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나는 놈 위에 로켓 타고 가는 놈
“맨 위에 하루 이름 있어!”
긴장되고 말 것도 없었다.
‘연극영화과 영상연출 전공 지망 합격자’ 타이틀 바로 아래 첫 번째 줄.
당당하게 떠 있는 이름이 바로 ‘우하루’였으니까.
“와,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축하해, 하루야!”
등 뒤로부터 친구들의 축하가 그에게 쏟아졌다.
아무리 나름 자신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막상 이름을 확인하기 이전까지는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다.
이제야 우하루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뭐지. 이거 혹시 성적순인가.”
강세영이 명단 순서에 대해 나름 추측을 해본다.
물론 짐작일 뿐이지만.
“그럴 리가.”
“아냐, 아무래도 그런 거 같아!”
“일단 끝까지 보자.”
아직 끝이 아니다.
마지막 한 친구가 남았다.
뮤지컬 전공을 지망한 오지윤.
네 명 중에서 합격에 가장 자신이 없어하는 아이다.
우하루는 여전히 신중하게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거치며 스크롤을 내렸다.
점점 남은 하단 여유 공간이 줄어들어 간다.
강세영이 오지윤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그녀가 몸을 떨고 있다.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이다.
합격자 발표 페이지 거의 맨 밑까지 도달해 가던 그 순간.
우하루가 외쳤다.
“있다! 오지윤! 합격했어, 지윤아!”
마지막에서 두 번째.
거기에 그녀의 이름이 있었다.
포기 직전의 기적적 회생이었다.
“하아...”
오지윤이 바닥에 철썩 주저앉았다.
당연히, 다리에 힘이 풀렸을 것이다.
거의 포기 직전이었으니까.
안도의 웃음을 짓는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번져 있었다.
그녀를 강세영이 안아줬다.
이렇게 되면 목표로 하는 네 명 전원 합격의 미션 달성이다.
다른 학우들이 있으니 마음껏 기쁨을 발산할 수는 없었다.
네 사람은 조용히 옥상으로 향했고.
문을 열자마자 마치 미친 아이들처럼 광란을 부리기 시작했다.
“우리 다 합격했어!”
“정말이야. 진짜, 우리 다 해냈어!”
“우와!”
“축하해, 얘들아. 나도 축하하고!”
이리저리 깡총깡총 뛰어다니던 아이들은 이내 스크럼을 짜듯 한데 모였다.
오지윤은 이미 울고 있었고 강세영도 더 이상 벅차오르는 감격을 참지 못했다.
“얘들아. 우리 정말 대견하다, 그치?”
“그러니까. 우린 이게 운명인 거야. 앞으로 3년, 또 함께 할 수 있게 됐어! 잘 해보자!”
“화이팅!”
“사랑해, 얘들아!”
우하루와 친구들은 감격에 겨워 한참동안 서로를 부둥켜안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들은 하마터면 다음 수업에 늦을 뻔했다.
*****
송하예고 합격자 명단 공문은 곧바로 기호중학교로 전달됐다.
오후 종례 시간.
3학년 3반 담임 김미진 선생이 밝은 표정으로 이 사실을 급우들에게 전달했다.
“우리 반에서만 무려 네 명이 송하예고 합격했어요. 이런 일은 사상 처음이입니다. 자, 다들 박수!”
같은 반 급우들 모두가 부러운 시선으로 갈채를 보냈다.
“더불어 또 축하할 일이 있네. 하루하고 세영이 일어나 봐.”
담임이 부르다 두 명이 무슨 일인가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송하예고 입시에서 우하루는 연영과 영상연출 전공 수석, 그리고 강세영은 연기 전공 2등을 차지했어요! 한 번 더 박수 나가야겠지?”
“우와!”
이번에는 더 큰 함성이 일었다.
몇 명은 책상을 두드리며 환호했다.
합격 이상으로 대단한 일이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예술계 지망생들이 몰리는 치열한 경쟁률의 입시에서 합격한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인데 한 명은 1등, 또 한 명은 2등이라니.
그런데 정작 그 순간 우하루와 강세영은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합격 사실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지 몇 등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하아. 내가 1등이라고? 그럼 아까 세영이 네 말이 맞았네. 명단 순서가 등수였던 거.’
‘거 봐. 내가 뭐라고 했어. 축하해, 하루야!’
그들은 무언의 눈빛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를 주고받았다.
“선생님은 너희들이 너무 자랑스러워. 교장 선생님도 보고 받으시고 너무 기뻐하시더라. 아마 네 사람 따로 불러서 축하해 주실 모양이더라. 그리고 두 사람은 장학금을 받게 될 거야. 우하루는 첫 학기 등록금도 면제가 될 거고.”
듣던 중 가장 반가운 소식.
비록 웹소설로 꽤 많은 돈을 벌고 있다지만, 그럼에도 장학금을 받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다시 한 번 급우들로부터 부러움의 탄성을 받았다.
“부모님께서 너무 좋아하시겠다. 고생 많았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해서 꼭 꿈 이루기 바랄게.”
“감사합니다, 선생님!”
자리에 착석한 우하루가 이 소식을 한 시라도 빨리 어머니에게 알리려 깨톡을 켰다.
하지만 이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내 폰을 내려놓는 그.
‘아니다. 이따 직접 말씀드리는 게 낫겠다.’
마음을 바꿨다.
본인에게도 너무 좋은 일이지만 어머니 입장에선 어떨까.
당연히 그 기쁨의 정도는 더욱 클 거다.
당신 자신보다 자식을 더 아끼는 분이니까.
이렇게 반가운 소식을 얼굴도 안 본 상태에서 깨톡으로 틱 보내고 마는 건 정말 아니다 싶다.
행복한 웃음으로 들떠서 친구들과 교실을 나온 우하루가 말했다.
“얘들아. 오늘은 우리 다 집에 빨리 가서 부모님께 합격 소식 말씀드리자. 자축 파티는 내일 하는 걸로 하고.”
세 명 모두 일제히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 그게 맞지. 오늘은 가족과 함께!”
“어서 가서 말씀 드리자. 얼마나 좋아하실까.”
“그럼 내일 보자, 얘들아!”
우하루는 내일을 기약하며 밝은 인사를 나눈 뒤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오늘도 야근을 하실 지는 아직 모른다.
아직 문자가 없는 걸 보니 예감이 나쁘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집 문을 여니 불이 켜 있다.
이게 웬일이래.
3일 동안 내리 야근을 하시더니 어떻게 아시고 마침 오늘 집에 일찍 들어오신 걸까.
텔레파시라도 통한 건지 모르겠다.
“하루 왔구나! 혹시나 늦게 오면 어쩌나 해서 그렇지 않아도 깨톡 보내려고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어제 야근 늦게까지 한데다 오늘 외부 미팅이 있어서 바로 들어가라고 해서. 하루 배고프지? 저녁 준비 거의 다 됐으니까, 오랜만에 같이 먹자. 어서 씻고 와.”
“네.”
우하루는 샤워를 하고 와서 어머니와 저녁상 앞에 함께 앉았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이렇게 평일 저녁을 함께 먹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어머니의 정이 가득 담긴 된장찌개와 자반고등어가 입맛을 돋운다.
그는 정말 정신없이 먹어치웠다.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집밥이 최고다.
우하루는 괜찮다며 말리시는 엄마를 도와 설거지까지 함께 마친 후 과일을 앞에 놓고 거실에 마주 앉았다.
“엄마.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뭘까? 혹시 뭐 필요한 거라도 있어?”
“아뇨. 그런 게 아니고, 저...합격했어요.”
“합격? 혹시, 송하예고!”
“네. 맞아요. 오늘 합격 발표 났어요.”
“오, 이런!”
우지연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하루가 해낼 줄 알았어. 잘 했어, 우리 하루!”
“그리고 저, 1등 했어요.”
“1등?”
“네, 연영과 영상연출 전공 지원자들 중에서 수석이래요. 그래서 장학금 받게 됐어요. 첫 학기 등록금도 면제가 될 거 같구요.”
“오...이런...”
그녀가 아들을 와락 껴안았다.
“들어가기 어렵다는 그 학교에 합격한 것만 해도 너무 대단한 일인데, 1등을 했다니. 우리 하루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꿈 아녜요. 현실이에요, 엄마.”
“너무 장하다, 우리 하루. 진짜 대견하고 너무 고마워.”
일 년 사이에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아들이 갑자기 쓰러졌고.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지경에서 기적적으로 공여자가 나타나 심장 이식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깨어난 우하루는 오히려 그 이전보다 더 건강해졌다.
물론 정상적인 심장을 받아서 그렇겠지만 흔히들 겪는 거부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너무나 달라진 그의 성격이다.
남과 많이 다른 정신적 상태를 갖고 있어 늘 혼자였던 그는 이제 친구들과 어울리고 매사에 적극적이다.
더 이상 남들의 눈을 피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감사한 일이 자꾸만 생겨서 어떡하니. 내가 하루한테 제대로 해준 것도 없는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왜 해주신 게 없어요.”
이렇게 또렷하고 적극적으로 의사표시도 잘 하고.
이젠 거꾸로 엄마를 위로할 줄 안다.
오히려 유지연이 아들에게 조금씩 의지를 하게 될 정도.
그래서 그녀에게는 지금 이 모든 게 정말 꿈만 같다.
‘고마워, 하루야. 진짜 고마워. 내 모든 걸 바쳐 사랑한다!’
우지연은 아들 우하루를 오래도록 품에서 놓지 않았다.
*****
KTBS 드라마국.
기획2팀 소회의실에 제본된 종이뭉치들이 잔뜩 쌓여 있다.
문 앞에는 ‘단편 드라마 공모 심사 중’이라는 푯말이 보인다.
드라마국 손민호 차장이 헐레벌떡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선배님. 죄송해요. 미팅이 좀 늦어졌습니다. 일찍 오셨어요?”
“아니야. 좀 전에 왔어.”
얼마 전에 도착해서 제본물들을 하나하나 들쳐보던 그는 KTBS의 외주제작 협력체인 엔에이브라더스 부사장인 나극상 감독.
송하예고 입시에서 우하루와 경쟁을 벌였던 나중경의 아버지다.
“일단 1차적으로 뽑아 놓은 것들이에요. 지난해보다 응모 편수가 조금 적어지긴 했는데 오히려 전반적인 퀄리티는 상승한 느낌입니다.”
“그래?”
“네. 그 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작품도 보이구요. 아 참, 커피 한 잔 하시고 들어가시죠.”
손 차장이 탕비실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내려왔다.
“참, 중경이 송하예고 합격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또 어떻게 알았대, 그걸.”
“아이 참, 선배님도. 오히려 제가 서운해지려고 그러네. 중경이 어렸을 적에 제가 촬영장에서 많이 데리고 놀았잖아요.”
“하하, 그거야 알지. 그래도 진학하는 것까지 신경써주고 있을 줄이야 몰랐네. 고마워.”
“중경이야 아버지 이어서 세계적인 연출가나 드라마작가가 될 천재 아닙니다. 우리 방송국 사람들도 이번 소식 다 들어서 알고 있어요.”
나극상 감독이 멋쩍어하며 손을 내젓는다.
“아이 참. 왜 그래, 부담 되게. 그거야 나중에 봐야 아는 거고.”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요, 제가 장담합니다. 최고가 될 거에요, 중경이는.”
“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긴 하군.”
“당연히 수석 합격 했죠? 그렇게 되면 한 학기 등록금도 면제던데.”
“그건...아니고. 2등 했다더라고.”
갑분싸.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던 손 차장이 하마터면 뜨거운 커피를 그대로 삼킬 뻔했다.
하아, 그걸 왜 내가 물어봤을까.
급하게 후회 중이다.
“나도 1등을 할 줄 기대를 좀 했는데, 역시나 세상엔 나는 놈 위에 로켓 타고 달에 가는 놈이 있더라고. 허허.”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는 나 감독이었지만, 역시나 씁쓸한 뒷맛이 묻어나왔다.
“아이 참. 그럴 수도 있죠, 선배님. 대한민국에서 쟁쟁한 실력자들이 모이는 학교에서 2등이면 너무 대단한 거죠. 아깝게 그렇게 됐을 거예요.”
대충 수습을 해보려 하지만 왠지 더 난감해지는 느낌이다.
손 차장이 재빨리 화제를 돌린다.
“선배님, 혹시 들으셨어요?”
“뭘?”
“이번 단막극 공모전 수상작들 중 대상과 최우수상 두 작품은 어떻게든 무조건 드라마로 제작한답니다. 이제까지는 확률이 반반이었잖아요.”
“오, 그래? 반가운 소식이네.”
“거기다 더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대상은 선배님 회사인 엔에이브라더스에서 맡게 되실 거 같아요. 작년에 너무 잘 해주셔서 국장님께서 밀어주실 의향이 확실해 보여요.”
“그렇다면 나야 감사하지. 이거, 심사 더 빡세게 해야겠는데. 내가 만들 작품이라면 더 확실히 검토해서 골라야지. 아차,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건가?”
“아닙니다.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하하.”
간신히 어정쩡해진 분위기를 모면했다.
손 차장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저기, 이 작품부터 한 번 보시죠.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그 걸출한 작품입니다.”
나 감독이 자신에게 건네진 원고를 들쳐본다.
“우하루? 한 번도 못 들어본 이름인데. 신인인가 보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