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작가 우하루-30화 (66/69)

30화. 네 결정 백 퍼센트 이해 가

“어, 진짜네!”

순간, 갑자기 말이 없어진 나중경의 표정이 더욱 암울해졌다.

“내가 한 번 읽어볼게.”

조원들 중 한 명이 굳이 그 기사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얼굴이 굳어진 친구의 심경은 아랑곳하지 않는 행동.

그들이 나중경을 어떤 식으로 여기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대본을 접한 순간 그 자리에서 단번에 끝까지 읽어 내려갔어요. 덕분에 밤을 새다시피 했죠.]

“오...”

아이들이 현수빈의 멘트에 감탄을 하며 추임새까지 넣는다.

심지어 누군가는 손뼉을 치기까지.

[얼마나 감동적이고 완벽한지. 단연코 제가 접한 작품 중 최고였어요. 그리고 느꼈죠. 제가 이 드라마를 만나게 된 건 운명이라는 걸요.]

“하아. 진짜 장난 아니네.”

[출연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순전히 작품 자체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탄생시킨 우하루 작가님이 15살이란 걸 알고 너무 놀랐어요. 천재작가님과 어서 꼭 함께 작업해보고 싶습니다!]

“와, 미친!”

“올!”

“천재작가 우하루! 현수빈이 직접 그렇게 불러주다니!”

다섯 명의 탄성이 합창처럼 터져 나왔다.

“하아, 부럽다 진짜! 나 진짜 수빈 누나 완전 팬인데. 그런 톱스타가 하루를 보고 싶어 한다고 자기 입으로 이야기를?”

“같은 반 친구인데 난 왜 이리 초라해 보이는 거냐.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다규!”

부러움과 질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들로서는 현실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 기사의 내용이었으니.

“그러고 보니, 우리 중에 하루 작품 읽어본 사람 없잖아.”

“대상 탄 거? 그건 뭐 공개가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지.”

“현수빈 같은 탑배우가 저런 정도로 감동을 받고 찬사를 하는 거 보면 진짜 장난 아닌가 봐.”

“방송사 드라마 공모 대상이 장난으로 보이냐. 기성에 버금가는 난다 긴다 하는 차세대 작가들이 기를 쓰고 달려드는 데라고. 거기서 1등 했다면 이미 그 자체로 게임 끝인 거야.”

“하긴. 드라마 제작 끝나고 방영되면 꼭 봐야겠다. 얼마나 대단한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모두가 현수빈의 ‘아임 유어 팬’ 출연 소식을 놓고 열띤 대화에 폭 빠져 있는 사이.

누군가 한 명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얘 어디 갔냐?”

“누구? 어 진짜. 나중경, 그새 없어졌네.”

“놔 둬. 지금 속이 속이겠냐. 그렇지 않아도 그 놈의 근자감이 하늘을 찌르는 앤데, 벌써 우하루한테 한 판 대차게 깨진 셈이니.”

“세수라도 하고 오려나 보지.”

“수업 시간 다 됐는데, 뭐야.”

그 때.

교무실을 다녀온 우하루가 교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좋겠다, 우하루!”

“자식! 전생에 나라를 구했던 게 분명해. 수빈 누나 잘 부탁해!”

“부러워. 나중에 방송국 한 번 데려가 줘라, 제발!”

현수빈의 이름이 언급되자, 우하루가 곧 눈치를 챘다.

‘공식 발표가 나왔나 보군.’

그는 아이들에게 시크한 미소를 한 번 날려준 후 더없이 평온한 표정으로 수업 준비를 시작했다.

누가 봐도 멋짐 폭발이다.

*****

현수빈이 소속사인 투엔티 액터스 사옥으로 향하고 있다.

대표이사가 그녀를 보자고 했기 때문.

이번 결정 때문에 갈등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런데도 오히려 쫄아 있는 건 정작 현수빈보다 로드인 정우주 매니저인 듯.

룸미러로 계속 그녀의 눈치를 살피는 그다.

“아, 왜?”

“네?”

“왜 자꾸 보냐고. 모를 거 같아?”

“저, 그게...”

“내가 걱정돼서?”

“아무래도요.”

“걱정 마. 내가 다 알아서 하니까. 나 그렇게 생각 없는 애 아니야. 자꾸 힐긋거리다 사고 난다. 운전 집중해라, 좋은 말 할 때.”

“넵, 알겠습니다. 배우님.”

회사에 도착한 차에서 내린 현수빈이 곧장 대표실로 향했다.

안에는 그녀를 담당하는 1팀 팀장인 황광민 실장도 이미 올라와 있었다.

그 역시 잔뜩 긴장한 데다 편치 않은 얼굴이다.

“어서 와.”

“대표님, 잘 지내셨죠? 꽤 오랜만이네요.”

“그러니까 말이야. 그 간만에 보는데 좀 즐거운 기분으로 보게 해주면 얼마나 좋겠어. 솔직히 이번 결정 유감이야.”

“대표님과 합의가 없이 결정한 건 죄송한데, 어쨌든 작품 결정 권한은 배우한테 있으니 제가 계약을 어긴 건 아니잖아요.”

“그건 맞지만. 그래도 좀 아쉬움이 남는다랄까.”

“저도 대표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늘 제 안목을 믿어 주셨으니까 이번에도 그래주세요. 이런 말씀까지는 안 드리려고 했는데, 작년 초에 제가 맘에 안 들어 했던 드라마 대표님하고 방송국 관계 생각해서 출연했던 거 기억하시죠?”

“줬으니까 받게 해 달라, 뭐 이건가?”

“네. 세상에 ‘기브 앤 테이크’ 아닌 게 있나요.”

갑자기 대표가 할 말이 없어졌다.

이상하게도 늘 그녀에게 지는 것 같은데 그게 또 반복이 된다.

너무 똑똑한 여자.

미친 듯 인기가 상승하고 있는 배우이기에 이제 갑을 관계는 의미가 없어진 상황이다.

“전 찝찝한 거 싫어요. 깔끔하게 가죠. 자, 여기.”

그녀가 갑자기 가방에서 제본된 책 두 권을 꺼내 건넨다.

“이게 뭐지?”

“아임 유어 팬 대본이에요. 1부하고 2부.”

“이걸 왜? 읽어보라고?”

“네. 제가 왜 대표님 실장님 반대 무릅쓰고 출연 결정을 했는지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이해 못하세요. 그러니 읽어보세요. 만약 다 보시고 난 후 그래도 마음에 안 드시면 저도 다시 한 번 고려해 볼게요.”

“정말이지?”

“네. 저 약속이 있어서 나갔다 올게요. 그 때 다시 이야기해요.”

성큼성큼 대표실을 나선 현수빈.

그녀는 곧장 회사를 나가 어디론가 향했다.

도착한 곳은 한적하면서도 정갈한 전통 찻집.

자리를 잡고 기다린 지 얼마 안 돼 방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기는 현수빈.

“안녕하세요, 선배님!”

“많이 기다렸어?”

“아뇨. 저도 방금 왔어요.”

현수빈이 맞이한 그녀는 30년차 중견 여배우 임정화다.

한 때 대한민국 미녀 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으로 명성을 휘날리던 그녀.

여전히 주조연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멈추지 않는 대선배이자 명연기자다.

“선배님. 나 감독님한테 대본 받으신 거, 다 보셨어요?”

“그럼, 다 봤지.”

“어떠셨어요?”

“어떻긴.”

순간 긴장감이 흐르는 현수빈의 얼굴.

반응이 자못 궁금하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이자 늘 함께 연기를 하고 싶은 연기자인 그녀의 소감이.

자신의 안목과의 궁합이 달린 문제이기도 하니까.

“좋았어.”

“그러셨죠?”

“너무, 엑설런트 그 이상이었어. 감동적인 건 말할 것도 없고, 참 많은 걸 생각하게 하더라. 오랜만에 펑펑 울었지 뭐야, 부끄럽게시리.”

“저도요, 선배님. 전 통곡했어요.”

“그럴 만 해. 내용도 내용이지만 아이디어 자체도 참신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도 독특해서 감탄했어. 전혀 무리가 가지 않고 편하게 전개하면서도 몸의 온갖 신경을 자극하는 짜릿함도 있는 구성. 아주 멋져. 솔직히 난 결말도 그렇게 될 줄 몰랐거든. 뻔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뻔하지 않은. 다 읽고 나서 참 탄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지.”

극찬이었다.

듣는 내내 현수빈은 고개를 지나칠 정도로 끄덕이며 감개무량해 했다.

“수빈이 네가 왜 단박에 출연하겠다고 결심을 했는지 백 퍼센트, 아니 천 퍼센트 이해했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현수빈.

‘아임 유어 팬’의 진면목을 알아봐 주는 선배가 감사했고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받음에 행복했다.

“하여튼 수빈이 너 작품 보는 눈하고 연기에 대한 열정은 알아줘야 해. 내가 그래서 널 좋아할 수밖에 없다니까.”

“과찬이세요.”

“솔직히 말해 봐. 지금 제일 궁금한 거. 알고 싶은 거.”

“선배님도. 다 아시면서...”

“호호호, 하여튼 못 말려 진짜!”

임정화가 호탕하게 웃은 뒤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나도 해.”

동시에, 벌어진 입을 가리기 위해 자신의 손을 입으로 가져간 현수빈.

“저, 정말이세요?”

“해야지. 너만 그거 하면 나 샘나서 어떻게 살라고? 그럴 순 없지!”

“선배님! 사랑해요, 선배님!”

현수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맞은편으로 달려가 임정화를 와락 껴안았다.

당장이라도 울 기세다.

“그렇게 좋아?”

“너무 좋아요, 선배님. 선배님이 제 엄마가 되시는 거잖아요. 제가 정말 잘 할게요. 이 작품 멋지게 해내 봐요.”

“그래. 그러자.”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꽃을 피우던 두 사람.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나서야 찻집을 나섰다.

선배와 헤어진 현수빈은 곧장 소속사로 다시 들어갔다.

노크를 하고 대표실의 문을 여니.

어느 정도 예상을 했지만, 희한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팔소매를 걷은 와이셔츠 차림의 대표와 실장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의자와 소파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는 모습.

그들의 손에는 아까 현수빈이 건넨 ‘아임 유어 팬’의 대본이 들려져 있다.

“어? 와, 왔어?”

이상하게 두 사람이 코가 훌쩍이는 듯한 느낌이...

“우세요, 두 분?”

“에이. 무슨 말을. 아니야!”

“말도 안 돼. 훌쩍.”

“우네. 다 큰 어르신들이, 창피하게.”

재빨리 티슈로 코를 푼 두 사람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다시 봐도 운 거 맞다.

“다 보셨죠? 어떠세요? 지금도 극구 반대세요?”

“.......”

“대표님?”

“저기...내 생각엔 말이지...”

“네.”

“뭐, 이 정도면 나름 출연해 봐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해.”

혀가 길다.

그러면 뭐다?

꼬리를 내렸다는 뜻.

그 말을 듣자마자 피식 웃음이 나오는 현수빈이다.

자신이 걸려들었던 우하루 작가의 정체모를 마수가 이 두 사람에게도 전염된 게 분명하니까.

“실장님은요?”

“뭐, 나도...대표님하고 같은 생각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시원하게 오케이하신 걸로 알고, 이 대본은...”

대본을 회수하려하자, 갑자기 잡고 놓지 않으려는 두 사람.

“왜 이러세요?”

“아직...좀 덜 봤어. 다 보고 정 매니저 편에 집으로 보내줄게.”

헐.

“어이가 없네. 뭐, 알겠어요. 대신 잃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당연.”

“그럼 저 갈 게요.”

“그래요. 오늘 직접 오느라 고생했네.”

대표실을 나가려던 현수빈이 뭔가 할 말이 남았다는 듯 뒤를 돌았다.

“아직 모르실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건데, 임정화 선배님도 출연 결정하셨어요.”

“뭐라고? 리얼리? 그 깐깐하고 까다로운 사람이?”

“네. 참고하시라고요. 그리고, 일요일 밤 11시에 KTBS 꼭 보세요.”

“왜?”

“문화이슈 초대석에 우하루 작가님 나온대요. 두 분께서 지금 홀딱 빠져있는 그 작품 쓰신 분 말이에요!”

그녀가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날린 뒤 쿨하게 문을 닫고 나갔다.

*****

일요일 밤 11시.

우하루는 어머니와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마주했다.

KTBS 문화이슈 프로가 시작되고.

세 꼭지 중 마지막 파트에 드디어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

‘걱정했던 것보다는 다행히 꽤 괜찮네.’

나름 착장을 갖추고 방송국에서 해준 메이크업을 받은 후 카메라에 앉았던 그 날.

겉으로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체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은근히 긴장이 됐었다.

다행히 화면 속에 그런 티는 조금도 드러나지 않아 보인다.

“어머. 우리 하루 화면이 어쩜 저리 잘 받을까.”

어머니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심지어 대담을 진행한 여자 아나운서도 솔직한 느낌을 털어놨으니까.

- 너무 잘 생기셨어요. 전 아까 대기실에서 처음 봤을 때 새로 데뷔한 아이돌그룹 멤버인 줄 알았습니다. 진짜, 농담이 아니구요.

우하루는 오글거려 손가락이 곤두섰지만.

우지연은 뿌듯함에 입 꼬리가 한껏 올라가 있다.

약 20분간의 인터뷰 형식 대담.

우하루의 이번 공모의 당선 소감과 ‘아임 유어 팬’의 작품세계에 대해 솔직담백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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