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우리, 살았습니다! >
순간 걸음을 뚝 멈춰선 우하루.
‘도대체 내가 뭘 들은 거야? ‘아버지’라고?’
지금 저기에는 두 사람밖에 없는데.
나중경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버지.
그는 재빨리 마이클잭슨의 문워크를 상기시키는 백스텝을 밟으며 머리를 굴렸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둘 다 같은 ‘나’씨.
게다가 나 감독이 그 또래의 아들이 있다고 했잖아.
그렇다면...
‘뭐야. 나 감독님이 중경이 아버지였던 거야?’
헐.
이건 또 무슨...
우하루는 행사장으로 가는 경로를 긴급 변경했다.
비상 상황.
좀 멀더라도 건물을 삥 돌아가기로.
‘오늘 무슨 날인가?’
아까는 나중경이 팬클럽 회장으로서 꽤 많은 후원금을 보냈다고 하질 않나, 지금은 그와 나 감독과의 관계를 알게 됐고.
“나중경 데이야?”
다시 한 번 고개가 절레절레.
근데 궁금한 것 한 가지가 있다.
부자 두 사람 아무도 자신한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점.
왜 그런 건지 궁금하긴 하지만, 어쩌다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 싶다.
굳이 이유를 알아야 할 당위성도 없고.
어쨌든, 좀 복잡하게 됐다.
‘일단 나도 모르는 척 하는 게 낫겠군. 그나저나 쟤 내 팬클럽 회장은 어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송하홀에 도착하고 나서 잠시 후.
나 감독이 들어오며 우하루를 발견하고서는 반색을 한다.
“우 작가! 미국 잘 다녀왔어?”
어머니와 절친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먼 친척이 초대해서 여행을 다녀오는 거라고 둘러댔었다.
“네. 덕분에 잘 쉬다 왔습니다. 감독님께서도 새 작품 촬영 중이시라면서요. 축하드립니다.”
“다 자네 덕분이지. ‘아임 유어 팬’이 잘 되고 나니까 그 다음부터 너무 잘 풀리고 있어.”
“감독님께서 잘 만들어주셔서 그렇죠.”
애써 아무 일 없다는 듯 편안한 기색을 꾸며 답하는 우하루.
혹시나 해서 주위를 살펴보니.
나중경은 그새 어디 갔는지 보이지를 않는다.
그는 1학년 3반 임원이다.
그래서 오늘 학교에 불려나온 것일 테니.
아마 이 건물 근처 어디에선가 행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을 듯.
잠시 후 대선배님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어느새 송하관이 꽉 차기 시작했다.
‘홈커밍데이’ 행사 개막식이 성대하게 열린 후 여러 식순이 차례대로 진행됐다.
우하루는 무대 옆쪽에서 계속 대기를 하며 구경을 했다.
다소 지루한 감이 있어서 하품이 나올락 말락 하던 그 때.
선배님들이 주는 ‘모교를 빛낸 올해의 재학생상’ 시상 순서가 되었고, 그의 이름이 불렸다.
그가 단상 위로 올라가자 홀에 갈채가 가득 울렸다.
앞쪽에 있던 선배들은 마치 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 환호를 하면서 폰을 들어 우하루의 모습을 찍어대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 후배님, 잘 생겼다!”
“송하예고를 빛내는 천재작가 우하루, 최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아임 유어 팬!”
여기저기서 울리는, 자랑스러운 후배를 향한 덕담과 찬사.
동문회장인 나 감독이 직접 우하루에게 상장과 상패를 시상했다.
더없이 밝고 환한 얼굴의 그는 굳이 첨언을 잊지 않는다.
“존경하는 선배님들. 아시다시피 우리 우하루 작가는 지금 1학년 재학 중입니다. 그런데 벌써 베스트셀러 소설을 두 권이나 기록했고 두 작품 모두 드라마로 재탄생했습니다. 영광스럽게도 그 중 하나를 제가 연출을 했구요.”
“맞아, 맞아. 그랬지.”
“원작도 최고였고 드라마도 정말 좋더군!”
“선배님들 보시기에 얼마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우셨으면 압도적으로 우리 하루 군을 수상자로 선정하셨겠습니까. 말 그대로 신이 내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후배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우하루 작가의 미래를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치 자신이 상을 탄 것 마냥 신이 난 나 감독.
저런 멘트는 수상자가 해야 할 소감 아닌가?
“보기 좋다!”
“후배님들 우정 굿이야!”
“그렇게 나란히 서 있으니까 꼭 아버지하고 아들 같은데? 하하.”
그 말에 갑자기 나 감독은 세상 환한 웃음을 머금고서는 옆에 있던 우하루를 가볍게 포옹해주며 등을 토닥였다.
다시 한 번 홀 안에 우뢰와 같은 박수가 울리고.
그의 팔에서 풀려난 우하루가 대선배들을 향해 인사를 하려 정면을 향하던 그 때.
정면 출입구 옆에서 마치 훔쳐보듯 보고 있는 누군가의 시선이 포착됐다.
‘나중경.’
그가 문에 반쯤 몸을 숨긴 채 무대를 바라보며 거기에 서 있었다.
왠지 그의 눈빛이 서늘하기보다는 조금 처연한 듯 보였다.
실제 그러했는지, 아니면 우하루가 그렇게 느꼈는지는 알 수 없었다.
*****
2학기.
1학년의 후반전이 시작됐다.
방학을 눈코 뜰 새 없이 보내서 그런지.
우하루는 뭔가 하프타임을 그냥 건너 뛰어버린 느낌이다.
다만, 한 달 반 뉴욕에서의 기억만이 중간을 갈라놓는 지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새로운 시즌을 여는 시기.
우하루에게 있어 가장 신경 쓰이는 이벤트는 바로 미니시리즈 ‘무죄의 자격’이다.
단막극인 ‘아임 유어 팬’과 달리 16부작 미니시리즈라 좀 더 무겁게 체감되는 부담감이랄지 아니면 압박감이랄지.
‘그래, 기대감이라고 하는 게 더 좋겠네.’
강세영이 출연하는 작품이다 보니 와 닿는 느낌이 더 남다르다.
그나마 각색을 맡지 않았다는 데에서 조금 편한 기분.
첫 방송을 궁금해 하며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금요일 오후의 하교길을 뚫으며 집으로 향한다.
그러다 멈칫.
경로에 위치한 서점이 눈에 띠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올린 후 들어선 그 곳.
책을 사려는 사람보다 약속을 기다리는 이들이 늘 더 많은 장소.
금요일 오후라 더 붐비는 듯하다.
국내소설 코너로 향한 그의 발걸음.
‘뭐야, 아직도?’
미국 땅을 밟고 온 것도 모자라 다시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서점의 국내소설 베스트셀러 1위와 2위는 여전히 ‘무죄의 자격’과 ‘아임 유어 팬’이 차지하고 있었다.
마치 그 동안 시간이 멈춰 서 있었던 것처럼.
‘아 놔 진짜. 저 강소울 작가님인지 작가놈인지 때문에 내가 만년 2위네.’
혼자서 재미도 없는 농담을 스스로에게 해대는 우하루.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자신의 소설 두 권이 아직도 톱을 차지하고 있다는 데 어깨가 한껏 으쓱해진다.
이내 집으로 돌아온 그는 저녁을 챙겨먹고 나서 여느 때처럼 노트북 앞에 앉았다.
요즘 밤 시간에는 ‘회서군’ 드라마 대본 집필에 집중한다.
이제 두 화가 남았다.
이 정도면 계획에 딱 맞아 들어간다.
조셉 버튼 감독은 꾸준히 문자메시지와 이메일로 제작 준비 상황에 대해 그에게 알려오고 있다.
각 대본에 대한 피드백도 함께.
우하루는 어머니가 퇴근을 하신 후 함께 TV 앞에 앉았다.
오늘은 바로 디데이!
‘무죄의 자격’ 1화를 본방 사수하기 위해서다.
“세영이가 처음부터 나오니?”
“네. 1화부터 등장이에요. 비중이 꽤 돼요.”
“그래? 저번 드라마에서는 3화인가 4화 지나면서 갑자기 안 보이더니.”
“아, 작년 사극이요? 그건 그랬죠. 아역으로만 나온 거라서.”
“그랬구나.”
이사 때 봤던 강세영.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다 알아보는 얼굴.
아역부터 꽤 유명했기에 우지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 실물은 처음 보는 거였다.
나름 연예인임에도 목장갑에 면바지 차림으로 달려와 집 정리를 도와주고 짜장면을 맛있게 흡입했던 그녀의 귀여우면서도 소박한 모습을 우지연은 마음에 꽤나 들어 했다.
그래서 이번 드라마는 아들의 작품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그녀에 대한 관심이 크다.
드디어 드라마 시작.
원작 소설은 주인공 시점의 의도적인 건조함이 특징이다.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감각적인 부분을 절제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에 반해 이번 각색은 대중적 흥미와 인기를 감안해 다소 자극적이고 우울한 분위기를 첨가하도록 기획이 됐다.
그런 의도는 영상 첫부분부터 그대로 드러났다.
이는 우하루도 동의했던 부분.
‘회서군’은 소설 특유의 맛과 특이점을 그대로 갖고 가고 싶은 반면, 이 작품은 애초에 그럴 의도가 없었다.
소재가 주는 메시지 자체가 중요했기에 표현에 있어서는 다양성과 변형의 즐거움을 경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스테리 서스펜스 스릴러 장르의 1인자 손에 맡기는 거면 믿을 수 있었고 스스로도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연하 선배님의 역량이라면 가능할 테니까.’
초반, 스토리의 정황을 시청자들이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들이 잠시 나오고.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의례 그렇듯 첫 클라이막스를 위한 빌드업을 다지는 지점의 간격이 꽤 긴 편이 보통이지만.
이 작품은 그런 상식적인 전개를 과감히 깨버린다.
[뭐지? 벌써 이런다고?]
다들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로.
예상 지점보다 훨씬 일찍 과감하고 스피디한 사건이 발생되고 급격히 전개가 불타 오른다.
사실상 그런 구성의 패턴 측면에서는 꽤나 웹소설의 특성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데.
우하루는 그걸 의도적으로 이 소설에 적용시켰다.
‘회서군 덕분에 스킬이 늘었다고도 할 수 있지. 그래서 고맙고.’
공중파에 비해 다소 표현의 허용 범위가 넓은 케이블.
그 경계를 미묘하게 타고 흐르자 우지연은 조금 놀란 눈치다.
약간 섬뜩한 장치도 있고.
“엄마. 보기 불편하면 눈 가려줘요?”
“얘는. 내가 애니?”
그래도 다행인 건, 야한 장면은 안 나온다는 것.
다만 앞으로 그런 부분이 전혀 없는 게 아니어서, 어떻게든 그 때를 대비는 해야 할 것 같다.
첫 편 내내 휘몰아치는 긴장감.
각색도 훌륭하지만 감독의 연출미도 뛰어났다.
음향효과를 비롯해 각종 테크닉도 범상치 않아 보였고.
TVNT에서 입술 꽉 깨물고 투자를 한 티가 났다.
마침내 1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원작, 강소울(우하루)]
그의 입에서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결국 저렇게 적었네.’
제작진은 원작자의 필명과 본명을 함께 표기하고 싶어 했다.
아마 ‘강소울’이 ‘우하루’에 비해 인지도나 주목도 면에서 다소 부족하다고 여겼을 터.
본명을 같이 보여주면 시청자들이 하나라도 더 관심을 가질 거로 예상한 모양이다.
결국 우하루는 그들의 의견을 수용했다.
그 순간, 앤디 오스틴이 말한 ‘우하루’라는 이름의 브랜드 파워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이 난다.
*****
‘무죄의 자격’ 첫 화가 끝난 시점의 TVNT 드라마국.
모든 관계자들은 빡빡한 긴장감과 초조함을 가득 안은 채 하나같이 눈이 벌게져 있었다.
특히 주한영 신임 국장은 극도의 스트레스에 놓여 있는 상태다.
부임하고 나서 그가 기획한 첫 드라마.
거기다 본인이 직접 선택한 작품이다.
만약 이게 최근의 다른 드라마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성적을 낸다면 그의 남은 임기는 보장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구원의 임무를 띠고 투입됐는데 패전처리 투수 신세가 되는 셈.
“어땠어? 손 차장.”
“전 너무 좋았는데요. 일단 스토리 자체야 당연히 흠 잡을 데 없고요. 신 감독님께서도 원작의 묘미를 나름 잘 살려내신 것 같습니다.”
“박 차장은?”
“저도요. 처음부터 틈 안 주고 쉴 새 없이 몰아치니까 장난 아닌데요. 최근 우리 드라마에서 아쉬웠던 부분들을 넘어선 그런 느낌이랄까요. 다음 화에 대한 기대감도 크고요.”
직원들의 평가가 좋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관계자 입장.
시청자들의 눈과 마음에는 어떻게 보였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내일 오전 시청률이 나올 때까지는 말이다.
“만약 5프로 밑으로 뜨면 우리 다 한강 가는 겨. 각오해!”
자기 혼자 가면 될 걸, 왜 꼭 쫄따구들을 끌고 가려는 건지.
다들 은근히 불만이다.
“저기, 첫 화가 그 정도면 나쁘지는 않은 건데요. 2화에서 더 치고 올라갈 수도 있구요.”
“그런 식으로 희망고문 당한 게 벌써 몇 편째냐. 오히려 떨어진 게 더 많잖아. 첫 끗발이 개 끗발이 아니라 첫 끗발이라도 높아야 나머지 끗발도 기대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거야.”
다들 입 꾹.
자칫 내일 아침에 대한민국 인구수가 몇 명 감소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에 그들의 입에 침이 마른다.
‘아우, 살자 마렵네. 도망이라도 가야 하는 건가.’
당연히 예상한 바였지만, 오늘 밤은 퇴근 포기.
뭐, 방송국 일하면서 한두 번도 아니었지만 날이 날인만큼 다들 잠도 안 온다.
초조하게 이 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드라마국 직원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졸음은 찾아오는 법.
어느새 한두 명씩 의자와 소파에 기댄 채 코를 골기 시작하고.
국장실에도 인기척이 없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방이 훤해진 사무실에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대리님, 차장님! 우리 한강 안 가도 될 것 같습니다!”
*****
[다시 한 번 통한 우하루 작가의 힘! ‘무죄의 자격’ 돌풍 시작!]
[반짝 신인? 입 닫지 못해? 우하루 신 납신다!]
[깜짝! TVNT 구세주는 역시 우하루 작가였다.]
[소설 베스트셀러가 드라마 베스트셀러를 만든다!]
[‘무죄의 자격’ 첫 방송, 10.7프로로 동시간대 전체 1위!]
[TVNT 드라마가 10프로를 넘었다고? 그것도 첫 화에서? 아, 우하루 작가? 그러면 말 되지!]
[KTBS를 살리더니, 이번에는 TVNT까지. 우하루 파워가 방송을 흔든다.]
토요일 이른 아침.
베이컨에 토마토 슬라이스까지 한껏 품은 토스트를 입에 문 우하루의 손에 들린 태블릿에 나타난 기사 제목들이다.
“다행이네. 첫 화에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군.”
워낙 최근 1년 반 넘게 시청률을 죽 쑤고 있던 채널.
5프로만 넘겨주면 별도 달도 따주겠다며 말도 안 되는 구애를 펼쳤던 주 국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쯤 어떤 표정일지 궁금했다.
원래 사람이란 욕심이 한도 끝도 없는 법.
11프로가 안 나왔다며 아쉬워하고 있을지 누가 아나.
물론,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우하루는 오히려 강세영의 반응이 더 궁금했다.
좋아서 방방 뛰고 있으려나.
‘무죄의 자격’ 기사들을 다 훑어본 후 그는 미국 신문과 방송들로 옮겨갔다.
혹시나 ‘회서군’ 드라마에 관한 어떤 뉴스가 뜨지 않았는지.
한참을 살펴보고 있는데.
그의 전화가 진동을 한다.
“뭐야? 미국?”
번호를 보니 케더린 해링턴이다.
귀국한 후 통화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SNS도 안 하는 우하루 때문에 오직 메시지로만 안부를 주고받았었는데.
갑자기 ‘국제전화’라고?
“케이트! 반가워요! 어쩐 일이에요?”
- 작가님...
그런데 목소리가 좀...
흠뻑 젖어있다.
“울어요? 무슨 일 있어요, 케이트?”
우하루는 들고 있던 토스트를 접시에 내려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