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특별상을 받게 되셨어요 >
평생을 북 비즈니스에 바쳐온 더글러스 회장.
스스로 자부한 바대로 그의 책과 작가를 보는 눈은 언제나 옳았다.
어떤 매카니즘인지 그건 누구도 알 수 없지만.
모든 걸 증명해주는 건 항상 결과니까.
누구나 고개를 젓는 작품도 그가 끄덕이기만 하면 베스트셀러가 되어 나왔다.
서점의 한 모퉁이에서 영업 중인 커피전문점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
“한국의 서점들도 꽤 멋있군. 장사도 잘 하고 말이야. 사업 감각들이 뛰어나.”
“트렌드에 민감한 편이죠.”
“그 말은 곧 변화에 적극적이라는 뜻이지. 봐봐. 불과 이삼십 년 전의 책방들하고는 분위기부터가 완전 다르잖아. 이제 서점은 서적을 사는 데가 아니라 책 자체를 눈으로 보고 즐기는 곳이 되고 있어. 그러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거든.”
“맞습니다, 회장님.”
“종이책이 위기야. 뭐 그런 소리 나온 지 하루 이틀도 아니지만.”
“그래서 전자책도 활발하게 발간하고 계시잖아요.”
“물론 그렇지만 이 픽션 쪽은 웹소설이 빠르게 성장할 거야. ‘회서군’만 봐도 알 수 있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북과 웹소설은 접근 방식이 좀 많이 다르니까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서 대표의 말에 고개를 더글러스 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입에 넣은 그가 서점 안을 다시 한 번 휘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웹소설 플랫폼 하나를 인수할 계획이야.”
“아, 정말이세요? 저는 전혀 몰랐어요.”
“미리 말을 안 했지. 새어나갈까 봐. 미안.”
“호호, 아닙니다. 미안하실 것까지야.”
“원래 ‘겟픽’보다 이용자 수나 작가 풀이 컸는데 단번에 역전 당했지.”
“회서군 때문에요?”
“당연하지.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나. 그래서 우리가 그걸 인수해서 시장 1위를 탈환시켜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게 있어.”
“혹시...”
빙긋 웃는 그.
척 하면 척이란 건가.
“그 친구, 언제까지나 ‘회서군’만 연재하고 있지는 않겠지. ‘에이데이’의 신작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가 인수하는 그 사이트에서 할 수 있도록 해야 해.”
“그게 쉽게 될까요? ‘겟픽’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그 작가도 의리란 게 있을 텐데.”
“의리는 돈보다 힘이 약해. 상상도 못할 정도의 계약금을 제시하는데 그 누가 그걸 이겨.”
이 노인네.
가끔 보면 비즈니스를 무슨 스포츠 구단 운영하듯 다루는 경향이 있다.
만약 출판시장이 축구 리그라면 그는 ‘에이데이’를 가장 몸값이 높은 수퍼루키로 보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면 ‘우하루’는, 한국 지역리그의 슈퍼스타쯤인 건가.
물론 ‘아임 유어 팬’을 비롯해 줄줄이 히트한 작품들이 미국 시장에 번역돼 소개가 되면 그도 월드 스타가 될지 모르겠다.
*****
봄보다 가을이 빨리 가는 이유.
우리 몸이 따뜻함보다 찬 기운을 더 빨리 빨아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1년의 시작에서 시동이 걸린 속도에 탄성까지 붙는 계절이기도 해서다.
이는 어쩌면 10대와 20대보다 30대 이후의 시간이 빛의 속도로 지나가더라는, 중년 이후의 삶까지 살아본 분들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할지 모른다.
“와, 2학기 개학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추워지네.”
“그러게. 3학년 선배님들은 졸업사진 다 찍었잖아.”
“봄도 짧지만 가을은 더 짧다니까. 방학이 다가오니 좋긴 한데 그 전에 기말고사가 있으니 죽을 맛이네.”
1학기 초만 해도 송하예고 연영과 영상연출 전공자들 속에서 1, 2위를 다투었던 우하루와 나중경.
입학 때 수석과 차석의 순서가 그대로 잠시 이어지는 듯했건만.
두 번째 학기에 들어와서는 2강이라 말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차이가 벌어졌다.
어느새 나중경은 10위권에서도 멀어져갔다.
“쟤는 요즘 뭔가 좀 나사가 빠진 거 같지 않아?”
“공부에 흥미를 잃은 거 같은데. 어째 지난 학기에 우하루한테 너무 들이대는 듯싶다 했어.”
“상대를 봐 가면서 그래야 하는데. 혼자서 불타더니 스스로가 재가 되어 버린 거지 뭐. 좀 안타깝네.”
“그래도 저 아이한테는 삶의 낙이 있잖아.”
“에이데이?”
“그래. 소설이 한국을 넘어서 미국에서까지 인기를 끌고 있고 어제 보니까 일본하고 중국, 유럽까지 서비스를 넓힐 거라는 뉴스도 나오던데. 거기다가 세계 최고 감독이 드라마까지 만들고 있으니 광팬인 중경이 입장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살맛이 나겠지.”
“그럼 됐네. 우울증 같은 건 염려 안 해도 되겠네.”
“야, 우리 일이나 신경 쓰자. 남 걱정 하지 말고.”
2학기에도 ‘스토리 창작과 구성의 기초’는 우하루 조가 가장 좋은 성적을 받아들었다.
나중경은 이미 조장 자리에서도 물러나 앉았고.
그는 그 과목에 대해 특별한 애정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하루도 그의 그런 추락에 대해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더 이상 ‘너를 꼭 이기고 말겠다’든가 ‘두고 보자’며 눈을 부라리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
그 와중에 황당한 일이 하나 일어났다.
SNS 상에서 피진구와 나중경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남이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사이비 평론가가 이번에는 ‘회서군’의 세계적 인기를 폄하하는 발언을 올렸는데.
‘에이데이 러버’ 팬클럽 회장이 그걸 참을 리 없잖은가.
한 때 그의 우하루 비판에 동조했던 나중경이 이번에는 온갖 쌍욕을 박아댄 것.
서로 감정이 격화되며 심지어 현피를 뜨자며 난리를 친 두 사람은 실제 경찰이 수사를 고려하겠다는 말에 간신히 화를 가라앉혔다.
상대가 고등학생임을 알 리 없는 피진구가 잔뜩 겁을 먹은 덕분에 실제 고소전까지는 돌입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어쨌든 세상에 태어나 처음 들어본 갖은 쌍욕을 먹고 충격을 받았는지 피진구는 이내 다시 잠수를 타버렸다.
눈깔이 뒤집힌 사람 마냥 ‘에이데이’를 옹호하고 추앙하는 나중경.
그의 집착과 애정은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것 같다.
뭐든지 ‘적당히’가 좋은데.
그가 ‘에이데이’에 천착할수록 그 정체를 알게 되면 받을 그의 충격의 양이 더욱더 커져만 갈 게 분명하다는 점.
우하루는 그게 다소 우려스럽다.
그가 나극상 감독의 아들임을 알고 난 후에는 더욱 찝찝하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자신과 첫 작품을 함께 했던 명망 있는 연출자의 자식이 혹시라도 크게 엇나갈까 봐.
그렇게 되면 분명 마음이 좋을 리는 없으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본인이 온전히 감당해야 할 몫이지. 그것까지 내가 어떻게 해줄 수는 없네.’
아무리 뜨거운 애정과 열정도 언젠가는 식어가기 마련.
나중경의 팬심이 어서 식어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
기말고사가 끝나고 성적 발표가 나왔다.
이번에도 우하루가 1학년 영상연출 전공 수석.
다음 학기에 또 학비 면제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있어도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가장 기뻐할 사람은 어머니.
“장하다, 우리 하루. 1학년 내내 1등이라니. 그래도 건강이 더 중요하니까 무리는 하지 말고.”
“걱정 마세요, 엄마. 그리고 담임선생님께 저 정상적으로 학교 다니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래?”
출중한 그의 학습 성과에 다시 이야기가 나온 조기졸업 또는 교환학생 이슈.
사실 우하루는 둘 다 고민을 해보았지만 없던 걸로 하기로 했다.
일단, 살짝 관심이 갔던 1년 교환학생 기회.
언어 학습이라든지 장차 유학을 고려하고 있는 등 특별한 목적이 있다면 모르겠으나, 단순히 지난 삶에서 한 번 누려보고 싶었던 생활이라는 감성적 판단에 한 해를 맡기는 건 의미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더구나 온전히 10개월 이상을 어머니를 홀로 남겨두는 것도 불안하고.
두 번째 옵션인 조기졸업도 그다지 구미에 당기지 않는다.
대학에 빨리 진학해서 석사, 박사, 유학 코스를 남보다 빨리 밟아야 한다면 모를까.
굳이 급하게 갈 이유가 없다.
본인은 지금 이미 둘 다를 해내고 있지 않은가.
만약 이 코스를 택한다면 내년 한 해는 정말 정신없을 거다.
게다가 대학교를 반드시 가야 한다는 조건도 부담스럽다.
우하루는 오히려 이제껏 해온 것처럼 학업과 집필을 동시에 즐기고 싶은 희망이다.
지금이 너무나 만족스러우니까.
더구나 내년 초에는 ‘회귀 서자는 군주를 꿈꾼다’ 드라마의 방영이 있고 새로운 소설의 발표도 계획 중이니 무리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판단.
결국 모두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다.
“많이 고민해 봤는데, 그렇게 마음을 정했어요.”
“그래, 알았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는 전적으로 네 결정에 찬성이니까.”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어머니.”
너무나 잘 해주고 있는 아들.
그가 지금처럼 계속 이 삶을 즐기면서 동시에 늘 새로운 목표를 달성해 가면서 커줬으면 하는 게 우지연의 소망이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에 맡기고 싶다.
제철에 찾아온 감귤을 맛있게 먹으면서 어머니와 대화를 하고 있는 도중.
우하루의 폰이 요동을 친다.
“나 감독님? 이 시간에 웬일이시지?”
전화를 받은 그의 귀에 다소 들뜬 목소리가 들린다.
아니, 요즘 우하루에게 연락해 올 때에는 항상 비슷한 상태다.
- 우 작가. 올해 마지막 날 일정 좀 비워놔야겠어.
“네? 무슨 일 있으세요?”
- KTBS에서 ‘연기대상 시상식’에 우 작가도 꼭 나와 달라고 연락이 왔어.
응?
이게 무슨 소리.
거기에 왜.
- 뭔가 상을 주려고 그러나 보지.
“상을요? 제가 받을 만한 게 없는데.”
KTBS와의 연은 ‘아임 유어 팬’ 단막극 하나뿐이다.
작가상?
그건 단막극은 해당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이 작품의 성적과 평가가 좋았다 한들 미니시리즈나 주말드라마의 분량을 감당한 작가들과의 경쟁은 무리다.
단막극 부문 연기상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그건 자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분야이고.
이해가 잘 안 되는 요청.
- 어쨌든 공식적으로 제작사에 요청이 온 거니까 같이 갔으면 해. 아마 내일 중으로 따로 연락도 갈 거야.
“일단 알겠습니다, 감독님.”
전화를 끊자 어머니가 궁금해 하신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뇨, 그런 건 아니구요. 말일에 열리는 연기대상 시상식에 저 보러 참석을 하라네요.”
“정말? 무슨 상이라도 주려나? 설마 앉아서 구경하라고 초대하는 건 아닐 테고.”
우지연이 나 감독과 똑같은 추측을 한다.
“그건 아직 모르겠어요.”
궁금증은 바로 다음날 풀렸다.
‘연기대상’ 준비를 맡은 부서에서 우하루에게 연락이 온 것.
- 특별상 수상자로 결정됐어요.
“특별상이요?”
- 네, 작가님.
뭐야.
작가한테도 특별상을 주나?
- 특별상은 어떤 특정 분야에 한정해 선정하지 않아요. 자칫 꺼져버릴 위기에 처해 있던 KTBS의 단막극의 불씨를 되살려주신 동시에 드라마의 품격을 한 차원 높여 주신 데 대한 감사의 인사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거절하기도 뭐하고.
급한 스케줄이 있는 것도 아니니 아무래도 응해야 할 것 같다.
‘따뜻한 집에 편하게 누워서 TV로 현수빈 누님하고 임정화 선배님 상 받으시는 거 응원하려고 했는데.’
꼼짝 없이 현장에 앉아 그녀들과 함께 시상식을 지켜보게 생겼다.
*****
문스피아 매니지먼트 콘텐츠 3팀 팀장이 회의가 끝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뭔가 난처한 표정이다.
아니면, 윗사람한테 한 소리 들은 분위기인 것 같기도 하고.
“오 주임!”
“네, 팀장님.”
‘에이데이’를 전담하고 있는 오정민 피디 호출.
“대표님한테 엄청 깨졌다, 나.”
역시나, 그랬구나.
“왜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무슨 일은. ‘에이데이’ 작가님 관련해서지.”
“아...”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는 오 피디.
근래 들어 ‘회서군’에 대한 업무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제대로 감당을 못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작품의 프로모션 진행, 작가에 대한 케어는 기본이라 그렇다 쳐도 연재 중인 웹툰과 제작 중인 미국 드라마와 연관된 각종 업무들.
거기다가 일본과 중국뿐 아니라 유럽에서 밀려드는 번역판 연재 요청들과 출판사들의 출간 문의까지.
폭주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년 초에 드라마 공개되기도 전에 과부하가 걸려서 뭔가 뻥 터져 버릴 것 같아.”
“맞습니다. 저도 우려됩니다.”
“대표님께서 도대체 지금까지 뭐 했냐고, 이미 한참 전부터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호통을 치시더라고.”
“아...”
“분석해 보니까 앞으로 우리 OSMU 프로젝트의 육칠십 퍼센트가 ‘회서군’에 몰릴 태세야.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저작권 관련된 새로운 형태의 문제들도 밀려들 거니까 준비 제대로 해야 하고.”
“갑자기 이러니까 저도 조금 겁이 나네요. 버겁기도 하고요.”
“겁먹을 필요 없어. 좀 전에 결정됐으니까.”
“뭐가요?”
“전담팀 꾸리기로.”
“전담팀이요? ‘에이데이 작가님’ 전담 팀 말인가요?”
< 69화. 특별상을 받게 되셨어요 > 끝