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저 그 작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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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에이 픽처스.
나극상 감독이 대표와 수석연출자로 있는 이 회사 사무실에는 늦은 저녁까지 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
‘아임 유어 팬’의 본격적인 제작 준비에 들어간 상황.
밥 먹을 시간도 내기 힘들 정도로 바쁘다.
“중연아. 스태프들 체크 잘 하는 거 잊지 말고.”
“네, 감독님.”
“주조연 후보 배우들 리스트업 해놓으라고 한 거 있지?”
“일단 추려봤습니다.”
“가져와 봐.”
비록 단편 드라마이지만 나극상 감독의 각오는 대단하다.
한동안 작품을 하지 않던 그가 새롭게 제작하는 이른바 복귀작인 셈이니까.
사실 주위에서 꽤 만류가 있었다.
한 때 히트작 제조기였던 대연출가가 고작 심야 단막극 시리즈 중 한 편으로 컴백을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느냐고.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이게 마음이 편했다.
만약 주말드라마나 미니시리즈를 맡게 되면 쉬는 동안 녹이 슬어 있을지 모르는 자신의 감각이 자칫 그대로 노출되어 큰 실패를 경험하게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단 우려.
그건 자신감의 결여가 아닌 냉철한 판단이었다.
게다가, 잘 나갈 때에는 오히려 기회가 오지 않았던 이런 작품성 높은 드라마를 제작하고 싶은 욕구도 있었고.
‘사실 공모 시작할 때만 해도 내가 직접 연출을 맡을까 말까 갈등을 좀 했었지. 근데 이 작품이라면 너무나 하고 싶어졌어!’
아무리 네임드 작가가 쓰고 톱스타가 출연하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왠지 정이 안 가고 내 것이 아닌 듯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런 드라마를 맡을 때면 안도감은 느껴지지만 흥이 안 난다.
열정이 끓어오르지 않는다고 표현하면 될까.
그런데 이 ‘아임 유어 팬’은 정 반대다.
작품을 접하자마자 자신이 꼭 맡아서 제작해보고 싶다는.
스스로의 몸과 마음에서 강하게 발산되는 신호를 감지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신선한 열정.
살아 있다는 느낌.
이게 실로 얼마 만인가.
이 작품의 가치를 유명 배우들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깨닫게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아쉽기는 했지만.
어떡하랴.
여건에 맞는 방법을 찾는 수밖에.
“일단 자네가 뽑은 이 친구들한테 제안을 해보지. 나쁘지 않은 것 같군.”
“오디션을 보긴 해야겠죠?”
“당연하지. 그건 헐리웃 배우들한테도 스킵해줄 수 없는 거야. 아무리 연기력이 뛰어나다 해도 배역하고 궁합은 직접 확인해 봐야 하니까.”
“그럼, 날짜 잡아야겠군요. 차라리 공개 오디션을 함께 열까요? 이 친구들 전부 안 올 수 있잖아요.”
“설마, 그렇기까지야 하겠어.”
“네, 그럴 거 같은데요.”
일 잘 하고 성실하기로 유명한 홍 조감독의 유일한 단점.
분위기 파악해서 적당히 절제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거다.
기분이 살짝 나빠진 나 감독.
그 때, 그의 폰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엇!”
액정을 확인하고 놀란 그.
“왜 그러세요? 보이스피싱? 아니면 몰래 만나시는...”
“쉿!”
나 감독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수빈 씨. 어쩐 일이야, 이 느지막한 시간에?”
‘수빈’이란 이름이 나오자 조감독도 급 얼음이 됐다.
- 감독님. 저한테 주신 ‘아임 유어 팬’ 말이에요.
“응.”
- 혹시, 윤주아 배역 아직 비어 있어요?
나 감독이 폰을 가리고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답했다.
“아니, 아직. 솔직히 수빈 씨가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살짝 기다리고 있던 것도 있고.”
자존심에 해달라 노골적으로 매달리지는 못하는 그다.
그런데 그 때.
- 다행이네요. 제가 할 게요!
순간 나 감독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 지금 뭐라고 했어? 수빈 씨가 하겠다고?”
- 네, 제가 해요. 그거.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는 간신히 자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닫아 그 사태를 막아냈다.
“고마워. 정말 잘 생각했어. 수빈 씨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진짜.”
- 제가 감독님한테 감사하죠. 그런 명작을 만나게 해주셔서.
“솔직히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거란 건 알아. 우리 한 번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보자.”
-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자세한 건 따로 만나 뵙고 말씀 나눠요.
“그래, 그래.”
- 저기, 혹시...
“응? 뭐 궁금한 거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봐 줘.”
- 감독님하고 미팅할 때 그 작가님도 같이 볼 수 있을까요? 주말이나 공휴일도 괜찮으니까.
“아, 우하루 작가?”
- 네. 하루라도 빨리 만나보고 싶어요. 작품에 대해서, 윤주아에 대해서도 깊게 이야기를 나눠봤으면 해요.
“그럼 당연히 가능하지. 그러자고.”
- 감사해요. 그 때 뵐 게요.
“그래, 그래. 들어가고.”
종료 버튼을 누른 후 전화가 완벽히 끊어진 걸 확인한 나 감독.
그가 갑자기 두 팔을 벌려 만세를 부르며 폴짝폴짝 뛴다.
“감독님. 현수빈 씨가 우리 드라마 한대요?”
“그래. 하겠대. 으하하하핫!”
“말도 안 돼...”
“왜 말이 안 돼, 인마! 작품에 대한 안목이 깊은 배우야, 그 친구가!”
“그래도, 지금 제일 주가가 높은 탑배우가 이런 시청률 0프로대 단막극을...”
다른 때 같았으면 분명 한 대 쥐어 박혔을 조감독.
다행히 나 감독은 갑자기 찾아든 희소식에 기쁜 나머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사무실 안을 휘젓고 다니느라 제정신이 아니다.
“하아, 이게 다 우하루 작가 덕분이라고! 으하하하! 보물이야!”
그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
다음날 아침.
토요일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KTBS 본사의 드라마국 회의실은 꽤 분주하다.
오후 회의를 앞두고 나 감독 등 제작사와 방송국 관계자들이 자료를 준비 중인 상황.
누군가가 노크를 한 후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순간.
“와아...”
갑자기 회의실 안에 탄성이 일었다.
나타난 사람은 바로 우하루.
심플하면서도 상큼한 세미캐주얼 차림의 그가 직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훤칠한 키에 오목조목 이목구비는 덤이다.
그 멋짐의 폭발에 모두의 입에서 저절로 감탄의 소리가 나온 것.
“우 작가. 원래도 그랬지만 오늘따라 진짜 잘 생기고 멋있다!”
“인터뷰에 그냥 막 하고 올 수가 없어서요. 머리도 손질하고 옷도 좀 골라서 걸쳐 입었네요.”
“혹시 오다가 명함 못 받았어?”
“그렇지 않아도 여기...”
우하루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명함을 다섯 장이나 꺼냈다.
방송국 주변과 로비에서 매니지먼트사 관계자들에게 받은 것들이었다.
“뭐야. 난 농담이었는데 정말이네. 하하하.”
“막무가내로 주셔서 어쩔 수 없이 일단 집어넣었습니다.”
“충분히 이해 가. 이 정도면 아이돌 뺨치지. 참, 녹화 언제 시작이지?”
“한 시간 후입니다.”
“오늘 우 작가 인터뷰 나가고 나면 난리 한 번 나겠는 걸. 하하.”
그가 오늘 방송국에 행차한 건 ‘문화이슈 초대석’ 녹화 때문.
인터뷰 겸 대담은 편집을 거쳐 다음 주 일요일 밤에 방송될 예정이다.
“아까 전화 하셔서 직접 얼굴 보고 말해주고 싶다고 하신 건 뭔지 궁금하네요.”
“앉아 보게. 그리고 놀라지 말아요.”
“네.”
“현수빈 배우, 내가 이야기했었지. 대본 전달했다고.”
“네. 덕분에 저도 잠시 김칫국을 마셨더랬죠.”
“하하, 맞아. 나도야. 근데 그거 김칫국 아닌 게 됐어.”
“네? 설마...”
“맞아. 수빈 씨가 우리 드라마에 출연하겠대. 어제 공식적으로 연락이 왔어!”
“그게 정말입니까? 와, 잘 됐네요!”
아마 다른 직원들이 없었다면 다시 한 번 폴짝폴짝 뛰었을 게 분명한 나 감독.
기쁨을 자제하느라 힘든 기색이다.
‘그렇게 좋으실까. 이렇게 하이톤이신 건 처음이네.’
우하루는 그의 들뜬 목소리가 신기해 웃음이 나왔다.
물론 우하루도 기쁘기 이를 데 없다.
현수빈은 그도 너무 좋아하는 여배우였고, 연기력 또한 탑 레벨이니 말이다.
더구나 극중 주인공인 윤주아와 매치되는 점이 꽤 많았다.
“수빈 씨가 우 작가를 빨리 보고 싶어 해.”
“저를요?”
“응. 순전히 작품이 너무 좋아서 결심했대. 뭐, 내가 감독이 누구인지 따위는 결정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은 것 같아 좀 서운하긴 하지만...”
“에이, 감독님. 왜 또 그러세요.”
“하하, 농담이야 농담. 하여튼 다른 사람한테 전해 들었는데, 수빈 씨 소속사에서 반대가 꽤 심했나 봐. 그걸 이겨내고 결심한 거니, 얼마나 고마워, 우리로서는.
우하루도 그녀와의 만남이 기대된다.
어서 작품과 윤주아 캐릭터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까.
“이 소식은 외부에 아직 언급하지 말아주게. 며칠 있으면 공식적으로 발표가 나갈 거니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잠시 후, 우하루는 기쁜 마음을 안고 ‘문화이슈 초대석’의 인터뷰 녹화 장소인 소공개홀 세트장으로 향했다.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나중경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금요일 밤 늦게 하는 시청률 꼴지 단편 드라마에 인기 배우가 출연할 리가 없다는.
우하루의 입에서 웃음이 피식 흘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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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송하예고 1학년 3반 첫 수업은 ‘스토리 창작과 구성의 기초’.
각 조 별로 자리를 모여 앉았다.
아직 시작하기 10분 전.
나중경이 자기 조원들과 뭔가 열띤 토론 중이다.
“아무리 봐도 웹툰이 좀 아쉬워. 원작의 완벽한 구성과 캐릭터, 그리고 한 화도 빠지지 않고 이어지는 그 긴장감과 스릴이 덜 느껴진단 말이지.”
그가 침을 튀어가며 주장을 하자 다른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공감을 하는 분위기인가.
“사실 핵심은 ‘페르티’에 몰입해서 독자들이 느끼는 사이다잖아. 그게 웹툰에서는 좀 약한 거 같아, 나도.”
“네가 정확히 봤네.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라는 이 명작을 다른 콘텐츠로 옮길 때에는 나처럼 스토리텔링의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달라붙어 치밀하게 준비를 하고 시작해야 하는데 너무 급했지. 많이 실망이야.”
“그래도 초반에 비해서 엄청 나아졌잖아. ‘재거20’이 각성했다는 말도 나오는 걸 보면, 후훗.”
그 말에 나중경이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아마 ‘에이데이’ 작가님께서 훈수를 두셨겠지. 그게 분명해.”
“그럴까?”
“당연하지. 그렇지 않고서야 동일한 작가가 이렇게 방향을 틀 수 있을 리는 없으니까.”
“근데 나중경 넌 ‘회서군’하고 ‘에이데이’ 작가 이야기만 나오면 사족을 못 쓰더라. 완전 팬이구나?”
“얘 그냥 팬이 아니라 광팬이야 광팬. 이른바 덕후랄까. 이 소설이 얘가 본 웹소설 중 가장 명작이래.”
“얘들아. 나 나중경이 명확하게 말해줄게. 이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라는 소설은 단지 웹소설 뿐 아니라 모든 소설 중에서도 가장 명작이야!”
“헐, 그 정도야?”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에이데이’ 작가님을 꼭 만나고 말 거야. 나이고 어디 사시는 분인지 아직 전혀 알려진 바는 없지만, 혹시 외국에서 쓰는 분이라 해도 난 거기까지 날아가서 영접할 거라고. 나 이 분 미친 듯이 존경해!”
급발진하는 그를 보며 조원들이 혀를 차던 그 와중.
누군가 폰을 보다가 뭔가를 발견하고서 놀라움의 탄성을 지른다.
“어? 이거 뭐야?”
“왜? 지진이라도 났어?”
“그게 아니고. 와, 장난 아니다!”
“뭔데 그래?”
그러자 그 장본인이 폰을 들어 조원들에게 액정을 보여준다.
물론 나중경의 시선에도 화면이 들어왔다.
“이거 봐! 현수빈 배우가 우하루 작품에 출연하기로 했대!”
“정말?”
“어디, 어디!”
올라온 지 3분도 안 된 따끈따끈한 기사.
“와, 진짜네!”
“수빈이 누나가 진짜로? 대박!”
순간, 나중경의 안색이 흑색으로 변했다.
“중경아. 뭐야? 네가 이런 데에는 탑스타가 출연 안 할 거라며?”
“그러니까 말이야. 현수빈이면 지금 네임드 작가들이 너도나도 잡으려고 안달인 탑 오브 탑 배우잖아. 이거 어떻게 된 거냐?”
어중간한 레벨도 아니고.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은 사람도 현수빈이 현재 최고의 여배우 중 한 명이란 걸 알고 있는 정도인데.
그녀가 우하루의 ‘아임 유어 팬’에 출연을 결정했다는 소식은 나중경에게 있어 몇 톤에 버금가는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여기 기사 내용 봐봐. 수빈 누나가 출연하게 된 이유! 우하루를 직접 언급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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