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작가 우하루-64화 (55/69)

< 64화. 역시 집밥이 최고예요 >

‘와, 집이다!’

이 편안한 느낌.

고향.

순간 우하루는 웃음이 났다.

어느새 그는 완전히 이 삶 자체와 하나가 되었다.

불과 1년 반 전만해도 왠지 낯설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미국이 그렇다니.

‘역시 난 적응이 빨라.’

캐리어를 끌고 나온 그를 출국 게이트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

도대체 어떻게 회사에서 시간을 내신 걸까.

“하루, 잘 다녀왔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잘 지내셨어요?”

우지연은 아들을 힘주어 꽉 껴안고 머리를 어루만졌다.

마치 몇 십 년간 떨어져 있다 재회한 모자지간 같았다.

비록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사실 그녀는 우하루가 한국을 떠날 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아들을 이틀 이상 떼어놓지 않았던 그녀.

아무래도 남과 달랐었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하룻밤을 떨어졌던 것도 어쩔 수 없는 출장 때문이었고, 그나마 잠도 거른 채 이른 새벽길을 달려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런데 이틀이나 일주일도 아니고 무려 한 달 반이라니.

아무리 우하루가 이제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근심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며칠 전부터 오늘자 월차를 예약했던 것이고.

만약 이마저 쓰지 못하게 된다면 아들 말대로 정말 회사를 때려 칠 생각까지 할 정도였으니.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엄마. 오늘 일요일도 아닌데 어떻게 오셨어요? 회사 괜찮아요?”

“응, 괜찮아. 하루 휴가 쓰고 왔어. 배고프지?”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은 자식이 배고플까 가장 걱정들을 하신다.

그게 가장 마음이 아픈 일이니까.

사실은 기내식에서 꽤 먹었지만...

“네. 엄마 밥 그리워서 혼났어요. 배고파요.”

“그래, 어서 가자. 내가 맛있는 거 잔뜩 준비해놨으니까.”

집밥이 먹고 싶었다는 우하루의 말은 완전 진심이다.

비록 숙소 근처에 한식당이 있었고 호텔 식사에 동양식도 자주 나왔었지만.

그래도 역시 한국에서 엄마가 해주시는 밥하고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수밖에.

오늘따라 정겹게 느껴지는 인천 앞바다를 뚫고 집으로 온 우하루는 어머니의 정이 듬뿍 담긴 식사를 배불리 하고 나서 한참 동안을 이야기 나눈 후 침대로 들어갔다.

아들이 올 새라 한껏 깨끗이 빨아 놓으신 뽀송뽀송한 시트와 이불.

그 사랑이 그대로 전해졌다.

아무래도 뉴욕에서 잤던 잠은 잠이 아니었나 보다.

그는 오랜만에 너무 편하게 딥 슬립을 취했다.

한 종지의 꿈도 꾸지 않은 채.

*****

도원일보 문화연예부.

이혁진 부장 파티션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여자.

윤예지 기자다.

“그래서. 결국 소기의 목적은 달성 못한 거네?”

“소기의 목적이 뭐였죠?”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하지? ‘에이데이’ 작가의 정체를 파보겠다는 거 아니었나?”

“에이, 부장님. 그건 제가 그러겠다고 한 게 아니라 무작정 저한테 떠맡기신 거였잖아요. 그게 어떻게 이렇게 빨리 되겠어요.”

“와, 미치겠네.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구만, 얘가.”

“네, 없는데요. 전 최선을 다하고 있고 이번 뉴욕에 간 메인 미션인 만화 박람회 취재 건은 알찬 기사들 송고해 드렸으니까요.”

“헐...”

“미션 클리어 하고 왔는데, 뭐가 문제인지 저는 잘...”

할 말이 없자 이 부장은 허리춤에 손을 얹고선 창가 쪽을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쉰다.

이내 다시금 갈굴 용기를 내보는 그가 시선을 다시 마주했다.

“이러다 이번에도 디비팼지한테 다 빼앗기려고 그래?”

“걱정 마세요. 달봉이도 아직 얻어낸 거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괜히 다른 작가님한테 집적대려다 헛발질만 날리고 있던데요, 뭐.”

“정말 거기에서 아무 낌새도 못 잡아챈 거야?”

“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만약 ‘에이데이’ 작가님이 거기에 나타났었다면 세상이 이렇게 조용하겠어요?”

“똑똑히 들어. 우리 말고 다른 데에 ‘에이데이’ 관련 특종 빼앗기면 네가 책임져야 할 거야.”

‘내가 여기 말고 갈 데가 없는 줄 아나.’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윤예지.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네? 아, 아녜요. 어떻게든 제대로 해내야겠다, 뭐 그런 말 했습니다.”

다행히 정확하게 듣지는 못했나보다.

보청기를 낄 나이는 아닌데 이 부장의 귀는 좀 어두운 편인 듯.

그녀는 거수경례를 날린 후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띠링.

휴게실에서 커피 한 잔을 뽑는 사이 울린 새 메시지 도착 알림.

“어, 뭐야? 작가님?”

반가움에 얼굴이 급 환해지며 문자를 확인하는 그녀다.

[뉴욕에서의 일 감사했습니다. 저와 제 작품의 팬이어서 고맙구요. 은혜에 보답을 해야겠죠. 머지않아 좋은 선물을 드릴게요. 기자님이라면 누구나 좋아하실 만한 걸로요.]

“뭐야. 진짜 우하루 작가님이 보낸 거잖아!”

잠깐의 호의.

그리고 20분도 될까 말까 했던 잠시의 회동.

비록 난처한 상황을 벗어나게 도움을 줬던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한참 지나서까지 잊지 않고 감사의 문자를 보낼 줄은 기대하지 못했다.

감동, 또 감동.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거기에다가...

‘선물이라고? 그것도, 기자라면 가장...좋아할?’

잠시 생각하던 그녀.

이내 눈이 번쩍 떠진다.

“특종? 드디어 문을 열고 나오시는 건가?”

환한 웃음이 피어오른다.

이 사람, 아무래도 뭔가 알고 있다.

*****

뉴욕에서 서울로 장소만 옮겨졌을 뿐.

우하루의 하루하루는 또 다시 바쁘게 반복된다.

조금 있으면 개학.

가급적 그 전에 ‘회서군’ 드라마의 대본을 전 회 마무리 지어야 한다.

조셉 버튼 감독과 넷플럭스 측에서 피드백을 보내오면 검토를 해서 수정할 건 수정도 해야 하고.

늘 해오던 루틴한 집필 작업은 당연히 매일 매일 완수를 해야 하는 일들.

우하루는 그 와중에도 하루 짬을 내 파주의 드라마 세트장을 찾았다.

바로 한창 촬영 중인 ‘무죄의 자격’ 촬영 현장이다.

“하루야!”

반가움에 더위도 잊고 땡볕에 맨발로 달려 나오는 강세영.

아, 자세히 보니 맨발은 아닌 걸로.

“세영아, 잘 있었어?”

“뭐야? 언제 왔어?”

“3일 됐어.”

“그럼 연락을 하지!”

“너 바쁜데 괜히 전화하면 방해만 될 거 같아서. 그 대신 이렇게 왔잖아.”

“너무 반갑고 좋다. 이게 정말 얼마만이야. 가만있어 봐. 근데 너 조금 탄 거 같다?”

“내가? 그, 그래?”

“너 혹시 미국 금발의 미녀 여학생들하고 함께 해수욕 같은 거 하고 온 거 아니야?”

와, 여자의 촉이란.

어떻게 알았지.

해수욕은 아니지만 초미모의 금발 캐더린 해링턴과 요트 위에서 햇볕을 쬔 건 사실이잖아.

그 덕분에 좀 탄 것일 테고.

괜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겠다.

“흠흠. 얘가 지금 무슨 소리. 한가하게 그럴 여유 없었어.”

“하긴, 그러지 않아도 이 더위에 뉴욕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면 아무래도 타겠지. 하여튼 대단하다, 우리 하루. 미국을 다 누비고 다니고 말이야. 호호. 그나저나 날 잘 잡았네.”

“왜?”

“이연하 작가님 와 계셔.”

“오, 정말?”

‘무죄의 자격’ 각색 작업을 맡은 그녀.

미국에서도 자주 메일과 메신저를 통해 의견을 교환했던 터.

약속을 하고 온 것도 아닌데 마침 얼굴을 볼 수 있게 됐다.

강세영과 함께 우하루가 세트장으로 들어가니 신주현 감독을 비롯해 배우들까지 전부 원작자를 알아보고 반긴다.

“밖에 커피하고 간식 준비해 왔으니까 드시고 하세요!”

더없이 옳은 그의 자세에 모두의 찬사가 쏟아지고.

이연하 작가는 우하루 옆에 딱 붙어서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이 부분은 어떻게 생각해? 대사를 차라리 쳐내는 게 여운이 더 남을 듯싶은데?”

“아무래도 시점 상 이 두 씬을 뒤바꿔야 하지 않을까?”

“종반부를 이렇게 가려고 하는데, 우 작가의 의견이 궁금하거든.”

결국 오후 내내 선배님의 고민을 들어줘야 했다.

더불어 신 감독까지 여러 가지 상담을 요청해오는 바람에 우하루는 여기에서도 눈코 뜰 사이가 없다.

“네가 안 왔으면 어쩔 뻔. 다들 너한테 궁금한 게 뭐가 그리 많은지.”

정작 강세영과는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 얼굴 한 번 본 걸로 끝이다.

그래도 끝나고 난 뒤 그녀의 밴에서 실컷 대화를 나눌 수가 있어 다행이었다.

오늘은 밤샘 촬영이 없어 집에 가는 길에 우하루를 데려다 줄 수 있는 것.

“개학과 함께 드라마가 시작이네.”

“떨려. 시청률 잘 나와야 할 텐데.”

“걱정하지 마. 적어도 기본은 할 거야.”

“하루 넌 늘 긍정적이고 평온하더라. 나도 좀 그렇게 초연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

“오래 살아보면 그렇게 돼.”

“뭐래. 나보다 십 년은 더 산 사람처럼 말하네.”

“하하, 그랬나? 어쨌든 네가 고생이 많네.”

중학교 때에도 그러더니 꼭 개학 즈음에 그녀의 촬영이 맞물린다.

그래서 항상 초반에는 얼굴을 보기 힘들다.

“그래, 하루야. 참, 이번 주말에 홈커밍데이라면서?”

“아, 맞아. 넌 거기도 참석 못하겠네. 선배님들이 상 주신다던데.”

“나야 힘들지. 대신 네가 타다 줘. 너야말로 주인공인데.”

“무슨 주인공은. 오래서 그냥 가는 거지. 나, 간다. 항상 조심하고 촬영 끝나면 학교에서 보자!”

“그래, 잘 자고 나중에 봐!”

밴에서 내린 우하루의 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정말 오래간만.

나극상 감독으로부터 온 문자다.

[토요일 꼭 참석 부탁해. 선배님들이 우 작가 안 오면 나 혼낸다고 난리들이셔. 나 제발 살려도.]

나극상 감독은 송하예고 동문회장이다.

그로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

비록 친근함의 강조를 위해 장난기의 양념을 살짝 뿌렸지만 강력한 요청이다.

‘당연히 가야죠.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우하루는 꼭 참석하겠다는 회신을 보냈다.

아무래도 어려울 수밖에 없는 대선배들을 만나야 하는 자리.

솔직히 내킨다거나 흔쾌히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니지만.

세상에 어떻게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나.

더구나 그 자리에는 송하예고를 졸업한 유명 감독과 작가, 연기자 분들도 오실 테니 눈도장 찍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다.

며칠 후, 개학을 일주일 앞선 주말 토요일.

우하루는 교복을 정갈하게 갖추고서 학교로 향했다.

*****

30년이면 참 긴 세월이다.

하지만 또 짧다면 짧은 시간.

지나고 보면 늘 순간이고 번개다.

송하예고를 졸업한 지 30년이 된 대선배들이 학교를 다시 찾았다.

이른바 ‘홈커밍데이’.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전 교직원들이 출근을 했고.

각 학급의 임원들 또한 행사를 돕기 위해 학교에 불려나왔다.

선생님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일절 어떤 감투도 쓰기를 사양하고 있는 우하루.

그래서 원래는 오늘도 나올 필요가 없었지만.

상을 주신다니 예의는 차려야 했다.

시간에 조금 이르게 학교에 도착한 그.

교정에 가까워졌는데 ‘문스피아’ 오 피디로부터 전화가 왔다.

- 잘 다녀오셨어요?

“네, 덕분에요. 별 일 없으셨죠?”

- 다른 일은 없는데, 좀 난감한 일이 하나 생겼네요.

“난감한 일이요? 그게 뭐죠?”

- 하아...

진짜 곤란한 문제가 생겼나 본데.

“괜찮습니다, 피디님. 말씀해 보세요.”

- 저, 후원금이 들어왔어요. 그것도 꽤나 많이요.

“네? 후원금이요?”

- 네. 사이트 통해서 독자님들께서 보내주시는 거 말고, ‘에이데이’ 팬클럽에서 모금을 해서 거금을 보냈어요. 이거 어떡하죠?

뭐야.

팬클럽이면...

“그걸 받으셨어요? 사양하시죠.”

- 팬클럽 회장님께서 하도 완강하셔서요. 거절하면 당장 물속에라도 뛰어 들어가실 기세시더라구요.

아...

‘아이고, 두야. 중경아, 널 이제 어쩌면 좋냐...’

정말,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다.

이대로 가다가 그 날이 오면.

“어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갑자기 두통이 밀려온다.

“일단 알겠습니다. 지금 제가 일이 좀 있어서요. 월요일에 상의하시죠.”

전화를 끊은 우하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오늘 행사가 열리는 송하관으로 향했다.

체육관 앞길을 지나 어귀를 돌아서려는데.

화단 위쪽 계단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 감독님?’

그는 반가운 마음에 그 쪽을 쳐다봤는데.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역시나 양반은 아닌가보네.

‘중경이도 있었네.’

그런데, 그 순간.

“네, 아버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