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검증이 필요합니다
[작가님의 작품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를 미국 웹소설 플랫폼인 ‘겟픽’에 특별연재하려고 합니다. 이에 관련해 상의를 드리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우하루도 ‘겟픽’에 대해서는 잘 안다.
지난 삶에서 웹소설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갖지는 않았었지만 저 새로운 플랫폼은 작가들뿐 아니라 콘텐츠 업계에서 큰 이슈가 되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에 ‘회서군’을 연재한다고?
‘이거야말로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 중 하나이지 않은가.’
언젠간 해보고 싶었던 영미권 소설계에의 도전.
하지만 이 작품은 아니었다.
독점계약을 맺고 ‘문스피아’에 연재하고 있는 작품이기에 애초에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것.
그런데 이렇게 먼저 제안이 온다고?
가만있자.
근데, 문스피아가 아니라 ‘네온’이란다.
거기에 연재되고 있는 건 소설이 아니라 웹툰 작가가 각색한 작품이잖은가.
‘혹시 웹툰하고 뭔가 헷갈린 거 아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우하루가 이내 폰을 들어 뉴스 섹션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하! 이런 일이 있었구나.”
그제야 네온과 관련된 소식을 확인한 그.
이래서 늘 업계와 관련된 뉴스에는 항상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하루는 곧장 문스피아 오 주임과 통화를 했다.
이 내용에 관해 확인을 하기 위해서다.
혹시 모르지 않나.
피싱메일이라든가 이상한 낚시일 수도 있으니.
분명 네온 주소로 된 메일인데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를 위해 의심을 해야 하는 요즘 세태가 괜스레 안타까운 기분이 드는 그다.
- 저도 방금 전 팀장님께 전달받았습니다, 작가님!
다행히, 메일은 정상적인 것이었다.
일단 자신의 담당자인 오 주임과 몇 가지 협의를 마친 우하루.
전화를 끊고 나서 곧바로 네온 정한호 팀장에게 답신을 쓰기 시작했다.
*****
“하루야!”
이게 얼마만인가.
뒤에서 들려오는 상큼한 목소리에 우하루가 몸을 돌렸다.
언제 봐도 과즙 같은 모습의 강세영.
한동안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그녀가 폴짝거리며 그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세영아!”
“여기서 너를 딱 만날 줄 알았지.”
“어떻게?”
“그냥. 그럴 거 같았어. 내 직감이 맞았네. 호호.”
거의 두 달 동안 충청도와 경상도의 세트장에 번갈아가며 살다시피 한 그녀.
그런 노력과 열정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이번 드라마는 종편에서 방영됨에도 불구하고 높은 시청률을 기록 중이다.
그녀의 연기력 또한 호평이어서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될 전망이다.
“너무 재미있더라. 반응 장난 아니던데.”
“뭘 그 정도 갖고. 쇼킹 앤 센세이션이야 ‘아임 유어 팬’에 댈 게 아니지.”
“그건 단막극이고 이건 미니시리즈잖아.”
“어쨌든, 아직도 네 작품이 업계에 준 충격은 여전해. 현장에서 감독님들하고 스태프 분들이 지금까지도 화제로 삼는다니까. 게다가 우리 작가님이 너 엄청 보고 싶어 하시더라. 아마 조만간 얼굴 한 번 보자고 하실 거야. 그 때 나도 껴 주라.”
강세영의 이번 작품은 퓨전 사극 스릴러물.
작가는 바로 송하예고 입시 실기시험 때 외부 초빙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던 이연하 작가다.
지금 담임인 유하연 선생한테 입학하면 우하루를 따로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던 그녀.
세 사람은 학교 근처에서 한 번 만나 식사를 했었다.
그래서 안면이 있었고, 대학교에 뜻이 있으면 자신이 전임강사로 있는 연서대로 와 줄 것을 제안하기도 했었다.
“그러지 뭐. 근데 우리 담임선생님도 같이 보게 돼도?”
“헉, 정말? 하아, 그렇게 되면 좀 생각해볼게.”
천하의 강세영도 다른 반 담임 선생님은 꽤 불편한 가 보다.
“그나저나 어떻게 해? 세영이 너, 시험공부 제대로 못 했을 거 아냐?”
“나름 짬짬이 했어. 어제도 하루종일 쉬면서 좀 했고.”
“그래도 다행이네. 하긴. 어차피 시험의 묘미는 벼락치기에 있는 거니까.”
“호호, 맞아. 그 중에서도 당일치기가 아니면 섭하지!”
두 사람은 활짝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오늘은 중간고사 첫째 날.
우하루가 촬영 때문에 시험공부를 못 한 강세영을 걱정했지만.
사실 그 자신 역시도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지는 못했다.
글 쓰는 게 더 재미있고 우선순위다 보니.
그럼에도 오늘은 좀 자신이 있는 과목들이다.
“자 오늘은 영어, 제2외국어, 스토리 창작과 구성 기초 이론. 이렇게 세 과목인 거 알지?”
“네, 선생님!”
“시험들 잘 봐. 입학 후 첫 중간고사야. 최선을 다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유하연 선생이 나가고 10분 후 첫 과목인 영어시험이 시작됐다.
시험지를 받아든 우하루.
차분하게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평이하군.’
솔직히 그가 이번 삶에서 중학교를 다니면서 놀랐던 것 중의 하나.
영어 교과목의 난이도였다.
원어민도 아니고 외국어로서 배우는 건데.
꼬맹이 아이들에게 너무 어려운 수준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나이또래의 미국 학생에게 문제를 풀게 해도 만점이 쉽게 나올 것 같지 않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나이또래에 해당되는 이야기고.
영어를 이십 년 넘게 모국어로 써왔고 영문학을 직접 공부하고 영어소설까지 창작했던 우하루에게 있어서는 그저 재미있는 심심풀이 퀴즈 정도랄까.
솔직히 조금은 지루하고 싱거운 레벨일 뿐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한참을 낑낑대고 있을 때.
우하루는 분위기를 살피며 나갈 타이밍만 노리고 있었다.
마치 입시 실기시험을 보던 그 때와 비슷한 상황.
‘이 정도면 최소한의 예의는 차린 거겠지. 시간이 아까우니 나가서 글이나 써야겠다.’
그는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일어나 앞으로 향했다.
그럼에도 부스럭 소음이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하루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물론 그 중엔 나중경도 포함돼 있었고.
‘뭐야, 설마 포기? 그럴 리가 없는데, 저 자식이.’
원어민 교사와 가장 격이 없이 소통하고 심지어는 토론까지 서슴지 않는 우하루의 영어 실력.
그걸 알고 있는 그로서는 말도 안 되는 추측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결론은 단 하나.
‘너무 쉽다 이거냐...’
자존심이 또 한 번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받는 나중경이다.
중학교에서 늘 전교 3위권 안에 들던 그의 영어 성적.
그럼에도 이번 첫 시험은 유난히 어려워서 시간이 빠듯하다 느껴지고 있는 중인데.
‘30분도 안 돼 나가는 저 자식은 도대체...’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 시간인 독일어도 마찬가지였다.
딱 30분이 되자마자 살금살금 앞으로 가 시험지를 제출하고서 인사 후 나가는 우하루.
심지어 얼굴은 좀 졸린 표정이다.
‘하아. 신경 쓰지 말자. 쟤는 쟤고 나는 나! 근데 독일어 왜 이렇게 어려운 거야. 제발 제게 힘을 주소서, 에이데이 작가님이시여!’
이쯤 되면 ‘에이데이’가 나중경에겐 신적인 존재인가.
팬클럽을 맡아 활동하다 보니 아예 홀린 듯.
그나마 3교시 시험인 ‘스토리 창작과 구성 기초 이론’은 우하루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고, 나중경은 그예 위안을 받았다.
‘그래. 내가 강점인 수학, 과학, 한국사가 있잖아. 거기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전공도 있고 말이야.’
손을 뿔끈 쥐며 화이팅을 외치는 그.
정작 우하루는 전혀 신경도 안 쓰는데.
나중경은 혼자만의 치열한 승부에 오늘도 전투력이 충만하다.
*****
“작가님. 여기입니다!”
길거리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할 무렵.
한적한 소로의 아담한 어느 카페 2층.
문스피아 오 주임이 계단으로 올라온 우하루에게 손짓을 한다.
“좀 늦었습니다. 갑자기 선생님이 부르셔서요.”
오 주임 옆에 서 있는 사람이 그 말에 입을 벌리고 있다.
뭔가 좀 놀란 모양이다.
“정 팀장님. 이 분이 ‘에이데이’ 작가님이십니다.”
“네? 아, 네. 지, 진짜였군요. 고등학생이시란 게.”
네온 콘텐츠 사업부 개발 2팀 팀장 정한호.
우하루에게 메일을 보냈던 당사자다.
그는 오 주임의 말을 설마 하며 내심 믿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학생 내음 물씬 풍기는 우하루의 첫 마디를 듣고선 놀라 멍하니 있었던 거였다.
“안녕하세요, 에이데이 작가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제가 연락드린 정 팀장입니다. 반갑습니다, 작가님!”
여느 때처럼 우하루는 복숭아맛 아이스티를 시켰다.
앞의 두 사람은 역시나 아메리카노.
각자의 음료를 홀짝이며 잠시의 아이스브레이킹 타임을 가졌다.
‘내가 ‘아임 유어 팬’의 작가란 건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네.’
혹시라도 정 팀장이란 이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면 어떻게 하나 좀 걱정을 했던 그.
하지만 다행이었다.
그는 ‘우하루’와 ‘에이데이’를 매칭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TV는 별로 보지 않는 타입.
오 주임에게 당부했던 대로 절대 본명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무난히 넘어갈 듯싶다.
나중에 계약 단계에서 서류상 드러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세 사람은 본격적으로 미팅을 시작했다.
당연히 안건은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의 겟픽 연재.
“그럼, 작가님께서는 원칙적으로 찬성을 하시는 거죠?”
“네. 제가 생각하는 조건들만 맞는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아마 여러 조건들에 있어서 충분히 만족하실 겁니다. 유료 연재 수익은 특별히 현재 문스피아와의 조건으로 최대한 맞춰드릴 계획이구요, 마케팅은 말씀드린 바처럼 겟픽에 한국 웹소설 콘텐츠 런칭 기획 이벤트로 빵빵하게 밀어드릴 테니까요.”
“제가 운이 좋네요. 감사합니다.”
“하하, 무슨 말씀을. 다 ‘에이데이’ 작가님의 작품이 출중하니까 저희나 겟픽에서도 밀어드릴 수 있는 건데요.”
정 팀장도 역시 이 고등학생과 말을 섞다 보니 묘한 느낌이다.
왠지 겉은 미소년인데 말투나 분위기는 압도당하는 기분이랄까.
그를 처음 보고 느꼈던, 나이 차로 인한 난감함 따위는 금세 사라졌다.
오 주임이 우하루를 처음 만났을 때 겪었던 적응 단계를 똑같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는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습니다.”
“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라구요?”
“네. 전 무엇보다 작품 자체가 가장 우선입니다. 아무리 마케팅을 거하게 한다 하더라도 작품이 엉망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테니까요.”
뭐지.
지금 이런 의사표현이 고1 학생의 입에서 나올 수준인가.
역시나 또 한 번 긴장하게 되는 정 팀장이다.
“작품 자체가 중요한 건 당연한 건데, 전 무슨 말씀인지 잘...”
“문스피아에 연재하는 건 한국 독자를 위해 한국어로 창작된 것이구요, 겟픽에서는 당연히 미국을 위시해 영문화권 독자들에게 이해되고 어필할 수 있도록 재창조를 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제야 그는 우하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아! 번역 말씀이시군요. 하하.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최고 실력을 가진 번역가 분들을 추려놨으니까요.”
자신 있는 반응.
민 전무와 제임스 한 대표가 특히 걱정했던 그 부분이라 나름 실무진에서 준비를 많이 한 모양이다.
“그러시군요.”
“네. 정말 난다 긴다 하는 한영 번역자들입니다. 그러니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하하.”
“지금 그 말씀은 이미 검증이 끝났다는 걸로 들리네요.”
“검증이요? 뭐, 그 분들 레퍼런스가 증명하는 거니까요.”
“레퍼런스만 갖고 알 수 있을까요? 번역해야 하는 작품의 일부를 제공하고 테스트를 해야 검증이 이뤄지는 거 아닌가요?”
“물론 그, 그렇죠. 근데 그렇게 하면 워낙 네임밸류가 있는 분들이라 좀 기분 나빠하실...”
“그 당연한 걸 기분 나빠한다면 의지가 없는 거겠죠.”
초롱초롱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논리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이 소년.
틀린 말이 없기에 정 팀장은 갑자기 말을 잃었다.
“제가 우려하는 게 이런 겁니다. 번역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는다면 저는 이번 프로젝트 하지 않겠습니다.”
단호한 우하루의 말에 앞의 화들짝 놀란 두 사람.
정 팀장은 특히 당황했다.
이미 결정이 났고 잘 될 거라 보고 했으며 민 전무와 대표이사의 관심이 지대한 일이 시작도 못해보고 파탄 날 위기 아닌가.
“작가님. 진정하시구요. 말씀대로 검증을 거치겠습니다. 그러면 되실까요?”
자리를 뜰 것 같던 우하루가 다시 자세를 제대로 고쳐 잡았다.
“그럼 제 작품의 3화 이상을 그 분들에게 번역시켜서 검증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잠시 난감해하던 정 팀장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함께 검증하겠습니다.”
“네? 작가님께서요?”
“네.”
그 말에 갑자기 피시식 웃는 그.
분명 조소의 느낌이 섞여 있었다.
“저기 작가님.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게 아니라 한국말을 영어로 옮기는 겁니다. 그걸 봐 봐야 얼마나 안다고. 하, 참.”
마치 철없는 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그 말본새가 나와 버렸다.
그 순간.
우하루가 갑자기 정 팀장을 향해 뭔가 거침없이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영어였다.
그것도 너무나 유창한 영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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