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뭔가 터지고 있긴 한가보네 >
“하루는 영어를 어떻게 저렇게 잘 하니? 외국인 학교 보냈던 거야? 아니면 원어민 과외?”
김미정의 말에 코가 막히고 어이가 막히는 우지연.
그녀가 한숨을 한 번 쉰 뒤 답했다.
“그런 거 보낸 적 단 한 번도 없어요. 그럴 수 있는 사정 아니었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글 쓰는 것도 그렇고?”
“네, 당연하죠.”
“말도 안 돼. 천재가 아니고서야. 도대체, 어떻게 키웠기에 하루가 저렇게...”
“잘 자랐냐구요?”
“그, 그래.”
“제가 해준 것도 많이 없어요. 혼자서 스스로 알아서 훌륭하게 크더라구요. 왜요, 섭섭하세요? 그 때 그런 끼가 다 없어져서?”
순간, 지은 죄가 있어서인지 움찔하는 네 사람.
“넌 무슨 그런 말을...”
우지연으로서 그 때의 앙금이 쉽게 가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의 가시 돋친 반응에 아버지가 큼큼 헛기침을 한다.
지난번만 해도 딸 만나기를 별로 내켜하지 않으며 괄괄한 반응을 보였던 그.
요새 뭔가 사정이 달라졌는지 기세가 좀 죽어 보인다.
“그나저나 갑자기 왜 여길 오셨어요?”
“왜 오긴. 네가 집에를 안 온다니까 우리가 온 거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실례 아닌가요? 우리가 서로 안 보고 산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연락을 하고 오면 만나주기나 했겠니? 이렇게 불쑥 왔으니 그나마 말도 섞고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요. 그게 문제란 거예요. 매번 이런 식이잖아요.”
“그래, 그건 우리가 미안하다. 그러니까 이제는 조금씩 왕래를 하면서 살면 안 될까? 하루도 자주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놀러오고 말이야.”
“하아...”
이번에는 오빠가 입을 연다.
“지연아. 그 때 일은 우리가 정말 미안해. 잘못했다, 정말.”
“뭘 잘 못했는데?”
“너를 그렇게 매몰차게 대한 것. 조금이라도 보듬어 줬어야 하는 건데.”
“그건 아버지가 먼저 사과를 하셔야 하는 거 아녜요?”
우지연의 그 말에도 입을 꾹 닫고 있는 우기준.
입만 삐죽거린다.
끝까지 자존심은 버리기 힘든 모양이다.
“그리고 그 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해, 오빠는?”
“응? 무슨 말인지...”
“언니, 오빠, 하물며 엄마까지 모여서 우리 하루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 하는 거 나 다 들었어. 그래서 바로 데리고 나온 거고.”
“저, 정말이니. 그게?”
“제발 무슨 이야기를 할 때에는 누가 듣는지 신경 좀 써. 입에 꺼낼 이야기가 있고 꺼내지 말아야 할 게 있지. 우리 하루가 그걸 들었어 봐.”
그런데 그 때.
“모자란 애가 뭘 알아들어? 그 때 일 갖고 계속 그렇게 꽁해 있을 거야?”
갑툭튀.
우지숙의 그 말에 우지연이 기가 막힌다.
늘 이 언니란 사람은 그랬다.
은근히 경쟁적이고 자신을 못마땅하게 대했었지.
게다가 가장 조카 대해 신랄하게 반응했었고.
“누나. 좀 제발!”
우강민이 말렸을 때에는 이미 상황 종 친 상태.
결국 아물기 힘든 틈이란 것만 확인한 우지연은 그들을 내보냈다.
“제가 연락하기 전까지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하루 좀 더 보고 가면 안 될까?”
“안 돼요. 좀 전에 보셨잖아요. 바빠요. 방해하지 말고 어서들 가세요.”
그 때, 언니인 우지숙이 한 마디를 내뱉는다.
“야, 우지연! 우리 아빠 망했어.”
“...?”
“회사 부도났다고. 그래서 우리 다 밖에 나앉을 지경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리.
지금, 그래서 여길 온 거야?
저번에는 손자 달라졌다는 거 알고 보려고 학교를 찾아왔고.
이번에는 자기들이 아쉬우니까?
어쩐지 아까 차하고 집을 기웃거리는 눈빛이 이상하다 했더니.
‘하아, 더 정 떨어져 진짜.’
지긋지긋.
“그 때에는 날 매몰차게 겨울 찬바람 속에다 버려놓고 지금에 와서? 이런 가족이라면 나는 필요 없으니까 다시는 아는 체도 마세요.”
현관문을 쾅 닫은 우지연.
순간 밖에서 언니란 사람이 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 거 봐. 내가 뭐라 그랬어. 오지 말자고 했잖아. 쪽 팔리게.
씩씩대며 주방으로 향하는 그녀는 마음이 복잡하다.
“마음에 안 든다고 헌 신짝 버리듯 내쫓아놓고 아쉬우니까 알려주지도 않은 주소로 찾아오다니. 가뜩이나 차 몰고 다녀서 배고파 죽겠는데 저녁만 늦어졌네.”
투덜거리며 밥을 하려는데 뒤에서 누군가 포근하게 껴안는다.
아들의 품.
“엄마. 괜찮아요?”
“응? 왜. 아무렇지도 않아.”
물론, 거짓이지만.
“힘내요, 엄마. 늘 드리는 말이지만, 엄마한텐 내가 있잖아요.”
“알아, 아들. 배고프지? 빨리 저녁 차려줄게.”
열린 방문을 통해 거실과 현관에서 나는 소리를 다 들은 우하루.
자꾸만 엄마의 마음에 상처만 되는 가족들이 밉다.
차라리 찾아오지나 말 것이지.
피만 나눴다고 그게 진정한 가족은 아니다 싶다.
이전 삶에서 자신을 입양했던 집 부모님은 피 한 방울 안 섞였어도 한결같았으니까.
당연히 그게 더 가족 아닐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저 집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든다.
더구나, 일기장에 적힌 내용들을 다 봤으니 곱게 보일 리가 없다.
비록 직접 당했던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이 이전에 그들로부터 어떤 취급을 당했었는지 알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집 사는 걸 좀 더 앞당겨야겠어.’
그 때에는 절대 아무도 주소를 모르게 해야겠다는 다짐이다.
*****
뉴욕에서 걸려온 조셉 버튼 감독의 전화.
우하루가 손님들을 피해 재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와 받은 두 번째 통화는 그에게서 온 것이었다.
‘이렇게 직접 연락을...’
메일이나 메신저로 해도 되는 건데.
세계적 거장이 이렇게 손수 시시콜콜 진행 상황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는 게 실감이 잘 안 난다.
물론 통역을 거칠 필요가 없다는 점도 한 몫 했을 터.
분명한 건, 지금 조셉 버튼 감독은 우하루에 대해 지극한 호감과 경외심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마음은 행동 하나하나에서 존중과 배려로 나타나기 마련이니까.
그는 넷플럭스와의 협의 내용을 우하루에게 상세히 설명해줬다.
“말씀 듣고 보니 그 조건들이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오네요.”
- 그렇죠? 우리 둘이 의견 일치군요.
“솔직히 저는 원작자로서 영상화에 있어서는 감독님 의견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 노노. 원작자는 이 소설의 생명력을 쥐고 있는 존재예요. 우하루 작가님이 원하지 않는 건 안 할 겁니다.
하아...
또 감동.
“고맙습니다.”
- 사실 그래서 말씀인데요...
“네?”
- 이번 여름, 그러니까 7월이나 8월 즈음 한 번 미국에 와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제가 직접 미국에요?”
- 네. 아무래도 이렇게 원격으로는 자세한 의견 교환과 빠른 일 처리가 쉽지 않으니까요.
하긴, 조셉 버튼 감독의 말이 옳다.
영화 제작 같은 복잡한 사안을 하루에 몇 통화씩의 전화와 이메일로만 처리할 수는 없는 일.
하물며 계약을 위해서라도 직접 만나는 게 바람직하다.
게다가 우하루에게 있어서는 또 하나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각색’을 누가 맡을 거냐라는 사안.
‘무죄의 자격’이야 이연하 선배에게 맡겼지만.
‘솔직히 이건 정말 놓치기 싫거든!’
욕심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으나 불가능한 건 아니다.
물론, 이게 단막극과 비교할 수 없는 방대한 스케일이긴 하지만.
어차피 영문 번역 작업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을 가장 잘 아는 자신이 직접 부딪쳐 보고 싶은 것이다.
“조금 있으면 여름방학도 되니까 한 번 고민해 보겠습니다.”
-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오시면 경비나 제반 모든 건 우리 스튜디오에서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캐티가 너무 좋아할 거예요.
캐더린 해링턴.
순간 그 뽀얗고 청아한 푸른 눈망울의 그녀 얼굴이 우하루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또 보고 싶기는 하다.
- 그리고 또 하나 참고로 말씀 드릴 게 있습니다.
“네, 감독님.”
- 오늘 밤, 그러니까 한국 시간으로 내일 아침이 되겠네요. 미국 ACNN 방송 ‘투나잇 라이브’를 보세요. 이게 프라임 타임 뉴스인데 미국에서 가장 시청률이 높은 뉴스 프롭니다.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지.
“너튜브에서 생방을 해주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 맞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클립으로 시청 가능합니다.
“꼭 보겠습니다. 혹시 감독님 인터뷰 나오나보죠? 아니면 서울에서 열린 ‘오르테가의 비밀’ 월드 프리미어에 대한 보도인가요?”
- 아닙니다.
“?”
-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가 보도될 예정입니다.
“네?”
이게 무슨 소리.
자신의 작품이 미 대륙 전국구, 아니 전 세계 오대륙구 메인 뉴스에 나온다고?
그렇다면 지난 번 필먼 쇼보다 파급력이 더 클 텐데.
우하루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 아직 겟픽에서 연락 못 받으셨나 보군요. 그럴 줄 알고 미리 말씀 드린 겁니다. 지금 미국에서 불고 있는 웹소설의 인기에 대해 취재를 한 건데, 그 중 반 이상이 ‘회서군’과 ‘에이데이’ 작가님에 대한 내용이 될 거라고 하네요.
“알겠습니다, 감독님. 꼭 보겠습니다.”
희소식.
생각지도 못한 뉴스다.
귀가 간지러웠는지, 전화를 끊자마자 문스피아 오 피디로부터 연락이 왔다.
바로 그 소식 때문이다.
- 작가님! 이제 미국에서도 성공 가도에 오르신 것 같습니다. 하하!
지금 네온과 자기 회사에서도 완전 화제라며 그도 들떠있다.
다음날 아침.
우하루는 일찍 일어나 토스트를 물고 초집중해서 깔끔하게 ‘회서군’ 두 편을 집필한 후 알람이 울리자 너튜브를 열었다.
ACNN 프라임타임 뉴스 시작.
어제 일어난 몇 가지 주요 국제 및 정치 뉴스가 지나고 조셉 버튼이 말한 대로 웹소설에 대한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허리가 금세 꼿꼿해졌다.
[웹툰은 익숙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웹소설은요? 물론 젊은 층은 잘 알겠지만 종이책과 전자책 정도에 익숙한 많은 기성세대들은 좀 헷갈릴 수도 있겠죠.]
취재기자의 서두.
그녀는 곧바로 ‘겟픽’이라는 사이트를 소개하면서...
[현재 영 제너레이션을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소설이 바로 ‘웹소설’입니다. 제목은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 중세시대의 북유럽 가상의 왕국들을 배경으로 한 정통 판타지 소설인데요, 놀랍게도 이 작품을 연재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한국의 ‘에이데이’라는 닉네임의 작가입니다!]
헐.
이렇게 직접적으로 언급이 된다고?
조셉 버튼이 말한 대로 ‘웹소설’ 이상으로 ‘에이데이’와 그의 작품이 일으키고 있는 열기와 현상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물론 그걸 홍보해주려는 건 당연히 아니고 시청자들에게 좀 더 흥미롭게 다가가기 위해 채택한 취재 이슈에 운 좋게 걸려든 것일 터.
‘이게 웬 떡!’
보도는 단순히 이런 게 화제라는 정도로 1, 2분 정도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꽤 심층적으로 다루며 5분 이상을 할애.
‘이 정도면 기획특집 기산데?’
이 웹소설 작품이 미국뿐 아니라 유럽까지 포함한 영어권 소설 애호가들 사이에서 얼마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지.
겟픽 트래픽의 폭발적 상승과 이로 인해 웹소설 유입 독자수의 급증을 증거로 들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리고 몇 명의 일반인 인터뷰가 이어졌는데, 그 다음으로.
[이 소설이 가진 매력의 덫은 톱스타들까지 빠져들게 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인들이 잘 아는 톱스타까지 등장했다.
바로 ‘캐더린 해링턴’이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동생인 ‘엠마 해링턴’까지 함께 나와 ‘회서군’을 칭송하며 어떤 점이 매력적인지 왜 광팬이 됐는지 열띤 어조로 설명을 하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
이 정도면 수퍼볼까지는 아니더라도 웬만한 특급 광고 효과 뺨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이뿐만이 아닙니다. 세계적 거장 조셉 버튼 감독을 비롯해 이안 잭슨 감독, 장르소설가 스티브 W.고든에 이르기까지 많은 유명인들이 이 작품과 작가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영화계와 방송계에서는 이 소설의 영상화가 확실시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소설을 읽는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멋진 멘트로 마무리된 보도.
우하루는 예상보다 디테일하고 비중이 상당한 내용에 고무됐다.
“아무래도 뭔가 터지고 있긴 한가보네.”
얼떨떨한 기분의 그는 라이브가 종료된 후 이 기사 영상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봤다.
*****
다음날인 월요일.
첫 과목인 ‘스토리 창작과 구성의 기초’ 시간.
두 시간 연달아 조별 과제를 진행 중, 1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에 갑자기 복도 쪽 조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심하게 다투는 분위기.
우하루뿐 아니라 다들 그 쪽으로 시선이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