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작가 우하루-34화 (25/69)

34화. 우리 작품 또 같이해요.

“작가님!”

“어? 우 작가님 언제 오셨어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배우니 스태프니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를 에워싼 모양새가 되었다.

그제야 나 감독도 우하루가 온 걸 알았다.

“어떻게 이렇게 이른 시간에. 학교는 어떡하고?”

역시나.

촬영의 묘미는 날짜 개념이 희박해지는 데 있는 것.

나 감독은 오늘이 쉬는 날이란 걸 모르고 있는 눈치다.

“감독님. 오늘 일요일인데...”

“아, 그런가! 허허, 내 정신.”

수업이 없는 날이니 우하루가 부담 없이 촬영장을 찾을 수 있었다.

어제부터 밤샘 촬영이 이루어진 걸 알기에.

지쳐 있을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따뜻한 커피와 차를 대접하기 위해 일찍부터 서둘러 집에서 나온 것이다.

“감독님, 배우님들, 스태프님들. 정말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하루가 허리를 깊이 숙여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우 작가님이 마음고생 많이 하셨죠!”

“작가님 덕분에 즐겁고 행복하게 촬영했습니다!”

“맞아요. 좋은 작품 써주셔서 고맙죠, 우리는!”

“이번 주 내내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감동적이고 애절하고.”

그러고 보니 현수빈의 눈이 아직도 좀 부어있는 듯.

최고의 탑배우 중 한 명의 이름값을 톡톡히 한 그녀.

우하루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을 딱 마음에 들게 연기해준 그녀가 특히 고맙다.

- 너무 감사하고, 언젠가 꼭 다시 함께 작업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일주일 전 그녀와 따로 커피를 한 잔 하면서 건넨 말.

거기에 또 감동 받은 그녀가 하마터면 두 번째로 연기 외의 자리에서 눈물을 쏟을 뻔했었다.

자신을 둘러싼 이들에게 우하루가 간단한 인사말을 전했다.

“비록 이 작품을 쓴 건 저였지만 그 세계를 만들고 가꾸고 완성시켜 주신 분들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말할 수 없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머, 어쩌면. 말 하나 하나가 명품이야.”

“저 나이에 저 잘 생긴 얼굴에서 어떻게 저런 진중하고도 세련된 말이 나올까.”

“나 우 작가님한테 푹 빠져버린 듯.”

여기저기서 자신들도 모르게 반응의 말들이 튀어나왔다.

“제가 아직 학생 신분이라 교실에 잡혀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마음은 늘 이 곳에 여러분과 함께 있었습니다. 많은 시간 같이 하지 못해서 아쉬웠고요 죄송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감사를 드리는 일, 그리고 오늘 고생하신 여러분께 따스한 차와 아침을 대접하는 것뿐입니다. 부디 부족하지만 맛있게 드시고 몸 녹이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커피차가 와 있다.

우하루의 말대로 따뜻한 마실 거리뿐 아니라 토스트와 베이글, 김밥 등 간단한 식사류까지 마련돼 있다.

지난 번 간식에 이어 두 번째.

“하아. 감동이에요, 진짜.”

“이렇게 우리들 신경 써주시는 작가님 처음 봐요.”

“잘 먹겠습니다! 우 작가님 최고!”

“사랑해요!”

여기저기서 환호가 일었다.

“우 작가. 아니 저번에도 무리했는데 또 이러면 어떡해?”

“걱정 마세요, 감독님. 상금 아직 많이 남았어요. 그리고 이게 진짜 마지막입니다.”

“그럼 당연히 마지막이지. 촬영 끝인데.”

“아, 그러네. 더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네요. 그렇죠.”

“아이, 참. 하하하하.”

어이가 없는지 나 감독이 껄껄 웃는다.

우하루 덕분에 위가 따스해지고 피곤이 가신 배우와 스태프들.

다소 지쳤던 컨디션에 기운이 돋아난다.

하지만.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

촬영은 끝, 편집 시작.

이제 남은 건 나 감독과 홍 조연출의 몫이다.

그렇게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신나게 함께 한 시간.

이제 저마다의 자리로 헤어져야 한다.

나 감독이 좌중을 향해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진짜 촬영을 공식적으로 끝내야 할 것 같네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또 만날 그 날을 기약합시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수고하셨습니다!”

“꼭 또 봬요!”

“즐거웠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서로에게 보내는 격려의 갈채 속에서 촬영은 완전히 끝이 났다.

우하루는 배우들과 스태프들 한 명 한 명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고.

“우 작가님! 사진 같이 찍어 주세요!”

“셀카 한 장만요!”

“이대로 헤어질 수 있나요. 추억을 남겨야죠!”

밀려들어오는 사진 촬영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그.

환한 미소를 장착하고서 일일이 응해줬다.

마지막 차례는 한참을 기꺼이 기다려준 현수빈이었다.

사실 우하루는 이런 심야 단막극에 탑클래스 배우가 출연하겠냐는 나중경의 말을 듣고서 발끈한 심정이긴 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란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출연 결정 소식을 쉽게 믿지 못했었던 것.

그런데 현수빈은 기꺼이 이 작품을 선택해줬다.

그것도 미니시리즈나 주말드라마 1회 당 받는 출연료와는 터무니없는 적은 액수를 감수하고서 말이다.

그녀의 선택은 임정화 배우의 합류에도 영향을 줬을 뿐 아니라 우하루 자신, 그리고 나 감독과 다른 배우들의 자존심과 기까지 살려주는 스노우볼 효과를 만들어냈다.

그러니 고마움이 얼마나 크겠나.

추후 자신이 성공을 기대하는 작품에 꼭 그녀와 함께 일하겠다는 다짐을 한 이유다.

둘이서 다정하게 사진을 찍은 후.

현수빈이 우하루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우 작가님 작품에 주연을 맡아서 너무 행복하고 즐거웠어요.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에요.”

“기꺼이 이 작품에 출연해 주셔서 감사해요.”

“또 같이 할 기회 갖자는 말, 진심이죠?”

“당연하죠. 그 때 거절하시면 제가 서운할 겁니다.”

“그럴 리가요.”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의 표시로 따스한 포옹을 나눴다.

우하루의 첫 드라마 촬영 일정의 종장이 이렇게 막을 내렸다.

*****

약 3주가 흐른 어느 날.

나 감독으로부터 우하루에게 연락이 왔다.

- 토요일에 회사로 좀 와 줄 수 있을까?

‘아임 유어 팬’의 편집이 완료된 것이다.

제작 발표회도 없고 방송국 시사회가 열리는 것도 아니다.

그저 소박하게 제작진 몇 명이 모여 미리 한 번 보자는 것.

다음 주 금요일 방영을 앞두고 나 감독은 꼭 우하루에게 의견을 듣고 싶은 마음이다.

요청대로 주말에 ‘엔에이픽처스’ 본사를 찾은 그.

나극상 감독이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맞이했다.

“얼굴이 좀 상하셨네요. 피곤해 보이세요.”

밤낮을 매달린 편집 작업이 그에게 얼마나 고되고 힘든 스트레스를 받게 했을지 행색에서 금세 짐작이 된다.

집에도 거의 안 들어간 분위기.

“우 작가한테 먼저 꼭 보여주고 싶어서 불렀어.”

“영광입니다.”

“보고나서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말해주게. 절대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알겠지?”

“네, 감독님.”

특별한 공간이 마련된 것도 아니다.

편집실에 있는 비교적 큰 모니터를 통해 ‘아임 유어 팬’의 편집본, 정확히 말하자면 가편집본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쓴 작품이 어떻게 영상으로 다시 탄생을 했을까. 진짜 궁금하긴 하네.’

약간의 걱정과 기대감으로 우하루는 화면에 집중했다.

사전에 제작회의 때부터 나 감독과는 이 작품에 대한 방향성에 대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생각의 차이를 좁혀왔다.

분위기, 톤 앤 매너, 음악, 추구하는 영상미, 전개방식 등등.

그런 합의가 있으면 결과물에 대한 만족도는 작가 입장에서도 더 높을 수밖에 없다.

우하루가 나 감독에게 특히 강조했던 건 인위적인 감정 주입을 최소화하고 여백을 충분히 두면서 시청자들에게 스스로가 독자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줬으면 하는 거였다.

그래서 주인공의 오열 신을 너무 길게 가지 않았으면 했고.

현수빈에게도 적정선에서 감정의 절제를 요청하기도 했던 것.

다만, 딸이 어머니의 생전 스타로서의 활약상을 차례차례 열어볼 때의 임팩트는 어떻게든 압도적으로 가져가줬으면 했다.

두 시간 반.

연달은 두 편의 소박한 시사회가 종료됐다.

나름 길다면 긴 그 시간동안 단 한 번도 영상에서 눈을 떼지 않은 우하루.

불도 켜지지 않은 채, 엔딩 크레딧이 정지됐다.

감독이 희미한 조명을 통해 그의 눈치를 살핀다.

“어떤...것 같아?”

조심스러운 목소리.

뒤쪽에 있는 홍 조감독과 다른 스태프들도 덩달아 긴장한 듯 보였다.

이내 우하루가 나 감독을 바라봤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너무 좋습니다. 진심으로요!”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척 내미는 그.

그러자 나 감독이 큰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정말?”

“네. 제가 희망했던 분위기, 강조하거나 절제했으면 했던 것. 감독님께서 다 들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톤 앤 매너 너무 좋아요. 제가 썼었던 원작 소설의 느낌이 풍성하게 살아난 느낌입니다. 영상미 진짜 대박이에요.”

박수를 한 번 치고 나서 손바닥을 비비며 일어나는 나 감독.

우하루의 찬사에 폴짝폴짝 뛰기라도 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다.

그가 다시 한 번 확인하려는 듯 물었다.

“내 앞이라 과장하거나 허언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저 작품을 두고는 절대 그런 식으로 안 합니다.”

“그거야 알지. 내가 제일 잘 알지. 하하하.”

막 웃어대던 그가.

갑자기 우하루를 끌어안는다.

“고마워. 고맙네.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만나게 해준 자네가 나로 하여금 아직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줬어! 지금 정말 행복하군!”

진정으로 들떠 보이고 행복해 하는 나 감독.

그 덕분에 우하루도 같은 기분이 되었다.

*****

충청도에 위치한 사극 세트장.

금요일 늦은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조명이 여기저기 환하다.

분주한 스태프들 사이로 보이는 한복 착장의 앳된 미소녀.

강세영이다.

“감독님! 시간 다 됐어요.”

“어, 그런가? 진짜네. 마침 휴식 타이밍이니까, 한 시간 쉬었다 합시다!”

그 말과 동시에 세트장 옆의 휴게실로 달려가는 그녀.

꽤 널찍하고 안락하게 마련된 그곳의 정면에는 TV가 놓여 있었다.

강세영이 리모컨을 들어 재빨리 화면을 켜고.

곧바로 KTBS로 채널을 맞췄다.

“아유, 하여튼. 이럴 때에는 행동 엄청 빨라요. 다람쥐인 줄!”

뒤이어 들어온 감독과 몇 명의 배우들.

저마다 자리를 잡는다.

물론 맨 앞자리는 강세영 차지.

“감독님, 나중에 나 때문에 촬영 늦어졌다, 이거 안 보고 싶었는데 강요받았다 이러기 없기예요.”

“걱정 마세요. 그럴 일 없으니까요. 나 선배님 오래 작품 못 하신 후 복귀작이라 세영이 네가 아니었어도 보려고 했다니까 그러네.”

그 말에 만족스러운 듯 헤헤 웃는 열다섯 숙녀다.

“역시. 이래서 감독님하고 저는 쿵짝이 잘 맞는다니까요.”

둘이 하이파이브.

여간 사이가 좋아 보이는 게 아니다.

아역 때부터 세 작품을 함께 한 사이니 그럴 만도 하다.

“어, 시작한다!”

어느새 휴게실에 사람들이 꽉 차 있다.

감독과 강세영이 딴 일 다 제쳐두고 드라마를 본다고 와 있으니 그들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터.

드디어 ‘아임 유어 팬’이 시작했다.

살짝 웅성댔던 소리가 금세 사그라지고.

다들 드라마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잔잔한 숨소리와 간혹 한 번씩 울리는 기침소리 이외에는 고요 그 자체.

강세영은 마치 얼음이라도 된 듯 자리에서 꼼짝 않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오직 TV에서 들리는 소리 이외에는 정적이었던 휴게실.

60분이 넘어가면서 갑자기 여기저기서 코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강세영은 이미 손수건을 손에 쥐고 울 준비를 하고 있었고.

마침내 1부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노골적으로 눈을 비비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 세영이 메이크업 다시 해야겠네.”

감독의 말대로 그녀의 눈 밑은 얼룩이 져 있었다.

단지 이야기의 반이 방영됐을 뿐인데 모여 있던 사람들은 영 그 여운에서 깨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 분위기를 감지한 감독의 입에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나 선배님 아직 살아계시네. 작품 보는 눈은 여전하셔.”

*****

우하루는 어머니와 함께 거실에서 자신이 쓴 대본으로 제작된 첫 작품을 감상한 후 침대로 들어갔다.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미 먼저 본 거지만 TV에서 방영되는 걸 보니 또 감회가 남달랐다.

지난 삶에서 자신의 소설이 영상화된 첫 작품을 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그 아쉬움이 깨끗이 씻어져 내려가는 기분이다.

“이게 우리 하루가 쓴 원작으로 만든 드라마라니.”

어머니는 감격에 겨워했다.

엔딩 크레딧에 우하루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보시고는 아이처럼 기뻐한 그녀.

기쁨과 행복을 드릴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우하루는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자꾸 떠오르는 드라마 영상.

감은 눈에서도 이리 흐르고 저리 흐르던 잔영이 어느새 꿈으로 바뀌었고.

아주 잠시 잔 것 같은데 어느새 아침이 됐다.

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는 걸 느끼던 즈음, 전화벨이 울렸다.

“하아, 시간이 벌써...”

폰을 들어 액정을 확인했다.

나 감독.

토요일 아침에 그가 전화를 한 이유라면...

“감독님. 잘 주무셨어요?”

- 우 작가는?

“전, 뭐 잘 잤습니다.”

- 하여튼 나보다 더 산 사람 같아. 한결같이 침작하고 냉철하고.

아침부터 또 칭찬이라니.

아니, 시샘인가...

“감독님은 잘 못 주무셨어요?”

- 한 잠도 못 잤지.

“왜요?”

- 왜긴. 떨려서지.

“뭐가요?”

- 반응이 어떨지 안 떨릴 수가 있어?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좋은 반응 나올 거라고요, 분명히.”

- 우 작가. 방금 나왔어. 시청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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