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운까지 따라주네 >
“만약 이거 다른 곳에 빼앗기면 다들 각오하세요. 참고로, 영어판 판권은 본사인 ‘빌햄’에서 이미 TF팀까지 구성해서 발 벗고 나섰습니다. 정신들 바짝 차리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 저희도 특별팀 바로 구성하겠습니닷!”
별로 미덥진 않지만, 갈아 끼우기 전까지는 맡겨 봐야지 어쩔 수가 없다.
‘보아하니 이번에도 내가 또 나서야겠군. 그나저나, ‘에이데이’ 작가님은 어떻게 만나보나.’
산 너머 산이다.
*****
이제 슬슬 시원한 바람이 교정을 스치기 시작한다.
늦여름의 기운이 완연히 물러나고 본격적으로 가을이 찾아들고 있는 모양이다.
점심을 먹고 난 우하루는 전화 통화를 위해 학교 뒤뜰로 나왔다.
“네? SCBS에서요?”
- ‘그것을 알려주마’ 아시죠?.
“알죠. 거기에서 취재 요청이 들어왔었다구요?”
- 네.
“아니, 연예정보나 교양 프로그램도 아니고 사건사고 추적 프로그램이 무슨 일로...”
-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회서군’ 인기가 심상치 않으니까 이번에 특별편을 편성했나 봐요. 그 프로가 주로 사건이나 사회적 이슈 같은 걸 파헤치긴 하지만 간혹 어떤 큰 관심사에 대해서도 집중 기획 보도를 하기도 해요. 사실 ‘회서군’이 이슈는 이슈잖아요. 놀라우리만치 미디어에서 무관심해서 그렇죠.
오 피디의 부연설명이 이해가 가기는 하는데.
그래도 왠지 별로 내키지는 않는다.
“피디님께서 고생 많으십니다.”
- 일단 주말에 방영되는 걸 한 번 보시죠.
최근 들어서 부쩍 ‘에이데이’와 ‘회서군’을 찾고 파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그런 걸 보면 정말 대중들의 관심이 급격히 커지고 있구나 하고 느껴지는 우하루다.
전화를 끊고 난 후 오전에 들어온 다른 메시지를 찬찬히 훑어보며 거닐던 그 때.
교정 맨 끝 쪽의 화단 근처에 일단의 무리들이 보인다.
가만히 보니 눈에 띠는 한 사람.
3학년 민서아 선배의 모습이다.
‘아, 촬영 중인가 보네.’
그가 ‘티켓 투더 마스’ 대본을 준 조.
졸업작품 제작이 시작됐나 보다.
잠시 쳐다보고 있던 그가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우하루!”
어느새 발견을 했는지 그를 부른다.
모른 체 가기는 애매한 상황.
“안녕하셨어요?”
“하루야. 잘 지냈어?”
“네, 선배님들.”
“네 덕분에 우리 조 촬영 정말 잘 하고 있어. 진짜 고마워.”
매번 만날 때마다 고맙다니까 오히려 자신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어차피 서로 이득이 되는 건데 뭘.
“이런 말 다른 조 없으니까 하는 건데, ‘티켓 투더 마스’ 이 작품이 최고야. 수준도 재미도. 게다가 연기력을 보여주기에도 너무 적합하고.”
“만약 우리 조가 1등 하면 그 공은 다 하루 네 거야. 입에 발린 소리 아니고.”
“나도 격하게 공감! 하하.”
그렇게 평가를 해주니 우하루도 뿌듯하다.
이들 중 몇 명은 분명 배우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리고 누가 아나.
그 중에 톱스타가 나올지.
그렇게 된다면 우하루는 미래의 명배우와 꽤나 특별한 연을 맺게 되는 셈이다.
인생은 그런 식으로 채워져 가는 것이다.
“제가 이 소설을 쓰면서 이걸 영상으로 만든다면 이랬으면 좋겠다, 생각한 팁 하나가 있는데요.”
후배의 말에 다들 반색.
천재 작가의 의견을 자존심 때문에 마다할 바보 선배들은 아니다.
“오, 그래? 뭔데? 혹시, 들어볼 수 있을까.”
“그냥 참고만 하세요. 이 소설이 비록 과거에 못 박힌 시점은 아니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향수랄까 추억이랄까, 그런 걸 느낄 수 있으면 감동이 배가 될 거 같아요. 그래서 장면들 중 일부를 예전 비디오테이프...아시려나.”
“알지, 당연히.”
역시, 배우 지망생들이라 영상의 유물들도 잘 알고 있구나.
“그런 느낌의 노이즈 이펙트를 좀 주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흑백도 섞고요. 오랜 사진처럼 말이죠. 아, 너무 과하면 안 되구요, 좀 절제되게 적절한 부분에만요. 예를 들면 이런 곳...”
그는 대본을 뒤적이며 자신이라면 그런 효과를 주고 싶은 장면들을 짚어 보여줬다.
“오, 너무 좋겠는데. 우리가 왜 그런 생각을 못했지?”
“맞아. 이거 너무 괜찮은 아이디어인데?”
“한 번 해볼게. 이렇게 맨날 신세만 지니 어쩌지?”
“제가 영상연출이 전공이잖아요. 아무튼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화이팅하세요!”
우하루가 반으로 돌아간 후.
“우리 조 진짜 하루 덕을 너무 많이 본다.”
“그러니까. 작품 받은 것만 해도 어딘데, 이런 코치까지 받고.”
“진짜 이 팁 너무 좋은데? 이런 효과가 우리 연기의 결과물을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게 하거든.”
“그걸 감안해서 그 장면들은 카메라 움직임을 조금 더 자연스레 주면 좋을 것 같다.”
“오케이. 그렇게 하자. 그리고 우리 작품 완성되면 맨 먼저 우하루한테 시사하자.”
“좋네. 그게 고마움에 대한 예의지.”
조원들에게 한 마디 덧붙이는 민서아.
“너희들, 나중에 하루가 우리한테 해준 거 절대 잊으면 안 돼.”
그녀의 말에 모두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하지! 이 인연과 고마움은 영원히 가져가야지.”
*****
토요일 저녁.
글을 쓰고 있던 우하루는 거실에서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네? 부르셨어요?”
“이거, 혹시 너하고 관련 있는 거 아니니?”
켜져 있는 TV를 보니 시사 프로그램 하나가 시작 중이다.
바로 ‘그것을 알려주마’.
“아차. 내가 까먹고 있었네. 맞아요. 오늘 웹소설 다룬다네요.”
그는 어머니 옆에 앉았다.
[여러분, ‘웹소설’이라고 아십니까? 아마 젊은 층이나 청소년이라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실 겁니다.]
무슨, 웹소설이 인디밴드도 아니고.
너무 마이너한 느낌으로 시작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웹소설 플랫폼 ‘문스피아’라는 사이트에서 역대 최고의 흥행 성적을 거두고 있는 소설이 있습니다. 바로 ‘에이데이’라는 작가의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라는 작품입니다.]
뭐지.
이렇게 노골적으로 작가명과 작품명을 언급한다고?
이거 너무 한 거...
...긴 뭘 너무 해.
너무 좋잖아.
일단 시작은 합격이다.
리포터는 우리나라의 장르문학과 웹소설 시장에 대해 간략하게 보도를 한 후 ‘회서군’을 다시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나왔다, 저 멘트.
자칫 섬뜩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뭘 말하려고 저러는 거지.’
논조가 궁금하다.
괜히 이상한 데로 흐르는 건 아닌지.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이 웹소설이 지금 미국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 우리는 그걸 알아야겠습니다.]
아, 왠지 ‘회서군’의 미국 붐이 꼭 무슨 사건처럼 느껴진다.
이게 같은 메시지라도 매체의 특성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는 효과다.
[현재 이 작품은 미국 내 젊은 층과 소설 애호가들 사이에서 신드롬이라 불릴 만큼 인기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 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겠습니다.]
한참 동안 ‘회서군’의 미국 인기에 대해 다양한 곳에서 취재한 내용이 나온다.
일반인들의 인터뷰와 더불어 캐더린 해링턴이 ‘브래든 쇼’에서 이 작품을 언급했던 장면, 그리고 조셉 버튼 감독의 반응까지.
꽤나 자세한 리포트였다.
“저 정도로 인기가 있어?”
우지연마저 놀란다.
그런데 우하루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국에서 저 정도로 미국의 웹소설 붐을 취재한 보도는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아니, 주류언론에서 웹소설이란 걸 다룬 기억이 없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런데 말입니다!]
또 저 멘트.
오금이 저린다.
[바로 미 대륙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 작품의 작가. 이미 한국 웹소설 독자들 사이에서 전설로 불리고 있는 그 작가의 필명은 ‘에이데이’.]
나왔네.
아마 오늘 메인 타깃은 이거였을 거다.
“네 이야기지? 필명.”
이제 어머니도 훤히 아시네.
“맞아요.”
“대단하네, 저런 프로에도 네 이름이 나오고.”
“그러게 말이에요. 어떤 내용인지는 끝까지 봐야 알 거 같아요.”
[그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알고도 공개하지 않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추적에 들어갔습니다.]
추적에 들어간다고?
갑자기 왜 폭주하지?
설마...
“뭔가 너란 거 알아낸 거 아니니, 저 사람들? 그래도 괜찮은 거야?”
“하하, 네. 뭐 큰 문제는 없어요. 다만, 계획에 약간 차질이 생길 뿐이죠. 걱정하실 일 아녜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찝찝함을 지울 수는 없다.
공중파 방송이라면 무게감이 다르니까.
귀가 쫑긋 섰다.
[여기는 미국 뉴욕.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를 드라마로 제작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 넷플럭스 본사입니다.]
‘뭐야, 저기까지 간 거야?’
그 다음이 더 가관이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에이데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좇고 있다는 두 사람의 기자와 인터뷰.
여자 한 명과 남자 한 명인데.
딱 봐도 그녀는 도원일보 기자 윤예지였다.
‘그렇다면 다른 저 남자는 디비팼지의 마달팽이겠군. 아, 마달봉이었나?’
괜히 피식 웃음이 나는 우하루다.
이름이 아무리 해도 입에 익지가 않는다.
- 저도 열심히 추적을 하고 있지만, 전혀 밝혀진 바가 없어요. 그 작가님이 실제 존재하시는 건지도 의심이 생길 정도로 말이죠.
윤 기자는 자신도 답답해 죽겠다는 톤으로 물음에 답했다.
마달봉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이번에는 다시 국내.
문스피아와 네온을 찾은 피디들은 역시 해답을 얻지 못했다.
[결국 우리는 ‘에이데이’ 작가를 찾아내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뭔가 있을 것 같아 보였던 기세.
하지만 결과는 허무했다.
우하루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느새 그의 자세가 편안해졌다.
추적하는 자를 따돌린 이의 여유로움이랄까.
‘그러니까, 내 정체를 알아낸 듯 지난 주 예고편에 어그로를 끌어놓고 정작 내용의 대부분은 회서군이 미국에서 통하고 있다는 내용뿐이군. 아주 좋아!’
하아, 방송국 놈들.
이럴 줄 알았지.
그러던 와중에 나오는 한 멘트.
“사실 이 작품은 비록 웹소설로 탄생해 그 문법과 히트 조건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이제 세계 진출을 한만큼 그 방대한 세계관과 작품성은 ‘그 수준을 넘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세계적인 판타지 소설로 인정받은 셈입니다.”
응?
이건 또 무슨 소리.
우하루는 기분이 씁쓸하다.
저 말의 논리인즉슨.
이제 ‘회서군’이 웹소설보다는 훨씬 수준이 높아졌다라는 의미.
도대체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그 수준을 넘어섰다면, 웹소설의 수준은 뭐고 지금 내 작품은 도대체 무슨 수준이란 거야.’
여전히 웹소설을 은근히 깔아뭉개고 있는 행간의 의미다.
어이가 없었다.
물론 이렇게 자진해서 홍보를 해주는 건 고맙긴 한데.
장르소설에 이어 웹소설 역시 낮추 보는 저 시각은 여전한 게 현실이다.
‘그런 시각 때문에 진즉 관심을 가져주긴 힘들었던 거였구나.’
막상 문스피아에서 히트할 때에는 별반 눈길 한 번 안 주다가 해외에서 반응이 오니 이제야 난리를 치기 시작하는 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다뤄주는 게 또 어디인가.
해외의 힘을 빌린 셈이지만.
다 그렇게 출발하는 거다.
‘그래. ‘회서군’이 세계적으로 성공하는 건 비단 나의 문제에 국한되는 게 아니야. 이 사회가 가진 고정관념에도 변화를 일으키는 일일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드니 드라마가 꼭 히트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부디 멋지게 한 방 날려 주기를!’
어느덧 마무리가 가까운 시간.
[비록 오늘 ‘에이데이’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분명 그의 천재적 상상력과 천부적 창작력은 세계에 족적을 남기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가 장차 어디에선가 베일을 벗고 세상에 나올지, 아니면 영원히 그 정체를 숨길 것인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려주마’도 당신을 응원합니다.]
마지막 멘트가 끝났다.
우하루는 고개가 갸우뚱.
‘뭐지? 저러고 나중에 나한테 홍보비 요청하는 건 아니겠지?’
불안했던 마음은 깨끗이 가시고.
도대체 저 방송이 왜 나와 내 작품을 광고해 준 걸까.
그런 의문만 남았다.
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솔직히 이 정도면 광고비로 따져도 어마어마한 비용인데.
15초에 몇 천만 원으로 계산해도...
‘이거 몇 십억 원짜리 아니야?’
이러게 고마울 수가.
물론 기획 의도는 우리나라의 웹소설의 국위선양과 더불어 그 작가의 정체를 파헤치려던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작가와 작품의 홍보만 엄청 해준 셈.
그쪽 의도는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우하루만 좋은 일이 됐다.
‘아무리 봐도 요즘 내가 운이 좀 좋아. 다음 소설 드라마는 저 방송국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봐야겠군. 최소한의 보답은 해야지.’
다시 방으로 돌아온 우하루는 메일이 하나 와 있는 걸 발견했다.
조셉 버튼 감독으로 부터 온 편지다.
**
보내주신 대본들은 너무 완벽합니다. 더 이상 수정할 부분은 없을 듯하고, 피치 못하게 촬영 중 변경이 필요한 내용은 따로 의견을 묻겠습니다.
기쁜 소식 하나.
일정이 확정됐습니다.
크랭크인은 다음 달 1일이고, 작품 공개 시점은 내년 4월 1일로 잠정 결정됐습니다.
넷플럭스 사정에 따라 약간의 변동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에이데이’ 작가님의 탁월한 역량과 우리 모두가 애정하는 ‘회서군’의 뛰어난 작품성과 대중성이 이를 가능케 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제작발표회에서 다시 만나기를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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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드디어 확실한 각이 나왔구나!”
일정까지 픽스되니 이제 현실감이 느껴진다.
드디어 내년 봄이면 우하루의 실질적인 첫 작품이 드라마로 만들어져 세계 팬들을 만나게 된다.
리얼 웅장해지는 가슴.
조셉 버튼 감독에게 답신을 띄웠다.
‘보내기’ 버튼을 누른 후 뛰는 심장을 진정시킨 우하루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을 알려주마’를 시청하느라 중단했던 ‘회서군’ 새 화 집필 작업이다.
잠시 후, 여전히 놀라운 집중력으로 한 화를 가뿐하게 마친 그는 한껏 상기된 기분으로 룰루랄라 ‘문스피아’를 열었다.
“자, 업로드를 해볼까나.”
그런데...
“어? 왜 이래?”
사이트가 안 열린다.
아무래도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뭐지? 왜 이러는 거야?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었는데.”
다른 사이트들은 빠르게 들어가지는 걸 보면 랜선 문제는 아니다.
힘겹게 돌아가던 로딩 서클이 멈추고.
이내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현재 트래픽이 허용치 이상으로 폭주하여 잠시 접속이 원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폭주’라고?
“아,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