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작가 우하루-56화 (47/69)

< 56화. 그건 좀 땡기는데 >

분위기만 봐서는 꼭 못마땅한 후배 혼내러 온 꼰대 선배들 같다.

그런데 맨 앞에서 우하루의 이름을 불렀던 한 사람.

그가 갑자기 헤벌쭉 웃는다.

“사실은 우리가 부탁을 좀 할 게 있어서 왔어.”

“부탁이요?”

“응.”

안면도 제대로 안 튼 사이에 무슨 부탁?

매너가 좀 아니란 생각을 하는 와중.

“뭐냐 하면 그게. 우리가 졸업작...”

그 때.

갑자기 반대쪽에서 다른 몇 명의 일단이 나타났다.

역시나 3학년 선배들인 듯.

“야, 이길준. 너희 이게 무슨 짓이야. 우리가 먼저 말을 꺼냈는데, 새치기? 이러면 안 돼지!”

도대체 이건 무슨...

“먼저 약속하는 조가 장땡이지. 이런 거에 순서가 어디 있어?”

“그래도 우리 같이 수준 높은 예술학교에서 매너와 상식이란 걸 무시하면 쓰나. 비켜라, 어서. 우하루 작가는 우리 조와 함께 할 테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 그렇게는 못하지.”

우하루뿐 아니라 그 장면을 제 3자 입장에서 지켜보고 있는 반 급우들도 어안이 벙벙하다.

지금 한 사람을 놓고 양쪽에서 선배들이 뭐하자는 건지.

“너희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다행히 구세주가 나타났다.

담임 유하연 선생.

서로 으르렁대던 3학년 연기전공 선배들이 다급히 다소곳해지며 한쪽으로 물러섰다.

“설마 너희들 졸업작품 제작 때문에 이러는 거야?”

“하아, 네. 선생님.”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면식도 없는 후배한테 찾아와서 이게 무슨 행동이지?”

“우리 학교에서 우하루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하루가 너희들을 모르잖아. 그러니 이건 예의가 아니지.”

“그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졸업작품은 저희들한테 사활이 걸린 문제라서요.”

송하예고 3학년 연영과 연기전공 학생들의 졸업작품.

그들의 말대로 굉장히 중요한 이벤트다.

최종 학기 성적이 판가름되는 결정적 요소인데다, 연영과 대학교에 진학을 하든 곧바로 현역에 데뷔를 하든 유리한 포트폴리오를 점할 수 있는 기회.

그 관건은 좋은 극본을 만나는 거다.

연기야 자신들의 실력을 발휘하면 되니 본인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지만, 작품을 잘못 만나면 연기력을 발휘해도 제대로 평가받기 힘든 게 사실.

그래서 기를 쓰고 좋은 작가를 찾는 것이다.

기존 작품이나 소설이 아닌, 순수한 창작물로만 제한을 해두는 학교 방침 때문에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으로 아무 관계없는 외부 작가들을 섭외하는 건 불가능한 현실.

그래서 대부분 같은 3학년 문창과나 영상연출전공자들과 협업한 후 서로의 졸업 점수로 인정을 받는 형식을 취하는데.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우하루 이상으로 검증되고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친구는 없습니다.”

그건...그렇지만.

“그렇더라도, 하루는 지금 1학년이야. 3학년 졸업작품을 후배학년생하고 함께 한 전례는 없어.”

그런데 그 때.

유하연 선생의 말에 토를 다는 한 아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있던데요?”

“뭐?”

“이연하 선배님 케이스를 확인했어요. 선배님 2학년 때 당시 3학년 연기전공 선배님들과 작품 같이 해서 1년 앞서서 졸업작품 점수 선인정 받으신 거 알아냈습니다.”

“하아, 그...그건.”

생각해보니 이 학생의 말이 맞다.

외부 초빙 심사위원으로 위촉돼 우하루의 입시 실기 시험을 채점했던 이연하 작가.

현재 추리, 미스터리, 스릴러 분야에서 한국 1인자로 인정받는 프로 작가 그녀.

이 학교에 다닐 때 역시나 특출나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그녀의 선례를 3학년 아이들이 찾아낸 것.

“일단 알았으니까 오늘은 돌아가 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실례 많았습니다, 선생님.”

꼬랑지를 말고 돌아가려던 그들.

그런데 아차, 하며 몸을 돌린다.

“조회 시간 남았으니까 사진 좀 찍고 가겠습니다. 헤헤.”

어이가 없는 유하연.

할 수 없이 허락해줬고.

그들은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와 표정으로 해맑게 우하루와 셀카를 찍으신 후 고이 돌아가셨다.

*****

“원칙적으로 하루가 응하면 가능은 하죠. 점수도 미리 인정이 되니 손해 볼 것도 없고요.”

송하예고 도민숙 교감의 답변이다.

유하연 선생이 3학년생들의 의견에 대해 자문을 구한 것.

“이연하 작가 케이스는 조기졸업과 연계되어서 그렇게 된 것 아닌가요?”

“그렇긴 한데, 뭐가 먼저인가를 따지는 건 좀 애매해요. 마치 닭하고 계란 관계처럼 말이죠.”

“결국 우하루도 조기졸업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인 거네요.”

“당연하죠. 솔직히 그 아이는 그럴 만 하잖아요. 누구 하나 경쟁할 아이가 없을 정도로 전공 실력도 탁월하고 벌써 포트폴리오가 탄탄한데다가 학교 성적까지 탑이니까요.”

구구절절 옳은 말인 데다 누구보다 담임인 자신이 그건 너무 절실하게 느끼고 있으니.

유하연 선생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조기졸업 평가위원회가 열려 심사를 하겠지만, 하루 같은 경우는 무난하지 않겠어요? 다만...”

“?”

“두 가지 길이 있죠. 연하처럼 곧바로 대학 진학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중간에 1년간 미국 예고에 교환학생을 다녀올 수도 있는 거구요.”

“교환학생이요?”

“네. 지난해부터 뉴욕에 있는 레이튼 예술고등학교와 자매결연 맺고 MOU를 체결한 건 알고 계시죠?”

“아, 네.”

“그 프로그램 1호가 될 수 있는 거죠. 사실 이전에도 그런 게 있었다면 연하도 둘 중 고민을 했을 것 같은데.”

3학년 아이들의 뜻하지 않은 행동.

그것이 유하연 선생에게 근본적 고뇌를 가져다줬다.

우하루에 대한.

사실 입학시험 때부터 그 아이의 재능을 알아봤던 그녀였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수재도 아니고 천재 중의 천재일 줄이야. 솔직히 작가로서는 내가 배워야 할 처지니.’

비록 아직 반년도 안 됐지만.

우하루의 실력과 잠재력, 게다가 성장속도는 이 학교 안에서 너무 튀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 뭔가 그에 맞는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그저 추상적이었을 뿐 구체적인 방안은 떠올리지 않았었는데.

‘나는 선생이고 걔는 학생이야. 선생은 학생과 빨리 헤어져야 한다 해서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 오직 그 아이의 미래를 위한 생각만 하자.’

제자에게 있어 무의미할 수 있는 시간은 최소화시켜 주는 게 스승의 옳은 자세라는 생각.

유하연은 우하루와 터놓고 의논을 해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

TVNT는 ‘무죄의 자격’ 제작과 편성을 신속하게 확정했다.

마치 다른 방송사에 빼앗길 새라.

첫 작품을 단막극으로 데뷔했던 우하루.

드라마로서 그의 두 번째 작품은 미니시리즈로 제작되는 것이다.

좀 특이한 점이 있다면, 크레딧에 들어가는 원작자의 이름이 ‘우하루’가 아니라 ‘강소울’이라는 것.

이미 온 국민이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별 문제는 없었다.

“잘 하면 본명과 필명이 작품의 특징을 나타내는 일종의 ‘브랜드’가 되겠군.”

“오. 그거 말 되네. 한 제조사에서 여러 브랜드를 운용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말이지?”

“맞아. 어쩌면 우하루 작가도 애초에 그걸 염두에 둔 게 아니었을까? 비록 같은 작가란 걸 알고 있더라도 그 각각의 이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느낌이 다르니까 그걸 마케팅적으로 활용하는 거지.”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비즈니스 감각도 탁월한 거네.”

독자들과 드라마 애호가들은 이런 추측도 이어갔다.

그리고 그게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는 작가 본인만 아는 일일 터.

방송계와 대중들의 또 하나의 관심사는 각색에 있었다.

이번에도 우하루가 직접 대본 작업을 할 것인지 말이다.

그렇게 되면 원작은 강소울, 각본은 우하루가 될 것인데...

“이번에는 다른 분께서 극본을 쓰셨으면 합니다.”

그는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쓰고 싶다.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화되는 모든 작품의 각색을 일일이 다 맡아서 할 수는 없는 일.

시간도 시간이지만 각색은 소설과는 분명 또 다른 영역이다.

분명 스스로도 잘 해낼 수 있지만 그쪽 분야에 더 특화된 머리에서 나오는 또 다른 창의력에게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모든 걸 다 하겠다는 건 욕심일 뿐.

뭐든지 지나치면 탐욕이다.

우하루는 절제할 줄도 알았다.

“혹시, 작가님의 작품 스타일에 맞는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까요?”

잠시 고민을 하던 우하루.

이내 답했다.

“이연하 작가님, 아시죠?”

“그럼요. 잘 알죠.”

“그 분께 한 번 맡겨 보면 어떨까요?”

“베테랑이시라 더할 나위가 없긴 한데, 미스터리 서스펜스 분야 쪽이시라...”

“그러니까 더 좋죠.”

“아,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무죄의 자격’은 은근히 분위기가 무겁고 암울하다.

몸서리치게 끔찍한 장면이 나오거나 스릴러틱 하지는 않지만 미스터리와는 궤를 같이 하기에.

바로 그녀가 떠올랐던 것.

이번 작품이 영상화될 때 그런 특유의 느낌이 잘 표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데, 이연하 작가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

학교 선배라거나 담임과 함께 따로 한 번 만났던 인연 때문에 추천한 건 절대 아니다.

“바로 타진해보겠습니다.”

이야기가 나온 지 불과 3일 만에 답을 받았다는 연락이 왔다.

- 이연하 작가님께서 수락하셨습니다.

“잘 됐네요.”

며칠 후 두 사람은 TVNT 방송국에서 재회했다.

제작사는 ‘마일스톤 스토리’로 결정됐고, 연출은 신주현 감독이 맡기로 했다.

“원작의 탁월한 감각과 취지에다 재미까지 모두 그대로 살릴 수 있도록 저희 두 사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미팅을 마치고 나온 우하루와 이연하는 학교 앞으로 이동해서 다른 사람과 합류했다.

담임 유하연.

그녀는 마침 세 사람이 모인 자리라 상의하려던 이야기를 꺼냈다.

우하루의 조기졸업 또는 교환학생 건에 관한.

“저는 대찬성이에요.”

우하루보다 이연하가 먼저 반응했다.

“물론 학교라는 게 친구도 사귀고 공부 이외의 다른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배우는 장인 것은 맞아요. 하지만 따박따박 정해진 코스를 모두 거쳐야 한다는 법은 없거든요. 어떤 친구가 그 과정을 스킵해도 좋다면 굳이 감성적 이유를 들어 거기에 잡아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본인에게도 사회에게도 낭비니까요.”

하지만 정작 본인은 신중한 반응이다.

“제 장래가 달린 문제니까 깊이 생각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만, 졸업반 선배님들의 작품 요청 건은 받아드리려고요.”

“정말? 괜찮겠어?”

“단편으로 써 놓은 작품들이 꽤 있어요. 마침 그 중에서 영상으로 한 번 테스트 해보고 싶었던 소설들이 있는데 그걸 드리면 될 거 같아요.”

학교 다니면서 성적은 1등에다 베스트셀러까지 두 권을 냈는데.

거기다 집필을 해놓은 단편소설들이 또 꽤나 있다고.

도대체 그게 가능이나 한 건지.

‘진짜 이 아이는 글을 쓰려고 태어났구나.’

두 사람은 놀라움과 경이감을 다시 한 번 느낀다.

만약 우하루가 웹소설까지, 그것도 미국의 영문판까지 연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아마 그들은 잠시 넋이 나갈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다행인 건, 네가 선배들 조에 참여하면 내후년에 영상연출 졸업작품 점수는 인정이 된다니까 걱정하지 말고.”

어떤 보상을 바라고 3학년 선배들에게 작품을 주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해준다면야 나쁠 건 없다.

있는 소설 제공하고 점수는 미리 따고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는 우하루.

둘 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만 왠지 한 쪽에 더 마음이 간다.

‘미국 교환학생은 좀 땡기는데. 1년이라면 부담도 적고.’

이전 삶에서 미국의 고교생활이야 지겹도록 했지만.

정작 송하예고와 결연을 맺었다는 뉴욕의 레이튼 고교와 같이 명문 예술고는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그런 교육기관에서의 학창생활을 꽤나 동경했었다.

*****

다음날.

송하예고 3학년 복도에서는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뭐야. 제비뽑기에 참여하는 조가 이렇게 많아?”

“많은 정도가 아니라 전부 아닌가?”

와글와글.

전부 연영과 연기전공 3학년생들.

그들은 꽤 부피가 있어 보이는 복주머니 하나를 앞에 놓고 모여 있었다.

“자, 이 안에는 흰 색 돌이 딱 하나 있다. 그걸 뽑는 조가 우하루 작품을 받는 거야. 이의 있어?”

“없어!”

그들은 상기된 채 한 조씩 앞으로 나와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다른 학생들.

“우리 학교 역사상 이런 적은 없었을 거야.”

“우리 학교 역사상 우하루 같은 아이가 없었으니까.”

“명언이네.”

그 사이, 누군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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