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미국 다녀올게요 >
‘무슨 일이지?’
바로 그 조는 나중경이 있는 팀.
그런데 한 아이가 일어나서 뭔가 따지듯 누군가에게 말을 퍼붓고 있다.
“야. 진짜 웃기네. 지금 여기에서 왜 ‘에이데이’ 이야기가 나오고 ‘회서군’이 어쩌고저쩌고 말을 꺼내? 정작 우리는 지금 진도도 제대로 못 빼고 있는 거 몰라?”
그가 향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중경.
이내 그마저 일어서자 대립 중인 두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히 드러났다.
“쉬는 시간인데 다른 이야기 좀 하면 안 돼?”
“지금 잠깐이 아니잖아. 좀 전에 수업 시간에도 계속 그 이야기 꺼냈어.”
“내가?”
“그래!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선생님 계시니까 큰 소리 낼 수 없어서 참은 거야!”
그 말에 같은 조원들 몇 명이 고개를 끄덕끄덕.
반응만 봐도 답이 나오는 상황이다.
“되게 예민하네. 우리 ‘에이데이’ 작가님이 어제 미국 ACNN 방송에서 언급되셨어. 그거 좀 화제 삼아 올렸다고 그게 이렇게 화낼 일이냐?”
역시나, ‘에이데이’ 팬클럽 회장답네.
그 말은 왜 또 그리 창가 쪽까지 잘 들리는지.
우하루는 괜스레 눈썹이 간지럽다.
“나도 그 작가 좋아하고 ‘회서군’ 애독자 중에 한 명이야. 그리고 아까 인터넷에서 그 기사도 봤고.”
뭐야.
벌써 기사까지 떴어?
“내가 너의 그 열정에 기분 나쁘다는 게 아니야. 우리 지금 갈 길이 바쁘잖아. 네가 그랬지? 우리 꼭 1등 하자고. 근데 거기에 집중해도 모자랄 시간에 수업과 관련도 없는 이야기를 자꾸만 꺼내니까, 그게 열 받아서 그러는 거잖아? 얘들아, 내 말이 틀리니?”
“아니, 맞아.”
이번에는 모두가 고개를 젓는다.
마치 칼군무를 하듯.
“하아...”
이렇게 되니 그도 할 말이 없다.
자기 관심사 때문에 같은 조원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돼지.
결국 꼬리를 마는 나중경.
하지만 이미 그의 조는 여러 군데 금이 많이 가 위태위태한 상태.
이런 상황을 다른 급우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쟤가 너무 독단적이란 데 있어. 근데 그렇더라도 잘 하면 되는데 저렇게 딴 데 신경 쓰고 일도 제대로 진행을 못시키니까 조원들이 열이 받는 거야.”
“쟤 성준이가 저번 주에 그러더라. 하루 너하고 같은 조 못한 게 천추의 한이 된다고.”
“우리는 얼마나 행운아 들인 거냐고. 헤헷.”
조금 전 싸운 아이들의 심기를 괜히 건드릴라 조그만 목소리로 안도의 감탄사를 뱉는 우하루의 조원들이다.
나중경 조와 달리 이 조는 너무도 순항 중이다.
다들 한 사람에게 의존하려는 경향이 다소 있기는 하지만.
그걸 적절하게 조절하며 자발적인 참여와 각 조원의 성취감을 고취하는 스킬을 우하루가 발휘해내면서 완벽한 균형을 맞추고 있다.
다른 배야 뒤집어지든 말든 별반 신경 쓸 이유는 없지만.
함께 출발한 급우 입장에서 복도 쪽 분위기가 답답하긴 하다.
“자, 우리는 우리 것에만 몰두하고 최선을 다하자.”
“오케이. 그게 맞지!”
“이제 캐릭터는 다 정해졌고 세계관도 촘촘하게 짜였으니까 본격적으로 스토리 구성이 진입할 차례야.”
“그래.”
“각자 창작해온 줄거리들을 한 번 공유해보고 합치고 빼면서 퍼즐 맞추듯 플롯을 구성해 보는 건 어떨까?”
“엑설런트 아이디어네. 저마다의 줄거리에 장단점이 있으니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건 이 작품을 기획한 배경과 목적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도착할 그 곳에 대한 걸 항상 염두에 가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말이지. 그럼 시작해볼까?”
“좋아, 하루야!”
신이 나 보이는 우하루의 조원들.
중앙을 두고 복도와 창가 쪽의 조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
어느 쪽이 성공적인 항해를 마치고 최고의 기착지에 무사히 도착할 지.
너무도 뻔하게 눈에 보이는 듯하다.
*****
사람들은 늘 기적과 의외를 바란다.
하지만 그게 그리 자주 일어나 줄 리는 없다.
노력 없이 놀라운 성과가 나오기는 힘든 법.
행동하지 않고 과실을 따먹으려는 건 도둑놈 심보에 불과하다.
그게 바로 ‘순리’라는 것일 터.
학기말에 나온 결과는 그런 교훈을 여실히 증명해줬다.
“5조가 압도적으로 1등이다!”
스토리 창작과 구성의 기초 전공과목 실기 점수.
우하루 조가 가장 우수한 점수를 받았다는 선생님의 발표에 환호와 신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고.
대부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나 복도 쪽에 등을 붙이듯 앉아있던 나중경은 실망감에 차 얼굴을 들지도 못한다.
“3조는 뭐지? 2등도 아니고 4등이야.”
잠시 얼굴을 들었었던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어깨마저 무너뜨렸다.
조원들은 참담한 표정.
“그렇게 의지를 불태우더니, 제출한 작품 보고 너무 실망스러웠어.”
확인사살에 나중경 조는 초상집 분위기다.
이번만큼은 우하루를 무너뜨리겠다던 그 전투력은 그저 공허한 으르렁거림이었을 뿐.
완벽한 패배로 다시금 돌아와 버렸다.
‘자식. 좀 잘 하지.’
자꾸 저러니까 이젠 불쌍해지려고 그런다.
우하루는 일말의 애증까지 느껴지는 듯하다.
그래도 ‘에이데이’를 신처럼 떠받들고 있는 고마운 존재이잖은가.
아마 그는 방학 중에도 그 열정을 온전히 발산해 줄 것이다.
이어진 1학년 기말고사.
그 결과는...
“축하한다, 하루야!”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네! 누가 우하루를 이길쏘냐!”
“넌 영어하고 독어는 그냥 올백이구나. 근데 이번엔 다른 과목에서도 저렇게 만점이 쭉쭉 나오고, 게다가 전공까지 압도적이니.”
“부럽다, 부러워!”
역시나 이번에도 연영과 1등.
학교 측에서 공개를 하지 않는 전체 과 통합 수석도 아마 우하루일 것이라고, 동기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반면, 나중경은 이번에 5등 밖으로 밀렸다.
비록 10등 안에 간신히 턱걸이는 했지만.
반드시 기말에 뒤집겠다던 중간고사 직후의 각오와 분개는 미세먼지 속에 휘말려 사라져버린 듯했다.
더구나 ‘스토리 창작과 구성의 기초’ 조별 과제 수행에서 보여준 태도 때문에 같은 반 아이들에게도 구설수의 대상이 되어 평판마저 더 안 좋아진 건 치명적.
‘이제 나한테 남은 건 진짜 ‘에이데이’ 작가님밖에 없는 건가.’
한없이 기운이 빠져 보이는 그.
나중경은 여름 이후를 기약하며 1학년 첫 학기의 끄트머리에서 그렇게 사라져갔다.
*****
아지트에 모인 네 명.
오늘은 강세영이 푸짐한 저녁을 배달시켰다.
그녀의 환한 미소가 방을 가득 채웠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나 어제 오디션 합격했다, 얘들아!”
“오, 정말? 말 안 했었잖아.”
“예전에도 그랬는데 뭐. 떨어지면 창피하잖아. 몇 번 미끄러진 적도 있고.”
“어쨌든 축하축하! 근데 이번엔 무슨 드라마야? 아니면, 영화?”
“미니시리즈!”
“리얼리? 제목이 뭔데?”
그녀의 시선이 우하루에게로 향했다.
설마...
“아니야. 하루 작품은.”
“그럼? 어떤 건데?”
“강소울 작가님이 쓰신 원작 소설을 드라마화한 거야.”
“아, 강소울 작가...에이, 뭐야. 그럼 하루 거 맞잖아!”
아이들을 놀리고선 재미있다고 깔깔대며 웃는 강세영.
역시나 고1답다.
“너 정말 오디션 됐어? 혹시, 한서연 역?”
“맞아. 나 남주 딸로 확정됐어!”
우하루도 깜짝.
각색을 그가 맡고 있지 않으니 오디션 진행 상황은 모른다.
그 현장에는 이연하 작가가 참석하니까.
“너무 잘 됐다. 사실 그 배역 너한테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우하루도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환한 미소를 뿌렸다.
“정말? 그래서 감독님하고 작가님이 날 뽑으신 건가? 호호.”
예전에 강세영이 말했었지.
언젠가 꼭 우하루의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고.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물론 그녀의 바람은 ‘여주’였을 것이다.
하지만 ‘무죄의 자격’에서 주인공의 딸 ‘한서연’ 배역은 여주라고 해도 될 정도의 비중이다.
그녀의 어머니, 그러니까 주인공의 아내는 극 초반에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려 운명을 달리한다.
이후 아버지를 도우며 중간 중간 결정적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바로 강세영이 맡은 역할이다.
“촬영 이제 곧 시작이잖아. 아쉽다. 시간이 좀 충분했으면 캐릭터에 대한 고민 좀 같이 많이 했을 텐데.”
“지금부터 해주면 돼지.”
“그래. 일단 내일부터 짬짬이 만나서 스터디 좀 하자.”
“고마워, 하루야. 너밖에 없다. 촬영할 때 가끔이라도 찾아올 거지? 다들 너 보고 싶어 할 걸, 아마? 감독님도 그렇고 이연하 선배님도 그렇고?”
“나도 그러고 싶긴 한데...”
우하루가 또 하나의 새로운 뉴스를 아이들에게 털어놨다.
무슨 소식인가 하고 다들 토끼마냥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집중.
“나 방학 동안 미국 갔다 와.”
“미국? 갑자기? 무슨 일인지 혹시 물어봐도 될까?”
“사실은 ‘회서군’ 때문에. 들어서 알겠지만 미국에서 드라마화가 진행 중이야.”
“조셉 버튼 감독?”
“맞아. 거의 확정적이어서 감독님이 날 초대했어.”
“정말? 오 마이 갓!”
벌떡 일어나 몇 번을 하느님을 찾는 윤준환.
놀란 건 나머지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일이 빨리 진척될 줄 다들 예상치 못했던 것.
게다가, 세계 최고의 판타지 스릴러 감독이 친구 작품의 메가폰을 잡는다고?
모두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래서, 그럼 그 일 때문에 가는 거야?”
“응. 실무 협의를 이렇게 멀리서 하는 것도 무리고, 내가 원작자니까 기획 작업도 함께 했으면 하시네. 만약 일이 진척되면 계약도 해야 하니까.”
“와, 하루가 이제 월드와이드 수퍼스타가 되어 가는구나!”
“오버하긴. 그냥 내 소설 원작으로 드라마 하나 만들어지는 거 가지고. 내가 거기 출연하는 배우도 아닌데 스타는 무슨 스타.”
갑자기 윤준환이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묻는다.
“혹시, 거기 여주 ‘캐더린 해링턴’이 맡아? ‘회서군’ 완전 광팬이던데.”
그 말에 옆에서 웃고 있던 강세영이 왠지 움찔.
뭔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그건 모르지. 내가 관여할 수 있는 일도 아닐 것이고.”
“걔가 했으면 좋겠다. 엄청 예뻐서 나 되게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배우들이 너무 많아 혼자서 벅차하는 윤준환.
강세영과 오지윤이 답 없다며 고개를 젓는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은 어떤 작품이 영상화되는 데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아직도 멀었으니까 벌써부터 흥분할 거 없어.”
“너 마치 미국에 있어 본 양 말한다?”
아차차.
“응? 아, 그런 게 아니고, 나도 감독님한테 들은 이야기야.”
“근데 이렇게 되면 ‘에이데이’가 너란 거, 정체 다 밝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는 거 아니야?”
“그건, 모르지. 만약 내가 각색까지 하게 되면 그럴 가능성이 커지지만 원작자로만 계약하게 된다면 별 상관없을 거 같은데.”
“아마 지금도 궁금해 하고 있는 사람들이 엄청 많을 거야. 얼마 전에 ‘디비팼지’ 찍힌 것도 봐봐. 물론 우하루 작가로서였지만.”
“알 바 아니야. 그 때 가서 생각할 일이지.”
“그럼 가면 언제 와?”
“아마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 걸릴 거 같아.”
“꽤 기네. 그럼 거의 방학 내내 아니야?”
“맞아.”
“하아. 그럼 이번 방학엔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일 기회가 별로 없겠네.”
아쉬워하는 친구들.
하지만 영영 가서 안 오는 것도 아니고.
“고작 한 달 반인데.”
“어차피 세영이는 내내 드라마 촬영에 잡혀 있을 거잖아. 그럼 지윤이하고 나만 남는 건가?”
“나도 뮤지컬 극단에 견습 들어가기로 했어. 뭐, 기간은 고작 이삼 주 정도지만.”
오지윤도 나름 스케줄이 있었다.
이번에도 아무 일 없는 건 윤준환 뿐.
신세타령 들어가신다.
“난 혼자서 글이나 써야겠다. 솔직히 이번 방학에 며칠이라도 하루 너한테 하드 트레이닝 좀 받으려고 했는데, 섭하네.”
“다녀와서 가능한대로 해줄게, 준환아.”
“말이라도 고맙다. 역시 너밖에 없네.”
힙하게 악수를 하면서 남자답게 포옹을 나눈 두 사람.
비록 당분간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지만 다들 저마다의 꿈을 향한 길 위를 뛰는 일이니 아쉬움은 있을 수가 없다.
오히려 방학 말미에는 더욱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
우하루의 걱정은 어머니였다.
며칠 다녀오는 여행도 아니고 한 달 이상 걸리는 장기 출타.
그 동안 한국에 엄마를 홀로 남겨둬야 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오히려 나야말로 네가 걱정이지. 외국이라고는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아이인데.”
엄마.
죄송해요.
거기서 산 적이 있어서...
미국 일정에 대해 말씀을 드린 날, 오히려 우하루는 우지연을 안심시켜야 했다.
“주무시기 전에 보조 잠금장치까지 꼭 잠그시고, 저 없다고 대충 차려 드시면 안 돼요.”
“그래, 알았어.”
“그리고 무엇보다 차 운전 조심하시구요.”
“최고로 안전한 차를 네가 사줬잖니. 그마저도 최대한 안전하게 살살 몰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어. 요즘엔 어찌나 차들이 고분고분하던지.”
그나마 안심이다.
“한 달 반 금방 가요. 조금 더 빨리 오게 될 수도 있구요.”
우하루는 집에 하나 있는 캐리어가 모자라 하나를 추가로 구입한 후 능숙하게 짐을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어머니와 포옹을 마친 후 출국 수속을 마친 그.
조셉 버튼 스튜디오에서 마련해준 티켓을 가지고 비행기에 올랐다.
약 14시간 30분 정도 후.
존 에프 케네디 국제공항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게 얼마만인가. 내가 여기 또 오게 되다니.’
은근히 감개무량.
비록 이 광활한 대륙의 다른 쪽 끝에서 살았었지만.
어쨌든 새로운 삶으로 이 땅에 다시 발을 디디게 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