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작가 우하루-28화 (64/69)

28화. 하루만 있으면 돼

현수빈이 받은 대본은 1부.

한 권이었다.

어느새 그걸 순식간에 다 읽어버린 그녀.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 정도로 재미있고.

게다가 너무 감동적이다.

‘영화 한 편 보는 것보다 더 빠져들어 버렸어.’

클라이막스에 달할 때쯤 끝이나 버렸으니.

나머지를 보지 않고는 도저히 못 배길 지경이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가 나 감독에게 직접 전화를 넣은 것.

- 수빈 씨? 혹시 관심이 생겼어?

“일단 다 읽어보고 말씀드릴게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 안 될 거 없지.

“내일 매니저 보낼게요. 그 편에 보내주세요. 부탁드려요.”

- 오케이. 알았어.

계약을 한 상태라면 당연히 파일로 보내겠지만.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대본을 디지털 소스로 보내는 건 금지가 되어 있다.

그래서 매니저를 보내 직접 물리적 카피본을 받겠다는 거다.

갑자기 저녁에 전화를 받은 나 감독.

괜스레 기대가 된다.

‘출연 생각이 있는 건가?’

잠시 김칫국을 마시던 그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에이. 또 이러다가 김샐라. 괜히 설레발치지 말아야지. 조감독 말 하나도 틀린 게 없잖아.’

그는 괜한 헛바람 대신 대본을 하나 더 인쇄하기 시작했다.

그 시간.

나 감독과 통화를 끝낸 현수빈은 로드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주야.”

- 네, 배우님.

“내일 KTBS 본사 드라마국에 가서 나극상 감독님한테 대본 받아 와.”

- 네? 대본이요?

“응.”

- 배우님. 혹시 아까 그...

“맞아. ‘아임 유어 팬’ 2화 대본이라고 적혀 있을 거야. 그거 받아오면 돼. 그리고 절대 잃어버리거나 하면 안 된다. 누출되면 큰 일 나니까.”

- 설마 그 드라마 출연하시려고요? 회사에서 난리가 날 텐...

“우주야?”

- 네?

아까 차 안에서 느껴졌던 그 서늘한 목소리.

그 분위기가 전화를 통해서 다시 그대로 전달된다.

“아까 뭐라고 했지?”

- 하아, 죄송합니다.

“두 번째네. 나 세 번까지는 안 참아. 오지랖 노노. 알았지?”

- 명심하겠습니다. 내일 방송국 잽싸게 들러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현수빈은 곧바로 다시 대본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재탐독 시작.

두 번째임에도 마치 처음처럼 또 새롭게 느껴지는 감동과 재미.

조금 전에는 그저 제 3자 입장에서 소설을 읽는 심정이었다면.

이번에는 배우 입장에서 작품에 대해 나름 분석하고 캐릭터에  이입해 보며 자신을 그 속으로 풍덩 빠뜨렸다.

또 한 번 쏜살같이 흘러간 시간.

어느새 자정이 넘어버렸다.

‘다시 읽어도 감동이네. 그저 스토리만 좋은 게 아니야. 구성도 완벽하고 대사 하나하나가 주옥같아. 게다가 장면은 어떻고.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또렷하게 영상이 머릿속에 떠올라. 뭐 이런 극본이 있대? 이걸, 그 중3 애가 썼다고? 언빌리버블...’

그녀는 재빨리 스마트폰을 들어서 ‘우하루’에 대해 검색을 시작했다.

*****

하교길.

우하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연락해온 사람은 며칠 전 미팅에서 만났던 KTBS 드라마국 손민호 차장.

- 작가님. 혹시 매주 일요일 밤 11시에 하는 ‘문화이슈 초대석’이라는 프로그램 아세요?

그렇지 않아도 몇 번 본 적이 있다.

주로 예술계 소식을 다루지만 대중문화 전반도 꽤 다룬다.

최근 이슈가 되는 문화계 소식들을 소개하고 화제의 인물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프로.

아무래도 일반 대중에게 인지도가 높지는 않다.

“네, 알고 있습니다. 차장님.”

- 그 프로 피디님이 우 작가님 모시고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해서요.

“저를요?”

- 네. 스튜디오에서 일대일 대담 형식이라 큰 부담은 없을 겁니다. 물론 원하지 않으시면 거절하셔도 되구요.

잠시 고민하던 우하루.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전사적으로 밀어주는 드라마일 경우 배우들이 여기저기 유명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서 홍보도 하지 않나.

‘심야 드라마극장’은 그럴 수 있는 여건은 아니니.

‘작가인 내가 그곳에 나가서라도 PR을 하면 좋을 듯싶네.’

그런 점잖은 교양 프로그램이라면 상 하나 받고 유명해졌다고 나댄다는 어이없는 오해도 받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전화를 끊고 교문을 나서는데.

“저기...”

머리가 희끗한 초로의 마나님 한 분이 그를 아는 체 한다.

동시에 그녀의 시선이 우하루의 명찰로 향했다.

“하루, 나 기억 못하겠니?”

“누구신지...”

“하아, 역시 그렇구나. 하긴. 시간이 꽤 흘렀지. 그 때가 초등학교 갓 들어갔을 땐가 그랬으니까.”

영문을 몰라 하는 우하루에게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이는 그녀.

“나, 네 외할머니다. 엄마의 엄마.”

당연히 알 리가 있나.

본 적이 없는데.

하지만 일기에 등장한 그녀에 대해 기억을 하는 우하루다.

[엄마의 가족들은 다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본다.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외삼촌 전부. 내가 친구들과, 아니 다른 사람들과 다르단 걸 불쾌해 한다. 그래서 엄마는 그 집에 가기 싫어하신다. 더 이상 싸우는 게 싫으신 거겠지. 솔직히 나도 마찬가지다.]

“안녕하세요?”

우하루는 일단 인사를 했다.

진짜 외할머니가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표정이나 분위기를 봐서 거짓말이나 사기는 아닌 것 같다.

“그래. 어쩌면 어릴 때하고 이렇게 달라졌을까. TV에서 봤을 때처럼 정말 잘 생기고 듬직하구나.”

“.......”

“혹시, 어디 가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흠...

살짝 망설이는 듯하던 우하루가 답했다.

“죄송해요. 제가 지금 친구들하고 약속이 있어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지트로 향하던 중이었으니까.

그리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모르는 사람 따라가는 거 아니라고.

“잠깐이면 되는데...”

“진짜 제가 시간이 안 돼서요. 나중에 엄마하고 같이 만날 수 있게 되면 그 때 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명확하게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우하루.

똑 부러지고 어른스러운 태도에 외할머니로서는 좀 당황스럽다.

순순히 따라올 줄 알았는데 말이다.

겉만 바뀐 게 아니라 속이 다 바뀐 줄은 모르려나.

“그, 그래?”

“네. 다음에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럼 할 수 없지. 또 보자, 하루야.”

정중히 배꼽인사를 하고 난 후 갈 길을 가는 손자.

마나님이 아쉬워하며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아지트를 들렀다 어머니 퇴근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온 우하루가 그 일에 대해 말씀드렸다.

속으로는 놀라고 화가 났지만 티를 내지 않은 우지연.

아들이 방으로 들어간 후 그녀가 폰을 집어 들었다.

“오늘 하루 학교 앞에 오셨었다면서요?”

- 그래. 하루가 그러디?

“뭐 하는 짓이에요?”

- 어미한테 말본새가 뭐냐, 그게.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 정말 잘 컸더구나. 우리 손자 완전히 달라졌어, 그 때하고는. TV에서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우지연은 그제야 어머니가 갑자기 왜 손자를 찾아갔는지 납득이 됐다.

그러자 더욱 분노가 밀려들었다.

“달라져서 보고 싶었나 보군요. 안 달라졌더라면 아니었을 텐데.”

- 그게 아니고...

“그 때 생각만 하면 치가 떨려요. 애한테 얼마나 상처를 더 줘야겠어요.”

- 설마 그 때 그 말을 들었으려고.

“제발요, 이제 그만하세요. 그 날 이미 두 분은 손자 버리셨어요.”

- 그럴 리가 있니. 아버지도 보고 싶어 하시는 눈치다.

어이가 없으니 한숨이 나온다.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우지연이 말을 이었다.

“자식, 손자 보고 싶은 게 상태 따라 달라져요? 물건이에요?”

- 그 때 일은 미안하다 몇 번이나 말했잖니.

“이젠 진심인지도 모르겠구요, 더 이상 두 분 의사 따위는 중요하지도 않아요. 명확히 말씀드릴게요.”

- 뭘?

“앞으로 절대 하루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그 누구도요.”

- 지연아!

“만약 그랬다가는 스토킹으로 신고하고 접근 금지명령 신청할 겁니다. 빈 말 아니니까 명심하세요. 끊을게요.”

뚝.

우지연은 거칠게 종료 아이콘을 누르고 소파 위에 폰을 던져버렸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열이 받는다.

‘미친. 이제 와서. 뭐? 달라졌더라? 하아...’

정작 외롭고 절실할 때에는 신발까지 밖으로 던지며 내쫓고서 몇 년을 모른 체 하더니.

‘그걸 실망감을 준 불효에 따른 당연한 분노로 포장하셨지.’

잘 해보려고 단단히 마음먹고 다시 찾아갔던 집.

그런데 뭔가 성치 못한 느낌을 주는 외손자를 두고 상처 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던 그들.

이제와 갑자기 태도가 달라졌다?

‘하아, 하루가 TV에 나와 천재작가로 주목을 받으니까 이제 와서야 ‘우리 손자’라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걸 피붙이한테까지 하다니.

우지연은 치가 떨렸다.

‘하루가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 난감한 상황에서도 냉철하고 차분하게 대처한 아들.

대견하고 기특하다.

‘나한테는 우리 하루만 있으면 돼.’

*****

‘아임 유어 팬’ 2화 극본을 입수한 현수빈.

그녀는 그걸 받아들자마자 매니저를 돌려보내고 그 자리에 앉은 채로 폭풍처럼 읽어 내려갔다.

얼마나 궁금하고 간절했었나.

밤새 머릿속에 이 작품 생각뿐이었다.

주인공을 스타로 키워내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이모.

성공 가도를 달리며 최고의 배우로 우뚝 서던 그 순간.

자신과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1부가 끝났었다.

‘엄마겠지. 생모.’

누구라도 그게 유추되는 상황이다.

물론 현수빈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김이 새느냐고?

천만에.

알고도 당한다는 말이 이런 걸까.

오히려 그래서 더 기다려진 2부였다.

확인하고 싶으니까.

애절한 주인공의 심정을 느끼고 두 사람의 운명을 확인해야 하니까.

현수빈에게 이 대본은 종이 책자가 아니었다.

그 어느 제작사가 유명 감독을 써서 큰 돈 투자해 만든 영화보다 더 실감나고 몰입되는 작품세계 그대로였다.

2부를 읽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져갔다.

이모인 줄 알았던 엄마의 화려했던 젊은 날 스타로서의 모습을 그녀가 머물던 방에서 찾아낸 주인공.

어두운 방에서 홀로 그 영상들과 사진들을 돌려보며 복받치는 그리움과 회한을 눈물에 담아 쏟아내는 장면에서 현수빈은 함께 오열했다.

그 순간 그녀는 극중 윤주아 그 자체였다.

그녀를 또 한 번 극한의 통곡으로 이끈 장면.

그건 말미였다.

기적적으로 다시 재회했지만 이미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임종 직전의 엄마.

그녀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며 속삭이던 마지막 말.

“사랑해요, 엄마. 전 엄마의 팬이에요, 영원한.”

아임 유어 팬.

대본 마지막 장을 힘겹게 덮은 현수빈.

자신의 품을 끌어안고 움츠린 그녀는 한참동안 몸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했다.

*****

다음날.

현수빈이 소속사인 투엔티 액터스 1팀에 모습을 드러냈다.

“말도 안 돼요. 수빈 씨가 그 드라마에 왜 출연해요?”

그녀를 담당하는 1팀 팀장.

그가 말이 나오기 무섭게 대놓고 만류를 시작했다.

“지금 거기 얼굴을 비칠 때가 아녜요. 수빈 씨는 바야흐로 지금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기 시작한 톱 레벨의 배우라고요.”

“내가 그렇게 톱 레벨이 벌써 된 줄도 모르겠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서 그 작품 하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나요?”

“네. 스스로 급을 낮추는 거니까요.”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는 현수빈.

말릴 수는 있다.

하지만 이유가 마음에 안 든다.

“말도 안 돼. 왜 그게 급을 낮추는 거죠?”

“심야 드라마극장은 KTBS에서도, 아니 지상파 전체를 통틀어 가장 시청률이 낮은 시리즈예요.”

“그게 중요해요?”

“중요하죠. 2년 반 동안 수빈 씨가 거둔 평균 시청률이 20프로 가까이 돼요. 그런 톱스타가 아무도 안 알아주고 인기도 없는 작품에 알아서 들어간다? 누구한테 물어봐도 자살행위라고 할 거예요!”

부드러움을 잃지 않던 현수빈의 표정이 급변했다.

옆에 있던 로드 정우주가 낌새를 알아채고 먼저 찔끔.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네? 아...죄, 죄송해요. 제가 좀 흥분을...”

재계약이 1년 남짓 남은 시점.

지금 그녀의 위상을 따져본다면 소속사가 저리 딱딱하게 나갈 수만은 없는 상황인데.

“아쉽네요. 실장님은 이야기가 좀 통할 줄 알았는데. 이 작품에 대해서는 알아보실 생각 전혀 안 하시고. 실망이에요, 좀.”

“수, 수빈 씨!”

모처럼 찾아온 소속사 사옥을 미련 없이 나온 현수빈.

팀장의 저런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입장이란 게 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원했던 건 진지한 상의였다.

제대로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다짜고짜 질색부터 하는 반응.

단박에 정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다.

귀가한 그녀가 한참 동안을 고민에 빠졌다.

발코니에서 밖의 풍광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한참동안 동상처럼 굳어있던 그녀.

어느새 노을마저 가시고 어둠이 내려앉던 그 때.

마침내 일어나 불을 켜고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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