 만약 이 작품을 내 손으로 영화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건 내가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잃어버리는 비극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인터뷰를 듣고선 감격하지 않을 원작자가 어디 있을까.

그 작품 이름을 바로 이 곳, 이번 생의 아지트에서 친구들 입으로 듣다니.

우하루로서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그 동안 어쩔 수 없이, 그리고 의식적으로 잊고 살려고 했던 이전 삶의 파편이 다시 이번 삶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와, 조셉 버튼 인터뷰 보는데, 자신의 일생의 모든 걸 걸고 만들었대. 원작자가 돌아가셨는데 그래서 더 의미가 깊다네. 그 분이 엄청 천재였나 봐. 너무 안타까워하면서 그 작가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는데. 생전에 꽤 교감이 깊었나 봐.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절절이 느껴지더라. 엄청 감동이다.”

“진짜?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나도 꼭 봐야겠다. 조셉 버튼 감독 작품 보고 후회한 적 단 한 번도 없으니까.”

잠시 우하루는 멍하니 서 있었다.

뭔가 지금 이 상황이 실감이 잘 안 나서다.

조셉 버튼 감독과의 추억, 그 시절의 기억들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중에라도 다시 함께 작업할 날이 올까...'

그런 생각에 잠시 빠져있는 와중.

하지만 금세 현실을 일깨워주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우하루! 뭐 해?”

윤준환이 의아한 표정으로 부른다.

다시 제자리.

고마웠다, 친구가.

“응? 아냐, 아무 것도.”

“아, 자리 때문에 그렇구나. 세영이가 아예 하루 자리에 앉아서 노트북을 차지해버렸네. 쟨 또 뭘 저렇게 열심히 보냐.”

그의 말대로 강세영이 우하루의 노트북 화면을 유심히 보고 있다.

“하루야, 미안. 내가 네 노트북을 좀 보고 있어.”

“괜찮아. 세영아. 얼마든지.”

“근데 네가 쓰고 있던 이 소설은 뭐야? 연재하고 있는 웹소설 아니네?”

“응. 다른 거야.”

“아임 유어 팬? 근데 너무 재미있는데?”

“응. 그냥 뭐 중단편 소설이랄까. 머리 식힐 겸 써보는 거야. 웹소설만 쓰다 보면 좀 질릴 때가 있거든.”

우하루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내두르는 윤준환.

“헐. 쉴 때 한다는 게 또 소설을 쓰는 거라고?”

그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일이다.

쉴 때에는 게임을 하거나 너튜브를 보는 게 당연히 정상적인 거 아닌가 말이다.

“그럼 하루 너 저거 말고도 습작해 놓은 게 꽤 되나 보다?”

“많진 않아.”

“와, 역시 대단하네. 그러지 말고 재미있는 거 있으면 공유 좀 해 봐. 천재가 쓴 작품 무료로 먼저 좀 읽어보자.”

“아 또 그러네. 나 천재 아니라고.”

그 와중에 강세영은 마치 자기 것인 양 우하루의 노트북을 아예 무릎 위에 올려놓고 초집중 상태다.

거의 무아지경인 듯.

“세영이 하루 소설에 완전 푹 빠졌네. 그렇게 재미있냐?”

“응. 말 시키지 마, 윤준환!”

"아, 넵!"

아무래도 잠시 동안은 우하루가 자기 노트북을 못 쓸 것 같다.

괜히 그녀를 방해했다가 난리라도 것 같은 분위기.

결국 그는 대신 참고서를 들었다.

강제 자습행이다.

얼마 후.

갑자기 어디선가 누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윤준환이 제일 먼저 그 소리를 듣고선 기겁을 했다.

“흐극. 뭐, 뭐야. 귀, 귀신 아니야?”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소리가 나는 곳은 바로 강세영이 앉아있는 소파.

바로 다름 아닌 그녀였다.

“야, 왜 이래? 무섭게? 갑자기 왜 울어?”

“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 그냥 좀 눈물이 난 걸 가지고!”

“그니까, 왜 치킨 배부르게 먹고 나서 갑자기 흐느끼고 있냔 말이야. 한밤중이 아니길 다행이지, 하마터면 간 떨어질 뻔했잖아.”

“오버하긴. 왜긴 왜야. 너무 감동적이라서 그렇지. 슬프기도 하고.”

“뭐가? 우하루 소설이?”

“그래!”

그녀의 반응에 우하루 역시 당황했다.

현역 배우가 이 정도로 공감한 걸 보면 꽤 괜찮은 건가.

“괜찮아?”

그가 강세영을 걱정하며 물었다.

“글 읽고 좀 우는 건데 괜찮고 말고가 어디 있겠어.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이야, 이거.”

“그래?”

“응. 너 이런 쪽도 장난 아니네.”

“좋게 평가해주니 기분 좋다.”

“우하루. 지금 생각난 건데, 너 이거 방송국 드라마 극본 공모에 각색해서 내 보면 어떨까? 마침 지금 KTBS에서 하고 있는데.”

“드라마 극본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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