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씨 유 어게인, 뉴욕! >
“제 브랜드라. 작가가 글 잘 쓰고 자신의 작품을 팬들에게 인정받으면, 그게 자연스레 브랜드가 되는 거 아닌가요?”
“물론 옳으신 말씀이에요. 배우가 연기를 잘 하고 선수가 운동 잘 하는 게 중요한 것처럼 말이죠.
앤디 오스틴이 긍정을 하며 이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요?”
“?”
“만약 그렇다면 세상에 모든 좋은 제품들은 다 1위가 되어야겠죠. 하지만 현실이 그런가요?”
“흠...”
“사람을 상품으로 비교하는 건 좀 그렇지만, 결국 시장에서는 마찬가지에요. 그게 인간을 비하한다거나 물질화 시키는 건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시구요.”
“그건 저도 이해합니다.”
“다행이네요. 그렇다면 말이 통하겠군요.”
그녀가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물었다.
큰 눈이 아주 잠깐 동안 더 커졌다.
“기업들이 자신의 제품을 최고 수준으로 만들어 놓고도 마케팅을 하고 광고를 하는 건 그걸 알리고 브랜딩하기 위함이에요. 그래야 고객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으니까요.”
“그렇죠.”
“그 이미지가 고착화되면 신뢰와 명성이 쌓여서 이를 바탕으로 또 상품이 팔리는, 선순환이 되는 거죠.”
“상식적인 이야기군요.”
한국에서는 경제와 마케팅을 어릴 때부터 가르치나보다.
앤디는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고1 학생과 말이 이렇게 잘 통할 수가.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커리어나 레퍼런스는 거의 동일한데 누구는 이름 자체만으로도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과 돈을 기꺼이 바치게 만들죠. 반면 그 경쟁자는 인지도마저 별로이구요.”
“예를 들면요?”
“아...이건 좀 극단적인 이그잼플인데...”
“?”
“조셉 버튼 감독님 말이에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필 함께 일할 거장을 들먹이는 걸까.
“그 명성은 대단하시죠. 과연 그 이유가 작품 성적 때문 만일까요? 혹시, 리처드 레이먼 감독님 아시나요?”
“SF의 대가시잖아요. 작품은 좀 압니다.”
“거 보세요. 작가님의 인식에서 두 분의 차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죠. 사실은 리처드 감독님이 흥행 작품 수와 성적에 있어 조금 더 앞서 있어요.”
“흠. 그건 몰랐네요. 대단한 분이셨군요.”
“하지만 세계적인 브랜드 파워는 어떻죠? 당연히 조셉 버튼 감독님이 몇 배는 위예요.”
“그 이유는?”
“바로 스타성 때문이에요. 커리어의 질적인 면은 실력에 의존하지만 브랜드 파워와 흥행은 실력에다 개인의 매력까지 더해져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버튼 감독님이 훨씬 매력적이라는 이야기?”
“그건 뭐 너무 잘 아실 텐데요.”
부정할 수는 없다.
외모만 해도 그렇고 쇼맨십은 비교 불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조셉 버튼 감독이 나대거나 대중들의 관심에 목말라 한다, 그런 건 아니다.
인간적인 매력.
이른바 스타성.
확실히 리처드 레이먼 감독에 비해 뛰어난 건 사실이다.
팬들이 더욱 열광하는 이유다.
그녀의 말이 결국 맞는 거다.
“그렇다고 거창하게 생각하고 부담 가지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단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시면 돼요.
“지금처럼 신비주의의 장막 속에 웅크려 있지 말라!”
“호호, 네 맞아요. 우하루 작가님은 실력은 물론 외모와 분위기, 인성, 풍기는 아우라 등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이 있기 때문에 세상은 열광할 거예요.”
“그래서 아까 저를 세상에 공개해 달라는 말부터 꺼냈던 거군요.”
“네. 작가님께서 하실 일은 그것밖에 없어요. 온 세계가 환영하고 열광하며 좋아한다면 굳이 숨어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어떤 이들은 그런 자질이 없는데도 그렇게 스스로를 브랜드화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작가님은 그 모든 걸 다 갖고 계시잖아요?”
언뜻 생각해봐도 우하루로서는 전혀 나쁠 게 없는 일.
아니, 가만히 보면 결국 본인이 제일 좋은 거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배려라고 해야 맞을 것 같은데.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지만, 작가님의 작품이 단 한 번만 제작되는 데서 그치지 않을 거라고 전 판단하고 있어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확신해요. 장르가 다르긴 하지만 ‘프렌즈’는 10년을 방송했어요. ‘회서군’도 그러지 말란 법 없어요.”
“그러니까 저를 잘 이용하면 앞으로 몇 시즌 내내 이용해먹을 수 있겠다 싶은 거군요.”
“정확하긴 한데 또 노골적이신데요?”
“그게 제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이미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어머. 알고 보니 짓궂기까지 하시네. 호호.”
“제가 좀 그랬나요?”
두 사람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분위기가 좋다.
우하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공개해야 할 정체다.
원래 끝까지 숨기려고 계획했던 일도 아니고.
적당한 시기만 숙제로 남아있을 뿐.
생각해보니, 차라리 이렇게 전략적으로 계획 하에 움직이는 게 낫겠다 싶다.
이건 분명 ‘회서군’ 드라마의 성공을 위한 일이다.
우하루 자신이 쓴 작품의 명성과 직결되는 것이다.
그걸 성공시켜보자는 사람과 함께 행동하는 건 당연한 일.
“좋습니다. 한 번 해보죠.”
“공개 괜찮으시겠어요? 한국에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이유, 나름 있으시는 것 같은데.”
“네, 뭐. 어떤 절실한 목적이 있어서 그랬던 거는 아니었으니까요. 이 작품 처음 올릴 당시 전 중학생이었어요. 본명이 알려지는 게 부담스러웠죠. 게다가 웹소설 작가님들은 대부분 필명을 사용하는 게 관행적이에요. 그래서 저도 따랐던 거구요.”
“그러셨군요.”
“그러다 제가 방송국 공모전에 당선이 됐고 드라마로까지 제작되면서 본명이 알려지게 됐죠. 그러니 공개하는 게 더 애매해지더군요. 한국에선 두 영역 간에 인식의 갭 차이가 꽤 크거든요. 어느 쪽으로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게 분명했고 굳이 일을 만들 이유도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잖아요.”
“맞아요. 지금은 부담이 별로 없어요. 어차피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겠어요.”
“다행이네요. 제가 원하는 대답이었습니다.”
안도하는 앤디.
사실 우하루를 찾아올 때만 해도 은근히 걱정이 됐었다.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그럼 우리 함께 잘 해봐요.”
“네. 다만...”
“?”
“지금은 적절한 때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나서는 타이밍 말이에요.”
“그럼 언제가 좋을까요?”
“제 생각에는...”
앤디 오스틴은 우하루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몸을 바짝 당겨 앉았다.
*****
다음 날 오전.
청아한 하늘.
귀엽다 싶을 정도의 구름이 몇 점 떠 있는 뉴욕 상공을 우하루는 날고 있다.
헬리콥터를 타고 말이다.
“미친 듯 아름답네!”
그 말이 저절로 나온다.
옆자리에는 함박웃음을 머금은 캐더린 해링턴이 앉아 있다.
그녀는 신이 나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조잘조잘.
그렇지 않아도 좋은 분위기를 더 밝게 만들어 주고 계시는 중이다.
오늘은 그 동안 미뤄왔던 캐더린 해링턴과의 데이트.
연인들 사이의 그런 데이트가 아니라, 뉴욕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그녀의 부모님이 초대한 요트로 놀러가는 것이다.
“저 뉴욕 거리들을 작가님과 함께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캐더린이 아쉬운 표정이다.
사실 현 세계적 스타 배우인 그녀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자칫 사람들에 둘러싸이거나 봉변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
“작가님, 미안해요.”
“무슨 그런 말이 있어요. 지금도 너무 즐겁고 행복한데요.”
“그 대신 아빠 요트에 가서 맛있는 거 먹고 저녁에는 브로드웨이 극장 관람해요.”
“좋아요. 고마워요, 이렇게 초대까지 해서 좋은 추억 만들어 주고.”
“솔직히 더 많은 시간 함께 보냈으면 좋겠는데 작가님 시간이 워낙 없어서 그건 좀 서운해요.”
“내가 ‘회서군’ 각색을 맡게 돼서 아무래도 여유가 없네요. 미안해요. 우리 다음번에 만나면 서울이든 뉴욕이든 좀 더 많은 시간 함께 구경해요. 오케이?”
“좋아요, 오케이!”
두 사람은 손가락을 걸고 도장까지 찍었다.
환상적인 비행을 마친 두 사람.
도심 외곽의 착륙장에 내린 후 미리 준비돼 있던 리무진을 타고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초호화 요트들이 떼를 지어 정박해 있는 곳.
그 가장 중심의 어느 한 배로 우하루는 안내됐다.
“반가워요. 우리 케이트가 늘 입에 달고 살아서 꼭 보고 싶었어요.”
“환영합니다, 작가님. 어서 오세요!”
“와, 드디어 직접 이렇게 만나게 됐네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어요. 호호!”
캐더린 해링턴의 부모님과 여동생이 우하루를 세상 반갑게 맞이했다.
특히 엠마는 언니 못지않은 ‘회서군’과 ‘에이데이’ 작가의 팬.
월드 스타를 만난 것 마냥 열광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요트에서의 식사는 최고급의 신선한 재료들을 사용한 해산물 중심의 요리들로 채워져 있었다.
랍스터가 가장 싸 보이는 메뉴라니.
우하루는 이전 삶에서도 이런 미국 음식들은 한 번도 맛 본 적이 없다.
캐더린이 번 돈도 어마어마하겠지만 이미 그녀의 집안 자체가 최상류층이니 이해가 가고도 남는 바다.
네 사람은 오찬을 즐기면서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나도 그 소설 읽기 시작했답니다.”
“나도요, 호호.”
“정말요? 부디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하하, 처음에는 애들이 하도 졸라대서 손을 댔는데, 이제는 그만 읽으라고 말려도 듣지 못할 상황이 됐지 뭡니까.”
“그러게요. 밤이 되면 우리 둘이서 각자 핸드폰하고 태블릿 붙들고 ‘회서군’ 읽기에 바빠요. 전에는 없던 풍경이죠. 호호.”
세계적 대스타 집안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소설 광팬이라니.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
우하루는 행복하고 뿌듯하다.
그들은 소설만큼이나 그의 영어실력에도 관심이 컸다.
미국이나 유럽에도 한 번도 안 살아본 한국의 소년이 어떻게 이리 탁월한지.
“미국 아이비리그 졸업한 웬만한 대학생들 뺨치게 말도 잘 하네요. 쓰는 단어와 표현의 수준도 놀라워요.”
“엄마. 그러니까 영어로 소설을 척척 써내시지. 게다가 이번에 각색까지 맡으셨다구요!”
“오, 정말요?”
“놀랍군요!”
“대박!”
엠마는 저 단어를 어떻게 알았을까.
‘대박’이란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와 잠깐 움찔했다가 웃음이 나온 우하루다.
식사 후 대서양의 푸르고 맑은 바다를 바라보며 아이스티와 오렌지주스를 마시며 한가로운 오후를 보냈다.
뉴욕에 와서도 이렇게 여유를 부린 적은 거의 처음인 듯.
혼자 호텔에서 머무르며 게을러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다그쳤다.
매일 이른 아침에 일어나 규칙적으로 ‘회서군’ 원작 집필과 영문 번역을 적어도 1화 이상씩은 꼭 마쳤고.
스튜디오를 다녀오는 날 저녁에도 새로 시작한 소설을 목표한 양 마친 후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더불어 이제는 귀국 전까지 드라마 각색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적어도 5화까지는 초고를 마무리해서 제작진에게 넘기고 나서 뉴욕을 떠날 계획이다.
나머지는 한국에서 9월 말까지 마무리할 생각.
조셉 버튼의 말에 따르면 현재 스케줄로서는 10월 중순 안으로 크랭크인 될 예정이라니까 그런 진도라면 무리 없다.
지나칠 정도로 따스하게 맞이하고 베풀어준 캐더린 가족.
그들과 아쉬운 작별 후 두 사람은 브로드웨이 극장으로 향했다.
두 사람만 따로 좌석이 배치된 VIP석에서 멋지고 감동적인 뮤지컬을 관람한 후 두 사람은 아쉬움 속에 인사를 나눴다.
“작가님 한국 가기 전에 한 번 더 볼 수 있을까요?”
“저녁식사 해요. 이번엔 내가 살게요.”
“좋아요!”
그 한 마디가 그렇게 좋았나 보다.
입이 찢어질 정도로 환하게 웃어 보인 그녀는 리무진에 올라탔다.
약 보름 후.
우하루는 계획대로 ‘회서군’ 드라마 대본 5화 집필을 마쳤다.
속도에 경악하고 퀄리티에 감동한 조셉 버튼 감독은 우하루를 한 번 꼭 껴안아 줬다.
“고생 많았습니다, 작가님. 이렇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감독님 덕분이에요. 이 감사와 은혜는 잊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이제 함께 할 기회와 시간이 앞으로 더 많을 거라 너무 즐겁군요.”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우하루는 조셉 버튼 감독은 물론, 약속대로 캐더린과의 식사 약속을 지킨 후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가 태평양 상공을 가로지르고 있던 그 시간.
미국 언론은 조셉 버튼 감독과 넷플럭스가 손잡고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 드라마를 제작하기로 했다는 공식 발표 보도를 내보냈다.
[놀라운 건, 한국의 원작자가 직접 각색까지 맡기로 했다는 점입니다!]
어느새 비행기는 인천공항의 활주로에 바퀴를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