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작가 우하루-49화 (40/69)

49화. 무죄의 자격

“두...분이 어떻게...”

“하아, 그게...”

그 때, 각자의 주문번호에 불이 들어왔고.

일단 밥을 가져와서 자리에 앉았다.

원래 만나기로 했던 것처럼 얼떨결에 합석이 이루어진 상황.

“자초지종은 먹고 이야기를 하자.”

“그러자, 하루야.”

모두들 배가 고팠던 모양.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니 다들 식사에 집중했다.

배가 든든해진 후.

옮겨 자리한 백화점 내 커피숍에서 강세영과 서 대표는 우하루에게 사실을 털어놨다.

“하루야. 사실 서 대표님, 우리 이모야.”

“이모...시라고?”

“응.”

우하루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전혀 두 사람 간에 접점이 없었으니까.

강세영의 어머님 성함을 그가 알고 있었을 리도 없었고.

“나도 우 작가님이 세영이 친구란 거 알고 있었어요.”

“아, 그러세요?”

“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구요. 미국 빌햄 본사에 근무하다 이엘로 발령받아 온 게 얼마 안 됐거든요. ‘아임 유어 팬’ 드라마 같이 보다가 그 때서야 세영이하고 언니한테 듣게 된 거죠.”

“그러셨군요.”

“하루야. 혹시라도 오해는 하지 마.”

“오해? 무슨 오해?”

“지금까지 너한테 우리 관계 말 안 한 거 말이야.”

“아.”

“네가 불편해 할까 봐 내가 그러지 말자고 이모한테 부탁한 거니까.”

“맞아요. 사실 나도 세영이 친구라는 사적 관계를 통해서 우 작가님 작품 따 보려던 생각을 잠깐 하긴 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건 좀 아니더라구요.”

적당한 타이밍을 잡아 함께 만나서 공개하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레 들켜 버릴 줄이야.

당황스럽긴 했지만 우하루로서는 특별히 기분 나빠할 이유도 없다.

어차피 이엘을 선택하게 된 건 순전히 제안서의 내용과 조건들, 그리고 서 대표의 열정을 높이 샀던 이유였으니까.

“전 상관없습니다. 세상 좁잖아요.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죠. 어차피 다섯 명만 거치면 대한민국 사람들 다 아는 사이라는데.”

“이해해줘서 고맙다, 우하루.”

“그럼 세영이 너희 어머님의...”

“동생이지. 헤어샵 이모가 둘째고 이 이모가 막내!”

“아하. 그러고 보니 닮으신 것 같아요.”

“호호, 그래요? 그럴 거예요. 난 둘째언니보다 큰언니 더 닮았단 소리 많이 들으며 자랐거든요.”

대화를 하다 보니 좀 어색하다.

강세영과 우하루는 반말을 하고 서 대표는 우하루에게 존대를 쓰니까.

“저기, 이모님. 저한테 존댓말 안 하셔도 돼요.”

“네? 아니...그래도.”

“저도 그렇지만 세영이도 불편할 거예요. 일할 때에는 어떤 식으로 하셔도 좋은데, 이렇게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냥 조카 친구로 대해주시는 게 저도 편할 거 같아요.”

“그, 그럴까. 그럼?”

“네. 훨씬 좋네요.”

“호호호.”

이제야 제대로 분위기가 사는 듯.

세 사람은 그 동안 있었던 일들과 ‘아임 유어 팬’의 책 발간 에피소드와 관련된 대화를 이어갔다.

분위기는 너무도 화기애애했다.

“근데 하루 넌 오늘 여기 어쩐 일로 나왔어? 그것도 혼자?”

“사실, 곧 있으면 우리 엄마 생신이거든.”

“아. 선물 사려고?”

“응. 근데, 백화점에는 딱히 마음에 이거다 하는 게 없네.”

“미리 생각을 해두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꼭 해드리고 싶은 게 있기는 하지.”

“그래? 그럼 그거 사면 되잖아.”

“여기에는 없는 거라서...”

“그럼 어디에서 파는 건데?”

“이 근처에 있기는 한데.”

“도대체 뭔데, 그게?”

“그게...차.”

“차? 먹는 차는 아닐 테고. 설마, 타는 차?”

“응.”

뭐지.

이 통 큼은.

정작 놀란 건 서 대표다.

아무리 자신의 출판사를 통해 책을 낸 작가라지만.

‘방송 공모 대상과 드라마 극본으로 받은 돈으로 자동차까지 장만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닐 텐데. 우리 매출도 아직 정산이 별로 안 된 상황이고.’

강세영은 이모에게 우하루가 웹소설로 큰돈을 벌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친구와의 약속이니까.

그녀 뿐 아니라 윤준환과 오지윤 역시 마찬가지.

그러니 서 대표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더 놀라운 건.

“뭐라고? 외제차? 잠깐, 그 제조사면 안전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두 사람의 입이 쩍 벌어졌다.

중소형 세단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수입 SUV라니.

“엄마가 회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차를 몰고 다니시거든요. 소형차인데, 얼마 전에 사고가 났었어요.”

“저런. 괜찮으셔?”

“다행히 접촉사고 수준이었는데, 손에 타박상하고 목 근육통 정도에서 그치셨어요.”

“하아, 다행이다 정말.”

심하게 박은 것도 아닌데 뒤가 작살나 버렸던 상황.

우지연은 아무 잘못이 없는지라 보험사로부터 차 수리 완료될 때까지 렌트카를 제공받았지만.

정작 크게 충격을 받은 건 우하루였다.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는지 모른다.

“차 자체도 꽤 오래되었고요, 그래서 바꿔드리려는 거죠.”

그런데 그 때.

우하루가 문득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쳐다본다.

“저기, 서 대표님. 아니, 이모님.”

“응?”

“저 좀 도와주실래요?”

“뭐를?”

“차 좀 보러 같이 가주세요. 제가 혼자 들어가니까 아예 상담조차 안 해주더라고요. 보호자 데려오라고. 그렇다고 엄마는 절대 같이 안 가실 거 같고. 이모님께서 같이 가주시면 이야기가 좀 될 거 같은데.”

이런 일이 생기니 우하루는 한 가지 느낀 바가 있었다.

주위에 믿고 상의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걸.

친척과는 왕래가 없고.

그렇다고 선생님하고 이런 일을 상담할 수도 없으니.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고는 전부 또래 친구들.

하지만 강세영의 이모라면 신뢰가 간다.

절친의 친척이라는 걸 떠나서 함께 일하면서 믿음직한 사람이란 걸 느꼈으니까.

게다가 미국에서 오래 지내다 왔으니 차도 잘 알 것 같았고.

강세영이나 이모들 모두 재력이 되는 분들이라 거부감이나 부담을 줄 이유도 없다.

“그거야 내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지.”

천군만마를 얻은 우하루.

그는 두 사람과 함께 어깨를 활짝 펴고 자동차 매장으로 향했다.

*****

순조롭게 순항 중이던 ‘아임 유어 팬’이 복병을 만났다.

‘강소울’ 작가의 ‘무죄의 자격’이 바로 그것.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 국내소설 섹션 1위가 바뀌었다.

두 소설은 전혀 다른 소재와 분위기.

우하루의 소설이 따스하고 여운이 남는 가정적 소재의 소프트 드라마 픽션이라면, ‘무죄의 자격’은 다소 음울한 분위기의 시사적 메시지가 강한 작품이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던 주인공은 일면식도 없는 범죄자에게 소중한 가족을 잃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기까지 당하고.

그가 기댈 곳이라고는 정부와 법.

하지만 그런 기대는 처참히 무너진다.

여기저기에 산재하는 불합리와 부정부패, 정의는 쌈이나 싸먹으라며 쉽게 저버리는 정부기관들, 이때다 하고 덤벼드는 법률 관련 양아치들까지.

심지어 이 나라는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인권에 최선을 다하는 이상한 선의를 보여줌으로써 주인공에게 낙담을 넘어 좌절과 분노를 선물한다.

이 사회가 신봉하는 건 오직 ‘돈’과 ‘기괴하게 꼬여버린 신념’뿐이었으니.

결국 음성적 거래와 알 수 없는 모의에 의해 가해자는 무죄를 판결 받게 되고.

분노한 주인공은 그들을 응징하기 시작한다.

가족을 죽인 가해자는 물론 그 모든 과정에 있는 작고 큰 현장 및 법조계 권력자들까지 모두.

그리고 최종적으로, 가장 고고하고 깨끗해야 함에도 존재 자체가 오물투성이인 비리판사를 납치해 그의 입으로 가해자의 무죄에 비리가 있었음을 고백 받은 후 죽여 버린다.

여느 감성적인 작품이라면 여기에서 ‘나도 악마였다’느니 ‘허무하다’느니 하며 뭔가 대단한 철학적 의미를 전달하려 했겠지만.

강소울은 그 대신 심플한 결론을 택한다.

‘우리를 가해한 자가 무죄였다면 너희들을 응징하는 내게도 무죄의 자격이 있다.’

사회적 메시지와 함께 이 시대 개인이 갖고 있는 심리적 불안과 고민을 투명하게 털어놓는 스토리.

소재 자체는 불편하지만 결론은 너무 시원했다.

이게 독자들의 평가였다.

“와, 결국 이 소설이 맨 앞자리를 차지했네.”

“그러게 말이야. 별다른 홍보나 마케팅도 없이 대단하네. 거기다 무명작가가.”

“재미도 있지만 수준이 워낙 높긴 해. ‘아임 유어 팬’하고는 다른 결이라고나 할까.”

“맞아. 특히 순문 타령하는 이들도 이 작품은 엄청 호평하더라.”

두 소설의 불꽃 튀는 대결에 독자들도 설왕설래.

이슈가 몰리고 업계와 언론도 주목한다.

원래 독점은 재미가 없는 법.

이렇듯 경쟁 구도가 이뤄져야 뭔가 스릴이 넘치고 짜릿한 승부의 묘미가 생기게 마련이니.

최근 베스트셀러 종합 순위에서도 국내소설이 초강세를 이어가고 있는 건 순전히 이 두 소설의 붐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무죄의 자격’이 꼭 우하루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피진구 같은 사이비 칼럼니스트도 입에 닳도록 칭찬하는 걸 보면 말 다했지. 근데 그 인간 이번에 TVNT에서 시작한 ‘언베일’인가 뭔가 하는 예능 프로에 패널로 나오더라?”

“어우, 얼굴도 보기 싫은 무자격 인간이 그런 데를 어떻게 나오는지.”

“피디가 후배라잖아. 압력 넣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속물 없으면 시청률 몇 퍼센트는 더 나올 텐데 말이야.”

독자들의 말대로 이번 순위 뒤바뀜에 자칭 문학비평 컬럼니스트 피진구 씨가 또 입을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무죄의 자격’에 대한 나의 안목은 역시나 탁월했다. 이럴 줄 알았다. 한국의 순문학의 자존심을 지킨 대작가 ‘강소울’ 씨가 큰일을 해냈다. 이제 다시 저질 문학 작품들은 지하로 사라져야 할 일이다. 어서 그녀를 빨리 만나보고 싶을 뿐이다.]

송하예고에서는 나중경이 신이 났다.

최대한 우하루가 없거나 듣지 않을 때에만 떠들어 댔지만.

꼬박꼬박 ‘무죄의 자격’을 들고 다니면서 찬양해대는 걸 잊지 않았다.

그가 정말 저 소설에 감동을 받고 뭔가를 느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으나.

다만 그는 그런 행동들이 우하루와 ‘아임 유어 팬’에 모멸감을 주고 반 아이들의 애정을 깎아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원래 인기란 게 밴드왜건 효과를 받으면서 눈덩이처럼 급격히 불어나는 법.

이 ‘무죄의 자격’이란 소설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저자의 정체가 완전히 베일에 싸여 있기에 사람들의 호기심이 더욱 불어나는 중이다.

피진구를 차치하고서라도 많은 문학평론가들이 이 작품에 대해 호평을 보내고 있었다.

‘아임 유어 팬’에 대해서는 입 꾹 닫고 있던 이들도 대거 동참.

그들은 이 작품에 대해 소위 ‘깊은 사유와 은유, 그리고 정제된 언어’를 통해 집필된 하이레벨의 문학 작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렇듯 문학계와 독자들 사이에서 화제로 떠오르고 있는 작품과 작가.

그예 그렇듯 방송가도 그 흐름을 재빨리 캐치했다.

그 중에 한 곳은 바로 TVNT.

이 방송사 드라마국은 최근 큰 변화를 겪었다.

실적 압박에 무리하게 ‘회서군’의 드라마화를 밀어붙이다가 논란을 빚었던 원지윤 전 국장.

이 사람이 잘리고 주한영 국장이 새로 부임했는데.

그가 이 자리를 맡고서 처음 눈에 들어온 게 바로 ‘무죄의 자격’이다.

“이 소설이 우리가 원하던 바로 그런 작품 아닌가요?”

“작품 자체는 더할 나위 없긴 한데, 조금 주제가 무겁지 않을까요?”

“요즘엔 그런 게 잘 먹히잖아요. 가벼운 건 지상파, 조금 무게감 있는 건 종편이나 케이블. 시청자들의 기대 패턴이 그렇죠.”

“지금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선택지가 없는 게 사실이죠.”

“근데 작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네요. 신인에다 주부라는 정도가 전부예요.”

“그건 데어리 북스에 문의하면 될 겁니다. 어차피 드라마를 하게 되면 알게 될 수밖에 없어요. 참, 이 출판사가 우하루 작가의 ‘아임 유어 팬’을 출간한 이엘 퍼블리싱&콘텐츠 자회사라면서요?”

“네, 맞습니다. 처음에는 아니었는데 몇 년 전에 인수당한 거죠. 주로 순수문학만 다룹니다. 문예지도 계간으로 발행하고 있구요. 이 작품도 거기를 통해 발굴된 거라던데요.”

“흠. 이엘은 좀 휘청대는 거 같더니 다시 원탑으로 올라서겠네요.”

“이 회사 주가가 많이 올랐더군요. 빌햄 하우스가 대주주가 된 이후로 새로 부임 받아 온 CEO가 능력이 좋은가 보더라구요.”

고개를 끄덕이는 주한영 국장.

“오케이. 그럼 출판사에 연락부터 취해보도록 합시다.”

“네, 국장님.”

*****

영화 후반 작업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조셉 버튼 감독이 늦은 밤이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피곤한 몸의 경직된 근육을 따스한 샤워로 풀어낸 그.

자리로 돌아와 몇 가지 정리를 마친 뒤 쉬려던 그 때.

안 읽은 메시지들이 생각나 폰을 열었다.

그 중의 하나.

‘아, 맞다. 캐티가 보내준 문자.’

거기엔 주소가 적혀 있었고 링크를 누르자 ‘겟픽’ 사이트가 열렸다.

꼭 읽어 보라던 케더린 해링턴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하지만...

‘좀 피곤한데...’

망설이던 그가 일단 1화를 클릭해본다.

하도 그녀가 칭찬을 하니까 호기심을 억누르기가 좀 힘들다.

딱 1화만 보자.

뭐, 봐줘서 3화 정도까지는 견딜 수 있겠지.

종이책과 전자책만 보던 그에게는 다소 생소하고 어색한 인터페이스.

하지만 활자를 읽는 거야 거기서 거기니까.

그는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의 1화를 띄웠다.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그.

분명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만 해도 침침하고 졸린 눈이었는데.

어느새 초점은 점점 더 또렷해지기 시작했고.

이내 그의 몸에 각이 잡히기 시작했다.

다음 날 아침.

스튜디오에 나온 캐더린 해링턴이 그를 발견하고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

“어? 감독님? 어디, 아프세요? 눈에 충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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