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내가 너 때문에 산다니까
“응. 완전 좋아. 근데 파일로 받은 걸 보니까 출판돼 있는 소설은 아닌 거 같은데?”
“맞아. 미국에서는 아직 오픈 안 됐어.”
“역시 그렇구나. 보아하니 분명 우리 아빠 고향인 핀란드나 스웨덴, 덴마크 쪽 출신 미국 작가일 것 같아.”
“그래? 그 정도야? 그 정도로 완벽해?”
벨라가 오히려 남편을 이상하단 듯 쳐다본다.
전후 사정을 알 리가 없으니 남편의 반응이 이상하게 느껴질 만도 하다.
“무슨 질문이 그래? ‘그 정도로 재미있어?’도 아니고 완벽하냐니?”
“아니, 소설 자체는 너무 재미있는 거 나도 인정해. 하지만 자기도 말했듯 북유럽 출신 작가면 아무래도 미국인이 보기에 영어 자체가 좀 어색하다든가 부족하게 느껴지지 않느냐는 거지.”
“전혀!”
단호한 눈빛으로 강하게 부정하는 벨라다.
“아마 나처럼 부모님이 그쪽 출신이겠지. 자기도 나도 부모님이 미국사람 아닌데도 영어 잘 하잖아. 영문학 부전공까지 하고 지역 TV 앵커까지 할 정도로. 솔직히 이 정도면...”
그녀가 아예 마우스를 자기 손에 쥐고서 스크롤을 위아래로 훑는다.
“좀 쓰는 체 하는 웬만한 작가들보다 훨씬 레벨이 높은 걸. 게다가 놀라운 건, 일부 캐릭터 말투에서 자주 영국식 영어가 나오네”
“오, 맞아. 당신도 그걸 느꼈구나!”
“자기도 알지 모르지만 이건 북유럽쪽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 그런 거야. 영어문화권 판타지 작가들이 주로 쓰는 기법이기도 해. 그래, 확실하네. 드디어 트렌디 판타지 작가 중 보물을 찾아냈구나, 자기가!”
반색을 하며 두 손을 마주잡고서 기뻐하는 아내.
제임스 한 대표는 살짝은 멍한, 하지만 얼굴에는 환한 미소를 띤 채 그녀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그것도 놀라울 정도로 괴물 같은.”
*****
송하예고 교무실.
아침 조회를 앞두고 분주하다.
특히 오늘은 더 그런 느낌.
얼마 전 치러진 중간고사 성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유 선생님은 좋으시겠어요! 3반에서 연영과 1등하고 2등이 다 나왔으니.”
“아유, 좋기는요. 제 어깨만 더 무거워지죠.”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오늘따라 허리가 더 꼿꼿해 보이시네요.”
“선생님도 참. 감사합니다.”
겸손하게 답을 하긴 했지만.
뒤를 돌아 교무실을 나서는 유하연 선생의 입가에는 함박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내가 요즘 진짜 그 아이 때문에 산다니까. 호호.’
아무도 안 보면 휘파람이라도 불 것 같은 기분.
그녀가 자신의 반에 도착하자 시끌벅적하던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자, 오늘 중간고사 결과가 나왔다.”
순식간에 웅성웅성.
누군가는 숨죽여 오열하고.
어떤 아이는 한숨을 푹푹 내쉰다.
“자기 성적은 오늘 점심시간 끝난 뒤부터 홈페이지에 로그인하면 볼 수 있으니까 확인해 보도록 하고, 기쁜 소식 알려주려고.”
“...?”
“우리 반에서 연영과 1, 2등이 나왔다.”
담임의 말에 탄성이 터져 나오는 교실.
누구인지 다들 궁금해 한다.
입학 후 첫 성적이라 후보군이 정확히 짐작이 안 가는 상황.
“어차피 전교 10등까지는 다 공개가 되니까 알려줄게. 나중경!”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복도 쪽 벽에 등을 붙이고 있던 그가 깜짝 놀라며 선생님을 바라본다.
‘뭐야. 내가 1등인가?’
반 친구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축하한다. 연영과 2등! 자, 뭐 해, 박수 안 치고!”
약간은 강요받아 치는 듯 아이들이 손바닥을 마주쳤다.
동시에 나중경의 얼굴에는 잠깐 비쳐졌던 기쁨의 미소가 금세 사그라졌다.
‘하아...2등.’
그래도 어딘가.
과 전체에서 두 번째인데.
아버지가 소식 들으시면 분명 기뻐하시겠지.
“자, 1등 궁금하지? 1등은 바로...”
그녀의 시선이 창가 쪽으로 향했다.
순간, 나중경에게 스치는 불길한 느낌.
“축하한다, 우하루! 1학년 첫 시험에서 연영과 1등이다!”
이번에는 담임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급우들이 자발적으로 갈채를 보낸다.
“와! 우하루!”
“뭐냐, 대체. 못 하는 게 뭐야?”
“축하한다!
“하루야, 부러워!”
좀 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다.
‘끄응...’
역시나 불길한 느낌은 틀리지 않는 법.
나중경은 갑자기 또 하나의 패배를 안아들었다.
지난 번 첫 승부에서 깨끗하게 자신이 진 걸 인정하고서 앞으로 더 이상 그럴 일 없을 거라고 우하루에게 선전포고를 했던 그.
이렇게 되니 완전 새 된 느낌이다.
“하루야, 축하해.”
“감사합니다, 선생님.”
“다른 과목들도 다 잘 했지만, 특히 영어하고 독일어, 스토리 창작과 구성의 기초 이론에서 모두 만점을 받았어.”
다시 한 번 ‘우와’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교롭게도 모두 중간고사 첫 날 치렀던 과목들이다.
‘뭐야. 30분도 안 되서 나가더니 그걸 다 100점을 받았다고? 진짜 저 자식 미친 거 아니야?’
나중경의 그런 생각은 사실 다른 아이들도 매한가지이긴 했다.
이 반 인원 중 3분의 1이 영어 조기교육자이고 그 중에는 초등학교 때 외국인학교를 다닌 애들도 있는데, 우하루를 당할 수가 없으니.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중간고사 결과에 기분이 좋은 우하루.
하지만 내심 다른 아이들에게 좀 미안한 느낌도 든다.
영어야 말할 것도 없고 독어와 핀란드어도 지난 삶에서 거의 원어민 수준으로 마스터 했던 언어.
그러니, 냉정하게 말하자면 공정하지 않은 게임일 수도.
‘괜히 치팅같은 기분인데. 좀 미안한 기분이 드네.’
하지만 뭐 세상은 어차피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겠나.
거꾸로 우하루 역시 자신이 겪은 특수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할 필요 없었던 노력을 해온 게 있으니까.
결국 쌤쌤인 셈이다.
그런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던 그 때.
폰으로 문자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의 후보 번역자들에 대한 검증.
그 결과는 처참했다.
현지인들로 구성한 검증단의 검수와 감수가 전부 불합격 판정.
그런데 정 팀장이 추가로 하나 더 보낸 파일에 대해서는 제임스 한 대표와 벨라가 평가한 것과 같은 열렬한 반응이 모두에게서 터져 나왔다.
“믿을 수가 없군.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자신의 소설을 이렇게 완벽하게 영어로 번역을 해낼 수 있다고?”
네온 민 전무는 혀를 미친 듯 내둘렀다.
전혀 상상조차 못했던 상황.
그에 버금가게 충격 받은 사람이 또 있었다.
바로 에이데이 작가를 직접 만났던 정 팀장이다.
‘설마 했는데, 이럴 수가. 이게 도대체 말이 돼?’
그 때 했던 행동이 얼마나 성급하고 미련한 짓이었는지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됐다.
이런 실력을 가진 사람 앞에서 그를 비웃었으니.
에이데이 작가가 보기에 자신이 얼마나 하찮게 보였을까.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 대표님께서 보시기에 이보다 더 좋은 번역은 나올 수 없다, 이거죠?”
민 전무의 물음에 제임스 한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버!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정말 놀랍군요. 제가 이 놀랍단 말을 몇 번째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아내 벨라가 한 이야기 조금 전에 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얼마나 재미가 있었는지 다음 화 빨리 보여 달라고 지금 난리도 아닙니다. 제 아내를 위해서라도 에이데이 작가님이 직접 번역을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하하.”
이미 확신이 선 그.
민 전무의 결론도 다를 바 없었다.
“문제는 에이데이 작가님의 의중이군요.”
“네, 그렇죠. 근데 제 생각엔...”
“?”
“이미 그렇게 하겠다는 결심을 하셨을 것 같은데요.”
“그걸 어떻게 아시죠?”
“자신의 작품을 지극히 사랑하고 아끼는 작가 분들의 공통점은 그 본질이 훼손되는 걸 극도로 증오한다는 겁니다. 번역본을 받아보고 아마 그런 상황이 될 수 있단 걸 느꼈을 게 분명해요.”
“흠...”
“본인이 직접 작업한 번역본을 자진해서 첨부했다는 것만 봐도 의중을 알 수 있는 거 아닐까요?”
“하긴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계약 형식과 마케팅 지원 방안 문제겠군요.”
두 사람은 정 팀장과 문스피아 매니지먼트의 에이데이 담당 팀장인 정한호 부장까지 모아 상세한 논의를 진행했다.
사실 ‘회서군’의 겟픽 연재 문제는 네온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문스피아’와 독점 연재 계약을 맺고 있는 ‘에이데이’ 작가의 타플랫폼 배포의 문제니까.
다만 네온이 이 두 회사의 인수자와 최대 투자자이다보니 야심차게 진출한 미국 시장의 공략을 위해 전략을 마련했을 뿐.
“저희는 국내의 다른 플랫폼과 동일한 정책을 적용할 생각입니다.”
문스피아 김 팀장이 단호하게 의견을 말했다.
사실 그게 늘 고수해온 회사의 원칙이니까.
다른 작가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렇게 되면 에이데이 작가님은 번역이라는 수고까지 해가면서 너무 수익을 적게 가져가게 되는 것 같은데요.”
“번역은 어차피 현지 발행인의 투자분이 아닌가요?”
“그러니까요. 이렇게 되면 우리 회사가 도둑놈이 되는 걸 수도 있으니까요.”
잠시 고민을 하는 제임스 한 대표.
이내 입을 열었다.
“겟픽에서는 ‘회서군’ 영문본 수수료를 50퍼센트만 받겠습니다!”
그 말에 다들 놀란다.
“정말이십니까?”
“네. 더불어 플랫폼 수수료는 정산에서 빼도록 하죠.”
“허허,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 이 프로젝트 자체가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 겟픽의 마케팅 프로모션 차원에서 네온 측과 협의해 결정된 것이니 이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죠. 게다가 번역에 들어갈 뻔한 인력과 노력도 세이브하게 되는 셈이니까요.”
그런 점을 다 감안한다 해도 놀라운 결정이 아닐 수 없다.
“호오. 역시 통 크시네요.”
“마음 같아서는 아예 안 받는 걸로 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작품에 대한 애정이 줄어들 수도 있으니 가장 적정한 선이라고 보여집니다.”
자, 이제 다음 순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문스피아 쪽에서도 그에 대한 응답을 해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허허.”
민 전무의 은근한 압박.
아까와는 현저히 분위기가 달라진 상황이다.
세상에 예외 없는 규칙이란 없는 법.
김 팀장은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한 뒤 밖으로 나갔다 들어왔다.
아마 본사 윗선에 의견을 타진한 모양이다.
“우리도 동참하겠습니다. 겟픽과 동일한 비율로 수수료를 낮춰서 에이데이 작가님께 지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하루는 현재 문스피아에서 연재하는 것보다 더욱 높은 비율의 정산을 받게 되는 셈이다.
결국 겟픽에 독자적으로 올리는 것보다 훨씬 좋은 조건이 되어버린 셈.
역시, 작가의 실력과 작품의 인기는 플랫폼과 출판사를 춤추게 한다.
“현재 가장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고 계시는 분이 바로 에이데이 작가님인데 이 정도도 못 해드리면 사실 말이 안 되죠.”
“근데 아까는 왜 그렇게 냉정한 태도이셨는지.”
“전무님도 아시면서요. 제가 최종결정권자가 아니잖습니까.”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하하.”
민 전무가 유쾌하게 웃는데.
가만 있자.
두 사람이 이제 그에게 시선을 둔다.
정 팀장까지.
“아이고, 이제 제 차례군요.”
“당연하죠, 전무님.”
“물론 저도 동참을 해야죠. 다 생각을 해둔 게 있습니다. 하하.”
그는 네온 측이 준비해둔 지원 방안을 꺼냈다.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의 미국 런칭에 맞춰 대대적인 마케팅 프로모션 비용을 아낌없이 투자하기로 한 것.
그리고 거기에 더불어 놀라운 결정 하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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