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노력은 천재를 깨우는 열쇠야
“무슨 전환데 그러니?”
전화를 끊고 난 우하루를 보며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자못 심각한 분위기인 것 같아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해서다.
“엄마.”
“응?”
“저 KTBS 공모 대상 받은 거 있잖아요.”
“그래.”
“드라마 제작하기로 확정됐대요.”
“어머, 정말이야 그게?”
“네. 제작사 감독님이 직접 연락 주셨어요.”
“그럼 우리 하루가 쓴 첫 번째 드라마를 내가 TV로 보게 된다는 거잖니?”
“맞아요, 엄마.”
그녀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공모 공지에 수상작의 드라마화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다.
하지만 그게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약속’은 아니다.
검토의 대상에 우선적으로 포함이 되는 것일 뿐, 제작과 편성을 꼭 해주겠다는 건 절대 아니란 이야기다.
그동안의 사례를 보면 KTBS뿐 아니라 다른 방송사들도 당선작을 실제 제작하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만큼 넘쳐나는 극본이 실제 작품으로 현실화되는 데에는 바늘구멍보다 더 좁은 관문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그런 현실을 잘 알기에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던 건데.
‘아임 유어 팬’이 드라마로 만들어져 세상에 선보이게 됐다니.
더구나 이렇게 빨리 말이다.
두 사람은 정말 날아갈 듯 기쁘다.
우하루는 아직 정리가 덜 된 방에서 노트북을 켰다.
공모에 제출하고 난 후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파일.
‘아임 유어 팬’을 클릭했다.
‘60분 2부작이라. 그렇다면 이대로는 분량이 조금 많지.’
당초 제출 조건에는 최소 분량만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우하루는 길이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원래 소설로 썼었던 걸 충실히 각색하는 데에만 중점을 뒀었고.
그러다 보니 일반적인 단막극 러닝타임 90분을 훌쩍 넘어버렸었던 것이다.
다행인지, 아니면 방송국의 배려인지 모르겠지만 120분이 주어진 상황이다.
그럼에도 우하루가 계산해보니 약 10분에서 15분 정도 길다.
거의 영화 시나리오에 맞먹는 분량.
“제작 확정이 된 이상 기다릴 이유가 없지. 바로 수정에 들어가 보자. 그렇지 않아도 그 때 시간이 넉넉지 않아서 일부 만족스럽지 않았던 부분도 있었으니.”
우하루는 곧바로 ‘아임 유어 팬’ 극본을 다듬는 작업에 돌입했다.
*****
KTBS 드라마국 회의실.
국장까지 모인 제작회의가 한창이다.
협력사인 ‘엔에이 픽처스’이자 고문인 나극상 감독의 얼굴도 보인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홀대를 받아왔던 단막극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첫 편을 2부작으로 해서 이번 공모 대상 당선작으로 결정한 거구요. 홍보도 심혈을 기울일 생각입니다.”
김정욱 국장의 말에 나 감독이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단편 수작을 발굴해 시청자들에게 소개함으로써 영상문화의 균형적인 발전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늘 피력해왔던 그였으니까.
“국장님께서 배려해주시고 애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저도 마음이야 감독님과 같죠. 하지만 이 자리가 ‘흥행’에 연연해야 하는지라 쉽지만은 않다는 점 이해해 주세요.”
“이해하다마다요. 이번에 주신 기회, 꼭 보답하겠습니다.”
“하하하, 기대가 큽니다. 근데 이미 꽤 화제가 되고 있어서 홍보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네요.”
“혹시, 공모 대상 수상자 말씀이신가요?”
“왜 아니겠습니까. 이미 시상식 때 기사가 나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편성 확정으로 다시 또 화제가 되겠죠. 그렇지 않아도 이번 홍보의 마케팅 핵심 포인트가 ‘작가’가 될 것 같습니다.”
KTBS 뿐 아니라 대한민국 방송계 전체를 따져 전무후무한 드라마 극본 공모 최연소 대상 수상자.
김 국장 말대로 누가 뭐래도 ‘천재 소년 작가 우하루’는 이슈의 중심축임에 틀림없었다.
“국장님께서 부담 팍팍 주시네요. 감독님 스트레스 받으시게.”
회의가 끝나고 국장이 나간 후 손민호 차장이 웃으며 나 감독의 기분을 살폈다.
“무슨 말을. 부담 노노. 절대 아니야. 오히려 얼마나 고마운데. 지금 가슴이 막 떨린다고.”
“정말요? 다행이네요. 하긴, 감독님께서 직접 심사에 참여하시고 상까지 준 그 작품을 직접 제작하게 되신 거니까 감회가 새로우실 수 있겠네요.”
“맞아. 게다가 매번 주말드라마나 미니시리즈 같이 시간에 늘 쫓기면서 돈에 치어야 하는 작품들만 맡는 게 질려가던 차에 이런 작품성 진한 단편 드라마 맡게 돼서 너무 좋다고.”
“그 심정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참, 우하루 작가하고 미팅 가져야 하지 않나요? 각본 꽤 수정해야 할 거 같은데. 길이도 좀 줄여야 하구요.”
그 말에 나 감독이 갑자기 허허 알 수 없는 웃음을 터뜨린다.
손 차장 뿐 아니라 옆에 있던 조감독도 무슨 일인가 싶다.
“자, 이것 좀 봐봐.”
갑자기 그가 제본된 책자 하나를 손 차장에게 건넨다.
“뭐예요, 이게?”
“뭐긴. ‘아임 유어 팬’ 극본 뉴 에디션이지!”
“뉴 에디션이요?”
“그래. 어제 밤에 받은 따끈따끈한 신판이야. 60분 2부작으로 완벽하게 맞춰져 수정된 완결본.”
“뭐라구요? 그럴 리가. 아직 요청도 안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말이야. 하하.”
손 차장 곁으로 홍종연 조감독이 건너가 함께 극본, 그러니까 ‘대본’을 확인한다.
그 장면을 건너편에서 미소 한가득 지은 채 바라보는 나 감독.
한참 정적 속에서 대본 넘기는 소리만 들리던 얼마 후.
“말도 안 돼. 이게 가능하다구요?”
손 차장의 입에서 외마디 탄성이 튀어나왔다.
옆에서 같은 대본에 눈길을 주고 있던 홍 조감독도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그냥 이거 갖고 지금 당장 촬영 시작해도 되겠는데요?”
그 말에 큭큭 웃는 나 감독.
“내가 뭐라고 했어. 완결판이라고 했잖아. 굳이 미팅 안 해도 된다니까.”
“아니, 우하루 작가한테 전화하신지 일주일도 안 됐잖아요?”
“정확히 말하면 3박 4일 됐지. 그것도 난 그냥 제작이 확정됐다, 그렇게만 말해줬을 뿐이라고. 미팅을 해야 한다던지 일정이 어떻다, 극본 좀 손 봐 달라, 이런 이야기 일절 안 했다니까.”
“근데 이걸 알아서 보내왔다구요? 어제 밤에?”
“그렇다니까. 내가 곧바로 이메일 열어서 다 읽어보고 서재에서 얼마나 혼자 실실 웃어댄 줄 알아? CCTV라도 있어서 그 장면이 녹화라도 됐으면 아마 사람들이 미친놈인 줄 알았을 거야.”
“이해 돼요. 너무 완벽한데요. 빼야 할 곳, 장면 중 필요 없는 부분을 정확히 잘라냈어요. 게다가 약간 애매했던 부분까지 다 고쳤구요.”
손 차장이 자꾸 대본을 뒤적거렸다.
뭔가 흠이라도 찾아내려는 듯.
하지만 허사였다.
“그러면서 메일에 뭐라고 코멘트를 달아놓은 줄 알아?”
“뭐라고 달았는데요?”
“촬영 여건 상 불가피하게 수정해야 할 부분 있으면 피드백 달래. 바로 수정해서 전달하겠다고. 그리고 내가 봐서 애드립이 필요하다 싶으면 해도 좋단다. 하하.”
“헐. 그게 중학생, 아니 이제 고등학생이지만 어쨌든, 그 나이 또래가 할 수 있는 말 맞아요? 게다가 실전 경험 전무한 신인이?”
“그러니까. 혹시나 해서 다른 사람이 보낸 건가 발신자를 다시 확인했다니까.”
“아무래도 그 친구, 아니 우하루 작가 처음이란거 거짓말이네. 분명 인디든 극단이든 어디선가 작품 많이 해본 기성이야. 내가 뒷조사를 좀 해봐야겠어요.”
물론 손 차장의 말은 농담이었다.
기가 막혀서 하는 말.
그 정도로 놀라웠다.
세 사람 모두 고개를 저으며 한참 혀를 내둘렀다.
“에디슨이 그런 말을 했잖아. 천재는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고.”
“네, 그랬죠.”
“난 솔직히 그 말을 믿지 않아. 천재는 99퍼센트의 타고난 머리와 1퍼센트의 노력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하거든.”
“완전 거꾸로네요.”
“나 같이 평범한 범인 입장에서 보면 그게 맞지.”
“감독님이 그렇단 건 인정 못하겠지만, 그 말엔 동감입니다.”
“근데 진짜 중요한 건 뭔지 알아? 그 1퍼센트의 노력이 터무니없이 작다고 소홀히 여길 수 있지만, 막상 그게 없거나 모자라다면 절대 99퍼센트의 머리가 발현될 수 없다는 거야.”
“음,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요. 노력이 재능 발현의 린치핀이란 거군요.”
“맞아. 그래서 말인데, 우하루 이 친구는 천재로서의 모든 걸 갖췄어. 이 일 하면서 이런 정도의 성실함과 노력으로 나를 놀라게 한 사람은 여태껏 없었거든.”
나 감독의 말에 두 사람 모두 깊이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이런 경험은 너무 신선했으니까.
“감독님. 그래도 미팅 한 번 하시죠. 우하루 작가 얼굴 좀 보고 싶네요.”
“나도 그렇긴 한데. 그럼, 그럴까? 학생 신분이라 아무래도 토요일밖에 안 될 텐데.”
“그럼 어떻습니까. 전 오히려 좋습니다. 하하.”
나 감독이 자신의 폰을 들어 곧바로 우하루에게 전화를 건다.
*****
우하루는 나 감독의 전화를 받고 흔쾌히 미팅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실 그도 제작진을 한 번 만나고 싶었다.
비록 스스로도 수정이 완료된 대본에 큰 흠결이 있을 거라 생각지는 않는다.
다만, 이곳 한국의 드라마 제작 환경을 첫 단계부터 경험해 보고 싶기도 했고 자신이 그리고 있는 ‘아임 유어 팬’의 분위기랄까 무드가 나 감독의 생각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 소통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토요일 오전.
그는 편안한 세미캐주얼 복장을 하고서 KTBS 본사 드라마국 회의실에 도착했다.
“어서 오게, 잘 지냈지?”
“안녕하세요, 감독님.”
“여기 손 차장은 시상식 담당했으니까 알겠지?”
“또 보게 돼서 반가워요!”
“그리고 이쪽은 우리 드라마를 함께 만들 홍중연 조감독.”
“앞으로 잘 해 봐요, 우리.”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우하루와 마주앉은 손 차장과 홍 조감독.
왠지 그들은 진중한 미팅 분위기에 빠져들지가 않는다.
이렇게 어리고 파릇파릇한 작가는 처음이라서.
왠지 조카 같고 자식 같은 아이 앞에 있으니 괜히 실실 미소만 지어진다.
차라리 아이돌 멤버를 만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편할 듯싶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가벼운 기분은 우하루가 일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꺼내기 시작하면서 싹 사그라져 버렸다.
“저는 가급적 연기자 분들께서 대본의 대사를 충실히 따라주시기를 바라지만 감독님께서 판단하시기에 그 장면을 더 충실히 살릴 수 있는 요소가 된다면 어느 정도 변형이나 애드립도 가능하단 생각입니다.”
“드라마의 분위기가 너무 어둡지 않았으면 해요. 아프고 비극적인 스토리지만 가족의 사랑이 주제니까요. 군데군데 경쾌한 요소도 넣어놨구요. 가볍지 않지만 따스한 느낌을 시청자들이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감독님께서 그리시는 이 드라마의 세계는 어떠세요?”
“이 부분이 제일 걱정인데, 연기자 분께서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고 몰입해 주시도록 지도해 주셨으면 바램입니다. 입체적인 캐릭터여야 하니까요.”
우하루의 발언이 쏟아지면서 손 차장과 홍 조감독의 자세와 표정은 방금 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진지한데다 심지어는 심각한 그들의 심리 상태.
‘미친.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고1 신인 맞아?“
‘의견 하나하나가 주옥같아. 꼭 필요한 사항들인데다 정확한 의사 전달이 되고 있어.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분명 저 친구 경력 있다니까.’
너무 놀라고 신기한 경험이다.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앞 사람.
절대 설렁설렁할 수 없는 분위기다.
‘어른스럽고 똑 부러지는 언변은 말 할 것도 없고 저 당당하고 침착한 태도 봐. 여느 학생들처럼 쭈뼛거리면서 부끄러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정말 와...’
어느새 그들은 완벽히 ‘프로’ 작가와 제작 스태프의 관계 속으로 침잠되어 갔다.
손 차장과 홍 조감독은 더 이상 ‘고등학생’을 마주하고 있지 않았다.
편하게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허리도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빳빳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우하루가 그들에게 질문의 화살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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