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언베일, 플리즈!
“네, 다음 주에 녹화하시겠답니다!”
“오케이. 됐어!”
최 피디가 주먹을 불끈 쥐고 기쁨의 포효를 외쳤다.
타잔인 줄.
그가 웃음을 머금은 채 조연출의 어깨를 짚었다.
“신혁아.”
“네, 피디님.”
“지난 번 얼굴 없는 가수 편도 좋았지만 이번하고는 완전 차원이 틀려. 무게감이 완전 다르단 말이야.”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이번 천우신조의 기회를 놓치면 안 돼. 무슨 말인지 알지?”
“네.”
“드라마국에서 연락온 걸 보면 분명 강소울 작가 작품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시그널인 거야.”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거기하고 함께 편성국과 마케팅팀에 존나 압력을 넣어서 홍보 빵빵하게 받아내.”
“알겠습니다, 피디님.”
“오케이. 뛰자!”
“넵!”
‘언베일’의 시청률과 관심도가 다소 정체되는 듯싶던 차에 만난 호재.
최근 그 작가와 작품의 인지도와 화제성을 잘 알고 있는 최 피디는 이를 이용해 어떻게든 자신의 프로를 도약시킬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싶다.
*****
강소울 작가의 방송 출연 소식이 알려지자 소설 애독자들뿐 아니라 문화계 전체가 들썩였다.
많은 순문학 작가들과 평론가들이 환영의 메시지를 표했고.
우하루에 이은 또 한 명의 스타 작가의 전면 등장에 독자들의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언베일’ 프로에 패널로 출연 중인 자칭 문학평론 칼럼니스트 피진구 씨다.
“이런 가슴 떨리는 일이! 데어리북스에 강소울 작가님에 대해 그렇게 문의를 해도 묵묵부답이더니, 이렇게 극적인 공개를 염두에 두고 있었나 보군. 하하하.”
우하루에 대해 무한 깎아내리기에 열중하고 있는 그.
반면 강소울 작가에 대해서는 순문의 별이라며 찬사에 찬사를 거듭 중인데.
오매불망 경외감의 대상을 직접 영접하게 됐으니.
그로서는 흥분될 만도 하겠다.
“드디어 홈런을 칠 기회가 왔어!”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실력과 안목을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찬스가 온 것이다.
그런데 이 소식에 열광하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송하예고 1학년 3반 교실에서 ‘아임 유어 팬’을 죄악시하고 ‘무죄의 자격’을 전도 중인 나중경이라는 학생이다.
“분명 고상하고 지적이며 아름다운 분이실 거야.”
몸까지 부르르 떨며 들떠서 어쩔 줄을 모르는 그.
그렇게나 못마땅해 마지않는 우하루의 작품을 누르고 1위를 차지한, 그 고마운 존재가 바로 강소울이니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르겠다.
“아줌마라던데.”
옆에 앉은 같은 조원의 초치는 말.
나중경의 날카로운 시선의 레이저가 그에게 내리꽂혔다.
“아줌마면 고상하고 지적이고 아름답지 말란 법 있냐?”
“그게 아니고, 네가 무슨 여신 정도를 상상하는 것 같아서.”
“제발 소설을 제대로 읽어 봐. 이런 최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단 자체가 여신이야.”
“근데, 지금까지 나온 그 정보들 다 신빙성은 있는 거야? 여자라느니 결혼했다느니 하는 것도 다 뜬소문 아닌가?”
갑자기 짜증을 내는 나중경.
“바보 같으니라고. 문체가 섬세하고 세련되잖아. 표현 하나하나 다 트렌디하고 고결하며 깊은 맛이 있다고. 그런 분이라면 분명 끊임없이 삶과 세상에 대해 깊은 고민과 관조를 해오다가 세파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뒤 텅 빈 여백을 채워나가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글로 쏟아낸, 그런 여류작가 분일 게 분명해.”
그가 그야말로 열변을 토해낸다.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도대체 어떤 근거로 저런 상상을 하는 걸까.
어이가 없는지 옆에 있던 다른 아이가 헛웃음을 참지 못했다.
“풉. 판타지 소설이냐? 네 그 이야기가 더 웃기다, 하하!”
그러자 곧바로 날아오는 나중경의 따가운 눈초리.
뭔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그 때.
다행히도 선생님이 들어오며 수업이 시작됐다.
“자, 이제 벌써 1학기도 얼마 안 남았지?”
“네.”
“다들 잘 알다시피 이 ‘스토리 창작과 구성의 기초’는 필기와 실기 점수를 합쳐서 성적을 낸다. 기말고사와 별도로 너희들이 같은 조원들과 힘을 합쳐 각본을 창작해서 제출해야 해.”
그 말에 다들 웅성웅성.
사실 필기보다 실기가 더 까다롭다.
그저 열심히 밤새고 공부만 해서 되는 게 아니기에.
“이번에 제출하는 각본의 퀄리티가 중요한 이유는 그걸 갖고 2학기 때 실제 영상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대본이 형편없으면 당연히 최종 결과물도 기대하기가 힘들겠지?”
묘하게 교실 안에 흐르는 긴장감.
조원들 각자의 역할과 기여도도 채점 기준이기에 내부 경쟁도 치열할 수밖에 없지만.
각 조간에는 그야말로 피 튀기는 전쟁 수준일 터.
어차피 결과물은 조 당 하나이고 그걸 갖고 상대평가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단 조별 경쟁이 우선일 수밖에 없다.
“더불어서, 영상연출 전공 1등을 먹은 조의 작품은 내년 송하제에 상영이 될 거니까 명예도 따른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임해주길 바래. 알았지?”
“네, 선생님.”
그 순간, 비장한 각오로 창가 쪽을 바라보는 한 사람.
나중경은 또 한 번의 기회가 왔음에 기뻐했다.
‘지난번에 당한 치욕을 갚아주마. 이번엔 내 앞에 무릎을 꿇어야 될 거야.’
그는 곧장 조원들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얘들아. 내가 하자는 대로만 해. 다 나한테만 맡겨.”
순간 찌푸려지는 같은 조원들.
반면 우하루는 여느 때와 별반 다름없이 조원들과 함께 느긋하고 평안하게 수업을 즐기고 있다.
“우리만큼 실력자들로 꽉 찬 조가 없으니까 내가 든든하다.”
“에이, 우리는 하루 너만 믿고 있는데.”
“무슨 말이야. 나야 당연히 최선을 다하겠지만, 내가 부족한 점이 너희들한테 다 있더라. 우리 힘 합쳐서 멋진 작품 한 번 만들어 보자. 오케이?”
“오케이!”
“그런 의미에서 이따가 내가 간식 쏜다!”
“역시 너밖에 없다, 하하!”
그 어디보다 화기애애한 우하루의 조.
학기 초 그와 함께 하기를 원했었지만 아쉽게 제비뽑기에서 탈락했던 아이들이 오늘도 아쉬운 눈으로 힐끗거린다.
물론 그 중에는 복도 쪽 어느 조의 아이들도 포함돼 있었다.
*****
일주일이 흘러 예능 프로그램 ‘언베일’의 녹화일이 도래했다.
강소울 작가가 정체를 공개한다는 바로 그 편.
아직 촬영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언론은 벌써부터 관련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신비로운 이 신인 베스트셀러 작가에 대한 대중들의 궁금증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일 것이다.
“내용이 사전 유출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사활을 걸고 막아야 해요!”
신비감과 궁금증이 큰 만큼 내용 보안이 생명이다.
어떤 내용이든 유출이 된다면 김이 팍 새고 만다.
그래서 제작진은 패널은 물론 방청객들에게까지 일일이 비밀 유지 서약까지 받아냈다.
약간 지나친 감이 있다싶기도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강소울에 대한 세간의 궁금증은 녹화를 마친 이후에 더욱 달아오를 것이다.
본방까지 일주일의 시간 동안 호기심은 극도로 상승할 테고.
그로 인해 높은 시청률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때마침 TVNT에서 ‘무죄의 자격’의 드라마화 가능성이 높다는 소식까지 흘러나온 터라 타이밍이 더없이 좋다.
사실 이는 드라마국의 계획된 언론 플레이었고.
결국 이런 삼박자가 제대로 맞아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 드라마까지 시청률이 낮게 나오면 나를 포함해서 다들 끝입니다. 사활을 걸고 준비하세요!”
새로 부임한 드라마국 주 국장이 칼을 갈고 있다.
불씨가 꺼져가는 케이블 드라마 제국의 부활 계획에 시동이 걸린 것이고.
그 첫 신호탄이 바로 ‘무죄의 자격’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예능이 히트를 쳐서 판을 깔아줘야 한다.
“주 국장님께서 어인 일로 여기까지. 너무 감격인데요!”
자기가 맡은 프로의 녹화 현장에 드라마 국장이 뜨자 반가워하는 최 피디.
두 사람은 입사 때 사수 부사수 관계였다.
“오랜만에 너도 볼 겸.”
“에이. 강소울 작가님 때문에 오셨으면서. 제가 그걸 모를까 봐요.”
“내가 너무 뻔했나? 하하. 맞아. 그 분 보려고 왔어.”
“정말 ‘무죄의 자격’ 드라마화 확정된 거예요?”
“99퍼센트. 그런데도 아직 작가님 얼굴을 한 번도 못 봤다니까. 그래서 오늘 직접 만나서 인사라도 하려고 왔지.”
“잘 오셨습니다.”
“최 피디, 한 번 멋지게 잘 만들어줘. 여기서 이슈가 돼야 드라마도 탄력을 받을 수 있으니까. 부탁해.”
“여부가 있겠습니까, 국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하.”
이 때, 조연출이 급히 최 피디를 찾아왔다.
“저, 피디님.”
“응? 왜?”
“아직 강소울 작가님께서 도착 안 하셨습니다.”
“그래? 연락 해봤어?”
“네. 차 몰고 오시는 중이라는데요, 많이 막히나 봐요. 녹화 시간에 간당간당할 거 같다고 하시네요.”
“일단 기다려보자고. 만약의 경우 녹화를 조금 늦추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아직은 약간 여유가 있지만 너무 늦어지면 안 된다.
이 스튜디오에서 다른 촬영이 예정되어 있기도 하고, 일번 방청객들의 사정도 있으니까.
잠시 후.
예정된 시간이 거의 다 되자 대기실에 있던 패널들이 모두 세트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맨 마지막으로 나와 가장자리에 앉는 피진구를 향해 누군가 말을 건넨다.
“피 선생님, 오늘 유난히 화색이 도시는 것 같군요.”
“하하, 당연하죠. 제가 너무 경외하는 분이 나오시는 건데. 아마 여러분도 오늘 이후로 저를 좀 많이 다르게 보실 겁니다.”
“제발 좀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허허허.”
비록 그와 방송을 함께 하고 있기는 하지만.
가끔 논리가 하나도 안 맞고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해대는 통에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거기다 내뱉은 말 중에서 거짓으로 탄로 난 것도 몇 번 있었고.
정작 본인은 부끄러운 줄을 알지 못하는데.
오늘따라 신이 나고 흥분된 그의 모습에 다른 패널들은 살짝 불편하다.
그럼에도 오늘 베일을 벗게 되는 강소울 작가에 대한 기대만큼은 모두가 한결같다.
짜릿한 흥분감에 벌써 그들의 얼굴이 점점 더 상기되어 간다.
“오늘이 우리 프로그램 시작한 이후로 시청자와 언론으로부터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는 녹화인 것 같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벌써 기사만 몇 개예요. 커뮤니티도 장난 아니고요.”
“최 피디님이 저렇게 긴장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상황을 모르는 패널들과 달리 최 피디의 속은 타들어간다.
아직 오늘의 주인공이 방송국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
주차장까지 버선발로 마중나간 조연출한테도 영 소식이 없다.
결국.
[녹화 시작 5분만 늦추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스튜디오 내에 고지를 하던 그 때.
무전기가 울렸다.
- 피디님!
“어떻게 됐어?”
- 지금 도착하셨습니다. 대기실 말고 바로 현장 들어가시겠답니다.
“오케이, 알았어. 그럼 바로 녹화장으로 모셔.”
- 알겠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최 피디.
다른 때 같으면 베일을 벗는 주인공과 미리 인사도 하고 덕담도 나누는 등 아이스 브레이킹 시간을 먼저 가졌을 텐데.
오늘은 어쩔 수 없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볼 수는 있지만 본인도 바로 녹화에 들어가겠다고 하니.
‘인사는 나중에 하는 걸로 하고.’
잠시 후.
조연출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지금 베일 뒤에 오셨습니다.”
“그래? 고생했어. 혹시 숨차 하지는 않으시나? 인사는 했고?”
“네. 아드님하고 함께 오신 거 같던데요.”
“흠, 역시나 그랬군. 자, 그럼 녹화 시작하지!”
잠시 후.
큐 사인이 울리고.
메인 패널의 인사말과 오늘의 주인공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다.
얼마간 저마다의 지식 자랑 향연이 지난 후.
“자, 그럼 오늘 주인공을 모셔볼까요?”
“그러죠. 너무 궁금해서 진짜 못 참겠습니다.”
“빨리 신비의 베일을 벗겨 드리자구요!”
“그럼 화제의 작품 ‘아임 유어 팬’을 누르고 국내소설 베스트셀러 1위에 당당히 오른 ‘무죄의 자격’의 작가님을 모시겠습니다. 대한민국 최초 공개임을 시청자 여러분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 하나 둘 셋!”
모두가 함께 손을 뻗으며 외친다.
“강소울 작가님! 언베일, 플리즈!”
그 소리와 함께 중앙 홀 가장자리의 베일이 서서히 벗겨지고.
모두가 그렇게 고대해 마지않던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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