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성공의 보증수표 >
이전에 딱 한 번 느려진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들어가지도 못했던 경우는 없었다.
자정이 지난 시각이라 누구에게 하소연할 데도 없고.
잠시 멍하게 새로 고침 키를 몇 번 연타하던 우하루.
냉장고에서 물을 시원하게 한 사발 들이킨 후 돌아와 보니.
“오, 된다!”
다행히 정상가동!
복구가 된 모양이다.
“한밤에 무슨 일로 서버가 기절을 했던 거야? 설마 또 그러거나 느려진 건 아니겠지?”
그는 혹시나 또 그럴까 봐 완료분을 빛의 속도로 업로드했다.
큰 이상 없이 말끔하게 올라간 ‘회서군’의 새 글 예약.
확인 후, 이번에는 ‘겟픽’에 연재할 영문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다음 날.
간밤의 서버 다운의 원인을 오 피디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 SCBS ‘그것을 알려주마’ 끝날 즈음부터 갑자기 접속이 폭발적으로 몰렸어요. 전혀 예상 못한 상황이었죠.
“그랬군요.”
- 이미 감 잡고 계시겠지만, 폭증한 트래픽은 ‘회서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는 몰랐지만 밤늦게 확인을 했다.
무료 회차들의 접속량과 유료분 구매수가 엄청 늘었다는 것을.
그 많은 사람들이 ‘에이데이’와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그 시간에 들어온 것이다.
“당연히 그 프로 때문이겠죠?”
- 다른 이유는 없으니까요. 심지어 우리 ‘문스피아’ 신규 가입자수도 다른 날 동시간대에 비해 몇 배 이상 뛰었습니다. 즉, 새로운 분들의 관심이 유도된 거다, 그렇게 분석이 되는 거죠.
“역시 그렇군요. 인지도를 높이는 데 SCBS가 큰 역할을 했군요.”
- 그러게 말입니다. 일반 대중에게 홍보 대사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네요. 하하.
‘회서군’이 처음 유료화했을 때보다도 하루 수익이 더 올라있다.
이게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지난 번 ‘겟픽’을 통해 미국 진출 소식이 떴을 때.
그리고 드라마화 공식 발표가 났을 때.
한 번씩 급격히 출렁거렸던 선작수와 판매량.
이번에는 그것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이런 식이면 봄에 드라마 공개될 때 또 한 번 폭발적 추이가 나오겠네.’
이렇게 되니 ‘회서군’은 또 하나의 기록을 써내려가고 있는 셈이다.
원래 연재가 진행될수록 당연히 연독률과 구매수는 하락하는 게 이치.
하지만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는 그런 그 동안의 불변의 법칙의 유일한 예외가 되어가고 있다.
*****
어느덧 12화를 넘긴 ‘무죄의 자격’은 시청률이 20프로에 육박하고 있다.
TVNT 드라마국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
“나머지 4화 동안 마의 20프로에 도달도 가능하겠어요.”
“주인공이 본격적으로 악에 대한 응징에 나서고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다음 주 일요일이 그 시점으로 본다, 난.”
희망은 현실이 될 분위기다.
고정 시청자층을 보유하고 있는 지상파 주말드라마를 제외하면 전 채널 단연 탑이다.
이로써 우하루는 단편으로 반짝한 작가라는 극히 일부의 악의에 찬 억지 험담을 단박에 우주 밖으로 날려버렸다.
어느새 촬영이 마무리되고, 강세영이 아지트에 나타났다.
“귀환을 축하한다!”
“고생했어, 우리 세영이!”
“힘들었지?”
그녀를 열렬히 맞이하는 절친들.
2학기 개학을 하고 거의 반이 흘러서야 제대로 모이게 됐으니 그 반가움은 더욱 남다를 수밖에 없다.
“정말 고생한 건 이연하 선배님이야. 하루 네 원작에 결코 누를 끼칠 수 없다, 그런 집념으로 얼마나 열정적이시던지. 글쓰기에만도 바쁜 분이 자주 촬영장까지 누비시고.”
“나도 알지. 거의 매일같이 전화 통화했는데. 내가 너무 고마워서 조그마한 선물도 보내드렸어.”
“정말? 잘 했다.”
“조만간 식사도 함께 하려고. 너도 같이 가자.”
“껴 주면 고맙지.”
이야기는 어느새 ‘회서군’으로 넘어간다.
“영화 한창 촬영 중이겠다.”
“그렇지.”
“하루 너, 몸은 여기 있어도 마음은 거기 가 있겠다.”
“뭐 그럴 정도는 아니지만 항상 궁금하고 가보고 싶기도 하고, 그렇지.”
“각색까지 네가 맡았으니 애정이 얼마나 남다르겠어. 참, 캐더린 해링턴이 여주라면서. 혹시, 네 입김?”
“내가 그럴 위치냐? 한국에서 너 하나도 어디 못 꽂는 사람인데. 미국에서? 그게 가능하다 생각해?”
“하긴.”
“그리고 난 그런 식으로 배우가 결정되면 절대 안 된다는 주의라서 누가 칼 들고 협박해도 아닌 건 아니야.”
“역시. 우리 하루는 달라.”
간만에 다시 뭉친 그들은 오랜만에 피자집으로 몰려가서 배불리 저녁을 해결한 후 노래방에서 정신없이 목을 푼 다음 헤어졌다.
다음 날.
점심 식사 후 여유 시간에 민서아가 우하루를 찾아왔다.
그녀가 데리고 간 곳은 학교 소극장.
같은 조 아이들이 모두 모여 있다.
“너한테 가장 먼저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
그들에게 준 대본, ‘티켓 투 더 마스.’
제작이 완료됐다.
편집본까지 완성이 된 후 가장 먼저 우하루에게 시사를 하자던 자신들의 약속을 지키려는 것이다.
15분짜리 단편.
원작도 짧기는 하지만 그걸 조금 더 압축해서 각색한 다음 넘겨줬었다.
연기가 조금 더 강조될 수 있도록 대사는 오히려 약간 늘려줬고.
선배들은 그런 우하루의 배려를 충분히 알아챘고, 그런 세심한 정성에 보답하기 위해 작품 분석부터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결과물에 충분히 반영이 됐다.
‘어? 내가 조언했던 아이디어도 채택을 했구나.’
지난 번 교정 뒤뜰에서 만났을 때 제안했던 영상기법.
그것도 반영해 편집이 이루어진 걸 볼 수 있었다.
가장 핵심요소는 선배들의 연기력.
그들은 연기전공이기에 작품 자체보다는 그들의 연기력이 돋보일 수 있도록 만드는 각색의 묘미가 필요했다.
이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우하루는 그걸 감안해 작업을 해서 전달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의도를 못 살린다면 치명적이었을 터.
하지만, 예상했고 기대했던 대로 현재 졸업반 중 가장 실력자들이 모인 조답게, 우하루의 장치를 그들은 충분히 활용해냈다.
대부분 바로 영화나 드라마에 투입되어도 충분한 실력들이었다.
‘발음도 정확하고 명료하네. 감정선의 맺고 끊음도 만족스럽고. 자칫 오버하지나 않을지 좀 걱정이 됐었는데.’
꽤나 만족스러운 작품.
며칠 후 발간될 그의 첫 단편집에 실릴 이 작품을 영상으로 만나게 되니 느낌이 남다르다.
영화가 끝나자 그는 곧바로 일어나 소극장 안이 크게 울리도록 박수를 쳤다.
단 한 명의 관객과 그보다 몇 배수의 배우들.
숫자적으로는 거꾸로 된 느낌이지만 우하루는 수백 명 분 이상의 갈채를 뿜어내줬다.
“정말 너무 좋습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어요.”
아주 미세하게 조미료를 쳤지만 99프로는 진심이다.
그러자 다들 감격스러운 표정.
“우리가 연기하는 데 너무 좋았어. 작품 자체가 캐릭터들을 다 골고루 돋보이게 만들어 주니까 힘이 솟더라.”
“하루야. 정말 네 도움은 우리 모두 평생 잊지 않을 거야.”
“맞아. 이제 내가 가장 사랑하는 후배는 바로 너다!”
“너 연서대 오면 안 될까? 나 거기 연영과 갈 건데?”
“작품 때문에 우리 연기가 빛날 수 있는 것 같아. 이런 기회를 줘서 정말 고맙다, 우하루!”
선배들은 너도나도 후배에게 고마움을 드러냈다.
더없이 훈훈한 광경.
모든 학교에서 이런 선후배지간의 장면이 연출된다면 아마 엄청 아름다운 세상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들의 깊은 마음이 듬뿍 담긴 애정 표현에 우하루도 마음도 찌릿하다.
보름 후.
3학년 연영과 연기전공 선배들의 조별 작품 발표회가 열렸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 결과가 나왔다.
“축하해. 3조. 1등이다!”
민서아의 조.
조원들이 벌떡 일어나 얼싸안고 자축한다.
다른 친구들은 부러움의 시선을 쏘아대고.
하지만 축하의 박수도 잊지 않는다.
“연출도 좋았고, 연기들도 수준급이었지. 1등할 만 해.”
“이미 원작에서 기본 점수를 먹고 들어가서 너무 유리했지. 대사들 봐봐. 주옥같잖아. 그 짧은 길이에 탄탄한 구성은 말할 것도 없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전개, 거기에 어느새 가슴 속에 콱 박히는 메시지까지. 가벼운 성장 청춘 드라마면서도 너무 깊이 있고 아름답지 않냐?”
“인정. 작품이 연기를 더욱 빛나게 했지. 물론 그걸 다 잘 받아먹었고.”
“제비뽑기 잘못한 우리 잘못이지, 뭐. 그것도 실력이니까 할 말은 없고. 아무튼 민서아하고 쟤네들은 좋겠다. 부럽다!”
“결국 우하루는 보증수표네. 성공의 보증수표!”
그 날 오후.
같은 제목이 새겨진 우하루의 첫 단편집이 전국 서점에 조용히 깔리기 시작했다.
*****
캐더린 해링턴에게서 메일이 도착했다.
‘회서군’의 촬영이 시작되던 때, 마음이 들떠서 보내왔던 그녀의 편지에는 환한 미소를 장착한 초미모의 얼굴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이후, 바쁜 일정에 뜸하던 연락이 드디어 다시 온 것.
**
여기는 스웨덴입니다.
캐나다에서 보름, 아이슬란드에서 일주일을 거쳐 이 곳에 어제 도착했어요.
다행히 세 곳 모두 그렇게 춥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뉴욕에 비해서는 당연히...흐극.
그래도 순간순간이 너무 재미있어요.
조금씩 조금씩 ‘회서군’을 그려가고 있다는 데 가슴이 뛰고요.
작가님께서 완벽하게 그려주신 멋진 밑그림에 열심히 색칠을 해나가겠습니다.
사진 몇 개 첨부할게요.
작가님한테만 보내드리는 거니까 몰래 보세요, 호호.
촬영 끝날 때까지 당분간 SNS는 금지입니다.
뭔가 누출될 우려가 있으니까요.
이 늦가을이 가고 겨울이 또 가면 봄기운이 만연할 때 뉴욕에서든 서울에서든 다시 만날 수 있겠죠?
그 때가 기다려지네요.
앗, 추신.
잊은 이야기가 있어요, 별 건 아니지만.
연기 시점이 헷갈릴 수 있기에 전 출연자 회서군 연재소설 새 글 읽기 금지령이 떨어졌어요.
그게 맞는 거죠, 당연히.
그렇다고 서운해 하지는 마세요.
촬영 끝나고 몰아서 볼 거니까.
그 때에는 밤잠 꽤나 설치게 되겠죠.
굿나잇, 작가님!
아차, 거긴 밤이 아니겠구나. 크크.
**
메일을 읽다보니 마치 옆에서 그녀가 조잘조잘 대는 기분이 들어 웃음이 나오는 우하루다.
역시나 이번에도 사진이 첨부돼 있다.
한 장도 아니고 무려 세 장이나.
순백의 눈을 싸매고 있는 침엽수림을 배경으로 털모자와 방한 귀마개를 뒤집어쓴 채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
그리고 그 중 하나에는 조셉 버튼 감독까지 찍혀 있다.
‘하아. 당장 달려가서 촬영하는 거 보고 싶네.’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간절하다.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
그 모든 게 자신의 작품을 드라마로 만들기 위한 열정 아닌가.
그 과정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조금만 참자.’
우하루는 우하루대로 이 자리에서 할 일이 있다.
가끔 의견을 물어오는 조셉 버튼 감독에게 생각을 전달하고.
현지 사정 때문에 불가피하게 조정이 필요한 장면과 대사를 수정하면서도 작품의 퀄리티와 방향성을 유지하는 것.
그게 지금 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
서울 중심가 대형서점 코너.
금발의 백인 남자가 문 안으로 들어오며 호기심 가득해 보이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내부 여기저기를 훑는다.
나이는 60대 중반 정도.
이내 그 뒤를 여자 한 명이 따라 붙었다.
“회장님. 여전히 걸음이 빠르시네요.”
“자네가 여전히 늦는 건 아니고?”
“호호, 그런가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잘 보이는 곳.
거기에 독립 매대가 놓여 있고.
그 위에 같은 책들이 진열돼 있다.
“이게 다 저희 책입니다.”
“그래? 같은 책을 이렇게 쌓아 놓은 건가?”
“네. 마케팅 전략인 것도 있지만 제일 잘 나가는 소설이니까요.”
“서 대표가 그렇게 입이 아프도록 내 귀에 쏘아붙인 그 ‘우하루’ 작가?”
“호호, 네 맞습니다. 제가 그 정도까지 했나요? 귀 아프셨다면 죄송해요.”
“덕분에 좀 깜깜해져가는 청력이 뚫린 느낌이야. 허허.”
다시 안 쪽으로 향하는 그.
베스트셀러 코너가 보인다.
“지금 1위부터 3위까지 전부 우리 책입니다. 그리고...”
“다 그 작가 작품이고 말이지?”
“네, 맞습니다.”
서인희 대표가 극진히 모시고 있는 초로의 이 사람.
바로 세계 최고 최대 출판그룹의 회장 ‘더글러스 해밍턴’이다.
“대단하구만, 우하루라는 이 작가 말이야.”
“지금 3위에 있는 저 단편집 ‘티켓 투 더 마스’는 발행된 지 불과 3일밖에 안 됐습니다.”
“그러니까, 혼자서 이엘을 먹여 살리는 상황이군.”
“지금으로서는 그 말씀이 맞습니다.”
“흠. 오케이. 저 책들 전부 영문판 발간 기획 검토 해.”
“그렇지 않아도 제안을 드리려고 했는데, 역시 회장님이 한 발 빠르시네요.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책에 시선을 두던 그가 서 대표를 바라본다.
뭔가 듣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
“아직, ‘에이데이’ 작가는 못 만나본 거지?”
“죄송합니다.”
“뭐, 그걸 갖고 죄송할 것까지야 있나. 본인이 작정하고 꽁꽁 숨으면 누가 어떻게 찾겠어. 서 대표 잘못 아니야.”
“그래도 어떻게든...”
“노력해도 안 될 거야. 일단 기다려 보는 수밖에.”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나요.”
“어차피 3월이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어?”
“그럴까요?”
“내가 보기엔 그래. 그리고 나도 ‘회서군’을 아주 재미있게 열심히 읽고 있는데 말이지, 꽤나 익숙한 향기가 나더군. 그래서 더 흥미가 당겨.”
“저하고 같은 느낌을 받으셨군요.”
“그래서 말인데, 분명 엄청난 일이 벌어질 거야. 자네 내 촉 알지? 두고 봐. 온 세계가 뒤집어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