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작가 우하루-53화 (44/69)

< 53화. 거의 팬사인회 수준이군요 >

멍하니 넋 놓고 앉아 있다가 갑자기 지목당한 피진구.

그의 눈은 이미 초점이 끊어진 상태다.

잘난 체 신이 나 까불거리던 아까와는 너무 다른 사람.

혼이 없어 보인다랄까.

“.......”

아무 대답을 듣기 힘들다 싶은 우하루.

그가 더 이상의 기다림을 포기하고 이내 말을 이었다.

“저는 이번에는 순수문학을 써야겠다, 이렇게 결심하고 이 작품을 쓴 게 아닙니다. 그냥 제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목적에 가장 맞는 톤 앤 매너와 문체로 적어 내려가다 보니 이 작품이 나온 거죠. 그런데 전작은 덜 순문틱하다, 이번에는 퍼펙트 순수문학 작품이다. 어떤 분들이 자꾸 그렇게 나누면서 마음대로 비평을 하시더라구요. 그게 과연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 또렷하게 나눌 수 있는 걸까요?”

그의 말이 스튜디오 안에 갑자기 어떤 울림 같은 걸 줬다.

깊이 사유해 보게 하는 언급.

많은 방청객들이 공감을 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흠...”

“논리적이지도 명료하지도 않은 분류를 자의적으로 정의하고 선을 그으면서 그 기준을 자신의 사적인 취향과 공허한 명예욕에 이용하는 분들이 계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더 큰 문제는 그로 인해 죄 없는 작가 분들이 상처를 입고 피해를 본다는 거죠.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모략과 비방을 일삼으며 그걸로 돈벌이를 하시는 행위는 제발 앞으로 삼가 주셨으면 합니다. 이 자리에도 그런 분이 계시는 걸로 알고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우하루가 패널석 맨 끝에 시선을 두면서 직설 저격을 했다.

도둑은 제발이 저린 법인 건가.

피진구의 얼굴이 순간 새파래졌고.

모든 이들의 눈길 역시, 순간 그를 향했다.

“어떤 비평을 할 때에는 객관적이고 투명한 근거와 단단한 논리로 주장을 하시는 게 맞는 일이겠죠. 우월하고 저열한 건 독자 분들께서 판단하실 일이지 한 개인이 강요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하루의 일침에 여기저기서 패널들의 헛기침이 나오고.

반면 방청객들에게서는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사실 그가 지금 누구를 저격하는 건지 대부분 알고 있었다.

혹시 이를 노렸을까.

그렇지 않아도 못마땅했던 누구에 대한 쐐기골의 욕심이었을까.

굳이 이 순간 메인 패널이 타깃을 짚어냈다.

“그렇지 않아도 오매불망 강소울 작가님을 찬양하면서 기다리던 분이 한 분 계십니다. 만나보셔야겠죠? 저기, 피진구 패널님.”

다시 한 번 좌중의 시선이 그를 향했고.

이제는 피가 한 방울도 몸에 남아있지 않은 듯 하얘진 얼굴이 카메라에 포커싱됐다.

“네?”

“그렇게 고대하던 분이 나오셨는데 말씀 한 번 나누셔야죠? 왜 이리 조용하세요? 아까 같았으면 업고라도 다닐 것 같더니만.”

다시 한 번 스튜디오 안에 웃음이 돌았다.

“그...그게...”

당황한 그를 향해 우하루가 손을 들어줬다.

“감동했습니다. 저를 그렇게나 애정해 주시고. 고맙습니다!”

“하아...”

“참, 우하루 작가가 안타까워하더라구요. 쓸 데 없는 데 에너지를 많이 쓰신다고. 자신도 피 패널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고결한 순문 한 번 써보도록 노력해본다고 하니까 한 번 기대해 주시라고 전해달라더군요. 그리고 가끔은 스스로에 대한 비판과 비평이 인생에 더 도움이 되실 거라는 말도 함께요.”

우하루의 말에 여기저기 폭소.

피진구의 얼굴은 마치 빨간 물감이라도 뒤집어쓴 양 검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무래도 119라도 불러야 할 것 같은 위급함이 느껴진다.

결국 메인 패널이 다시 마이크를 이어받았다.

“앞으로도 그럼 이 필명으로 책을 계속 내실 계획이신가요?”

“아마도요. 하지만 자주는 아닐 겁니다.”

“어떤 기준이라도 있으신지요?”

“그건, 제 마음입니다.”

“하하, 그러시겠죠. 잘 알겠습니다!”

한 마디로 꼴리는 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 재치 있는 말에 모두의 웃음이 터졌다.

분위기도 이끌어낼 줄 아는 우하루를 보며, 담당 연출자인 최 피디는 애정 듬뿍 담긴 눈빛을 보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제 방청객 차례.

여기저기서 그야말로 폭풍이 몰아치듯 질문이 쏟아졌다.

우하루는 그 모든 질문에 시종일관 예의바르고 진지하며 명쾌하게 답변을 이어갔다.

보면 볼수록 진국인 그.

한 명을 제외한 패널들은 넋을 놓고 그의 열정과 매력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

‘언베일’ 녹화가 모두 끝난 후.

공개홀은 한 순간에 우하루의 팬사인회장이 되어 버렸다.

방청객들은 모두 ‘무죄의 자격’을 갖고 와서 사인을 요청했고.

어떤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건지 ‘아임 유어 팬’까지 들고서 그의 곁을 찾았다.

그 열기는 정말 뜨거웠다.

“와, 장난 아니네.”

“거의 아이돌 스타급 아닙니까, 이 정도면?”

“음악가나 미술계에도 어린 천재 신인이 탄생하잖아요. 그러면 붐이 불고. 그게 바로 아이돌이죠, 뭐.”

“문학 분야에도 드디어 스타급 대어가 탄생했네요. 실력 괴물이지, 나이 어리지, 외모 최상급이지. 하아, 부럽다. 다 가졌네.”

패널들과 스태프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그 사이, 한 사람이 눈에 띠지 않는다.

“어? 근데, 피진구 컬럼니스트는 어디 갔죠?”

“모르겠네요. 아까부터 안 보이네요. 벌써 집에 갔나.”

“병원에 간 거 아닐까요? 안색이 굉장히 안 좋던데.”

“솔직히, 당분간 고개 들고 다니기 쉽지 않겠죠.”

“내가 보기엔 완전 종친 거 같은데.”

“그러게요, 호호.”

이 시간.

패널들에게 있어서 오늘은 우하루가 스타고 연예인이었다.

그들도 방청객들 사이에 끼어서 사인을 받아내고 인사를 나눴다.

축제 같은 시간이 지나고.

마지막으로 최 피디와 주 국장이 그를 만났다.

“강소울 작가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우하루 작가님’이 맞겠죠?”

“아무렇게나 부르셔도 됩니다.”

“헷갈리지 않게 일 이야기할 때에는 우 작가님으로 통칭해도 될까요?”

“좋습니다.”

“진짜 반갑습니다. 그리고 오늘 너무 잘해주셨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편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할 거 같아요. 대국민적 관심사를 우리 프로를 통해서 풀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평소 깐깐하고 다소 거친 성격인 최정우 피디.

우하루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어 있었다.

큰 신세를 진 셈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주 국장 역시 우하루를 깍듯하게 대했다.

“우 작가님. ‘무죄의 자격’ 드라마화에 대해서는 여전히 긍정적인 거 맞으시죠?”

“네. 좋은 제안 주셔서 인상 깊었습니다.”

“그럼 우리 빠른 시간 내에 한 번 봬야 할 것 같은데요.”

“죄송하지만 제가 학생이라 토요일밖에...”

“전혀 문제될 거 없습니다. 그럼 다음 주 토요일에 첫 미팅 어떠실까요.”

무사히 촬영을 마친 우하루는 TVNT 드라마국과 첫 회의 일정까지 잡은 뒤 서 대표와 함께 방송국을 나섰다.

“대표님 덕분에 모든 일이 다 잘 됐네요. 감사합니다.”

“에이, 뭘 이 정도 가지고. 오늘 아주 시원하고 좋았어. 근데 어떻게 해서 이 프로를 고르게 된 거야?”

“완전 딱 맞는 컨셉이잖아요. 타이밍도 적절하고.”

“하긴, 정말 그래.”

“드라마화 의지를 가장 먼저 밝혀준 방송사이기도 하고요. 자세한 건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지난번에 좀 미안한 일도 있었어요.”

TVNT는 바로 전임 드라마 국장 때 ‘회서군’을 드라마로 만들어보자고 연락을 해왔었다.

그런데 그가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한 것.

“다른 이유는 전혀 없었고?”

“이유라기보다는, 마침 귀찮은 인간도 치워버릴 겸 해서요.”

“혹시, 피진구?”

“네.”

그럴 줄 알았다며 서 대표가 깔깔 웃는다.

“아까 그 인간 얼굴 봤어? 완전 사색이 됐던데.”

“사실 전 그런 잔챙이가 목표는 아니었어요.”

“무슨 뜻이지?”

“그냥 여기 문학계 전체에 퍼져 있는 이상한 기류, 나눠먹기와 갈라치기 분위기에 조그마한 돌 하나 던져서 잔잔한 동심원이라도 일으켜 볼까, 뭐 그래보고 싶었던 욕심도 좀 있었던 거죠.”

“그 정도보다는 파급력이 훨씬 클 거 같은데?”

“모르죠, 뭐.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이번 작품에 필명을 쓴 건 오늘 밝혔듯 제 이름과 기존 작품의 후광 없이 제대로 평가받아보고 싶었던 거였잖아요.”

“그렇지.”

“그걸 솔직하게 독자 분들과 대중에게 털어놨으니 그걸로 대만족입니다. 다른 것들은 뭐, 곁가지들이니까요.”

“호호, 역시 우 작가 쿨해!”

어둠이 깔린 길에는 교통량이 제법 많다.

차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우하루가 이내 뭔가 생각난 듯 입을 다시 열었다.

“참, 대표님 덕분에 어머니 좋은 차 계약해 드렸어요. 감사해요.”

“내가 한 건 매장에 같이 가 준 것밖에 없는데, 뭘.”

“저 같이 아직 미성년자한테는 그게 정말 큰 힘이 되더라구요.”

자신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우하루가 너무 따스하고 좋다.

딸만 있었다면 어떻게든 욕심내 볼 텐데.

그런 괜한 생각을 해보던 서인희 대표.

갑자기 뭐가 생각이 났는지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다.

“왜, 그러세요?”

혹시, 긴장해서 실성이라도?

운전대 잡고 있는 사람이 그러니까 겁이 덜컥 난 우하루가 경계하며 물었다.

“아니, 아까 생각이 나서.”

“무슨 생각이요?”

“나를 우 작가 엄마로 안 거 말이야. 그 조연출 분. 호호.”

“아...”

“하긴, 나 같아도 베스트셀러 1위 작가가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구분 안 될 정도로 어린 친구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거야.”

그러고 보니 우하루도 웃음이 난다.

조연출의 착각 덕분에 피디와 주 국장까지도 서 대표가 우하루를 소개할 때까지 깔끔하게 속아 넘어가 버렸던 것.

오히려 그래서 더 극적인 연출이 이뤄졌다.

아무튼 이번 방송은 많은 뒷이야기와 화제를 낳을 것 같다.

본방 방송 후 많은 이들의 반응이 궁금해지는 그들이다.

*****

한국 웹소설계에서는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의 독주가 고착화된 느낌이다.

기사에서도 심심치 않게 이를 다룰 정도.

하지만 이 소설이 미국에 진출한다고 했을 때 업계나 언론계에서는 막상 큰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네온과 문스피아 담당자들만 기대감에 부풀었을 뿐.

그 이유는 미국 문학 시장의 특성과 영어 번역의 한계 때문이다.

영어권 독자의 취향과 니즈는 한국과 꽤 다르다.

인기 있는 장르도 틀리고 선호하는 전개 방식도 차이가 있다.

게다가 웹소설보다는 종이책과 전자책에 익숙한 마켓 상황까지.

그 때문에 비관적인 예상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역사를 봤을 때 중요한 사건의 발단은 의외로 조그마한 불씨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

‘캐더린 해링턴’이 쏘아올린 작은 공.

이는 마치 잠잠하게 수면 밑을 가르는 어뢰처럼 영어권 독자들의 마음 속을 잠영하기 시작했다.

미국 TNBC 방송국의 간판 이브닝 토크 프로그램인 ‘필먼 쇼’.

게스트로 조셉 버튼 감독과 캐더린 해링턴이 초대됐다.

개봉을 앞둔 ‘오르테가의 비밀’의 홍보 겸 호스트인 매튜 필먼과의 인연 때문에 두 사람이 출연하게 된 것.

그들은 간만의 회합에 반가워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르테가의 비밀!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영화가 세상에 선을 보이는 군요. 한동안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 소설이 드디어 조셉 버튼 감독님에 의해 영상으로 만날 수 있게 됐습니다.”

필먼과 방청객들은 환호했고, 환호로 기대를 표했다.

세 사람은 이 작품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고, 중간 중간 화제의 영상 클립과 메이킹 필름 몇 장면이 나갔다.

조셉 버튼의 깊이 있는 목소리와 캐더린 해링턴의 과즙같이 맑고 생생한 생기가 스튜디오를 한가득 채웠다.

그들에게 할애된 시간이 한 반쯤 흘렀을까.

작품 이외의 가벼운 주제들이 화제에 오르기 시작했다.

“참, 두 분이 요즘 같이 빠져 계신 게 있다고요?”

당연히 작가와의 사전 인터뷰에서 오고간 내용들일 터.

“네. 메신저나 DM으로 쉴 새 없이 그에 관한 대화를 하고 있네요. 그 덕분에 캐더린 양하고도 더 친해졌지 뭡니까. 하하.”

“오, 정말요? 세대 차이를 극복하고 두 분을 연결시켜 준 그게 뭔지 자못 궁금해지는데요? 그게 뭘까요?”

“바로 웹소설입니다.”

캐더린 해링턴이 해밝게 웃으며 수줍은 붉은 볼로 대답했다.

급격히 텐션이 오르는 그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체감된다.

“웹소설!”

“네.”

“전자책 말씀인가요?”

“아닙니다. 웹에 올라가 있어서 무료로 보거나 유료 분량은 돈 내고 한 화씩 보는 겁니다.”

“호, 그런 게 있나요?”

“네. 특히 감독님과 제가 깊이 빠져 있는 소설이 있어요.”

“그래요? 뭔지 알 수 있을까요? 너무 궁금한데요!”

“바로 이겁니다!”

그녀가 무릎 위에 놓고 있던 태블릿을 호스트에게 보여줬다.

매튜 필먼이 화면을 유심히 응시.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

“네! 이 작품이 바로 조셉 감독님과 제가 홀딱 반해 있는 소설이에요!”

드디어 우하루의 작품이 미국 메인 공중파를 통해 처음 수억 명의 영어권 시청자들을 향해 전파를 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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