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의사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
“처음 뵙겠습니다. 에이데이입니다.”
맑은 눈으로 또렷한 발음의 영어를 내뱉는 한국인.
예상하던 것보다 너무 어려서 놀랐고, 케이팝 아이돌 뺨칠 정도로 잘 생겨서 또 놀랐고, 비록 단 한 마디의 인사뿐이었지만 그럼에도 거기에서 풍기는 원어민의 억양과 분위기에서 또 놀란 조셉 버튼과 캐더린 해링턴.
두 사람은 경이로운 감정으로 우하루를 대하며 악수를 나눴다.
보통 이런 자리에서는 대스타를 만난 상대방이 놀라며 어쩔 줄을 몰라 하거나 기뻐하면서 방방 뛰는 게 일반적인데.
하지만 이 신비로운 동양의 소년은 따스하고 미려한 미소를 장착한 채 그저 보드라운 손길을 내밀 뿐이었다.
“만나게 되서 너무 기쁩니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우리 둘 모두 작가님의 광팬이에요.”
“저도 전해 들었습니다. 방송에서 제 작품 언급하시면서 거듭 칭찬해주시는 장면도 봤고요.”
“정말요?”
“네. 너무 기쁘고 고마웠습니다.”
“무슨 말씀을요.”
서로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우하루와 캐더린 해링턴은 서로가 비슷한 또래라는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왠지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오른다.
‘케이팝 그룹에만 왕자님이 있는 건 아니었어. 여기 이 사람은 정말, 하아...’
이 짧은 순간, 아무래도 캐더린의 마음에 무언가가 와 닿은 모양.
설레는 파도가 그녀의 심장을 적신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청량한 어떤...
“제 작품을 좋아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세계 최고의 감독님과 배우님께서 ‘회서군’에 애정을 듬뿍 주시니 솔직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그걸 알게 된 날엔 잠도 못 이뤘습니다.”
“저희야 말로 잠을 못 잤습니다. 한꺼번에 막 올려주시는 거, 그날그날 다 읽느라고 말이죠. 하하하.”
조셉 버튼 감독의 재치 있는 농담에 함께 폭소.
분위기 좋고.
일순간에 화기애애해진 세 사람은 가볍고 일상적인 대화 위주로 아이스 브레이킹 타임을 가진 후 룸서비스로 식사를 시작했다.
메뉴는 한식.
‘에이데이’ 작가의 부담도 덜 겸 그들도 먹어보고 싶어 선택했다고 했다.
우하루는 하나하나 나오는 음식들에 대해 설명을 해줬다.
입맛에 맞는지 두 사람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열심히 흡입.
식사가 끝난 후 티타임에 우하루는 여느 때처럼 아이스티 피치를 요청했다.
그러자.
“저도 작가님하고 같은 걸로 주세요.”
캐더린 해링턴이 우하루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동일한 메뉴를 주문했고.
그녀의 입에는 꽃 같은 미소가 한가득 달려 떨어질 줄 몰랐다.
차가 나오고, 이제 본격적으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테이블에 올려졌다.
“작가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정말 놀랐습니다. 그 방대하면서도 빈틈없는 세계관, 한 명 한 명 납득이 가고 매력이 넘치는 인물들, 서로 얽히고설킨 갈등과 복선, 부드러우면서도 예상이 안 되는 이야기의 전개. 그리고 그 묘한 분위기의 문장과 표현들. 제가 경험해본 소설들 중 이런 기분을 느낀 건 단 한 번 있었을 뿐인데.”
그가 의미하는 건 ‘오르테가의 비밀’, 즉 네이선 라이네의 작품.
우하루도 짐작이 되는 바였다.
“정말 한 화 한 화가 숨 막히더군요. 거기다가 다음 편을 보지 않으면 못 견디게 만드는 그 놀라운 절단신공의 마법까지. 연재소설을 거의 보지 않던 저로서는 참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하하.”
조셉 버튼 감독의 찬사가 이어진다.
캐더린 해링턴 역시 다를 바 없었다.
“작가님 덕분에 제가 요즘 사는 의미를 찾았지 뭐예요.”
“설마 그런 정도까지...”
“아녜요, 정말이에요. 완전 어려서부터 저는 배우로서의 삶을 살아왔어요. 다른 곳은 돌아볼 시간도 여력도 없었죠. 근데 최근에 여러모로 번아웃이 오는 느낌이었어요. 힘도 빠지고 무기력하고. 뭔가 신나는 일도 없더라구요.”
그러던 그녀가 빠져든 게 바로 케이팝.
새로운 세상이었다.
늘 들어오던 비트와 랩 중심의 현대 미국 팝과는 다른.
흥겨운 춤과 멜로디, 그리고 멋진 아이돌들.
“그런데 어느 날 더 재미있고 멋진 걸 발견했지 뭐예요. 그게 바로 작가님의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 이 작품이에요. 읽다보면 제가 그 세계로 온전히 날아가 있는 걸 느껴요. 에이데이 작가님이 요즘 제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 주고 있는 거예요.”
우하루는 두 사람의 말에 감동받았다.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완벽한 진심이었다.
그걸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저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이 절대 아니었다.
서로 이유는 조금 달랐지만.
세 사람은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로 이미 공통된 하나의 세계로 이어진 느낌이다.
‘이게 소설의 힘이구나...’
이전 삶에서도 미처 깨닫지 못한 걸 지금 느끼는 우하루다.
오늘 이 자리에 안 나왔으면 어쩔 뻔.
차가 준비되고 테이블에 놓이는 동안에도 대화는 멈춤이 없었다.
한참동안 이야기를 이어가던 중.
우하루가 말을 할 때마다 놀라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조셉 버튼 감독이 잠시 주저하더니 궁금한 걸 결국 묻는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네, 물론이에요.”
“작가님께서는 어떻게 이런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실 수 있는 건지. 솔직히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요. 혹시 영어권에서 어릴 적을 보내신 건가요?”
우하루가 쑥스럽다는 표정을 살짝 지으며 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제가 부모님 유전자 덕분인지 언어에 좀 소질이 남다른 것 같구요, 또 영어를 좋아해서 TV나 영화를 보며 공부를 많이 했더니 좀 괜찮은 실력이 됐네요.”
“괜찮은 실력이라뇨. 솔직히 쓰는 어휘나 문장, 표현력이 저보다도 뛰어난 것 같은데요. 이렇게 말하면 뭐하지만 여기 캐티보다도 더...”
아차차.
너무 나갔나 보다.
조셉 버튼 감독이 입을 막고서 캐더린의 눈치를 본다.
“괜찮아요, 감독님. 저도 그걸 느끼고 있어요. 호호.”
다행, 다행.
그들의 궁금증은 풀렸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놀라움은 컸다.
이 정도면 작가로서뿐 아니라 언어로서도 천재 아닌가.
즐겁고 행복한 만남의 시간.
하지만 모두가 바쁜 사람들이다.
아쉽지만 마냥 길게 시간을 낼 수는 없으니.
조셉 버튼이 미소를 머금은 채로 우하루에게 물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회서군’이 너무 마음에 듭니다. 사실 제가 지향하는 세계관이기도 하고요, 스토리의 매력은 더 말할 나위 없고 말이죠. 이 작품은 그냥 소설로서만 머물러 있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하루는 그의 서론을 듣고서 무슨 말을 할지 추측이 됐다.
“서사의 장대한 스케일로 볼 때 영화보다는 드라마로 다시 태어난다면 전 세계의 시청자들에게 큰 선물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시선이 뜨거웠다.
“지금 그 말씀은...”
“네. 영상화에 대한 의견을 여쭤 보는 겁니다. 다 오픈하자면, 저 개인의 의견이기도 하지만 이미 몇 곳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몇 곳이나요?”
“네. 그 중에는 NABC도 있고 넷플럭스도 있습니다.”
미국 최고의 지상파 방송사인 NABC에다 넷플럭스까지.
도대체 작가 본인이 모르는 사이 미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거냐.
“여기에 계셔서 체감이 잘 안 되시겠지만, 지금 영어권에서 작가님 작품의 인기가 대단합니다. 그 불길이 더욱 타오를 게 분명하고요.”
“맞아요. 특히 젊은 층에서 ‘회서군’ 때문에 케이노블 바람까지 불기 시작하고 있어요.”
“네. 캐더린 말이 사실입니다.”
문스피아를 통해서 듣고 인터넷상에서 보기는 했지만.
이야기를 듣고 보니 생각하던 것보다 조금 더 인기가 있는 것 같다.
“제가 알기로는 한국에서 웹툰으로도 제작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정보를 접하고서, 에이데이 작가님께서 OSMU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으시겠구나, 짐작했더랬죠.”
많은 걸 알고 있군.
우하루는 조셉 버튼 감독의 너무도 빠른 이 제안이 그냥 자신을 떠보려는 것이 아님을 느꼈다.
그의 눈빛이나 말투, 분위기도 그랬지만.
막내 딸 벌 되는 세계적 대스타 배우인 캐더린을 옆에 두고서 허언이나 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더욱이 ‘회서군’에 대한 그녀의 애정을 알면서 말이다.
게다가 혹시 모르지 않나.
어쩌면 드라마에 그녀가 직접 출연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작가님 의견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잠시 고민을 하는 듯 지그시 한 곳을 응시하던 우하루.
이내 시선을 들어 조셉 버튼의 눈과 마주쳤다.
“감독님과 같은 세계적 명장께서 작품을 드라마로 만들어주신다는데 그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저야말로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마음 졸이던 조셉 버튼 감독.
그의 대답에 호탕한 웃음을 내뱉으며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럼, 의사는 확실하신 걸로 알고 있어도...”
“되십니다.”
“하아, 이거 너무 설레고 흥분되는 군요.”
반가움은 옆에 앉아 있는 캐더린 해링턴이 더한 듯보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작품을 드라마로도 볼 수 있게 되다니.
물론, 작품뿐만이 아니고...
“고마워요, 작가님. 제가 기다리던 응답을 해주셔서요!”
그녀의 눈빛이 우하루와 마주 닿았다.
“혹시, 미국에 와 보고 싶은 생각 없으세요? 제가 초대할게요.”
갑작스런 그녀의 제안에 살짝 당황했지만.
기분은 좋다.
“기회가 될 때 꼭 가보고 싶네요.”
“기다릴게요.”
둘 사이에 환한 웃음이 오고 갔다.
그 덕분인지 스위트룸이 밀려드는 햇빛과 함께 한껏 청초해졌다.
*****
그야말로 철통 보안 속에 극비리에 진행된 세 사람의 만남.
조셉 버튼 감독 측 최소한의 인원 이외에는 그 누구도 이번 일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제작사와 한국 측 행사 담당 관계자들마저.
우하루는 다음 날 삼성동에서 열린 ‘오르테가의 비밀’ 프리미어에 초대를 받았고.
역시나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한껏 가린 채 그 현장에 참석했다.
무대 위에서 환하게 웃으며 한국 팬들을 만나는 조셉 버튼과 캐더린 해링턴.
그들은 이 유작을 남기고 떠난 ‘네이선 라이네’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천재였던 그 분이 계셨었기에 이 작품이 탄생했고, 그렇기에 지금 우리와 이 영화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무한한 애정과 사랑을, 그리고 이 영화를 바칩니다!”
그 장면을 직접 눈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우하루.
이전 삶의 존재를 저렇게 기억해주는 사람들과 그 때 남긴 정신적 유산이 영상 작품이 되어 이렇게 세상에 뿌려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는 심정은 오묘하면서도 뭉클하고 감동적이었다.
‘지금의 나 우하루도 그 때가 있기에 가능한 거겠지.’
그 고마운 얼굴들을 향해 열렬한 박수를 보낸 그는 행사 종료 직전에 조용히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날.
“하루야! 너 어제 저녁에 삼성동 갔었어?”
등굣길에 만난 윤준환이 등을 툭 치며 묻는다.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디비팼지’에 네 사진 떴던데? 그것 때문에 커뮤니티에서 온통 난리더라.”
미친.
어떻게 알아보고...
근데, 가만 있자.
우하루는 좀 어이가 없다.
“내가 뭐라고 거기 기사에 내 사진이 실리냐? 거긴 유명 연예인들 뒤 파서 디비 패는 데 아니야?”
“패는 건 잘 모르겠고, 파는 건 맞긴 하지. 어쨌든 너 이제 그 급이잖아. 몰랐어?”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우리 나이에 두 개 소설을 한꺼번에 초대형 베스트셀러 1위 히트시키고 예능 프로에 나가서 온 국민한테 눈도장 찍은 네가 유명인이 아니면 누가 유명인이겠냐. 세영이 한 명도 버거운데 너까지. 일반인인 나는 정말 버겁다 버거워.”
“하아...”
“아, 갑자기 버거 먹고 싶네. 이따 쏴라. 나 먼저 간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조잘댄 후 자기 갈길 가는 윤준환.
우하루가 재빨리 기사를 확인해보니 정말 자신의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 올라와 있었다.
무대를 향해 집중하다가 잠시 숨을 고르려 마스크를 살짝 내렸던 그 타이밍.
그 모습이 잡힌 거였다.
‘뭐야. 노리고 있었던 거야?’
근데.
‘흠. 꽤 멋있어 보이긴 하네. 꼭 연예인처럼 나오긴 했군.’
스스로도 나름 괜찮아 보이긴 한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어이없어지는 그.
‘설마 연예인병? 에라, 이 미친놈아. 정신 차려!’
앞으로는 어디 갈 때에는 조금 더 철저히 가리고 가야겠다고 다짐을 하게 된다.
그래도 엊그제 호텔에서 찍히지 않은 게 다행이다.
만약 그랬다면 또 무슨 뒷이야기들이 오고갔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교실로 들어가려는데.
복도에서 서성거리던 일단의 남녀 학생들이 그의 앞에 섰다.
본 적 있는 얼굴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우하루!”
역시나 얼굴을 알고 있다.
학교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으니, 뭐 당연한 일이긴 하다만.
“네?”
“우리 3학년 선배들인데.”
“아 네. 안녕하세요. 근데 저한테 무슨 용건이라도...”
살짝 흐르는 긴장감.
교실 안에 있던 몇몇의 아이들도 무슨 일인가 하고 문 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