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작가 우하루-21화 (21/69)

21화. 사인 좀 해주세요, 선배님

*****

일주일 후, KTBS 본관에서 열린 단편 드라마 공모 시상식.

예상보다 훨씬 많은 기자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허허, 참. 단편 드라마 공모 시상식에 우리 방송사 기자들 말고 다른 데에서 이렇게 많이 온 적이 있었나?”

“전 처음 보는 거 같은데요.”

“이게 다 대상 수상자 덕분이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죠, 하하.”

나극상 감독의 물음에 손민호 차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로서도 처음 경험해 보는 장면이었다.

말하자면 흥행 성공이랄까.

“이전 같았으면 인터뷰도 없었을 텐데 이번엔 건너뛰었다간 돌이라도 맞을 기세네요.”

“난 안 해도 되는 거지?”

“죄송하지만, 네 맞습니다. 감독님께서는 우리 뉴스에 나갈 것만 따시면 될 거 같아요. 다른 기자들은 전부 우하루 군 인터뷰만 원하네요.”

“하하하. 그렇겠지. 당연해. 그 친구야말로 정말 뉴스깜 아닌가.”

잠시 후.

시상식이 시작되고 나 감독이 수상자들에게 상장과 상패를 전달했다.

맨 마지막 차례로 대상 수상자인 우하루가 호명됐다.

최종면접 때와 달리 교복을 입고 참석한 그.

그러니 더욱 눈에 띠었다.

장내에 박수와 함께 카메라 플래시가 정신없이 터졌다.

가히 이전 수상자들이 머쓱해질 만했다.

모든 포커스가 그에게 쏠렸으니까.

“축하합니다, 우하루 작가님. 앞으로 큰 기대 갖고 있습니다. 함께 좋은 작품 만들어 봅시다, 우리.”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의 두 번째 만남.

면접 때 느꼈던 우하루의 알 수 없는 노련한 기세와 어른스러움.

오늘도 역시 나 감독은 여전히 그런 것들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아직 스케줄이 확정된 건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대상 수상작인 ‘아임 유어 팬’은 그가 연출 제작을 맡기로 사전에 결정되어 있는 것.

이 미스터리한 천재와 같이 일 해볼 수 있는 기회는 확정적이다.

그 생각을 하니 은근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나 감독이다.

‘괜히 조바심이 나는군. 하루 빨리 그 날이 왔으면 좋겠어.’

시상식이 끝난 후.

KTBS 뉴스부터 시작해 각 방송국과 신문사 기자들이 우하루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가 모든 인터뷰 요청을 전부 소화해내는 데에는 꽤 한참이 걸렸다.

*****

“엄마 아빠, 저희 왔어요! 늦어서 죄송해요. 아유, 길이 얼마나 막히던지.”

우지숙.

우지연의 친언니, 즉 우하루의 이모다.

그녀가 남편과 아이들을 대동하고 아버지 집으로 들어섰다.

“오느라 고생했다. 아버지 서재에 계셔. 가서들 인사드려라.”

“네, 엄마. 강민이네는?”

“아까 왔지. 다들 주방에 있다.”

잠시 후.

우하루의 할아버지인 우기준이 주방에 나타났고, 온 가족이 널찍한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그래도 이렇게 한 달에 한 번씩 꼭 모이는 걸로 하니까 좋네. 엄마가 잘 생각하셨어.”

“나도 동감. 그 덕에 누나하고 매형, 우리 조카 얼굴도 보지. 안 그랬으면 명절 빼놓고는 어림도 없었을 거야.”

우지숙의 말에 남동생 우강민이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강민이 넌 진심이라 쳐도 올케는 아닐 거 같은데. 그치?”

“아녜요, 형님. 저도 너무 좋아요. 얼마나 손꼽아 기다리는데요.”

“하여튼 올케는 참 맘에 없는 소리도 예쁘게 하더라. 호호.”

진담부터 가시 있는 말까지, 오고가는 대화 속에서 화기애매한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그릇들이 조금씩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즈음.

“엄마. 어디 안 좋아? 드시는 것도 시원치 않은 거 같어.”

“그러게 말이에요, 어머님. 몸 편찮으세요? 제가 맥 좀 짚어드릴까요?”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다운돼 있는 것 같은 김미정에게 딸 내외가 걱정이 돼 물었다.

우지숙의 남편은 한의사다.

“안 아파. 걱정 말아. 휴우.”

걱정하지 말라면서도 말끝에 붙어나오는 한숨.

아무래도 몸이 아니라 마음이 문제인 것 같다.

“참. 엄마, 지연이 만났다고 하지 않았어?”

그 말에 헛기침을 하는 우기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아버지다.

“만나고 왔어.”

“그래? 잘 살고 있기는 한 거야, 걔?”

“몰라. 그냥 회사 앞에서 잠깐 본 거니까.”

“뭐, 그래도 직장 잘 다니고 있으니까 별 어려움은 없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 걔 때문에 혹시 걱정돼서 그러는 거유?”

“걱정이 되지 그럼 안 되겠니. 자칫 자식과 영원히 생이별한 채 나머지 생을 살게 생겼는데.”

“그래서, 찾아올 생각은 없대?”

“그래.”

우하루의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분위기가 갑자기 가라앉았다.

이 자리에 유일하게 없는 자식 한 명.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식에 손자까지 두 명.

김미정도 한 때에는 둘째딸을 원망하고 내외했지만 지금은 자신이라도 그랬으면 안 되는 거였다며 후회를 하고 있다.

아니,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자신을 실망시켰다고 너무 도에 지나치게 그녀와 손자를 대했다며 자책 중이다.

따지고 보면 사랑이 죄인 것을.

“그냥 놔 둬. 잘 살고 있으면 된 거지 뭐.”

“솔직히 그 때 아버지 어머니가 너무 하셨잖아요. 저 같아도 쉽게 그 응어리가 풀리진 않을 거 같아요.”

막내아들 우강민의 말에 아버지가 미간을 찌푸린다.

“사실 누구보다 힘든 건 누나였는데, 마음에 치명상을 입은 딸을 그렇게 매몰차게 내쫓은 건 죽으란 소리나 마찬가지였어요. 자신을 사지로 내몬 부모를 어느 누가 쉽게 다시 찾아올 수 있겠냐고요.”

“강민아. 너 말 이상하게 한다. 상처를 입은 게 지연이 지뿐이었냐? 아버지 어머니는? 그 이상으로 힘들어 하신 거 몰라? 걔가 잘못한 건 잘못한 거잖아. 누가 그렇게 멋대로 남자 만나서 애를 덜컥 가지래? 그러니까 정상도 아닌 애를 낳았지.”

이번엔 큰 딸이 동생에게 발끈했다.

“누나! 말조심 해! 아무리 작은 누나 없다고 어떻게 그런 말까지. 친언니 맞아?”

“그만들 못 해!”

우기준이 기함했다.

“아주 그 년이 끝까지 우리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네. 이미 난 자식 하나 없는 셈 치고 살아온 지 오래야. 이제 필요 없다. 다시는 내 앞에서 지연이 입에 담지 말아.”

잠시 후.

간신히 분위기를 가라앉힌 가족들은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일찍 가보겠다는 막내아들 우강민을 김미정이 간신히 뜯어말려 앉혔다.

“우리 서진이는 학교 잘 다니고 있지?”

“엄마. 얘 이번에 모의고사 전교 2등 했어.”

“그래? 역시, 애비 애미 닮아서 똑똑하네.”

“어머니, 우리 정안이는 연예기획사에서 캐스팅 제의가 왔어요. 잘 하면 아이돌 데뷔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정안이, 그럼 어디 한 번 노래나 춤 좀 춰 봐라.”

역시 분위기를 띄우는 데에는 손주들이 최고다.

다들 무슨 짓을 해도 귀여워 보일 나이는 지났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의 기운으로 금세 화목한 가정의 모양새가 살아났다.

“아유, 잘 한다. 우리 정안이 최고다 진짜.”

우기준과 김미정이 손녀의 애교에 귀여워 어쩔 줄 모르며 박수를 치고 좋아하던 그 순간.

“어? 지금 저 아이...”

아직 덜 가라앉은 기분으로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TV를 응시하던 우강민이 뭔가를 발견한 듯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시끌벅적한 가운데에서도 그의 목소리가 워낙 컸기에.

다들 무슨 일인가 하고 TV 화면으로 시선을 향했다.

[이번 KTBS 단편 드라마 공모에서 사상 최초로 중학생이 쟁쟁한 일반인들을 물리치고 ‘대상’을 수상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주인공, 바로 기호중학교 3학년 ‘우하루’ 군입니다.]

한창 진행 중인 KTBS 아홉시 뉴스.

거기에 낯설지만은 않은 아이 한 명의 이름과 얼굴이 나왔다.

“쟤 하루 맞죠? 작은누나 아들!”

“설마...”

“기호중 3학년이잖아요. ‘우하루’라고 밑에 써져 있네!”

우지연의 어머니 김미정이 좀 더 자세히 확인하려는 듯 화면 가까이 다가갔다.

“하아. 맞아! 하루야! 지연이 아들...”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의 입을 막는 그녀.

순간 눈물이 그렁그렁 올라왔다.

너무나 멀끔하게 잘 생긴 외모.

부쩍 커버린 키에 맑게 빛나는 눈빛.

자신의 소감을 당당하게 말한 뒤 이어지는 질문에 너무나도 침착하고 능숙하게 답하는 그 아이.

그는 정말 손자였다.

한 때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르다고 못마땅해 마지않았던 바로 그 우하루...

[대상 수상 연락 받고 누가 가장 먼저 생각났어요?]

[당연히 어머니죠. 절 홀로 키우시면서 고생 정말 많이 하셨거든요. 어렸을 때 제가 남들과 좀 달라서 마음이 많이 아프셨을 텐데, 내색 한 번도 안 하시고 오직 사랑만 주셨어요. 이 상을 어머니께 드리고 싶습니다.]

김미정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엄마, 괜찮아?”

“하아. 지연이가 하루 많이 나아졌다고 하더니. 괜찮아진 정도가 아니네. 저렇게 잘 컸을 수가.”

“그러게. 어렸을 때 정말 확실히 좀 모자라...”

“누나! 애들도 있는데 제발 말 좀 가려서...하아...”

[KTBS 뿐 아니라 방송계 역사상 드라마 공모에서 최연소 대상 수상의 기록을 쓴 우하루 군. 그의 작품 ‘아임 유어 팬’은 올해 안에 드라마로 제작돼 시청자들을 만나게 될 예정입니다.]

보도가 다 끝나자 우기준은 말없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

아직 봄이 오기엔 많이 이르다.

한겨울 기온과 찬바람을 뚫고 등교한 우하루와 친구들.

개학이다.

사실상 이들에게는 졸업식 준비를 위한 예열 기간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우리 다 고등어 되는 거네!”

“실감 안 난다, 진짜.”

“폭삭 늙는 기분이야. 엄마는 내 맘도 모르고 어제 저녁 자반고등어를 해주셨다니까.”

“헐. 너 혹시 그거 유머라고 지금...”

“아니야. 정말이라니까.”

왁자지껄 소란스레 떠들며 계단을 올라 복도를 진입한 그들.

순간 깜짝 놀라며 멈춰 섰다.

“뭐야, 쟤네?”

강세영이 가장 먼저 발견한 광경.

자신들의 반인 3학년 3반 문 앞에 웬 무리들이 한 가득이다.

교복을 보니 기호중학교는 맞는데...

다 여학생들이다.

“교실이 바뀌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어, 쟤네들 2학년인 거 같은데. 아는 애 한 명 있다.”

“1학년 방송반도 있어, 보니까.”

천천히 다가가자 이내 이쪽을 발견하고 몰려온다.

“어, 왠지 무서운데.”

하지만 그럴 건 없었다.

그녀들은 나름 질서정연하게 다가와 네 명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응? 아, 그래. 안녕.”

“혹시, 우리한테 무슨 볼 일이라도 있니? 아니면 뭐 진학 상담이라도?”

“저, 그게 아니고요. 사인 좀 부탁드리려고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용건.

사인이라니.

“아, 드라마 방영할 때 되니까 세영이한테 사인 받으려고 그러는구나.”

오지윤의 말에 강세영이 혀를 찬다.

“너도 참 눈치는. 나겠니? 얘들 지금 누구 쳐다보고 있는지 안 보이냐고.”

역시 강세영은 눈치가 빨랐다.

돌진해온 후배들 모두 한 사람을 응시 중이었다.

“우하루 선배님! 사인 좀 해주세요.”

“존경합니다. 그리고 대상 수상 축하드려요!”

“선배님! 팬 됐어요. 저도 선배님 따라서 꼭 송하예고 들어갈 거예요!”

“저도요!”

“부탁드립니다!”

어느새 와글와글 우하루 주위를 둘러싼 아이들.

그 덕분에 나머지 세 명은 자연스레 외곽으로 밀려나 버렸다.

“헐. 뭐야, 하루 인기.”

“뉴스에 나와 인터뷰 했더니 세상 사람들 다 알게 됐잖아. 솔직히 유명세 탈 만 하지.”

“안 되겠다. 나 문구점에 가서 A4 용지 좀 사갖고 올게.”

“윤준환. 웬 A4 용지?”

“하루한테 미리 잔뜩 받아놓으려고, 사인. 나중에 쟤 바빠지면 그거 애들한테 팔아야지.”

“어이가 없네. 너 그래서 내 사인도 그렇게 모아놓은 거야?”

“당연하지.”

후배들에게 일일이 사인을 해주느라 한참 동안을 복도에 있다가 간신히 조회 시작 시간에 맞춰 교실에 들어온 우하루.

이번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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