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딱 보면 감이 오지 >
*****
“외부 미팅 가는 길?”
넷플럭스 본사.
마케팅팀 앤디 오스틴 수석 디렉터가 부르는 소리에 리지나 와인이 뒤를 돌아본다.
그녀는 콘텐츠 개발팀 디렉터.
둘은 입사 동기고 친구지간이다.
“맞아. 앤디 너도 어디 가는 거 같은데?”
“난 들어오는 길이야. 근데 회의가 취소됐더라고. 어디 미팅인데?”
“조셉 버튼 스튜디오.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 제작 관련해서.”
그 소리에 귀가 쫑긋 솟는 앤디다.
“오, 정말? 그럼,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어차피 그거 우리 팀에서 마케팅 전략도 세워야 하는데.”
“아직 계약 확정은 아니야. 막판 조율 중.”
“에이, 어차피 결국 우리가 만들게 될 거잖아. 그리고 나 그 소설 엄청 팬이야.”
“오케이. 같이 가자. 오늘 작가님하고 첫 만남이거든. 긴히 의견 조율을 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한데 잘 됐다. 사실 나도 은근히 긴장이 되서 말이야.”
“뭐라고? 작가님...이라면...”
“다 알면서. ‘에이데이’ 작가님.”
“정말? ‘에이데이’ 작가님이 여기 뉴욕에 와 있다고?”
“아, 몰랐구나. 하긴 나도 아직 못 만나봤으니까.”
“와, 나 운 좋네. ‘회서군’의 작가님을 직접 대면할 기회도 갖고. 내 이래서 이 회사를 다니는 게 행운으로 생각이 된다니까. 호호.”
너무나 좋아하는 그녀와 리지나는 곧장 차를 몰고 조셉 버튼 스튜디오로 향했다.
얼마 후 우하루와 인사를 나눈 그녀들.
여느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이 얼굴에 여실히 드러났다.
어려서 놀랐고.
영어가 자신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라 놀랐고.
태도나 분위기가 너무 어른스러워서 놀랐고.
외모가 준수함 그 이상의 초미남이어서 놀랐고.
그리고 너무 똑똑하고 스마트해서 경이로웠다.
하지만 일은 일.
리지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공사 구분을 확실히 했다.
- 작가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열정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소설과 영화는 아주 다른 성격의 콘텐츠예요. 문자 콘텐츠에 탁월하다는 게 극본을 잘 쓴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거든요.
역시나 원작자가 각색까지 맡겠다는 데 대한 넷플럭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우려하시는 바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시는 바처럼 ‘회서군’의 세계관은 방대합니다. 이 판권을 사서 특별한 목적을 가진 꽤나 다른 작품을 제작하시려는 게 아니라면 원작자인 제가 그 누구보다 적합한 각색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디렉터님도 소설을 읽어보셔서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에이데이’ 작가님의 영어 실력은 원어민 못지않습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그 이상인 부분도 있구요.”
조셉 버튼 감독도 지원사격.
만약 우하루가 각색을 하게 되면 자신도 창작에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말까지 했다.
“아무래도 미심쩍으실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제 대본을 한 번만 검토해 주셨으면 합니다.”
“흠. 죄송하지만 그건 일단 팀장님께 보고하고 답변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작가님.”
“알겠습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빛.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감정.
단단해 보이는 깊은 속내.
그리고 무엇보다, 고급지고 수려한 말솜씨까지.
두 사람은 우하루를 만난 여운이 계속 남는다.
“리지나.”
미팅을 마치고 나온 앤디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동기이자 친구를 불렀다.
“응? 왜?”
“넌 뭐 느끼는 거 없어?”
“느끼는 거? 뭐?”
“나는 느낌이 팍 하고 왔는데.”
“무슨 소리야?”
갑자기 싱글벙글 미소를 띤 채 눈을 맞추는 그녀.
“작가님 있잖아. ‘에이데이’ 작가님.”
“응.”
“완전 스타성 넘치지 않아 보여?”
“스타성? 뭐, 엄청 매력적인 건 인정하는데. 근데 배우도 아닌데 무슨 스타성, 갑자기?”
“역시. 이래서 너는 콘텐츠 개발, 나는 마케팅이 천직인가 봐.”
“뭔 소리야, 도대체?”
차에 오른 앤디가 어안이 벙벙해 하는 리지나에게 자신의 생각을 설명한다.
“내가 입사 이후 지금껏 만나본 작가 분들 중에서 이렇게 느낌이 오는 사람은 처음 봐. 솔직히 저 나이에 네이티브 한국인이 영어를 저렇게 잘 하는 것도 모자라 영문 소설을, 그것도 한국과 미국을 열광시키고 있는 대작 판타지 웹소설을 혼자서 2개국어로 동시에 집필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넌?”
“흐음. 그건 진짜 신기하지.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지.”
“맞지! 신기한 정도가 아니라 경이롭지. 그냥 창작가로서 능력이 뛰어나다, 이 정도가 아냐. 천재 그 자체잖아.”
“그래서인지, 분위기도 좀 압도를 당하는 기분이었어. 내가 누난데.”
“나도 그래.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야. 게다가 말도 잘 하고 또 외모는? 유명한 한국 배우나 아이돌 그룹 멤버들 뺨칠 정도잖아.”
“설마 내가 사랑하는 오빠들하고는 비교할 생각 하지도 마. 나 극성팬인 거 알지?”
“내가 보기엔 더 잘 생기고 멋지던데. 키도 더 크고.”
“뭐라고?”
“알았어, 알았어. 흥분하지 마. 그냥 내 생각이니까. 호호.”
하마터면 두 사람, 의 상할 뻔했다.
친구의 지극한 팬심에 질투를 끼얹으려 하다니.
“너 완전 뿅 갔구나, ‘에이데이’ 작가님한테.”
“응. 완전.”
“차라리 ‘에이데이’가 작가가 아니라 배우였다면 네 생각을 뭔가 발전시켜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노노. 배우만 스타가 되라는 법이 어디 있어? 작가도 이제 글만 잘 쓰면 되는 시대는 지났어. 글은 기본, 스타로서 개인적 인기가 올라가면 그 팬층의 열광으로 작품도 더 뜰 수 있지. 더구나 ‘에이데이’ 작가님처럼 자신의 작품을 다양한 형태로 멀티 콘텐츠화 하는 역량을 가진 분이라면 더욱 말이지.”
“그것도 그렇긴 하네. 배우나 가수도 연기와 노래는 기본이고 이제 다방면에 능력을 발휘하는 멀티 엔터테이너로 활약하는 시대니까.”
“내 말이.”
너무도 신이 나 보이는 앤디 오스틴.
뭔가 가슴 뛰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사람처럼 완전히 들떠 있는 표정이다.
“내가 오늘 널 잘 따라왔네.”
“한 턱 쏴.”
“조만간. 그리고 이런 참견해서 미안한데, 에이데이 작가님이 각색까지 하겠다는 것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게 어떨까 생각해. 기회를 줘볼 수는 있잖아.”
“그것도 스타 작가 마케팅 프로젝트의 일환인가?”
“뭐, 그렇게 생각해도 좋고.”
“글쎄, 그건 내가 혼자 결정하는 게 아니라서.”
“설마, 예전 ‘게투스 일대기’ 때처럼 각색 작가 이미 섭외해서 정해 놓은 거야?”
난처한 표정을 짓는 리지나 와인.
결국 긍정의 표현인 것이다.
“맞구만 뭐. 또 망하고 싶어서 그래? 좀 그렇다.”
“너만 알고 있어.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이 사안은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렇지. 네가 혼자 결정하는 건 아니지. 엄청 많은 사람들이 결정하게 될 수도 있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보면 알아.”
뜻 모를 미소를 짓는 앤디 오스틴이다.
*****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글을 쓰느라 늦은 잠을 잔 우하루가 일어나 우유에 시리얼을 탔다.
오후에 미팅이라 시간이 좀 남은 상황.
그릇을 들고 창가에 서자 센트럴 파크의 오전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온다.
‘좋네...’
어느덧 뉴욕에 온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간다.
각색과 관련된 협의만 마무리되면 계약도 확정이 될 것이고.
이미 드라마의 기획 방향에 대해서는 조셉 버튼 감독과 논의를 거의 끝낸 상황이다.
서로 생각하는 바에 큰 차이가 없다보니 진척도 빠르다.
“진짜 운도 좋아. 하고 많은 감독들 중 ‘조셉 버튼’이라니.”
정말 그랬다.
지난 삶에서 그의 소설을 영상화한 바로 그 거장이 이번에도 자신의 작품을 콕 찍어 먼저 대시를 해온 거잖나.
이런 인연이 또 있을까.
거기다 가장 중요한 것.
서로가 추구하는 바가 거의 일치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공통된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자꾸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신기하고 행복한 일.
띠링.
문자가 왔다.
조셉 버튼 스튜디오에서 보낸 것.
미팅 일정에 변경이 있나 확인해 보니 다른 사안이다.
‘응?’
우하루는 그릇을 테이블에 내려놓고서 SNS 앱을 켰다.
연락이 온 문자는 ‘회서군’의 영어권 팬들이 들고 일어났다는 내용이었다.
“뭘 들고 일어나?”
살펴보고 나서야 그 의미를 알게 된 우하루.
소셜미디어에 온통 난리였다.
[‘회서군’ 드라마의 ‘에이데이’ 각색 참여 결사 찬성! 원작 훼손 막아야 합니다!]
[넷플럭스는 재작년 ‘게투스 일대기’의 전철을 밟지 말기를.]
[개 같은 각색 때문에 망한 드라마가 한두 개가 아니다. ‘회서군’을 그 목록에 올려버린다면 가만두지 않는다!]
[‘에이데이’ 작가님이 직접 쓴 드라마를 보고 싶어요!]
[우리는 원작 그대로를 고집하는 게 아닙니다. 그 스토리와 세계관을 충실히 구현된 영상 작품을 보고 싶은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에이데이’ 작가님의 힘과 의지를 넷플럭스에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각색 때문에 원작이 망가진 사례를 나는 알고 있다. 이런 일이 ‘회서군’에서 되풀이된다면 나는 탈퇴 운동을 펼칠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하룻밤 사이에 뭔 일이 일어난 거냐고.
스튜디오에 도착한 우하루.
조셉 버튼 감독도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고 한다.
“협의 내용이 일부 누출된 것 같네요.”
“그게 가능해요?”
“뭐, 비밀이란 건 없으니까요. 누가 일부러 흘린 것일 수도 있고 말이죠.”
“흠...”
“솔직히 ‘회서군’ 넷플럭스 통해서 우리 스튜디오가 만들 거란 거, 계약도 하기 전에 이미 팬들은 거의 다 알고 있잖습니까. 이 바닥이 원래 그래요. 허허.”
“그렇군요. 근데, SNS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게투스 일대기’ 건은 무슨 내용이죠?”
“아, 하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더니 자세히 설명을 해주는 조셉 버튼 감독이다.
“그 작품은 아시죠?”
“네. 워낙 유명하잖아요. 소설로 읽었죠. 역시 정통 판타지.”
“맞아요. 근데 원작을 너무 심하게 변형시킨 각색 덕분에 그 특유의 냄새와 뽕이 다 말라버려서 기대와 달리 미니시리즈는 완전히 망해버렸죠. 원래 시즌 3까지 예정돼 있었는데 다 흐지부지됐고요.”
“아, 그래서 그 전철을 되풀이하지 말란 거였군요.”
“네, 맞아요. 그래서 말인데, 오늘 사태 내가 보기엔 잘 된 거 같은데요.”
“그럴까요?”
“네. 넷플럭스는 그야말로 시청자들 반응에 목매는 회삽니다. 이 드라마 제작되면 ‘회서군’ 팬들이 코어가 되어 주어야 하는데, 저런 정도면 무작정 눈 감고 귀 막고 있을 수만은 없죠.”
그의 말은 정확했다.
불과 반나절 만에 넷플럭스 ‘리지나 와인’에게서 연락이 온 것.
물론 여론 때문이란 말은 절대 하지 않았지만.
- 저희 쪽에서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로 했습니다. 내일 미팅 하시죠.
*****
“2화까지의 대본입니다. 일단 120분 분량에 맞췄습니다.”
우하루가 내민 두툼한 제본.
리지나 와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제 이걸 벌써...”
“이 정도도 준비하지 않고서 각색을 해보겠다고 하지는 않았겠죠, 제가 설마요.”
빙긋 웃는 우하루의 미소가 치명적이다.
이러면 일이 빨리 풀리겠다, 싶은 그녀.
팀장과 임원들이 직접 검증하겠으니 대본을 집필해 오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알아서 먼저 주다니.
살짝 들춰보니 정말 다른 시나리오나 극본에 못지않게 형식이 꽉 잡혀있다.
‘한국에서 단막극 각색 경험이 있다더니, 역시인가.’
그녀는 빠른 시일 내 피드백 할 것을 약속하고 돌아갔다.
만약 각색을 정말 맡게 된다면 우하루는 여기 일정에서 남은 기간 동안 최대한 많은 편수를 집필하고 귀국할 생각이다.
그래야 신뢰를 확실히 더욱 탄탄하게 쌓을 수 있을 테니.
그리고 나머지 화수들은 제작 일정과 기획 확정에 맞춰 한국에서 작업해 넘기면 될 것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아직 해가 남아 있어 석양이 넘어가는 멋진 장면을 구경하기 위해 도보를 택했다.
센트럴파크 가장자리를 지나 빌딩 옆 소로를 지나는 그.
그런데...
‘뭐지?’
아까부터 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진다.
누군가 미행 같은 걸 하는 기분이 든다랄까.
우하루는 자연스레 걷다가 의심 가는 곳을 휙 돌아봤다.
역시나.
뒤 쪽 도로에 정차 중인 차 한 대.
시동은 켜져 있고, 아까도 시야에 들어왔던 것 같다.
잠시 걸음을 늦추었던 우하루가 재빨리 뛰었다.
그러자 커지는 엔진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고.
노트북과 책이 든 가방 때문에 달리기가 쉽지 않다.
모퉁이를 돌아 상가 건물 앞에서 숨이 차 걸음이 느려지는데.
그 순간.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에서 손이 불쑥 나와 그의 팔을 잡아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