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작가 우하루-36화 (27/69)

36화. 난 이제 시작일 뿐인데

그로부터 한 시간 15분 동안.

강세영의 집 거실에는 완벽한 정적이 흘렀다.

TV 앞에 모여 있는 세 사람은 작품 속으로 완벽하게 빨려 들어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주 훌쩍이는 소리와 코 푸는 소리와 함께...

“하아...”

이런 탄식이 간간이 들려왔을 뿐 누구도 말을 뱉어내지 않았다.

이윽고.

‘아임 유어 팬’ 2부작이 대단원의 막이 내렸다.

비록 총합 3시간의 짧은 단막극에 불과했지만 마치 영화를 한 편 본 듯 감동의 여운이 그녀들을 휘감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광고가 끝난 후에도 누가 쉽사리 입을 열지 않는 상황.

유난히 감정이 풍부한 사춘기 소녀 배우의 얼굴은 아예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우, 나도 주책이지.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네.”

간신히 강세영 어머니가 제일 먼저 운을 뗐다.

그런데 옆을 둘러보니 가관이다.

딸도 딸이지만 동생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티슈를 오지게도 많이 뽑아 코를 펑펑 풀어 그대로 바닥에 던져버린 탓에 여기저기 난장판.

“얘들아, 정신 좀 차려!”

그제야 두 사람은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세영이 넌 소설로 봐서 내용 다 알고 있었다면서. 그런데도 보니까 또 슬퍼 그렇게?”

“당연하지. 슬픈 영화 다시 본다고 안 울어? 그거나 마찬가지지.”

티슈를 또 하나 꺼내 말아서 코를 쑤시던 이모 서인희.

그녀가 그 와중에도 두 사람의 말에서 중요한 포인트를 캐치해냈다.

역시 극한 상황에서도 프로는 냄새를 놓치지 않는가 보다.

“지금 뭐라고 했어? 이걸 소설로 봐서 내용을 알고 있었다고?”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건 공모 대본 아니야?”

“맞긴 한데, 원래 이거 소설로 먼저 썼던 거야. 하루가.”

“정말?”

“근데 내가 읽어보고 너무 좋아서 공모에 내라고 졸랐지. 마침 접수 기간이 조금 남았던 때였거든.”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구나.

서인희는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의 커리어에 향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거란 걸 재빨리 알아차렸다.

“세영아.”

“응?”

“네가 이모 좀 도와줘야겠다.”

어느새 이엘 퍼블리싱&콘텐츠 서인희 대표의 눈이 갑자기 반짝이고 있었다.

*****

나극상 대표가 KTBS 공모 수상작의 제작을 맡겠다고 했을 때 엔에이 픽처스 직원들의 반응은 굉장히 좋지 않았다.

홍중연 조감독도 마찬가지.

“대표님 복귀작을 왜 하필 그런 걸 맡으세요.”

“그러게요. 차라리 조금 더 기다리더라도 미니시리즈나 주말드라마 같은 제대로 된 걸 하셔야죠.”

“잘 만들어도 시청률이 제대로 나올 리도 없습니다. 결국 그 욕은 감독님이 다 받으실 거예요.”

“맞아요. 굳이 리스크를 안고 불 속으로 뛰어들 이유가 없습니다.”

대부분이 극구 말렸다.

심지어 친한 친구나 옛 동료들까지.

물론 나 감독도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KTBS와의 의리도 있고 컴백작으로 너무 부담을 갖기 싫었으며.

결정적으로 공모 대상 작품을 직접 심사해 본 후 밀어붙였었다.

너무나 다행히도, 어제 1화의 시청률은 그런 모든 것들이 기우였음을 증명해줬고.

그에 더해 나 감독은 목표로 했던 것보다도 훨씬 좋은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이제 그 최종 시청률이 뜨기 직전이다.

오늘도 역시 밤을 꼴딱 새다시피한 두 사람.

촬영할 때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시뻘겋게 충혈된 네 개의 눈이 시청률 사이트에 꽂혀 있었고 나 감독의 손가락은 계속 새로고침을 연타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떴다!”

드디어 발표.

두 사람의 눈과 입이 동시에 크게 열렸다.

“이...이게 정말이야?”

“감독님. 미쳤네요, 정말.”

“내가, 내 눈이 정말 잘못 된 거 아니지?”

“네. 맞습니다. 저도 보고 있으니까요!”

그들이 보고 있는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수치.

[KTBS 심야 드라마극장 스페셜 : 아임 유어 팬 : 9.4]

그랬다.

2부는 1부를 뛰어넘는 정도가 아니라 정확히 2배가 뛴 9.4프로를 달성했다.

드라마극장 스페셜 역사상 처음 있는 일.

모든 2부작들이 후편에서 시청률이 떨어졌었는데 그걸 바꾸었다.

하지만 더욱 큰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것 봐! 반응이 너무 뜨거워서 내가 이럴 거 같다고 했잖아!”

“토요일 밤 1부가 끝나고 입소문이 엄청 났는데 그 영향인가 봐요. 커뮤니티에서도 장난 아니었고 네온 동영상 클립도 마찬가지고요.”

“어제에 이어서 또 한 번의 기적이야!”

“심야 드라마극장 통틀어 최고 시청률인 것 같은데요.”

“당연하지. 내가 9프로 대는커녕 8프로대도 본 적이 없어.”

“그래도 한 번 찾아볼까요?”

언감생심 시청률이 3프로를 넘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기에 최고 기록 따위는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두 사람.

그들은 재빨리 기록을 찾아봤다.

그들의 추측이 맞았다.

“맞아요, 감독님! 우리가 기록을 썼어요! 그동안 최고가 2010년에 8.0프로 딱 한 번 있었고 나머지는 6프로 대도 없어요!”

2010년이면 케이블과 종편이 활성화되기도 전.

지상파 드라마가 대충 만들어도 10프로 대는 나올 때였다.

그 때에도 8프로가 최고였으니 오늘 이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굳이 말이 필요 없는 일이다.

“우리가 해냈어! 하하하하!”

두 사람은 마치 월드컵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여차하면 ‘대한민국 짝짝짝짝’이라도 외칠 기세였다.

정신없이 흥분을 즐기던 나 감독.

뭔가 생각이 났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우리 우 작가님한테 전화를 걸어야지!”

*****

1부 4.7.

그리고 2부 9.4.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 놀라운 수치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우하루.

잠시 어안이 벙벙해진 채 한참 액정을 응시했다.

‘이게 가능한 거였구나.’

미국에서도 이렇게 극적인 시청률 상승을 가져가는 경우가 없다.

당연히 여기서도 그건 쉬운 일이 아니고.

그런데 벌어졌다, 이런 일이.

웬만큼 크게 히트한 미니시리즈 화제작도 단 2화만에 쓰기 힘든 기록이다.

곧 이어 나 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두 사람은 들떠서 한참동안 통화를 했다.

- 심지어 SCBS하고 TVNT 미니시리즈 시청률이 하락했어.

“그래요? 그 정도였다구요?”

- 그래. 우리 드라마 빼고는 변수가 없었거든. 결국 우리가 월드컵 대표팀 중계방송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발휘한 셈이지. 하하.

그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아임 유어 팬’ 때문에 시간대가 일부 또는 전부 겹친 드라마들이 내상을 크게 입었다.

나 감독과의 전화를 끊자 기다렸다는 듯 강세영의 이름이 화면에 떴다.

- 하루야. 너 진짜 큰 일 낸 거야. 축하해.

“시청률이 꽤 잘 나오긴 했지만, 이거 하나 갖고 큰 일 해냈다고 말하기엔 좀 부끄럽다.

우하루의 말대로 그는 이제 시작일 뿐인데.

앞으로 해내고 싶은 큰 일들이 더 많으니 비교적 덤덤한데.

정작 작가 당사자보다 오히려 제 3자들이 이렇게 난리들이다.

- 나 지금 촬영 중인 드라마 다음 주부터 시작하는 거 알지?

“응, 알고 있지.”

- 감독님이 안도의 한숨을 쉬시더라.

“왜?”

- 왜긴. 한 주만 빨랐어도 시작부터 초칠 뻔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계셔. 진짜로. 엄살이 아니고.

어쩌면 두 드라마가 겹칠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간 셈.

그래서 강세영이 출연 중인 작품은 한숨을 돌리게 됐다.

“이게 다 세영이 네 덕분이야. 그 때 공모 나가라고 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

- 또 그런다. 아무리 내가 등 떠밀었어도 네 작품이 좋지 않았으면 이런 결과 나올 리가 있겠어? 너 스스로한테 고마워 해.

역시나 강세영답다.

우하루의 입가에 미소가 띄워졌다.

“요즘 촬영하느라 고생일 텐데. 힘들지?”

- 뭐 견딜 만 해. 어렸을 적부터 해서 익숙하니까.

“그래. 힘내고, 촬영 끝나고 보자.”

조만간 학교와 아지트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며 통화를 마친 두 사람.

그러자 강세영 옆에 딱 붙어서 통화를 엿듣던 서인희 대표가 어쩔 줄 모른다.

“뭐야? 내 이야기를 하라니까! 그냥 끊으면 어떡해?”

답답한 듯 고개를 저으며 이모를 쳐다보는 그녀.

“이모. 경우가 있지. 아무리 조카 친구라도 그래. 전혀 일면식 없는 사람이 갑자기 지금 만나자고 하면 실례 아니야? 게다가 이렇게 이슈가 생긴 마당에 제작사니 방송국이니 여기저기서 연락 오고 난리일 텐데.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야. 오히려 밉보일 수도 있다고. 빨리 먹는 밥이 체한다는 말 몰라?”

뭐지.

요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커서 이런 어른스런 말을 다 하고 있는 거냐고.

이모의 얼굴이 화끈거린다.

애타게 찾던 작가를 이렇게 가까이서 발견했으니 너무 흥분한 나머지 매너를 못 지킬 뻔.

이렇게 되니 조카가 고맙다.

“내가 일단 하루한테 이모에 대해 말하고 의견을 들어본 다음 연락처를 줄게. 그게 순서야.”

“너, 왜 의젓하니 이렇게.”

“의젓하긴. 하루한테 비하면 완전 어린애인데.”

“그 친구는 더 그래?”

“그럼. 얼마나 어른스럽고 진중한데. 우리 엄마도 홀딱 반했잖아.”

그 말에 옆에 있던 서지희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자꾸 그러니까 더 만나보고 싶잖아.”

서인희는 조카에게 다짐 또 다짐을 받았다.

자신이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고 여유를 가질 테니 꼭 우하루와 연결을 시켜 줄 것을.

“하루를 쓸데없이 귀찮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소설 출간 문제라는데 노력해봐야지. 다만, 하루가 원하는 경우에 한해서야.”

“그래, 알았어. 걱정 마.”

은근히 친구를 진심으로 위하는 조카의 마음이 귀엽고 예쁘다.

그런 와중에도 서 대표의 머릿속에는 하루빨리 놀라운 저 신인 작가와 하루빨리 만났으면 하는 바램뿐이다.

*****

어제가 일요일이었음에도 ‘아임 유어 팬’의 신선한 기적과 반란에 대해 기사를 쏠쏠하게 내보냈던 언론들.

월요일이 되자 본격적으로 관련 내용들을 무시무시하게 밀어 쏟아내기 시작했다.

[‘KTBS 심야 드라마극장’의 신기원 이룩!]

[단막극으로 전대미문의 9.4프로 시청률 달성!]

[2012년 이후 평균 2.6프로, 최고기록 4.7프로에 머물던 시청률을 단숨에 뛰어넘은 역대급 기록 수립]

[같은 시간대 MBCS에서 야심작으로 방영한 미니시리즈 시청률은 고작 1.9프로. 아, 초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라...]

[단편 드라마 공모를 포기하지 않은 KTBS의 뚝심이 발휘됐다!]

[마침내 베일을 벗은 우하루 작가의 대상 수상작이 대한민국 드라마 업계를 발칵 뒤집어]

[천재작가 우하루 군이 다시 조명]

자그마한 2부작 단막극 하나가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만 이틀이 지났는데도 네온 동영상 섹션에는 윤주아가 엄마인 오영아의 임종을 지키면서 애절한 감정을 쏟아내는 장면을 필두로 이 드라마 속 많은 클립들이 상위권을 여전히 독식하고 있었고.

그 감동의 물결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면서 미처 보지 못한 사람들의 재방송 요청이 홈페이지와 SNS에 빗발쳤다.

이 난리를 뒤로 하고 우하루는 변함없이 학교에 등교했다.

오늘따라 그를 목격한 선배들과 동기생들이 더 친한 척을 해대고.

심지어 선생님들마저 손을 들어 노골적으로 반가움을 드러낸다.

“우하루. 잘 봤다. 너무 재미있더라! 정말 감동이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화이팅!”

“고맙습니다.”

일일이 화답을 해가면서 교실에 들어서자.

“와!”

함성과 함께 급우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가끔 볼 수 있는 장면이긴 하지만, 오늘은 유독 정도가 세다.

“하루야. 진짜 부럽다. 이제 스타 작가 반열에 올라서는 거냐?”

“나 얼마나 울면서 봤는지 몰라. 우리 가족들 다 그랬다니까.”

“어떻게 하면 그런 작품을 쓸 수 있는 거냐? 나 좀 가르쳐줄 수 없을까?”

“자자, 일단 여기 사인부터 좀. 나중을 위해 받아 놓으련다.”

“혹시 촬영장에도 가 봤어? 배우들 본 소감이 어때?”

뭐라고 차근차근 대답도 하기 힘들 정도로 몰려드는 질문과 찬사들.

그 사이 조회 시간이 되고 담임이 교실로 들어왔다.

“얘들아. 자리에 앉아 빨리.”

후다닥 자신의 좌석에 착석하는 아이들.

이제야 우하루의 잘 생긴 얼굴이 교탁에서 제대로 보인다.

잠시 흐뭇한 눈길을 주는 유하연 선생.

당장 곁으로 가서 ‘아임 유어 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일단 나중을 기약하고.

조회를 시작하려고 교실을 한 바퀴 휘 둘러보는데.

복도 쪽 한 자리가 비는 걸 발견했다.

그 자리는 바로...

“중경이 어디 갔니?”

“선생님. 나중경, 등교 안 했는데요!”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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