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우하루라는 브랜드 >
“이리로요, 어서!”
처음 보는 여자.
그런데 어라, 한국말이네?
일단 우하루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귀퉁이에 몸을 숨겼다.
수상한 차를 피하는 게 우선이니까.
거대한 환기통 뒤.
굳이 들어오지 않으면 존재를 알기 힘든 곳이다.
조금 전 뒤를 따르는 낌새의 그 차가 나타나고.
잠시 정차를 하는 듯하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제가 먼저 나가볼게요.”
청바지에 편한 셔츠 차림.
20대 중반이나 됐을까.
머리를 질끈 뒤로 동여맨 그녀가 인도로 나가 살펴본 후.
“나오셔도 될 것 같아요.”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일단 고맙습니다. 근데, 누구...신지.”
“아 네. 제 소개부터 하는 게 순서겠네요. 여기 제 명함입니다.”
뉴욕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는 거야 확률적으로 그리 낮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시츄에이션에서 이렇게 만나는 건 좀.
[도원일보. 문화연예부 기자. 윤예지]
이런, 뭐야.
“기자세요?”
“네. 맞습니다. 작가님.”
역시, 알고 있구나.
우하루라는 걸.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그리고 저 차는 뭐구요?”
“디비팼지 마달봉이라는 인간이에요.”
“그럼 저 차에 탄 사람도 기자라는 거군요.”
“네. 근데, 좀 질적으로 다른 기자죠. 저번에 삼성동에서 우하루 작가님 사진 찍어서 막 올린 사람이 바로 저치예요.”
그렇군.
그런데, 가만히 있어보자.
“그럼 둘이서 나를 동시에 따라...”
“아, 오해는 사양합니다. 저 자식이 나타난 걸 보고 조치를 취한 것뿐이에요. 어찌됐든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그녀.
기자치곤 예절이 바르다.
어쨌든 곤란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 구해준 건 사실이니.
차갑게 대할 필요까지는 없으리라.
“근데 이해가 안 가는데요. 기자님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 마달...”
“달봉이요.”
아.
이름 참.
“네, 저 사람은 왜 저를 미행을 하는 거죠? 정 취재할 게 있으면 이렇게 당당하게 와서 요청을 하면 될 텐데 말이죠?”
“그건...”
뭔가 속사정이 있는지,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
이내 답을 했다.
“우하루 작가님을 취재하려는 게 아니라 ‘에이데이’ 작가님의 뒤를 캐고 있는 거기 때문이에요.”
*****
“그래서, 지금 ‘에이데이’ 작가님을 찾아서 마달봉이란 저 사람도 오고 기자님께서도 여길 오고. 그랬단 거죠?”
“네, 맞아요.”
근처 커피전문점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난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지혜롭게 우하루를 구해준 사람.
게다가 기자라지 않나.
커피 한 잔쯤은 대접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단순히 ‘회서군’을 ‘조셉 버튼’ 감독이 제작할 것이라는 소문만 듣고 말이죠?”
“거기에다, 그 작가님께서 미국에 와 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어요. 그렇다면 여기밖에 더 있을까요? 영화화에 관한 정보도 얻고 혹시나 ‘에이데이’ 작가님을 조우하게 될 수도 있는 거구요.”
“그런데 엉뚱하게도 저하고 만나게 된 거다?”
“네. 게다가 작가님을 또 음침하게 스토킹하고 있는 저 인간을 발견했지 뭐예요. 구해드려야겠다 생각했죠.”
“왜요?”
“왜긴요. 작가님 팬이니까요!”
하아.
반갑긴 한데.
팬인 거야, 기자인 거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거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감사드립니다.”
“아우, 아녜요. 고맙단 소리 들으려고 한 건 진짜 아닙니다.”
어쨌든 우하루는 이제 이 상황에 대해 정리가 된다.
앞에 앉아 있는 기자와 디비팼지의 그 놈은 아직 ‘에이데이’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자신과 동일이란 건 상상도 못하고 있고.
그저 ‘에이데이’를 찾아 조셉 버튼 스튜디오로 찾아가다가 그 경로에서 우연히 자신을 발견했던 것뿐이란 거네.
‘괜히 혼자 앞서가서 내가 먼저 불어버릴 뻔했군.’
그나저나, 갑자기 궁금해진다.
“왜 ‘에이데이’의 정체가 그렇게나 궁금하죠? 여기에까지 오실 정도면 개인적인 궁금증 때문은 아닐 테고요.”
“그걸 정말 모르세요?”
그 말에 눈이 동그래져서 오히려 되묻는 윤 기자.
“아, 우 작가님께서는 웹소설을 안 보시는...”
“아뇨. 저 굉장히 좋아합니다. 물론 ‘회서군’도 열심히 보고 있고요.”
“정말이요? 와, 그럼 우리 둘 다 ‘에이데이’ 작가님 팬이네요, 호호.”
신나게 그녀 혼자가 웃다가 다시 뻘쭘.
다시 대답을 이어간다.
“아시겠지만 한국에 이어서 미국에서까지 대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작품의 작가시잖아요. 더구나 그 소설을 원작으로 미드가 만들어질 분위기고. 그러니 당연히 한국 언론에서 관심도 레벨이 급격히 높아지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별반 시큰둥하다가 갑자기 미국을 중심으로 영어권에서 반응을 하니 뭔가 대단한가 보다 하며 급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뭐 이런 거네요.”
“네, 맞아요. 기자보다 정리를 더 잘 하시네요, 호호. 역시 소설가시다.”
듣고 보니 좀 씁쓸한 면이 있다.
정작 관심을 두지 않거나 낮추 보다가도 미국이나 여타 외국에서 인기를 끈다 싶으면 그 때에는 들불처럼 관심을 일으키며 치켜세우는 한국의 미디어들.
많은 케이스가 그러했다.
이번에도 같으려나.
‘내가 지금까지 굳이 정체 공개를 하지 않고 있는 이유 중 하나지. 이제 와서 뭘 굳이.’
우하루가 아이스티를 한 모금 입에 넣는데 윤 기자가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낸다.
“저기...”
보니까 소설 두 권.
바로 ‘아임 유어 팬’하고 ‘무죄의 법칙’이다.
“여기 사인 좀 해주세요.”
우하루의 팬이라 조금 전에 밝혔던 그녀.
허언이 아니었다.
기쁜 마음으로 정성스레 사인을 한 뒤 책들을 돌려줬다.
그녀의 얼굴에 급 미소가 활짝 올라왔다.
“내일부터는 도보 말고 차를 이용하세요. 혹시 모르니까요.”
걱정까지 해주고.
조심스레 가라고 인사를 한 후 우하루는 혹시나 해서 다른 길을 통해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가만 있자. 날 만날 줄 어떻게 알고 책을 지니고 다녔던 거지?’
아무리 팬이라도 그렇지.
이미 다 본 책들 같은데 노트북이 든 가방 안에 저 두 권까지 넣어 가지고 미국을 돌아다닌다고?
갑자기 든 의문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우하루다.
*****
일주일 후.
넷플럭스 본사 콘텐츠팀 회의실.
관련 임원들을 비롯해 콘텐츠 개발부 드라마 제작 2팀 팀원들 전부가 모여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빌런도 모자라 멍청이가 된 셈이군요.”
“네. 역시 이 지구 곳곳에는 우리가 예측하고 상상하지 못한 존재들이 많은데, 한 마디로 세상을 얕본 거죠. 허허.”
몇 명이 조용히 따라 웃는다.
그 중에는 리지나 와인도 포함돼 있었다.
“대충 기회를 줘서 오답 투성이의 답안지가 들어오면 엄격하게 채점해서 정중히 돌려보내며 포기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만점이더라.”
“역시, 비유가 찰지시군요.”
“이거, ‘에이데이’ 작가님한테 가서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너무 죄송해서 말이죠.”
담당 이사의 표정은 진지했다.
빗댄 표현은 농담이 섞여 있다 해도 심정만큼은 진심이었으니까.
“한두 명도 아니고 검토해본 전문가 모두가 찬사를 보냈습니다. 저도 너무 깜짝 놀랐구요. 그 콧대 높고 직설적 성격의 브래든 쇼마저 입에 침을 튀겨가면서 칭찬을 했으면 말 다 한 거죠.”
“솔직히 전 원작을 그대로 대본화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특징과 묘미를 제대로 살려내면서 장면을 선택하고 심지어 몇 개의 씬은 새로 추가까지 했더군요. 압축과 절제 및 변형의 기술이 놀랍습니다.”
“전 소설은 안 봤는데, 이건 정말 미친 극본이네요. 제가 써도 이 정도까지는...솔직히 자신이...”
“소설을 보고 싶네요. 읽으면서 머릿속에 다 그려져요. 그걸 대사와 장면으로 다 풀어내고 있어요. 이 절묘한 신 구성을 보세요. 지문마저 군더더기 없습니다. 현대 영상 예술의 언어와 문법을 백퍼센트 이상 이해하는 사람 아니면 이런 게 불가능하죠. 저도 각색을 하지만 솔직히 경의를 표합니다.”
모두가 긴박하게 토해내는 찬사.
그리고 비록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지만 그에게 주어지는 경의.
그건 놀라움이었다.
“근데 정말 이해가 불가능하네요. 한국사람, 그것도 고등학생이 어떻게 미국인의 심리적 특성과 취향을 이렇게 잘 알고 있죠? 저도 케이드라마를 꽤 보지만 많이 다른데, 그런 차이점을 명확하게 알고 있어요.”
“아무리 지역마다 테이스트가 다르다 하더라도 인간이라면 갖는 공통적인 감성이 있잖아요. 그걸 작동시키는 거죠.”
“게다가 또 한 가지. 이 작품은 굳이 미국에서 만들어지지만 전 세계 누구나 보게 됩니다. 한 마디로 ‘회서군’ 드라마의 무대는 세계적 감독님이 언급하셨던 대로 ‘로컬’이 아니라 ‘월드와이드’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굳이 지극히 미국적 취향의 각본이 아니라 조금 더 포용적이고 융통성 있는 각본이 필요할 수도 있어요.”
“맞습니다. 그런 점에서 ‘에이데이’ 작가님의 대본 집필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되는 겁니다.”
우하루의 대본을 받아보기 전과는 백팔십도 다른 결론.
일주일 만에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는 건지.
사실 본인들조차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설익은 결정으로 인한 실수의 반복을 되풀이할 뻔했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결정이 난 후.
리지나 와인은 직접 스튜디오를 찾아와 우하루에게 직접 이 소식을 전했다.
“지난번에 작가님의 제안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던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깊이 뉘우치고 있어요.”
“아닙니다. 디렉터님 입장 백분 이해합니다.”
“마음도 넓으시네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이 어린 미소년의 마음 씀씀이와 인성에 탄복했다.
앤디가 지난 미팅 후 감이 왔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 인정.
“이제 제 어깨가 더 무거워지네요. 자청해서 나선만큼 최고의 대본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모두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사님 비롯해서 임원 분들이 감사와 응원의 메시지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조만간 뵙고 싶다고 하시네요.”
“기회가 되겠죠. 고맙습니다.”
최상의 결과.
우하루는 뜻하는 바를 이뤘다.
비록 각색을 맡지 못했어도 원작자로서의 모든 걸 이뤘기 때문에 불만은 없었을 테지만.
마음이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욕심을 채우고 나니 속이 시원하고 후련하다.
*****
리지나가 스튜디오를 떠난 후 오후에 넷플럭스의 다른 직원 한 명이 우하루를 또 찾아왔다.
그녀는 바로 마케팅팀 앤디 오스틴 수석 디렉터.
지난번에는 둘이서 함께 오더니, 이번엔 따로 온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제가 이 드라마 마케팅을 맡게 될 예정이에요.”
“그러시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에 SNS에 ‘회서군’ 팬들이 들고 일어선 것, 제가 한 일이에요.”
뜻밖이다.
역시나, 안에서 새어나갔구나.
그랬으니 팬들이 우하루의 각색 참여를 하느냐 마느냐 논의가 되고 있다는 걸 알고서 들고 일어났던 거겠지.
“사실 작가님을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드라마를 위한 일이기도 해요. 또 망할 거 같아서. 좋은 원작 가져다가 각색으로 말아먹은 적이 최근 꽤 있거든요, 망할 놈의 윗대가리.”
벌인 일의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당당한데.
뭐, 우하루로서는 불만은 없다.
결국 득이 됐으니까.
아니, 오히려 뻣뻣하던 임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지도.
“제가 해드린 일이 있으니 그 보답으로 부탁 하나 들어주셨으면 하는데.”
“좀 부담스러워지려고 그러네요.”
“만약 정말 안 되겠다 싶으시면 거절하세요. 뭐, 할 수 없죠. 제 팬심으로 해드린 거다 그렇게 치면 되죠, 뭐. 호호.”
“들어나 보죠. 어떤 부탁인가요?”
“작가님을 세상에 공개해 주세요.”
“네?”
우하루는 좀 난처한 기색을 비쳤다.
사실 이제는 별반 문제가 없긴 한데.
왠지 좀 비싼 척 보이고 싶어서...
“혹시 제가 그래야 하는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솔직하게 말씀 드리죠. 작가님 이용하고 싶어서요.”
“이용이라. 좀 그럴싸한 다른 말 없을까요. 너무 노골적이시네.”
“호호, 제 단점이자 장점이죠. 그럼 포멀하게 말씀 드릴게요. 작가님을 브랜드화 하고 싶습니다. 스타로 만들어 보려구요.”
“저를요?”
“네. 그렇게 되면 작가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시너지 효과를 이룰 수 있죠.”
“그것보다 귀사에서 투자하고 마케팅하는 ‘회서군’ 드라마의 성공을 더욱 확실하게 하고 싶어서겠죠.”
“에이, 뭘 그리 노골적으로 표현하실까.”
“제 단점이자 장점입니다.”
“어머. 저하고 똑같네요, 호호.”
조크 한 방에 그저 좋다고 웃는 앤디다.
우하루는 차라리 꽤 솔직한 그녀가 마음에 든다.
스스로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니까.
“맞아요. ‘회서군’을 마케팅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동력이 될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녜요.”
“?”
“저도 애독자이자 팬이지만, 직접 만나 보니까 작가님의 포텐셜을 직감할 수 있었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작가님 즉 ‘우하루’라는 브랜드 자체를 세계 시장에 마케팅하고 싶은 거예요.”
이 사람.
이미 ‘에이데이’의 본명까지 다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