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이건 기적 맞지
“벌써요?”
그래서 전화를 한 거구나.
일단 짐작이 갔다.
그렇게 나쁜 수치는 아닐 것 같다는 걸.
만약 그랬다면 나 감독이 지금 이렇게 전화를 걸 리가 없겠지.
어디선가 모닝 소주를 들이붓고 있을 테니까.
우하루는 그제야 몸을 침대에서 완전히 빼냈다.
“얼마나 나왔는데요?”
- 하아...
웬 한숨?
갑자기 냉한 기운을 느끼는 우하루다.
‘역시인가...’
금요일 심야의 이 단막극은 어차피 1프로 대 시청률을 넘기기가 쉽지 않다는 걸 누누이 들어왔던 그.
그래서 별반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더라도 2프로 정도만이라도 나왔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나 감독도 마찬가지였고.
그의 긴 정적에 우하루가 좀 답답하다.
“제가 직접 볼까요?”
- 아냐, 아냐. 내가 말해줄게. 놀라거나 실망하지 말고.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 사쩜칠 나왔어.
워낙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니 정확히 들리지가 않는다.
분위기로만 추측하자면 초상집.
그런데.
“네? 얼마라구요?”
우하루가 다시 물었다.
- 4.7프로.
“그러면. 잘 나온 거 아녜요?”
- 당연하지! 잘 나온 정도가 아니지. 엄청 잘 나온 거야!
순식간에 피치를 쭈욱 높여나가는 나 감독의 목소리.
소프라노 성악가인 줄.
조금 전 다 죽어가는 목소리는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도대체 뭐지, 이 사람.
‘뭐야. 나 놀라게 하려고 연기 하신 거야?’
우하루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혹시나 지금 이 수치도 몰래카메라나 뭐 그런 거 아닌지.
“정말이에요?”
- 응. 정말이야. 밤새고 시청률 뜰 때 부리나케 확인했거든. 순간 내 눈을 의심했지 뭐야. 눈을 계속 비비고서 보고 또 보고. 뭐가 잘못 된 거 아닌지 새로고침 계속 해보고.
“그 정도면 진짜 대박이네요.”
- 기적이지, 기적.
폰 저 너머에서 나 감독의 흥분된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온다.
- 이 수치는 지상파 드라마 시청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옛날에도 당시 ‘심야 드라마극장’ 시리즈 중 상위권에 해당하는 수치야. 2012년 이후로는 최고 기록이고. 그 해에 동률이 딱 한 편 있었더군. 그야말로 요즘 같은 시대에 이건 대기록이라구!
나 감독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십 몇 년 전 같으면 준수한 수준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지상파를 비롯해 케이블에 수십 개의 채널이 드라마를 쏟아내며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시대.
예전처럼 40프로 이상을 넘기는 작품이 나오는 건 불가능하고.
엄청난 투자를 한 대작 미니시리즈도 첫 방 시청률이 4프로를 넘지 못하는 케이스가 속출하는 게 요즘 시장 상황이다.
비록 현수빈과 임정화가 가세했다고는 하나, 척박한 시간대에 시청자의 선호도가 전통적으로 낮은 단막극이 4.7프로가 나왔다?
‘그래, 나 감독님 말대로 기적이네, 이건.’
업계와 언론에서 대략적으로 예상했던 수치보다 무려 네 배에 가까운 기록이다.
- 더 놀라운 게 뭔지 알아?
“또 뭐가 있어요?”
- 지금 온라인 반응이 엄청 뜨거워. 네온 동영상 조회수 상위권에 우리 드라마 클립 영상이 몇 개나 올라가 있고 드라마 관련 커뮤니티에서도 핫해. 이러면 오늘 2편 시청률은 더 높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된단 말이지!
그의 기대감.
사실 조금 무리일 수는 있다.
과거 ‘심야 드라마극장’ 시리즈 중 이번처럼 두 화가 방영되었던 적이 좀 있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결과.
1화보다 2화가 시청률이 더 높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나 감독은 1화의 성공이 중요하다고 했었는데.
반응이 이렇게 뜨거우니 오늘도 기대를 걸어본다는 말이다.
하지만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점.
동시간대에 경쟁 지상파채널인 SCBS에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중인 미니시리즈와 30분이 겹치는 건 물론 TVNT를 비롯해 드라마 세가 강력한 케이블과 종편에서도 수작들과 경합을 펼쳐야 한다.
- 뭐, 말이 그렇단 거지. 그래도 일단 1화에서 이렇게 좋은 성적을 거뒀으니까 너무 욕심은 안 부리려고. 하하하.
그래.
그의 말대로 1화 시청률도 기적이다.
“너무 잘 됐네요. 축하드려요, 감독님.”
- 우리 다 함께 자축을 해야지, 왜 나한테 축하를 하나. 근데 어째 목소리가 나보단 덜 기쁜 것 같은데?
“감독님도. 제 성격이나 반응 패턴 잘 아시면서.”
- 하하. 알지, 알지. 그 느긋하고 침착하면서도 관조적인. 나보다 한 30년은 더 살아본 사람 같다는 거.
“그러니까요. 저 지금 엄청 행복하고 좋습니다.”
우하루는 진심이었다.
전화를 끊은 그는 태블릿을 켰다.
직접 눈으로 시청률을 확인하고 싶었다.
나 감독의 말이 정확했다.
4.7.
숫자가 꽤 예뻐 보인다.
주소를 이동해 KTBS 홈페이지의 ‘심야 드라마극장’ 홈페이지에 들어가 시청자반응을 살폈다.
새롭게 단장한 그곳에는 엄청난 글들이 쏟아져 있었다.
대강 제목만 훑어봐도 찬사에 찬사.
그 흔한 악플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네온 동영상 섹션.
최근 TV에서 방영된 방송클립들이 인기 순위별로 올라오는 곳이다.
맨 첫 번째로 차지한 영상은 그제 저녁에 방영된 트롯트 경연 프로 영상.
그 다음이 바로 ‘아임 유어 팬’의 영상이다!
‘역시. 갑자기 사라져버린 이모가 친모였다는 걸 알고 현수빈 배우님이 오열하는 그 장면이군.’
혹시 1편에서 화제가 되는 부분이라면 여기일 거라 예상은 했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히 맞았고.
추세를 보니 1위도 딸 듯한 기세다.
그 이외에도 다른 장면들이 줄줄이 상위권에 포진돼 있는 게 보였다.
이렇게 포털 영상에 줄을 세우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밤사이에 꽤나 화제가 되긴 한 모양이다.
“뭔가 정말 일을 내긴 낸 것 같네.”
우하루가 다소 들뜬 심장을 식히기 위해 냉장고에서 물을 한 잔 꺼내 마신 후 거실로 향했다.
기척이 없는 걸 보니 어머니는 오늘도 출근을 하신 모양이다.
‘이 소식 알게 되시면 엄청 기뻐하실 텐데.’
그 모습이 떠오르자 미소가 올라왔다.
‘아임 유어 팬’, 이제 오늘은 2부다.
*****
강세영 이모가 운영하는 헤어샵.
토요일 늦은 오후 꽤 장사가 잘 되는 가운데 또 한 명의 손님이 종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세...”
“언니!”
“어머. 이게 누구야? 인희야!”
서윤희가 반기며 맞이한 사람은 바로 서인희다.
그녀의 동생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들어온다고만 하고 입국 날짜도 안 알려주고.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는 건 뭐냐고.”
“언니들 놀라게 해주려고 그랬지.”
“하여튼 여전해. 지금 막 온 거야?”
“아냐. 온 지 벌써 2주 됐어.”
“뭐라고? 미쳤어. 그 사이에 연락도 한 번 안 하고!”
“미안해, 언니. 그렇게 됐어. 나 아예 들어왔잖아. 이엘 퍼블리싱&콘텐츠라고, 빌햄 하우스에서 인수한 회사 대표를 맡게 됐어.”
“정말이야? 어머, 축하한다! 역시, 넌 우리 집안의 인재야.”
“언니도 참, 호호.”
바쁜 둘째 언니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숍을 빠져나온 서인희.
그녀는 곧장 맏언니 집으로 향했다.
“인희야!”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맞이하는 서지희.
두 사람은 한동안 얼싸안고 반가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려서부터 동생을 키우다시피 한 큰 언니.
그래서 서인희에게 그녀는 마치 엄마 같은 존재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눈물을 훌쩍이는 그녀들이다.
“일단 미국은 정리하고 들어온 거야. 집 이사하고 회사 일도 바빠서 금방 못 들렀어.”
“그랬구나. 잘 했다. 그럼 이제 아예 여기서 사는 거지?”
“나중엔 모르겠지만 적어도 몇 년 간은 그렇게 되겠지. 그리고 마음에 들면 이제 눌러 살아야지.”
“그래. 뭐니 뭐니 해도 태어난 데가 최고야.”
서지희는 동생을 위해서 정성스레 저녁을 차려줬다.
모처럼 언니가 차려주는 집밥에 정신줄을 놓은 그녀.
허겁지겁 입에 집어넣고 나니 불러진 배에 몸이 노곤해진다.
“인희 너 설마 지금 집에 갈 건 아니지?”
“왜, 자고 가라고?”
“그래. 이렇게 오래간만인데 자고 가.”
“형부가 불편해 하시지 않을까?”
“형부는 출장 가서 내일 저녁에나 오셔. 그러니 걱정 안 해도 돼.”
“그래? 세영이는?”
“세영이는 촬영하느라 충청도에 내려가 있는데 조금 이따가 들어올 거야. 하루 여기 있다가 월요일에 내려가야 된대. 그러니까 세영이도 볼 겸 밤새 나하고 이야기도 하면서 자고 가.”
“그럼 그럴까?”
결국 언니 집에서 하룻 밤을 묵기로 한 서인희.
과일을 먹으며 오랜만에 해후한 친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던 사이.
“엄마, 나 왔어!”
조카 강세영이 드디어 집에 왔다.
“세영아!”
“어? 이모!”
쪼르르 달려와 품에 안기는 강세영.
미국 여행 중에 만난 후로 그녀 역시 오랜만이다.
잠시 후 세 사람은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서인희가 한창 꽃다운 조카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어쩜 넌 점점 더 예뻐지니. 배우는 다르구나 진짜.”
“이모도 참. 대놓고 그런 말 하면 내가 부끄럽잖아.”
“하아. 나도 저렇게 상큼하고 예뻤을 때가 있었는데.”
“그래. 너도 이맘 때 참 예뻤지. 그래도 세영이하고 비교는 좀...”
“알아, 알아! 언니도 참. 맞장구 좀 쳐주면 어디 덧나나? 그렇지 않아도 요즘 자신감이 부쩍 떨어지는 와중인데.”
“이모, 지금도 미모 폭발인데 무슨. 남자친구는 어디다 두고 혼자서 귀국을 하셨대?”
“남자친구 같은 거 안 키운다. 혼자 살기에도 벅차.”
“근데 이모 진짜 대단하다. 그 큰 출판사 대표가 되다니. 정말 우리 집의 경사 아냐?”
“경사 같은 소리. 아직 멀었다. 참, 세영이 너 나중에 자서전 내거나 수필 같은 거 출간하려면 꼭 우리 회사에 맡겨라.”
“어우, 벌써 영업 본능 나오시네. 네, 걱정 마세요.”
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11시가 거의 다 된 시간.
그런데 아무도 들어가서 자자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모두가 한마음인 것 같은 분위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TV 리모컨에 손이 간다.
순식간에 켜지는 화면.
“엄마. 어제 봤지?”
“당연하지.”
“어땠어?”
“너무 너무 재미있게 봤어. 나중엔 눈물콧물 흘리면서 찔찔 짰다. 내가 주책이지.”
“이모도 봤어? ‘아임 유어 팬’?”
“당연하지. 내가 눈독 들이고 있는 작품인데.”
“눈독을 들인다고? 무슨 말이야?”
“하여튼 그런 게 있어. 솔직히, 나도 좀 울었다. 창피하게.”
“우리 촬영장도 눈물바다였어. 아무래도 오늘은 장난 아닐 거 같은데.”
“하여튼, 네가 하루 대상 받았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정말 이런 정도인 줄은 몰랐어. 역시 내가 보는 눈이 있다니까. 천재성이 있어. 얼굴만 잘 생긴 게 아니라.”
“내가 그랬잖아 엄마한테. 평범한 아이 아니라고.”
모녀의 말을 처음엔 흘려듣는 듯하던 서인희.
그녀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서 두 사람의 대화를 머리 속으로 리와인드 해본다.
“언니는 이 드라마 작가를 꼭 아는 사람처럼 이야기하네. 세영이도 그렇고. 마치 옆집 아이 이름 부르듯 하잖아.”
“아는 사람이니까.”
“응?”
“아는 사람이니까 아는 사람처럼 이야기하지.”
“맞아, 이모. 내 친구야, 우하루.”
순간 서 대표의 눈이 축구공만큼 커졌다.
“뭐라고? 그게 저, 정말이야?”
놀라움과 함께 어떤 카타르시스 같은 걸 느끼는 그녀다.
임직원들에게 컨택해 오지 않으면 알아서 하라고 호통 쳤던 그 대상이 이렇게 자신의 가까이에 있었다니.
자신이 눈여겨보고 있던 바로 그 작가.
앞으로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느껴져 반드시 ‘이엘 퍼블리싱&콘텐츠’와 인연을 맺게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바로 그 천재를 갑자기 찾아내 버렸다.
“세영아. 정말이냐고. 우하루 작가가 네 친구 맞아?”
“응, 그래. 이모, 쉿! 조용히 좀 해봐! 나중에 이야기하고 이거 봐!”
앞 광고가 끝나고.
‘아임 유어 팬’ 2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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