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그렇지? 장난 아니지?
정 팀장은 당황해서 순간 어찌 해야 할 바를 몰랐다.
뭘 알아먹어야 어떤 반응이라도 하든지 말든지 할 텐데.
당최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가니까.
게다가 속도가 너무 빨랐다.
어렴풋이 몇 단어는 들린 것 같은데.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이 고등학교 1학년생.
그가 뱉어내는 이 영어는 어려서부터 조기교육을 받은 그런 정도를 넘어서는 레벨이란 것만은 분명 알 수 있었으니.
‘혹시, 미국인인가?’
이런 어이없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그가 회화 공부를 할 때 교재로 챙겨봤던 ‘가십 걸’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이랄까.
뜻은 정확히 알기 힘들었지만 분명 너무도 유창하고 세련된 느낌의 영어였다.
놀란 건 옆에 있던 오 주임도 마찬가지.
‘역시나 오늘도 또 한 껍질을 까주는 구나.’
매번 만날 때마다 놀라운 모습을 하나씩 보여주는 그.
지금도 예외는 없다.
‘저 정도면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이삼 년 전에 한국으로 온 재미교포 2세나 3세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레벨인데...’
우하루의 말이 마침내 끝이 났다.
그저 멍하게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던 정 팀장.
이내 머리를 한 번 흔들어 털고서는 정신을 챙겼다.
“지, 지금 뭐 하신 건지...”
“설마, 못 알아들으신 건 아니겠죠?”
“네? 아...하하. 그럴 리가요. 아주 좋은 의견 같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그럼요.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저도 고민 좀 해보겠습니다. 하하하하.”
괜스레 아는 척 해보는 그.
쓸 데 없는 자존심은 사람을 솔직하지 못하게 만드는 법이다.
어차피 몇 초면 다 털릴 거면서.
“아 네, 그러시군요.”
우하루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좀 전에 정 팀장이 그를 향해 날렸던 그 썩소.
한층 업그레이드된 강도로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왔다.
“미국 소설 중 대화 부분을 그냥 읊은 건데, 그게 제 의견을 말한 것처럼 들렸나 보네요.”
“네?”
이런 젠장.
“연인이 사랑싸움 하는 대사입니다. 전혀 못 알아들으셨군요.”
“하아...”
그랬다.
우하루가 쏟아냈던 말은 이전 삶에서 집필했던 ‘오르테가의 비밀’에서 두 남녀주인공들이 나눴던 격정의 대화였다.
한방 근사하게 얻어맞은 정 팀장.
그래도 나름 영어회화 공부에 열심이고 어느 정도 리스닝은 수준급이라며 늘 자신하던 그.
막상 미국의 젊은이들이 쓰는 연음의 향연과 랩처럼 쏟아지는 속사포 속어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으니.
갑자기 멘탈이 띵 하고 가출을 해버린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는 이내 자신이 우하루에게 보였던 태도가 얼마나 모자라고 섣부른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세상에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산재해 있는 법.
별 것도 아닌 혼자만의 잣대로 이 괴물 작가를 재단하려 들었던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이제는 아시겠죠?”
“네? 아, 네. 작가님.”
“제 자신이 능력이 안 되면 요청을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하아,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제가 너무 경솔했네요.”
결국 완전히 꼬리를 내리고 모든 요청을 수락한 정 팀장.
에이데이 작가가 먼저 카페에서 나간 후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았다.
“무슨, 저런 사람이 다 있대요? 진짜 고1 맞아요?”
“그래서 제가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상식적으로 판단하지 마시라고요. 첫 작품에서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작가입니다. 그 하나만으로도 범상치 않잖아요. 완전 천재라니까요.”
“영어는 뭐죠? 왜 저리 잘 해요?”
“솔직히 그건 저도 잘. 거기서 오래 살다 온 게 아닐까요?”
“그나저나 혹시...”
“혹시 뭐요?”
“아까 작가님이 나한테 한 영어 중에 뭔가 욕 같은 게 있었던 거 같은데...”
“에이, 설마요.”
“아녜요. 진짜였어요. 아이 젠장. 이래서 내가 미국에 유학을 다녀오려고 한 거였는데.”
투덜투덜.
정 팀장은 미팅 결과를 민 전무에게 보고하기 위해 서둘러 네온 본사로 향했다.
*****
마침 민 전무와 제임스 한 대표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 팀장은 ‘에이데이’ 작가와의 미팅 내용을 보고했고.
그들 역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에이데이 작가가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단 것도 그렇고, 그 나이에 영어실력이 그 정도라니.”
“정 팀장 말대로 미국에서 나고 자란 친구 아닐까요?”
“그렇다면 더 대단한 거 아닌가요? 네이티브 미국인이 한국에 와서 웹소설을 한국어로 저렇게 히트시키고 있다는 거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어느 경우이든 대단한 일이네요.”
“작품 읽어보면서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지만, 오늘 이야기 듣고 보니 완전 팬 될 거 같은데요.”
“하하, 저도 마찬가집니다.”
그 미지의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두 사람의 가슴 속에 요동쳤다.
“정 팀장.”
“네, 전무님.”
“에이데이 작가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맞아. 자네가 한 수 배운 거야.”
“하아, 저도 반성 중입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는 걸로 해요.”
“네, 알겠습니다.”
뭔가 곰곰이 생각하던 제임스 한 대표가 정 팀장에게 물었다.
“그 검증 작업, 저도 참여해도 될까요?”
“그럼요. 한 대표님이야말로 최적이시죠.”
“그건 아니구요. 다만, 아무래도 제가 원어민이니 어색한 부분은 없는지, 표현은 정확한지 정도는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게다가 회서군의 애독자이기도 하니까요.”
“검증 과정에는 많은 분들이 참여할수록 좋죠.”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이 있는데. 에이데이 작가님이 검증해 보내주시면 그거 저한테도 좀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KTBS는 ‘아임 유어 팬’의 재방송을 내보냈다.
원래 계획에 전혀 없던 일.
하지만 시청자게시판과 SNS를 통해 밀려드는 요청에 긴급 편성을 한 것이다.
물론 화제성을 최대한 이어가려는 목적도 있었다.
결과는 역시나 대박.
일요일 오후에 방영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6.1프로를 찍었다.
같은 시간대 다른 방송사의 주말드라마도 꺾어 버린 것.
역시 큰 이슈가 된 데다 입소문을 탄 그 파워가 막강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이 작품을 소설로 출간하고 싶어 하는 출판사들은 안달이 났다.
제안서를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우하루가 아직 답을 주지 않았기 때문.
“하아. 혹시 다른 데 연락을 준 거 아닌가. 물어보기도 면이 안 서고.”
이엘 퍼블리싱&콘텐츠의 서인희 대표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초조함에 피가 마른다.
“마케팅은 타이밍이 생명인데. 이 불씨가 꺼지기 전에 출간을 해서 확 몰아붙여야지 효과가 확실하게 나오는데 말이야.”
조카 강세영의 카드를 써볼까 하는 유혹에 다시금 흔들리던 그 때.
새로운 메일 알람이 떴다.
하도 스팸이 많이 들어오니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려던 그녀.
그런데 왠지 확인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어 메일함을 열었다.
그 결과.
“왔다!”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가 터졌다.
드디어 답신이 온 것이다.
우하루 작가로부터.
[대표님께서 직접 작성해 보내주신 출간 제안서 소중하게 잘 확인했습니다. 정성과 성의에 감동했습니다. 이엘 퍼블리싱&콘텐츠에서의 제 작품의 출간에 대해 자세하게 말씀 나누고 싶습니다.]
그 순간.
서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일어나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다.
까짓 거 만세라도 부르라면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 얼마나 기다리던 연락이란 말인가.
“됐어! 이제 시간이 문제다! 달려 보자!”
그녀는 즉시 관련 팀 회의를 소집했다.
*****
우하루는 검증을 하기로 한 번역본들을 메일로 받았다.
번역자는 총 세 명.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네온 측에서 그들의 레퍼런스들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해 보내주어서 면면을 알 수 있었다.
“나름 나쁘진 않은 경력이군.”
그 중 한 명은 미국에서 사는 교포분이시다.
이러면 좀 믿을 만도 할 듯.
우하루는 받은 파일들을 꼼꼼하게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 번역.
1화도 채 넘어가기 전에 한숨이 몰려왔다.
‘도대체 이런 표현이...’
미국인이 실제 사용하지 않는 관용구들이 수두룩했다.
이 분은 분명 한국에서 옛날 미드만 열심히 보면서 실력을 쌓으신 듯 보였다.
실망 정도가 아니라 난감한 느낌.
둘째 파일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어색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고 심지어 어떤 곳은 문법도 틀렸다.
비영어권 외국인이 쓴 글이라는 게 티가 너무 났다.
그나마 마지막 교포 분의 번역이 가장 준수한 수준이었다.
세 명 중 지금의 미국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가장 정확히 알고 있고 표현들 또한 어색하지 않은 편.
하지만 문제는 판타지 소설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 떨어졌다.
용어를 나름 성의껏 영어로 옮겼지만 북유럽과 중세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으니 황당한 그만의 신조어를 이곳저곳에 박아뒀다.
세 명의 번역본을 전부 읽어본 우하루는 한숨부터 났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이야.
영어 소설을 한국어로 옮긴 책들 중에도 너무나 어색하고 불성실해서 차마 읽기 힘든 것들을 꽤 발견하곤 한다.
물론 원서를 그 행간의 의미까지, 현지인의 미묘한 감성적 티끌까지 완벽하게 타 언어로 백 프로 옮기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그도 잘 안다.
그럼에도 독자들이 그의 문화권이 지닌 상식과 지식을 바탕으로 최대한 원래의 뜻을 충실히 이해할 수 있게 번역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국의 문화와 생활, 감성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작품에 대해서도 충분한 지식을 갖춘 후 작업을 해야 한다.
‘그래. 애초에 그 모든 조건을 갖춘 번역자를 찾는 건 무리겠지.’
우하루는 즉시 각 검증대상 번역본에 대해 검수와 감수 코멘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문제점을 확실하게 제기하기 위해 잘못된 부분마다 일일이 지적하고 그 이유와 대안도 적었다.
작업을 마친 그는 꽤나 양이 불어난 세 개의 번역본을 ‘검증본’이라는 이름을 파일명에 추가해 메일에 첨부했다.
그리고는 전송 버튼을 클릭하려던 그.
뭔가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자신의 폴더에서 다른 파일 하나를 더 추가한 후 정 팀장에게 전송했다.
*****
며칠째 호텔에 머물고 있는 제임스 한 겟픽 대표.
오늘은 한국에 먼저 들어와 계신 아버지와 저녁식사를 한 후 아내 ‘벨라 라트발라’와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먼저 아내가 샤워를 하는 동안 노트북을 켠 그.
“오, 드디어 왔구나.”
네온의 정한호 팀장으로부터 도착한 메일.
거기에는 자신이 부탁했던 ‘에이데이’ 작가의 검증 완료본 파일들이 첨부돼 있었다.
압축파일을 풀어보니 총 네 개.
“하나는 뭐지?”
일단 자신도 읽어본 번역가들의 파일부터 열었다.
순간 깜짝 놀란 한 대표.
“와우! 이렇게나 자세히!”
빼곡하게 들어찬 수정 사항들.
그는 주의 깊게 하나하나 살펴봤다.
잠시 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놀랍군. 이게 정말 열여섯 살짜리 학생이 검수한 내용이라고?”
그가 미국에서 자랐건 아니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너무나도 꼼꼼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오류를 잡아낸 데 대해 전율마저 느낄 정도.
“내 검수 내용과 비교해 보니 부끄러워지는군.”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세 개의 파일을 모두 확인한 후.
마지막 파일을 열어 보려던 그는 그 때서야 메인 본문의 맨 밑에 정 팀장이 적어놓은 추신을 발견했다.
[네 번째 파일은 ‘에이데이’ 작가님이 직접 영어로 옮긴 번역본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함께 검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진 제임스 한 대표.
“뭐라고? ‘회서군’의 원작자가 직접 영어로 번역을 했다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검수한 내용을 보면 예상을 뛰어넘는 실력자임이 확실했으니까.
그는 재빨리 마지막 파일을 클릭했다.
열린 워드파일은 첫 인상부터 남달랐다.
단어의 배열이나 전체적인 문장의 구성 자체가 벌써 다른 번역본들과 달리 깔끔하고 보기 좋았다.
보기 좋은 음식이 맛도 좋다.
이 말은 사실 글에서도 어느 정도 통용되는 표현이다.
그런데 원작자의 이 번역본.
벌써 먹고 싶을만큼 맛이 좋아 보인다.
한 대표는 에이데이가 직접 번역한 소설을 초집중한 채 읽어 내려갔다.
“이런 미친.”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새어나온 한 마디.
경악한 그의 마음이 참지 못하고 탄성으로 불거져 나온 것.
샤워를 끝내고 욕실에서 흰 타월만 두르고 나오던 그의 부인이 그 소리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
“여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응?”
“안 좋은 일 있는 거야?”
“아, 그게 아니고. 여보, 이리로 와서 이것 좀 봐봐.”
아내 벨라가 한 대표의 옆에 붙어 앉아 함께 17인치 대형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뭐기에 남편이 이러는 걸까.
궁금함과 호기심으로 화면을 응시하는 벨라.
두 사람은 사이좋게 3화 분량의 영어판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를 읽어 내려갔다.
마침내 마우스의 스크롤이 더 이상 내려갈 데를 못 찾게 되었을 때.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 이거 우리 북유럽 중세시대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이네.”
“맞아. 어땠어?”
“시작부터 흥미로운데? 너무 재미있는 걸. 이거 새로 뜨는 베스트셀러야? 고증도 좋고 문장력도 꽤 출중하네. 작가가 누구야?”
그 말에 아내를 바라보는 한 대표다.
“그렇지? 장난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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