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이번엔 네가 이겼다
“가방이 없어?”
“네. 왔던 흔적이 전혀 없어요.”
“그래? 무슨 일이지...”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을 한 적이 없는 아이.
이렇게 늦은 적이 처음이다.
조회가 다 끝날 때까지도 나중경은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중경이 오면 교무실로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선생님.”
담임이 교실을 나가자 빈자리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
“얘 진짜 안 올려나 본데.”
“혹시, 우하루 드라마 결과 잘 나와서 쫄려 도망간 거?”
“에이, 설마. 그런 거 갖고.”
“그럴 지도 모르지. 솔직히 쪽팔리잖아. 얼마나 자신 있어 했냐. 시청률 2프로 이상 나올 일 없을 거라고. 1프로도 간당간당할 거라고까지 했잖아.”
“그건 현수빈 출연 결정하기 전이었잖아.”
“그 뉴스 나왔을 때부터 아닥하고 있었지. 쫄리니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결석까지 하고 튈 정도라고? 돈 내기 한 것도 아닌데?”
“걔 성격 보면 모르겠어? 돈보다 자존심에 죽고 사는 애잖아. 지금쯤 세상이 무너진 심정이겠지. 사실 나 같아도 얼굴 들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이 교실 들어설 용기가 안 날 거 같다.”
“어찌됐든, 우하루가 배려해서 응해준 이번 대결해서 도발한 쪽이 KO 완패를 당했네!”
“그건 그렇지. 인정!”
모두가 설왕설래.
그런 말들이 귀에 자꾸 들리자 우하루도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다.
물론 모든 건 추측일 뿐.
오다가 버스나 지하철에서 잠깐 졸다가 못 내려서 지각할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나중경은 그 날 수업이 끝날 때까지도 학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니?”
어둠이 깔려든 저녁, 집에 들어온 나중경을 향해 어머니가 역정을 냈다.
“너 학교 안 가고 어디 갔었어? 전화는 왜 안 받아?”
“일이 좀 있었어요.”
“네가 일은 무슨. 그 일이 학교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니?”
“네.”
“그런 게 세상에 어디 있어?”
“있어요. 엄마한테 갔다 왔어요. 됐어요?”
순간 정적.
어머니의 얼굴이 굳어졌다.
“들어갈게요.”
“잠깐.”
“.......”
“절대 아빠는 아시게 해선 안 된다. 그 때에는 정말 끝이야.”
잠시 뒤돌아 그녀를 쳐다봤던 나중경이 말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하아...”
나중경의 친엄마는 그가 다섯 살일 때 돌아가셨다.
그리고 3년 후.
지금 어머니가 집으로 들어오셨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그렇게 빠른 아버지의 재혼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하늘나라로 떠난 친엄마의 품에서 늘 맡았던 향기가 아직도 그대로인데.
그럼에도 그는 나름 적응을 하려 노력했고, 엄한 아버지 때문에라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중경은 엄마의 품이 그립다.
힘든 일이 있거나 고민이 있을 때면 그는 납골당을 찾는다.
사진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면 뭔가 따스하고 기운이 나는 것 같다.
왠지 해답을 주시는 것 같기도 하고.
“중경아. 아버지 오셨다.”
한동안 얼굴 보기가 힘들었던 나극상 감독이 오늘따라 집에 일찍 들어왔다.
나중경은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오늘 밥은 또 모래알이겠군.’
그의 추측은 틀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먹는 식사 때에는 언제나 그랬기에.
오늘은 특히 더 그럴 것만 같다.
“여보. 이번에 내가 제작한 드라마가 대박을 쳤어. 하하하.”
이렇게 기분 좋은 아버지를 본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이른 시간인데 술까지 한 잔 걸친 듯 얼굴이 벌건 나 감독.
“정말 잘 됐어요. 저도 봤는데 정말 너무 감동적이고 재미있더라구요. 당신 컴백작이 이렇게 성공하게 돼서 다행이에요.”
“그러게 말이야. 이게 다 좋은 작품을 만난 덕분이라니까. 하하.”
가시방석.
저 말 속에는 또 어떤 의미가 들어 있을까.
같은 또래 친구는 이렇게 걸작을 써서 나한테 도움을 주는데 너는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구나.
나중경에게는 꼭 이렇게 자신을 그 아이와 비교하고 책망하는 소리로 들린다.
“제가 아까 배탈이 나서 속이 좀 안 좋아요. 그만 먹고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흔쾌히 허락하는 아버지.
그나마 기분이 좋아 대답이라도 부드럽게 들었다.
방으로 들어간 나중경은 한참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다.
‘과연 아버지한테 인정을 받는 길은 뭘까. 저렇게 기분 좋게 해드리고 칭찬 받을 수 있는 길은 어떤 거지.’
곰곰이 고민하는 그.
‘일단 학교에서 1등하는 것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좀 약하겠지. 돈? 그래. 아빠가 시청률에 목매는 건 돈을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인 거야. 공모에서 대상 받는 건 솔직히 불가능하기도 하고 이제 우하루 때문에 김 다 샜어. 그렇다면...’
그는 뭔가 결심했다는 듯 주먹을 꽉 쥐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우하루가 교실에 도착한 뒤 1분도 안 되어 그 앞에 나중경이 나타났다.
“우하루!”
“어, 중경아. 어제 왜 학교 안 나왔니? 어디 아팠어?”
그래도 걱정을 해주는 그.
하지만 상대방은 그걸 받아줄만 한 표정이 아니다.
“그건 됐고. 인정한다.”
“뭐?”
갑작스레 다가와서는 다짜고짜 무슨 말인지.
이래서 아이들이 얘하고는 커뮤니케이션이 좀 힘들다는 거구나.
도입도 전개도 없이 곧장 결론이니.
“이번엔 네가 이겼다. 내가 깨끗이 승복한다고.”
“그래, 뭐. 그런 자세는 좀 인상적이긴 하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란 걸 명심해.”
“...?”
“한 번이 영원하리라는 법은 결코 없어. 자만하지 마라, 우하루.”
그 말을 남기고선 휙 돌아가던 나중경.
나름 허리를 꼿꼿이 펴고 폼을 잡으며 걷던 그가 교실 뒤쪽에 떨어져 있던 가방에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웃음을 참느라 고생 좀 했다.
‘뭐지, 저 신선한 창조물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뱉어낸 우하루다.
이정도면 뭐 일방적인 애증인 건가.
관심도 없는 자신한테 혼자서 자꾸 저러니 이제는 귀여워지려고까지 한다.
그 사이 자기 자리로 돌아간 나중경.
넘어져 제대로 쪽 당할 뻔한 위기를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폰을 켰다.
액정에 떠오른 건 문스피아 사이트.
그는 밤새 올라온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를 읽기 시작했다.
‘나도 반드시 이 작가님 이상의 글을 쓰고 말 거다. 그래서 일단 웹소설로 떼돈을 벌어서 드라마화도 시키고 영화로도 만들어서 네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거야. 그깟 단막극으로 버는 돈이 얼마나 된다고. 기다려라, 우하루!’
그의 눈이 전투에 임하는 전사처럼 결의에 이글거렸다.
*****
이번 ‘심야 드라마극장’은 단순히 시청률만 높아서 화제가 된 게 아니다.
작품성이 뛰어난 단편 드라마도 이렇게 대중적 인기를 얻을 수 있구나 하는 걸 증명해줬기에 이슈몰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빈 집 털이를 한 것도 아니고 같은 시간대 다른 채널의 미니시리즈들을 다 눌러버렸으니.
그게 현수빈과 임정화의 출연만으로 설명이 될 수는 없다.
과거 심야 드라마극장의 배우들도 당대의 탑배우가 나온 적이 꽤 있었지만 여지없이 시청률을 죽 쒔었고.
그래서 점점 유명 배우들이 출연을 꺼려하는 악순환이 거듭.
결국에는 명목만 유지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던 거였으니까.
또 하나 중요한 점.
공모의 필요성을 재점화시켰다는 것이다.
방송국들은 날이 갈수록 공모 등을 통한 신인들의 발굴보다는 기성 작가들을 통한 리스크 최소화를 노리고 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참신한 신인 작가를 통해서 작품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걸 업계에 보여줬다.
결국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희망의 빛을 얻게 됐다.
이 모든 것이 우하루로부터 시작됐다.
KTBS에서 고등학생도 아니고 중3이 대상을 받았다고 했을 때.
비록 기자들이나 방송 관계자들이 관심을 가지긴 했지만, 반면 일말의 의구심도 꽤 많았던 게 사실이었다.
작품이 공개된 게 아니었으니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갈 만하다.
하지만 드라마가 방영되고 난 후부터 더 이상 그런 낌새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누가 뭐래도 작품 자체가 뛰어났으니까.
“드라마로 제작 안 됐으면 우하루 작가가 억울할 뻔했네.”
“글쎄 말이야. 와, 저 나이에 이런 스토리를 창작하고 이 정도의 대본을 쓴다고? 정작 그 자체가 기적인 거 아닌가.”
“글쎄 말이야. 더구나 대본을 처음 써본 거라잖아. 초짜 신인이 지금 저 정도면 앞으로는 정말 어떨지 감도 안 온다.”
모두가 혀를 끌끌 차는 우하루의 실력과 재능.
그건 놀라움 이상의 경악이었고 비현실적인 경험이었다.
그래서인지 역대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던 ‘문화이슈 초대석 우하루 작가 편’을 시청자들이 뒤늦게 너도나도 찾아보기에 이르렀고, 조회수가 무려 수십 배가 뛰는 또 하나의 기록을 썼다.
이러한 화제와 열기 덕분인지 이례적으로 KTBS 대표이사까지 나서서 이번 일에 대해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제 마음 같아서는 해외에서 멋진 휴가를 즐기실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지만 예정돼 있던 게 아니다보니 대신 보너스와 종방파티로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단막극이라 그 흔한 제작발표회도 갖지 않았었다.
물론 종방연 역시 예정에 없었는데.
높은 시청률 달성으로 방송국 측에서 갑자기 마련한 것이다.
나 감독은 이 사실을 우하루에게 알렸다.
한 가지 추가된 일정을 덧붙여서.
- 종방파티만 연다고 하니까 기자들이 KTBS에 엄청 딜을 넣었나 봐.
“어떤 딜이요?”
- 그 바로 전에 인터뷰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인터뷰요?”
- 응. 우리가 제작발표회도 없었잖아. 배우들과 제작진이 함께 모이는 자리가 생기니까 그 때를 취재의 기회로 삼자는 거겠지. 게다가 같은 방송국의 연예 프로그램에서도 그런 요청이 들어오니까 결국 그 일정도 추가됐어.
그런데 역시나 문제가 하나 있다.
학생인 우하루라 겪을 수밖에 없는 장애물.
- 평일이라.
“그럼 저 빼고...”
우하루의 말에 전화 건너편인데도 불구하고 화들짝 놀라는 기색이 그대로 전해져온다.
- 안 돼!
“네?”
- 말도 안 된다고. 우 작가 지분이 얼만데, 주인공이 빠지면 난리 나!
그러면 주말로 잡던가.
자기들이 평일로 결정해 놓고서는.
“그 부분은 일단 제가 선생님께 말씀드려보고 혹시 교장 선생님께서 컷하시면 그 때 감독님께 구원을 요청 드려 볼게요.”
우하루는 점심시간이 끝나고 교무실을 찾았다.
이러이러 여차저차 해서 다음 주에 오전 수업만 마치고 갈 수 없을지 문의를 하는 그.
“글쎄. 나야 당연히 빼주고 싶은데, 그래도 교장선생님께 말씀을 드려야...”
그 순간.
“유 선생님!”
황두헌 교장이 어느새 바로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모양이다.
갑작스럽게 그의 목소리가 들리니 마치 귀신인 것처럼 두 사람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어머, 깜짝이야. 교장 선생님, 언제부터 여기에...”
“제가 그 때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네?”
“우리 우하루 학생이 방송 쪽 일을 볼 때에는 최대한 배려해 주라구요.”
“네. 그렇죠, 그건. 근데 그래도 일단 교장 선생님의 허락을...”
“선 조치! 후 보고!”
“네?”
하도 큰 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멀리 있던 다른 교사들도 무슨 일인가 하고 빼꼼 쳐다본다.
“유 선생님. 따라 해보세요. 선 조치! 후 보고!”
“선 조치, 후 보고!”
그걸 또 따라하는 유하연 선생이다.
참 직장 생활 어렵다.
“하루야.”
“네, 교장 선생님.”
“그 날 출석 다 인정해줄 테니까 조심해서 다녀 오거라.”
“네? 아, 네. 감사합니다.”
이렇게나 나긋나긋하게 대해줄 수가.
아니 우리들한테는 왜 저런 태도를 안 보여주는 거야.
선생들이 좀 서운하다.
“그리고...”
“?”
“어디 다닌다고 꼭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네. 늘 이야기하고 다닙니다.”
“그래, 그래. 역시 우리 하루다! 최고!”
귀엽게 엄지를 척 내보이는 황두현 교장.
지켜보는 선생들이 경악해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들키지 않도록 재빨리 몸을 숙였다.
*****
단체 인터뷰 겸 종방파티를 이틀 앞둔 날.
우하루는 현수빈 배우의 전화를 받았다.
- 우 작가님. 그 날 오전에 나한테 먼저 와줄 수 있어요?
“네? 어떤 일로...”
- 글쎄, 와 보면 알아요.
무슨 일인지 한사코 이야기를 안 해주는 그녀.
우하루는 종방파티 당일 아침 현수빈이 깨톡으로 보내준 주소를 찾아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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