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에브리데이, 에이데이
“네?”
다들 당황한 표정.
밑도 끝도 없이 다짜고짜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를 드라마화 하라니.
뭔가 사전에 낌새도 전혀 없었잖아.
“저기, 국장님.”
“뭐?”
“이 작품은 판타지인데요.”
“그래서?”
“배경이 북유럽이고 등장인물이 다 중세시대 백인들인데 어떻게 드라마화를...”
“그걸 누가 몰라. 스토리가 좋잖아. 그게 중요하지. 배경은 우리나라 선사나 중세 정도로 바꾸면 되고. 너 읽어 봤다고 했지?”
“네.”
“어때? 이야기만 따져놓고 봐도 존나 재미있지?”
“그렇죠. 그러니까 흥행 1위겠죠.”
“어차피 우리 선사나 중세 때에도 성이 있고 장수가 있고 왕이 있고 서자가 있잖아. 왕국 뺐고 빼앗기는 건 똑같은 거고.”
“.......”
“시대적 지리적 배경과 풍광, 몇 가지 전반적인 인물적 특성을 좀 고치면 동양 쪽으로 그대로 옮겨 와도 될 것 같다는 생각 안 해봤어?”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피디.
“글쎄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이내 혀를 끌끌 차는 원 국장이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안 된다는 거야. 몇 년 전에 SCBS에서 대히트했던 ‘인사이드 퓨쳐’ 기억나?”
“네.”
“그거 원작이 어디야?”
“영국이죠.”
“그건 잘 아네. 배경도 영국, 주인공도 다 영국 애들에 시대도 중세. 그런데 그거 한국 배경으로 각색해 와서 대성공 했잖아.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건 장르가 로맨스였잖습니까. 솔직히 세계관을 대체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고 스케일도 크지 않았지만 이건 도무지...”
“그러니까 숙제를 주는 거 아니야!”
원 국장이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른다.
늘 이런 식이다.
사실 최근 TVNT의 드라마 시청률이 부진하다고 책망을 늘어놓는 그인데, 원인을 따지고 보면 그 책임은 자신에게 귀결된다는 걸 본인만 모른다.
“내가 누누이 얘기하잖아. 재미가 거기서 거기면 일단 어그로를 끌어야 한다고. 지금 이 작품은 전통적인 웹소설 독자들 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한테도 유명해지고 있는 소설 아니냐. 거기다 재미까지 넘사벽이고. 그러면 어떻게 해서든 우린 그 화제성과 유명세를 이용을 해먹을 생각을 해야지. 그러면 조금 완성도가 떨어지고 어설퍼도 무조건 10프로는 넘는단 말이야. 알아들어?”
솔직히 못 알아듣겠다.
피디들은 위세에 눌려 이 한 마디를 할 수 없었지만.
확실해진 건, 자기 입으로 말한 바와 같이 어그로 끌기 위해 그저 유명세에 숟가락 얹어 보자, 그런 심보인 거다.
몇 년 전 그런 식으로 외국의 화제 드라마를 흉내 내 어설프게 기획했다가 수백억을 투자하고도 폭망한 경험에서 배운 게 전혀 없으시다.
‘그럴 정도로 ‘회서군’이 잘 빠진 작품이긴 하지.’
피디들은 원 국장이 저러는 게 조급함에서 나오는 무리수란 판단이다.
임원급 인사를 앞두고 뭔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이랄까.
이번이 그의 마지막 기회이긴 하다.
“그래도...작가 분이 그렇게 하자고 할까요?”
“돈 많이 준다는데 안 할 작가가 어디 있어? 더구나 서브컬쳐를 대중문화로 끌어올려준다는 거잖아. 언감생심 그런 거 꿈이나 꿀 수 있겠어? 일단 내 말대로 공격적으로 진행해 봐.”
은근히 웹소설에 대한 무시하는 뉘앙스가 짙게 풍긴다.
확실한 건, 이 작품과 작가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같은 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오직 이용해 먹을 생각만 머리에 가득한 게 확실했다.
회의가 끝나고.
“일단 문스피아에 타진은 해봐야지. 일단 내 목숨부터 부지하고 봐야 하잖아.”
“언론사에 일단 흘리라는 건 정말 너무하네. 하아...”
“솔직히 이 작품이 영상화 안 되는 건 아깝긴 해. 하지만 절대 여긴 아니야. 넷플럭스라면 몰라도.”
“내 말이.”
회의실에서 나오는 피디들은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
KTBS 드라마국 복도 끝 비상계단.
엉뚱하게도 이 방송국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두 사람이 엄한 곳에서 날카롭게 대치하며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서인희. 네가 여긴 웬일이냐?”
“알면서 뭘 물어. 소란해! 너야말로 왜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건데?”
“좋은 말 할 때 포기해라. ‘아임 유어 팬’은 우리 회사 거니까.”
그 말에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는 서 대표.
이 상황만 본다면 학창 시절 때 면도칼 좀 씹던 사람들 같다.
표정이나 태도가 정말 그렇다.
짝다리는 기본이고.
소란해는 서인희와 연서대 영문과 동기 동창이다.
한 때는 단짝 소리를 들을 정도로 친했던 적도 있었지만.
서인희가 자신의 단편소설로 대한문예를 통해 먼저 등단을 하면서 친구의 시기와 질투심에 불을 붙였고.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한 후, 소란해가 서인희의 작품에 대해 혹평을 하고 다닌 게 탄로가 나 버렸다.
그 이후 둘은 완전히 적이 되어 버린 것.
십 몇 년 후, 소란해는 에스오 북스 대표가 되었고.
외국에 나가 있던 서인희는 하필 경쟁사의 대표이사를 맡아 귀국을 하게 되었다.
이런 것도 운명일까.
두 사람은 앞으로 피 튀기는 전쟁을 예고했다.
“웃기는 소리 하네. 아직 작가님 얼굴도 한 번 못 봤으면서.”
“넌 봤어?”
“나는 인마 조카...”
아차.
패를 내 보이면 안 되지.
“이 년이 대놓고 욕을. 뭘 까라고?”
“아, 됐고! 오늘 내가 먼저 손 차장님 만났으니까 신사적으로 패배 인정하고 돌아가.”
“미친. 작가님 당사자도 아니고 방송사 담당자하고 만난 게 무슨.”
“좋아. 그럼 뭐 할 수 없지. 실력 대 실력으로 겨루는 수밖에.”
“그래. 어디 한 번 멋지게 해보자고. 난 두 번은 안 당해.”
“아니. 지는 년은 또 지게 돼 있어. 조만간 알게 될 거야.”
서인희가 소란해의 어깨를 툭 치고서는 먼저 복도로 나왔다.
회사로 돌아온 그녀.
그렇지 않아도 ‘아임 유어 팬’의 출간에 대한 집념이 강한데.
이렇게 되니까 집착 수준으로 욕망이 끓어오른다.
“저 인간한테 우하루 작가를 빼앗길 순 없어!”
위기감은 뇌를 각성시키고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킨다.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이대로 연락만 기다릴 순 없어. 그리고 세영이 통해서 접근하는 건 비겁한 일이야. 오히려 인상도 안 좋아 보일 수 있고. 이제 정공법이다.”
그녀는 당장 작업에 들어갔다.
보통은 담당자에게 시킬 일이지만 이번에는 직접 할 작정이다.
“김 팀장님.”
- 네, 대표님.
“우하루 작가님과 ‘아임 유어 팬’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가져오세요. 그리고 기획 팀과 디자인 팀에 최고의 시안들 준비해 오라고 하시구요.”
- 알겠습니다.
서인희 대표는 우하루 작가를 설득시킬 수 있는 제안서를 그 어느 때보다 심혈을 기울여 만들기 시작했다.
*****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
여전히 문스피아에서 독보적 1위를 달리며 어느덧 400화에 다다르고 있다.
스토리는 여전히 탄탄하고 부드럽게 이어지고 있는 상황.
그 흔한 연독률 기복도 거의 없다.
특징적인 건, 300화를 기점으로 주인공을 비롯한 환경 전반에 새로운 여건이 조성되며 세계관이 더욱 확장되었다.
독자들은 그 이후를 ‘시즌2’로 부르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시즌 10도 가능하겠어.”
“불가능할 건 없지. 회가 거듭돼도 긴장감이 전혀 늘어지지 않으니까. 떡밥 회수도 완벽하고, 또 늘 새로운 떡밥이 우리를 즐겁게 하잖아.”
“웅장한 스케일 속에서도 변함없는 사이다 충족과 완성도 제공.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작품을 써낼 수가 있는 건지.”
독자들 모두가 이 작품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결정은 작가 자신의 몫일 터.
종착역을 알게 되면 있던 김도 새는 법인 것처럼 오히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고 얼마만큼 이야기가 지속될지 전혀 예측이 되지 않기에 신비로운 흥분감의 텐션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럼 우리 에이데이 팬클럽 슬로건은 ‘에브리데이, 에이데이’로 확정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짝짝짝.
서울 모처 모임공간의 한 룸.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어느 유통기업 슬로건하고 같아서 좀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이 이상 운율도 잘 어울리고 우리 마음을 표현하는 건 없을 것 같네요.”
“맞습니다. 우린 모두 매일 매일 ‘에이데이’ 작가님입니다!”
“그래요. 하루도 빼놓을 수 없죠!”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에이데이’ 팬클럽.
오늘은 그 회원들이 현실 세계에서 직접 만났다.
직접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은 그야말로 ‘찐 팬’들.
이 작품과 작가에 대해 무한사랑을 보내는 이른바 ‘덕후’들이다.
“그럼 회장 투표 결과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은 온라인 중심으로 수동적 활동을 해왔다면.
이제부터는 오프라인에서도 자주 모이고 작품과 작가의 세계에 대해 토론과 지원활동 등을 실제로 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건 구심점.
그래서 이들은 회장과 임원진을 꾸리기로 한 것이고.
오늘 그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다.
“우리 팬클럽의 회장은...”
두구두구두구.
“역시나, 나중경 님이 선출되셨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반색을 하며 박수를 친다.
“이 팬클럽을 만드셨고 가장 열정적으로 모든 일에 임하시는 나중경 님이 회장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겁니다. 혹시라도 학생 신분이라 어려운 부분들은 성인인 나머지 임원들이 돕겠습니다.”
상기된 표정으로 앞으로 나와 회원들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는 나중경.
“여러분께서 뽑아주신 만큼, 앞으로 열심히 이끌어나가겠습니다!”
각오에 찬 그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빛난다.
“더불어, 어제부터 자꾸 이야기가 새어나오고 있는 TVNT의 ‘회서군’ 드라마화에 대한 저지 운동에 적극 돌입하도록 하겠습니다!”
*****
토요일 오후.
문스피아 오정민 주임의 연락을 받은 우하루가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여기가 만나기가 좋습니다. 사람도 거의 없구요.”
“아무데서나 봬도 괜찮은데요.”
“안 되죠. 아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는데.”
“저를요?”
“그럼요. 이제 얼굴 많이 알려지셨잖아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제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구요.”
“그건 모르셔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 회사 직원들도 작가님 얼굴 많이 알더라구요. 물론 ‘에이데이’가 아니라 ‘우하루’로서지만.”
계약서나 서류들에는 ‘우하루’라는 본명이 기재돼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임 유어 팬’과 그를 매칭시키는 직원은 다행히 없는 상황.
그런 문서에 접근이 가능한 사람은 담당자와 관련부서 사람 중 극히 일부뿐이니까.
결국 우하루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오 주임이 유일하다.
“비밀 잘 지켜주셔서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유, 무슨 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 오 주임이란 사람.
갈수록 믿음이 간다.
“오늘 뵙자고 한 건 작가님께 직접적으로 의향을 물어봐야 할 안건이 생겨서입니다.”
“혹시, TVNT에서 제 작품을 드라마로 만들고 싶다는 건가요?”
“그걸 어떻게...”
“이미 여기저기 소문이 났던데요. 미리 낚싯줄 먼저 던지신 것 같던데, 그 쪽에서.”
“하아. 네, 맞습니다. 공식적으로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작가님 의사를 정확히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하지만.
물어보고 말 것도 없는 것 같다.
우하루의 눈빛이 단호했다.
“안 합니다.”
*****
그 시각.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가 웹툰 섹션에서 연재되고 있는 국내 최대 포털 플랫폼 ‘네온’에 관련된 기사 두 개가 뉴스 사이트에 조용히 올라왔다.
[문스피아, 네온으로부터 대규모 투자 유치]
[네온, 미국에 위치한 최대 글로벌 웹소설 플랫폼 ‘겟픽’ 인수. 국내 웹소설의 영미권 진출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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