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작가 우하루-18화 (18/69)

18화. 방송국 좀 다녀오겠습니다

“저희 피디들도 처음 접한 작가예요. 아, 작가지망생이겠죠, 정확히 말하자면.”

“무명작가일 수도 있지. 아니면 보조작가거나.”

“물론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죠. 아니, 퀄리티를 보면 그게 맞을 것 같긴 해요. 실무에 투입된 경험이 꽤 있는 사람이 확실해 보여요.”

“인적사항은 당연히...”

“네. 지금은 공개가 되지 않습니다. 저도 몰라요, 그래서.”

KTBS는 단막극이든 미니시리즈든 그 어떠한 극본 공모 지원자의 정보도 심사가 끝날 때까지 완벽한 비공개를 원칙으로 한다.

선입관을 배제하고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물론 최종 면접에서는 직접 대면을 하기 때문에 나이와 성별, 인상착의는 자연스레 밝혀지게 되어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이외에 나머지 사항은 끝까지 비공개.

그래서 몇 년 전에는 피치 못한 이유로 막판에 한 명의 당선이 취소된 경우도 있었다.

나극상 감독의 시선이 원고에 머물렀다.

“제목이 ‘아임 유어 팬’이라...”

“네. 좀 독특하죠. 근데 떠오르는 것과는 내용이 많이 다릅니다.”

“읽어보면 알겠지. 이 작품이 2차 심사까지 통과한 스물 세 작품 중에서 가장 점수가 좋았단 말이지?”

“네, 선배님. 옆에 놔드린 점수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거의 모든 피디들이 최우수점을 줬습니다.”

“그래? 최근 그렇게 압도적인 경우는 별로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맞습니다. 대부분 몇 편이 경합을 벌였었죠. 물론 다른 작품들도 좋은 게 있긴 한데 이게 워낙 강력해서요.”

나 감독의 입에서 군침이 돈다.

마치 처음 방문한 5성급 호텔의 셰프에게서 새로 나온 메뉴를 맛보기 위해 각을 잡고 있는 손님처럼.

“어디 한 번 볼까.”

*****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그 날, 첫 눈이 왔다.

그것도 함박눈이.

교정에 빠르게 눈이 쌓였고.

어른들에게는 그저 보기에만 예쁜 골칫거리에 불과할 수 있지만, 그들은 역시나 감수성이 풍부한 소년 소녀들이었다.

세상에 갑자기 생겨난 백색 세상이 아직은 신나고 즐겁게 느껴질 나이.

우하루와 아이들은 마치 초등학교 어린 아이처럼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눈싸움을 했다.

네 명 모두 원하는 학교에 함께 합격을 했으니 홀가분한 마음에 더 신이 났을 터.

“하루야. 너 너무 많이 뛴 거 아니야? 무리하면 안 되잖아.”

강세영이 헐떡거리며 우하루를 걱정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더없이 생기있어 보였다.

“괜찮아, 이 정도는. 너무 신나지 않아?”

“너 꼭 무슨 설원에서 살던 늑대같이 뛰더라.”

“헉. 내 정체를 들켜버렸네.”

“정말인가 보네. 전생에 늑대였어? 그럼 난 뱀파이어였나?”

뭐지.

얘가 할리퀸을 아는 건가.

이전 삶에서 일 년에 반 이상 눈이 쌓여 있는 삼림을 보며 살았던 우하루.

그래서 그런지 오늘 반가움에 너무 흥분이 됐었던 것 같다.

“이제 좀 쉬자.”

“그래.”

두 사람은 운동장 가장자리 벤치에 털썩 앉았다.

“하루 너 입학 전까지 뭐 할 거야?”

“글쎄. 나야 뭐 글 계속 쓰고, 공부도 좀 해야겠지.”

“공부? 합격했는데 또 공부를 해?”

“학교 공부라기보다는 글 소재에 도움이 될 공부.”

“아! 소설 쓰려면 그런 게 필요하긴 하겠다.”

“응. 과학, 범죄, 법, 의학, 역사. 이런 걸 다양하게 공부해 보려고. 다 장르소설을 쓰기 위해서 필요한 소양이거든.”

그녀가 감탄스러운 눈빛으로 우하루를 바라본다.

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친구의 모습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이 아이와 친해지고 나서는 자주 자신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연기를 잘 한다는 주위 사람들의 칭찬 속에 살아온 그녀.

그러다보니 언제부턴가 자꾸 자만하게 된다.

때때로 그걸 스스로 깨닫고서는 그 싹이 더 이상 자라지 않게 잘라버리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한참 가치관이 성장해가고 있는 소녀에 불과하기에 그런 정신적 각성을 한결같이 유지하기란 쉽지만은 않다.

그런데 우하루와 함께 있으면 자연스레 자신이 올곧아진다.

정신이 번쩍 든다.

천재적인 작가의 재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절대 그걸 뽐내지 않는 겸손함.

더 높은 곳의 꿈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전진하는 모습.

그의 모든 자세가 강세영으로 하여금 자신의 자만함과 나태함에 대해 반성을 하게 만든다.

이성적인 매력을 차치하고서라도 우하루에겐 그런 인간적인 경외감을 느끼는 그녀다.

“정말 넌 글 쓰는 게 삶 자체구나. 남들은 웹소설 하나 쓰는 것만 해도 벅찰 텐데 학교 다니랴 공부하랴, 거기에 동시에 몇 편을 쓰는 거야.”

“재미있으니까. 상상 속의 세상을 꿈꾸고 그려내다 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

“정말?”

“응. 네가 연기하면서 느끼는 거와 같은 거라고 할 수 있겠지.”

“글쎄. 내가 연기를 하면서 그런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게 맞을까...”

갑자기 또 생각이 깊어지려고 하는 강세영.

그러자 우하루가 재빨리 화제를 돌려 환기를 시킨다.

“아 참. 세영이 너 드라마 들어간다고 했지?”

“응. 월요일부터 크랭크인이야.”

“KTBS?”

“맞아. 미니시리즈.”

“그러면 꽤 오래 찍겠구나.”

“아니. 난 학창시절 때에만 나오니까 실제 분량은 4화 정도밖에 안 돼. 그래도 한 달 정도는 걸릴 거 같아.”

“모처럼 방학인데, 어떻게 해. 쉬지도 못하고.”

“괜찮아. 난 오히려 좋아. 마냥 집에만 있으면 오히려 쳐지기만 하거든. 오히려 운이 좋은 거지. 방학 때 맞춰서 촬영을 하게 됐으니까.”

“한 동안 못 보겠구나. 재미있게 찍고 와.”

그 말에 강세영이 우하루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래, 하루 너도 글 열심히 쓰고 있고. 네가 쓰는 건 정말 다 재미있더라, 너무.”

“좋아해줘서 고맙다.”

“언젠가 네가 쓴 드라마나 영화에 내가 출연했으면 좋겠다.”

우하루도 바랐던 것 중 하나.

그걸 강세영이 먼저 자신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나도, 그랬으면...좋겠어.”

“조만간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해야지.”

“정말? 그래 줄 거야?”

“응.”

“와, 기대된다? 꼭 그래 줘. 약속!”

예쁘고 가녀린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그녀.

우하루가 자신의 다섯째 손가락을 거기에 걸자 강세영은 도장에 복사까지 마친 후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 와중에도 윤준환과 오지윤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눈사람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리도?”

“그러자!”

두 사람이 그 작업에 합류하기 위해 힘껏 달려갔다.

*****

우하루는 겨울방학을 집에서 보내고 있다.

아지트에 가도 되지만 아무래도 좀 그렇다.

강세영의 이모가 운영하는 헤어샵 2층인데 정작 그녀가 없으니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다.

어차피 글을 쓰고 공부를 하는 건 노트북 하나로 충분하니.

굳이 겨울 찬바람 맞으면서 다른 데 갈 이유가 없다.

‘집에서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면서 지내야지. 두 달 만이라도 어머니 도와 드리자.’

다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해보니 이게 정말 만만치가 않다.

한참 힘이 넘칠 때지만 집안일은 단지 파워만 갖고 되는 게 아니었다.

요령이 없으니 실수도 많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데다 금세 지쳤다.

“하루야. 하지 마. 엄마가 해.”

“네, 알았어요. 안 할게요.”

어머니가 만류했지만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꾸준히 하다가 보니 얼마 안 가 꽤 요령이 생기고 이력이 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우지연의 허리와 손목이 한결 편해진 건 말할 것도 없다.

“덕분에 내가 너무 편해졌지만, 정말 이제 그만 해. 너 할 일 해.”

“어차피 방학 때밖에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런 말도 있잖아요, 왜.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어머머, 얘 말 하는 것 좀 봐. 아들 고생하는 걸 나보고 즐기란 말이니, 지금?”

“얼마간이라도 편하게 누리시란 뜻이죠.”

“하여튼, 말이나 못하면. 누가 작가 아니랄까 봐.”

이젠 ‘작가’란 말을 들어도 그렇게 민망하거나 멋쩍지가 않다.

문스피아에서 꽤 잘 나기기도 하고 담당 피디로부터 늘 불리는 호칭이기도 하니.

“엄마. 내일 저 잠깐 어디 좀 갔다 와야 될 거 같아요.”

“어딜? 학교?”

“아뇨. 방송국에요. KTBS.”

“거긴 왜?”

“저 오늘 연락 받았어요. 단편 드라마 공모 최종심사에 올랐다고요. 그래서 면접을 보러 오래요.”

우하루의 말에 놀라는 우지연이다.

그에 관해서 전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 공모?”

“네.”

“그걸 냈었어? 언제”

“좀 됐어요. 송하예고 합격 발표 나기도 전이니까요. 근데 심사 결과 전화가 오늘 왔더라구요.”

이제는 아들의 성과들이 놀랍지만도 않다.

기대하지도 않는데, 누가 그러라고 떠밀지도 않는데 자꾸만 상상치도 못했던 결과들을 만들어오는 우하루.

우지연은 그저 그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안아줄 뿐이다.

“너무 대견해, 우리 하루. 근데 방송국 어딘지는 알아?”

“네, 알아요. 지하철 타고 가서 조금만 걸어가면 되더라구요.”

“내일도 날씨 춥다는데 조심해서 다녀와.”

취침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아들을 그녀는 한없이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

다음날.

우하루는 예상 시간보다 조금 일찍 서둘러 집을 나섰다.

처음 가 보는 방송국.

사옥에 도착해 로비로 들어갔다.

“저기 실례합니다만, 드라마국 가려고 하는데요.”

인포메이션 데스크에 묻자 직원이 친절하게 대답을 해줬다.

“견학은 이쪽에서 접수를 하셔야 됩니다. 방청을 하려면 별관으로 가셔야 하구요.”

아마 학생이라서 당연히 견학이나 방청을 하러 온 줄 알았나 보다.

“그게 아니구요, 오늘 공모 면접이 있어서요.”

“공모 면접이요?”

“네.”

“혹시, 단편 드라마 공모 면접 말씀이신가요?”

왠지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한 말투다.

“네, 맞습니다. 여기요.”

우하루는 폰을 켜서 자신이 받은 최종면접 안내 문자를 학생증과 함께 보여줬다.

“어머. 전 그런 줄도 모르고. 미안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여기 출입증요. 목에 거세요.”

“감사합니다.”

“저쪽 엘리베이터 타고 8층에서 내리시면 됩니다. 행운 빌게요.”

생각보다 친절한 직원이다.

자기 같아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겠다 생각하며 승강기에 오른 우하루가 층수 버튼을 눌렀다.

한편, 그 시각 드라마국 중회의실.

나극상 감독과 손민호 차장을 포함한 다섯 명의 심사위원들이 다섯 번째 3차 합격자의 면접을 보고 있었다.

지원자의 편의를 제공하고 원활한 진행을 위해 각 면접자들의 시간을 다르게 공지한 것.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군요.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종 결과는 늦어도 다음 주 안에 연락이 갈 겁니다. 유 작가님께 안부 좀 전해 주시고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면접을 마친 지원자가 회의실을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확인한 손 차장이 입을 열었다.

“네 명 다 내로라하는 유명작가들 밑에서 함께 작업하던 사람들이네요.”

“글쎄 말이에요. 하긴, 작년에도 세 명이 그랬잖아요. 역시 환경은 무시 못 하겠네요.”

“몇 년 전엔 한 명도 없었는데. 그래서 오히려 신인다운 정말 신인들이 빛을 봤잖아. 그게 일장일단이 있더라고.”

“맞아요. 근데 바로 제작에 투입될 수 있는 퀄리티는 또 있으니까 그건 좋잖아요.”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참신한 면이 좀 아쉽지.”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 노크 소리가 들리고 직원이 들어왔다.

“마지막 면접자 도착하셨습니다.”

“벌써요? 5분 남았는데?”

“바로 진행하시죠. 마지막 순서인데.”

“그럽시다. 대리님, 들어오시라고 말씀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닫힌 문이 왠지 수줍은 듯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리고 들어온 사람.

그의 모습에 심사위원들이 당황했다.

“저, 우하루 지원자님이...”

“네, 접니다.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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