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한 번 내기를 해볼까?
“저, 두 분...”
우하루의 말을 듣고는 있었지만 주로 감탄에 몰두하던 그들.
덕분에 정작 내용에는 집중을 못하고 있었으니.
손 차장과 홍 조감독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네? 저, 저요?”
엉겁결에 튀어나온 말.
뱉어놓고도 내심 어이가 없었다.
‘하아, 마치 내가 학생이 된 거 같아. 저 쪽은 선생이고.’
그들의 그런 심리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우하루는 수정된 대본에 대해 의견을 물으며 혹시 문제점이 있다면 지적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침을 꿀꺽 삼키며 재빨리 제정신을 차린 두 사람.
나름의 생각들을 털어놓았다.
특별한 건 없었고, 주로 이런 점이 좋은 것 같다 정도.
약간은 매가리 없는 그 의견들마저도 우하루는 굳게 다문 입술과 깊은 시선으로 끝까지 진중하게 청취를 했다.
자세도 국보급.
“이상입니다.”
“좋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호흡을 같이 잘 맞춰야 할 텐데 혹시 뭔가 어필하실 부분을 마음에 그냥 담아두고 계신지 궁금해서 여쭤봤습니다.”
“아, 네.”
“앞으로도 두 분과 터놓고 의견 교환 자주 했으면 좋겠습니다.”
“동감입니다.”
관자놀이에 땀 한 방울이 송골 맺힌 손 차장.
홍 조감독의 손은 미끄덩하다.
‘도대체 이 알 수 없는 무게감은 뭐지. 휴우.’
우하루를 앞에 두고 쩔쩔매는 직원들의 모습을 세상 신기한 구경이라도 대하듯 웃으며 쳐다보고 있던 나 감독.
그가 이내 우하루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우 작가.”
우 작가라.
우하루는 살짝 전율이 느껴졌다.
어쩌면 당연한 호칭인 것이었고, 그냥 성에 ‘작가’란 말만 붙은 것인데.
그래도 기분이 좋다.
그건 아마 이 드라마의 제작 수장인 감독이 정식으로 불러줘서 그런 것일 터다.
“네, 감독님.”
“가능하면 대본리딩에도 참석해줬으면 하는데.”
본격적인 드라마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대본리딩.
연기자들과의 상견례 자리인 동시에 작가와 감독이 각 캐릭터의 궁합을 맞춰보고 공감대를 만드는 자리다.
이 자리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이해를 공유시키는 건 보통 작가의 역할이다.
이야기를 태동시킨 장본인이 바로 작가이기 때문이다.
“저는 당연히 그러고 싶은데, 학교에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어찌 됐든 우하루는 현실 고등학생이다.
그러니 무턱대고 수업을 빼먹을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고 대본리딩을 주말이나 휴일에 잡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 감독이 누군가.
“그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군.”
“그렇다면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작이 시작되면 저도 직접 촬영장에 가서 현장을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당연히 가능하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야. 언제나 편하게 오게. 와서 의견도 주저 없이 말해주고.”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려는. 원래 그래도 되는 거네. 하하.”
미팅이 끝나고 우하루가 돌아간 후.
그제야 손 차장과 홍 조감독의 얼굴이 풀어지고 자세가 편해졌다.
“어우, 아까 식겁했지 뭡니까. 참 신기한 광경 다 본다 생각하면서 멍 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질문을 해서.”
“저두요. 허허.”
그 말에 나 감독이 고소하다는 듯 웃는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긴장 좀 타라고.”
“그래야겠어요, 어휴.”
“우 작가 절대 그저 만만한 신인작가로 생각하면 안 돼. 나이 같은 건 머리에서 싹 지워버리라고. 호랑이 원로 작가 선생님들 대하듯 해야 할 거야.”
“오늘 아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 알 수 없는 노련미.”
“이상하게 어렵더라구요. 그래서인지 반말도 안 나와요.”
“저도요. 저 웬만하면 등치 큰 깍두기들도 어려 보이면 반말 하는데 이상하게 못하겠어요. 아무래도 작가 대 스태프로 만나서 그런가.”
“그게 아니야. 가만 보니까 뭔지 모를 아우라가 있어. 그래서 그게 잘 안 되는 거야. 본능은 생각이 필요 없지. 반사적으로 행동을 하게 되거든.”
“근데, 앞으로 계속 존댓말 해야 해요? 그래도 우리가 삼촌뻘인데?”
그 말에 나 감독이 저음을 흘렸다.
사뭇 엄격한 분위기로.
“당연하지. 내가 반말 했다고 너희들도 그러랴? 상사가 갓 부임한 장교가 나이 어리다고 반말 찍찍 하는 거하고 뭐가 달라.”
“옳습니다. 전 계속 존대할래요. 그게 마음이 더 편할 듯요.”
“나도 제작 들어가면 존대할 거야. 그게 맞아. 오늘은 사전 미팅이니까 그런 거고.”
“넵. 그나저나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언론 홍보 들어간다던데. 내일부턴 기사가 조금씩 나겠네요.”
*****
다음날.
손 차장이 말한 대로 ‘아임 유어 팬’의 제작 확정에 대한 기사가 아침 일찍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얘들아, 이거 봐봐!”
등교하자마자, 누군가가 그 기사 하나를 폰으로 열었다.
**
KTBS가 올해 주요 기획 중 하나로 선정했던 ‘심야 드라마극장’을 정식 편성했다.
그 첫 작품은 얼마 전 실시했던 단편 드라마 공모에서 대상을 받은 ‘아임 유어 팬’으로 결정이 됐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의 어린 나이에 대상을 수상한 천재작가 ‘우하루’ 군으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 작품을 드디어 시청자들이 드라마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
누군가가 기사를 줄줄이 읊는 순간.
“우와!”
무리의 함성이 들렸다.
바로 ‘천재작가 우하루’라는 표현이 기사에 나왔기 때문.
그저 자기들끼리 하는 말도 아니고.
정식으로 언론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건 충분히 놀랍고 환호할 만한 일이었으니까.
“오. 진짜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거야?”
“장난 아니다. 같은 반 친구가 쓴 극본이 다른 데도 아니고 지상파에서 제작돼 방영된다는 게 실감이 잘 안나.”
“그러게. 부럽다 진짜.”
그 때 누가 뒤에서 거칠게 가방을 책상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복도 쪽 자리.
바로 나중경이었다.
그가 아이들 모여 있는 쪽을 째려보며 일갈한다.
“그런 기사 볼 시간 있으면 공부를 하든 아이디어를 짜든 해.”
“남이야. 왜 저래?”
“그깟 단편 하나 당선됐다고 무슨 천재니 뭐니, 기가 막혀서.”
“말이 좀 그렇다. 축하는 못해줄망정. 넌 그런 거라도 해봤어?”
“내가 이래 봬도 소싯적에 글짓기, 문예상 휩쓸고 다녔어. 저거 안 내서 그렇지 내가 냈으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고!”
그 말에 다들 한심해 하며 고개를 젓는다.
아무리 봐도 떼쓰는 것으로밖에 안 보이는 행동.
“오, 그러셨어? 이제 보니 천재작가는 이쪽이셨네. 하하.”
비꼬는 말이 들리자 나중경의 얼굴이 벌게졌다.
이내 노골적으로 그에게서 등을 돌린 아이들.
그 때, 마침 우하루가 교실로 들어왔다.
“하루 왔다!”
마치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 아이들이 박수를 보내며 환호를 했다.
영문을 모르는 그.
무슨 일인가 하고 잠시 멈칫하다 자리로 들어왔다.
곧바로 그에게 진격하는 급우의 무리들.
“하루야. 네 극본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서. 축하한다!”
그제야 애들이 이러는 이유를 알게 된 우하루.
멋쩍은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근데 아직 시간이 좀 걸려야 해.”
“기사 난 거 봤어? 너 보고 ‘천재작가’래. 기자가 그렇게 썼더라. 대단하다, 우하루!”
“난 너하고 같은 조 된 게 올해 가장 행운이라고 생각해.”
“하아, 나도 자주색을 뽑았어야 하는 건데. 아까비.”
“진짜 기대된다. 주연이 누굴까? 스타급 배우가 맡겠지?”
우하루보다 더 들뜬 친구들.
그런데 그 때 또 산통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타급 배우 같은 소리 하고 앉아있네.”
이번엔 우하루가 있는데도 도발을 해온 나중경.
모두의 시선이 다시 한 번 그에게 향했다.
“모르면 잠자코 있기나 해, 불쌍한 중생들아. 주말도 아니고 불금 밤늦게 하는 그런 단편 드라마에 누가 미쳤다고 스타급 배우가 출연을 하냐.”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네가 무슨 연예계 종사자라도 돼?”
“영상연출을 꿈꾼다면서, 헛똑똑이들이네. 스타급 연예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뭔지 알아?”
“?”
“시청률이야, 시청률. 그게 곧 돈이고 권위거든. 낮은 시청률 드라마는 급이 안 맞아 출연 안 한다고. 괜히 그런 데 나가서 레벨 다운시킬 일 있어? 이 바부들아.”
“하루 드라마가 시청률이 낮을 줄 네가 어떻게 아냐고?”
“보나마나지 이 멍청이들아. 불금 밤늦게 편성한 이유가 뭔데. 방송국에서도 그냥 형식적으로 배치한 거라고. 문화계에서 하도 작품성, 작품성 입에 달고 사니까 지상파로서 성의 보이려고.”
“무슨 지가 방송국 피디라도 되는 줄.”
누군가의 말에 나중경이 다시 발끈한다.
“그래, 우리 아버지가 바로...”
말을 하다가 흠칫 하는 그.
“네 아버지가 뭐?”
“하아, 됐다. 그만 하자. 불쌍한 중생들이 무슨 죄겠니.”
그 때 무리들 너머로 중저음의 착 가라앉은 매력적인 보이스가 교실 안에 울렸다.
“시청률이 네 예상보다 훨씬 잘 나오면 어떡할래?”
바로 우하루였다.
“뭐라고?”
“얼마쯤으로 할까? 3프로? 아니면, 5프로?”
“미친. 1프로를 넘어갈까 말까 할 마당에.”
“그러니까. 한 번 내기를 해보자고. 그렇게 자신만만하니까. 자, 넌 뭘 걸래?”
갑작스레 강하게 나오는 상대방의 기세에 당황한 나중경.
너무나도 평온하고, 심지어 입가에 미소까지 짓고 있는 우하루의 표정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빨간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
KTBS 드라마국 복도.
어딘가를 바쁘게 다녀오는 나극상 감독과 홍 조감독이 커브를 트는 순간 두 명과 마주쳤다.
“어머, 감독님!”
“오, 수빈 씨!”
나 감독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는 여자.
그녀는 현수빈이었다.
최근 2년 사이에 출연한 주말드라마와 미니시리즈 2편이 연이어 큰 히트를 기록하면서 차세대 스타로 떠오른 초미모의 여배우.
방송사와 제작사 모두 그녀를 캐스팅하기 위해 혈안일 정도다.
“여기 웬일이야? 새 작품 들어가나?”
“호호, 아뇨. 끝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아, 맞다. TVNT 미니시리즈 종영한 게 일주일밖에 안 됐구나. 내 정신 좀 봐. 축하해. 시청률 대박 난 거!”
“아유, 감사합니다. 다 감독님 덕분이죠 뭐.”
“내가 무슨.”
“감독님은 어쩐 일이세요? 제작 맡으셨어요?”
“응. 심야 드라마극장이라고.”
“드디어 새 작품 하시는구나. 기대돼요, 너무!”
잠시 망설이는 듯 주저주저하던 나 감독.
그가 이내 조감독이 들고 있던 책자를 빼앗아 그녀에게 안긴다.
“수빈 씨. 이거 한 번 봐 볼래?”
“네? 뭔데요, 이게?”
“내가 제작하기로 했다는 그거. 심야 드라마극장 첫 번째 작품 대본.”
“아...”
일단 주니까 받아드는 현수빈이다.
하지만 뭔가 크게 반색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그럼 나중에 뵐 게요.”
“그래. 한 번 생각해보고 혹시 생각 있으면 콜!”
“네, 감독님.”
헤어지고 난 뒤 회의실에 들어온 두 사람.
홍 조감독이 쩝쩝 소리를 낸다.
“왜?”
“솔직히 현수빈 씨가 이걸 하겠어요?”
“그래도 모르지 뭐.”
“감독님도 아시잖아요. KTBS에서 나름 신경 쓴다며 올해의 기획 시리즈니 뭐니 해도 정부하고 문화계 단체들 성화에 못 이겨 울며 겨자 먹기로 편성한 거. 그런 거 배우들도 다 아는데 선뜻 수락하겠냐고요.”
“.......”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장 핫한 톱스타 현수빈이 말이에요. 개런티나 많이 주면 몰라요. 쥐꼬리만해갖고.”
무슨 정신이었는지, 너무 노골적으로 뱉어내버렸다.
급하게 분위기 파악을 하며 후회하는 조감독이다.
틀린 말은 아니어서인지, 나 감독은 갑자기 연초가 확 당긴다.
*****
“나 감독님도 참. 좀 너무하시네요.”
운전석에서 매니저가 괜스레 투덜거리자 현수빈이 룸미러를 쳐다본다.
“뭐가?”
“아니, 배우님이 지금 거기 출연하실 레벨이냐구요. 아무리 형식적이라고 해도 그렇지 아실만 한 분이 참.”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너 좀 그렇다?”
“네?”
“너하고 직접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내가 편하기로서니 당사자 없는 데에서 뒷담화를 해? 그것도 명망 있는 감독님을? 많이 건방져졌는데?”
차가운 목소리.
밤거리를 달리는 실내등 꺼진 밴 안이 스산하다.
그제야 자신이 쓸 데 없는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매니저가 꼬리를 만다.
“자, 잘못했습니다. 배우님.”
“조심해. 선은 넘지 말자, 우리.”
“다시는 안 그럴게요. 진짜 죄송합니다.”
집으로 돌아온 현수빈.
샤워 후 나온 거실에는 습관처럼 늘 틀어놓는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
마침 나오는 소식은 KTBS의 심야 드라마극장 편성 확정에 관한 내용.
“아까 나 감독님이 이야기하신 게 이거구나.”
화면에는 이번 공모전 수상 장면에 이어 우하루의 모습이 비춰졌다.
‘천재작가’라는 호칭도 역시 나온다.
“와, 대단하네. 중학생이었다고? 지금은 고1? 헐...”
갑자기 급 관심이 생기는 그녀다.
과연 그 나이대의 작가가 써내려간 작품이 어떻기에 치열한 성인 경쟁자들을 뚫고 대상을 거머쥔 걸까.
그녀는 소파에 편하게 기대어 아까 건네받은 대본을 펼쳐들었다.
한 장, 한 장.
어느새 극본에 빠져든 현수빈.
중간에 아예 TV는 꺼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눕다시피 했던 몸이 저절로 일어나졌다.
흔히들 말하는 ‘몰입’이란 게 이런 걸까.
자신의 작품 대본을 읽을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아...”
마지막 장이 덮였다.
눈가가 촉촉하다.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던 그녀가 컵에 든 물을 들이켠 후 폰을 들었다.
“감독님. 저 수빈이에요.”
- 아, 수빈 씨!
“저기, 그 대본 말이에요. 아임 유어 팬. 나머지 분량 다 좀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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