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이 사람은 ‘진짜’야
- 이렇게 어린 나이에 KTBS 단편 드라마 공모에 당선되셨어요. 그것도 ‘대상’으로 말이죠.
- 하하, 네 그러게요.
부끄럽다는 듯 수줍게 답하는 우하루.
그 모습이 겸손해 보인다.
- 모든 방송사 통틀어 역사상 최연소 수상인 건 알고 계시죠?
- 네, 전해 들었습니다.
- 수상 소식 듣고 어떠셨는지 소감이 궁금하네요.
- 좋게 평가해주신 심사위원 분들께 감사했구요, 제가 작품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뛰고 행복했습니다.
- 어쩌면, 대답도 이렇게 어른스러울까요.
앳돼 보이는 모습과 상큼한 보이스에서 나오는, 그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기이한 연륜의 느낌.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그래서 장현주 아나운서는 신기하다.
그녀의 표정이 카메라에 그대로 담겼다.
- 소식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분은 누구였죠?
- 어머닙니다. 저를 혼자서 힘들게 키우셨거든요.
- 아, 그러시군요. 무척 좋아하셨겠네요.
- 네. 굉장히 기뻐하셨습니다.
그 장면에서, 우지연이 옆에 앉아 있는 아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소를 지으며 우하루의 손을 꼭 잡아주는 그녀.
대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듣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왠지 그 감격과 기쁨이 다시 한 번 솟아오르는 느낌이다.
- 공모에 당선됐을 당시가 중3 겨울방학 기간이었죠?
- 네, 맞습니다.
- 지금은 이제 고1이 되신 거고요.
- 네.
- 근데 그 와중에 놀라운 일을 또 하나 해내셨더라구요. 송하예고 연영과 영상연출 전공에 수석으로 입학을 하셨어요! 또 축하드려야겠어요!
- 아 네, 감사합니다.
몇 가지의 대화가 더 이어진 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아임 유어 팬’에 대한 이야기로 돌입했다.
작품에 대한 소개를 부탁받았고.
우하루는 최대한 심플하게, 그러면서도 궁금증을 유발시킬 수 있는 큐를 포함시킨 멘트를 쳤다.
물론 전개에 대한 힌트나 결론에 대한 스포는 철저히 차단!
설명을 들은 누구라도 다음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날 정도로 절묘한 화법이 돋보였다.
- 역시 작가 분이시라 그런지 호기심을 엄청 유발시켜 주는 능력이 탁월하시군요.
- 하하, 그런가요?
- 드라마 안 보고는 절대 못 배길 것 같은데요?
- 그렇다면 오늘 미션 중 하나를 이미 완수했네요.
- 아, 그렇게 되나요? 호호.
우하루의 재치 있는 농담에 분위기는 화기애애.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장현주 아나운서는 이 손님이 마음에 든다.
- 혹시 작가님은 이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나요?
아주 잠시 입을 오므린 채 생각하던 우하루.
이내 그가 답을 이어갔다.
- 저는 독자 분들께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
장 아나운서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이런 식이니 호기심이 더 생긴다.
- 그건 왜죠?
- 제가 어떤 의도된 메시지를 전달해도 시청자분들은 저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도 자체가 가치 없다는 게 아니라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 조금 어렵네요.
-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살면서 어떤 현실을 겪으면 그걸 누구나 똑같은 의미로 받아들일까요?
- 아니죠. 다 다르게 해석하겠죠.
- 맞습니다. 소설이나 드라마는 ‘있을 법한 현실’입니다. 인생과 같습니다. 그걸 받아들이는 방식과 내용이 시청자 분들마다 다 다르죠. 저는 그 ‘있을 법한 현실’을 창작해 드려서 즐거움을 드릴 뿐, 그 다음은 관여하지 않습니다. 자칫 강요가 될 수 있으니까요.
잠시 정적.
우하루의 말에 장 아나운서는 심연처럼 깊이 빠져들어 있다.
심플한 논리지만 분명 맞는 말이다.
아니, 너무 명료하지만 철학적 사색이 없이는 생각해낼 수 없는 통찰.
그걸 지금 이 고등학교 1학년생이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지금 원로 작가와 대담을 하고 있는 건가.’
갑자기 자신의 눈이 의심이 될 정도.
어느새 그녀의 자세가 완전히 우하루 쪽으로 돌아 향해있다.
이 정도면 카메라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듯.
마치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 학생같은 광경이다.
‘단지 글만 잘 쓰는 학생이 아니었어. 내가 배워야 할 정도로 사색이 깊다고.’
공모에서 최연소 수상이 나온 데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을 그녀는 들은 적이 있다.
운이 좋았다든가 분명 다른 누군가가 도와줬을 거라든가.
갑자기 그들의 입을 확 꿰매 버리고 싶은 욕구가 솟아나는 그녀다.
남들의 기적과 성과에 대해 그런 식으로 폄하하고 시샘하는 부류들이 너무 혐오스럽다.
이렇게 직접 만나보고 이야기를 해보면 자신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이내 깨닫게 될 것을.
오늘 장현주 아나운서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우하루란 이 미소년은 ‘진짜’다.
이렇게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면 못 볼 수가 없다.
그 깊은 사색과 사고의 샘물을 말이다.
이 천재작가가 쓰는 글은 분명 그곳에서부터 샘솟아 나오는 것일 터.
정신없이 우하루와 대화하던 그녀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피디가 사인을 보내자 그 때에서야 스톱.
예정 시간이 훨씬 넘어 있었다.
결국 상당 부분을 편집해야 할 상황이 된 이유였다.
- 벌써 시간이 다 됐네요. 아쉬워요.
자꾸 더 알고 싶어지는 사람.
오늘은 정말 시간이 너무 적었다.
그녀는 조만간 또 만남을 갖자는 약속을 하고서 대담을 마쳤다.
*****
KTBS ‘문화이슈’가 방송된 다음날인 월요일.
한 주를 시작하며 열린 조회가 끝난 후 잠시의 커피 타임.
교사들 사이에서 어제 방송이 화제로 떠올랐다.
“어제 밤에 다들 봤어요?”
“당연히 봤죠. 와, 역시. 하루 장난 아니던데요. 상상 그 이상이었어요. 어쩌면 그렇게 말도 잘 하고 어른스럽던지.”
“차분하게 조곤조곤 명료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솔직히 작가 아니고 아나운서 해도 탑 찍겠더라구요.”
“얼굴은 어떻고요. 아나운서 말대로 아이돌그룹 안에 세워놔도 전혀 안 꿀리겠더군요.”
“우리 학교에 명물이 들어왔어요. 아니, 들어왔는데 그 학생이 명물인 거지. 아니, 보물이라고 해야 하나?”
“네 맞아요, 보물!”
교장실로 들어간 줄 알았던 황두헌 교장이 어느새 그들 뒤에 나타났다.
월요일 아침이면 늘 컨디션이 안 좋은지 인상이 쳐져 있던 그.
오늘따라 기분이 밝아보였는데.
“어제 그 방송 보고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교장 선생님도 그러셨군요. 그래서 오늘 아침에 얼굴이 좋아 보이셨나 봐요.”
“왜 아니겠어요. 우리 학교 언급된 거 다들 보셨죠?”
“네?”
“우하루가 대 ‘송하예고’ 학생이란 게 만천하에 제대로 알려졌잖습니까. 이게 제대로 된 홍보지! 천재작가, 신동이 다니는 예술고! 다들 얼마나 관심을 갖겠습니까? 하하하.”
어느 학교든 사정은 비슷한가 보다.
교장이든 이사장이든.
윗사람들은 학교의 홍보에 그렇게나 목숨들을 건다.
하긴.
사립학교는 당연히 이윤추구가 목적 중 하나인 거니까.
이해를 하고 넘어갈 수밖에.
“선생님들 말대로 우하루는 우리 학교의 보물입니다. 저기, 유 선생님.”
황두헌 교장이 우하루의 담임인 유하연 선생을 부른다.
요즘 여러모로 어깨가 올라가고 면이 서 흐뭇한 삶을 살고 있는 유 선생.
물론 이게 다 우하루 때문이니.
“항상 우하루 잘 보살펴 주고 뭐 필요한 거 없는지 늘 신경 써 줘요.”
“알겠습니다. 교장 선생님.”
“이번처럼 방송 관련해서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빨리 나한테 이야기해주고. 내가 조치를 취해줄 테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뭐가 그리 좋은지 허허 웃으면서 황 교장은 다시 자기 방으로 복귀.
“교장 선생님 저러는 거 처음 봤어요.”
“글쎄 말입니다. 우하루가 여러 사람 기분 바꿔 놓네요.”
“그러게요.”
유하연 선생의 귀가 오늘따라 더 즐겁다.
자신의 제자가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데 기분이 안 좋은 담임이 있을까.
마치 본인이 칭찬을 받는 것처럼 행복하고 짜릿하다.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조회를 위해 조금 일찍 교무실에서 나온 그녀.
1학년 3반이 있는 복도로 올라선 순간.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뭐지? 저 장면은?’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인 한 명의 남자 아이.
키가 크니 금세 얼굴을 알아봤다.
“우하루?”
딱 보니 저마다 셀카를 같이 찍어달라고 조르고 있는 상황.
아무래도 어제 TV 출연의 여파인 듯했다.
“얘들아. 뭐 하니?”
다들 깜짝 놀라며 밀집도가 느슨해졌다.
“안녕하세요?”
“조회 시간 다 됐어.”
“아직 3분 남았는데요.”
요즘 아이들.
너무 칼 같아.
물론,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우리 반은 좀 일찍 시작해. 그러니 나중에 찍고 어서 돌아가.”
구시렁거리며 자기 반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잡혀 있던 우하루가 인사를 하며 읍소를 한다.
“몰려들어서 저로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인기 장난 아니다. 하루, 이쯤 되면 보디가드라도 구해야 되는 거 아니니?”
“그 정도는 아닙니다. 제 몸은 제가 지킬 수 있거든요.”
“호호, 농담이야 농담.”
그녀는 우하루에게 조금 전 교장 선생님이 한 말을 전달했다.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는.
“다른 건 없는데, 얼마 후에 ‘아임 유어 팬’ 대본리딩이 있습니다. 거기에 참석하고 싶은데 평일이라서요.”
나 감독이 손을 써보겠다고는 했다.
하지만 이 기회에 직접 요청해 보는 게 낫겠다 싶어 말을 꺼낸 그.
“그런 거라면 당연히 가능하지. 내가 교장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조치를 취해줄게. 걱정 마.”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 작품을 쓴 작가인데 당연히 가 보는 게 맞지. 드라마 꼭 잘 됐으면 좋겠다. 들어가자.”
이제 마음 편히 대본리딩에 참석할 수 있게 된 우하루.
어서 그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마음이다.
*****
그 날 오후.
‘아임 유어 팬’과 관련해 또 하나의 놀라운 뉴스가 떴다.
현수빈에 이어 또 한 명의 탑클래스 배우인 임정화가 어머니 역할로 합류한다는 소식.
다시 한 번 업계는 신선한 놀라움에 휩싸였고.
이는 당연히 1학년 3반에서도 화제로 떠올랐다.
“이렇게 되면 나중경 쟤, 드라마 제작되기도 전에 벌써 완패 아니냐?”
“그런 셈이지 뭐. 라인업이 이 정도면 소수점대 시청률 나오는 게 오히려 기적일 거 같은데.”
“하루가 봐 줬잖아. 5프로로.”
“근데 그건 너무 후했어. 3이라면 몰라도 5프로는 너무 봐준 거 같은데. 아무래도 좀 무리지 않을까.”
“나도 그럴 거 같긴 한데, 하루가 한 이야기들이 이렇게 하나씩 실현이 되고 있으니까. 또 모르지.”
“와, 생각만 해도 그 날이 기다려진다.”
“시청률 나오는 날? 나도. 월드컵만큼 떨려. 어서 빨리 와라!”
나중경의 도발과 우하루의 수용.
그로 인한 시청률 대결은 드라마 출연진이 속속 결정되고 제작일이 다가오면서 반 아이들 사이에서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자기들끼리 내기를 벌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 상황을 모를 리 없는 나중경.
자꾸 불리해져가는 상황에 살짝 초조함을 느끼며 하교한 집에 아버지가 와 계신다.
‘아임 유어 팬’의 제작 준비 때문에 며칠 동안 집에 못 들어왔던 그가 필요한 물품을 챙기러 들어온 것.
그 덕에 저녁식사를 함께 하게 됐다.
늘 그랬던 것처럼 주로 정적.
오직 수저와 젓가락이 덜그럭 거리는 소리만 울리는 식사자리.
음식이 거의 다 비워지고, 나극상이 물을 마신 뒤 일어나려는 찰나.
갑자기 나중경이 그에게 물었다.
“아버지.”
“?”
“지금 제작하시는 그 드라마. 금요일 저녁도 아니고 밤늦게 하는 보잘 것 없는 작품에 어떻게 현수빈하고 임정화 같은 탑스타들을 출연시키셨어요?”
그의 말투에는 원망이 느껴지는 듯했다.
물론 대놓고 그런 티를 드러낼 수는 없었겠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 감독이 다시 엉덩이를 붙였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넌?”
“물론 아버지 때문이겠죠. 아버지의 명성과 관계. 근데 아무리 그렇더라도 제가 생각하는 상식선에서는 도저히...”
그 때.
“아니다.”
“네?”
“내가 섭외한 거 아니라고.”
“그, 그게 무슨...”
나극상 감독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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